세월의 빠르기
현관문을 나서는데, 앞집 대문에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입춘첩立春帖이 나붙어 있었다. 순간, ‘아니 벌써?’ 하며 놀란 탄성을 내질렀다. 오늘이 미처 입춘인 줄 몰랐던 나로서는…! 지인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눈 지, 엊그제 같은데…! 머쓱하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뒤이어, 오세영 시인의 「2월」이란 제목의 시구 詩句까지 떠오른다.
‘벌써’라는 말이 /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 없을 것이다. /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 벌써 2월 /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 봄의 매화 가지를 살펴볼 일이다 / (이하 생략)
이럴 땐 자연스레 세월 참 빠르다는 후렴구가 따라붙는다. 아무런 실속도 없는, 그야말로 한낱 군더더기 말에 불과하지만, 이미 관용어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다. 찬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아직은 벌거숭이 나목裸木 상태인, 아파트 단지 안 키 큰 정원수 곁을 지나며 성질 급한 기대도 해본다. 아직 매화 보다야 늦겠지만, 머지않아 무성한 푸름을 자랑할 신록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옛사람들의 광음여시光陰如矢라는 말도 생각해 본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뜻이겠다. 세월의 빠름을 빛에다 비교했으니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있었다. 지나쳐온 경험상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청소년기가 그랬다. 그랬던 생각이 인생의 늦가을을 달리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위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세상의 누가 세월의 빠름에 아쉬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랴? 싶다.
그래서 나이 듦에 따라 세월의 빠르기는 연령에 따라 가속도가 붙는다고들 한다. 시간의 흐름이야 일정할 게 뻔하지만, 심정적인 느낌이 그럴 수밖에 없겠다. 나이 오십이면 50의 속도로, 70이면 70의 속도로, 가속이 느껴진다는 뜻인 이 말은 그만큼 남은 세월에 대한 부담감과 무게감이 점점 더 커진다는 데서 비롯되는 느낌이리라.
세월 歲月의 뜻을 직역해보면 해와 달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월이란 말의 한자 풀이만 봐도 그렇다. 歲(해 세), 月(달 월)로 구성되었으니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세월을 굳이 물리적 속도로 풀이하면, 하루는 24시간으로 둥근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를 돌아, 밤과 낮으로 나뉘는 시간을 말한다. 1년은 365일 동안,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말하지 않는가!
시간은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세월은 사람이 의식하든 말든 저 혼자 제멋대로 저만치 가고 있으니,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야,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한편 당황스러워하고 또 때로는 아쉬움으로 회한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심정적인 온갖 애환을 싣고 내달리는 세월의 빠름은 정말 어느 정도의 속도일까? 실증적이고 과학적(천문학적)으로 계산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다.
위에서 말했듯,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로 정해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하루는? 물론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자전自轉의 시간이다. 지구가 스스로 밤낮을 연출해 가면서 한 바퀴를 도는, 자전 속도는 1초에 436m의 속력이라고 한다. 또한 365일 동안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공전公轉하는 속도는 초당 30km의 속력이다. 뒤집어 말해, 1년이란 세월은 1초에 30km의 속도로 365일 동안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시간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세월의 속도를 굳이 수치로 표현해 보려면 초속 30km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더욱 실감 나게, 다시 말해 우리가 체험해 볼 수 있는 빠르기와 대비해 보면 더욱 구체적인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다.
즉,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열차인 KTX는 시속 300km의 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초당 83m의 속력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고 다니는 승용차가 시속 100km를 달린다면, 초당 속력은 27m가 된다. 우리가 이를 타고 느끼는 속도감이야 경험치에 의해 어느 정도 감感을 잡을 수 있겠다.
이상의 계산에 따른 세월의 빠르기는 결론적으로 말해, 승용차보다 16배 정도, KTX보다 5배 정도가 빠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아직 현실적으로 체감해 보지 못한 속도감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경험치에다 세월의 빠르기를 비교하다 보니 평소 세월의 빠르기를 상당히 후하고, 너그럽게 생각해 온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가져본다.
덩달아 아득한 옛 소년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난다, 중2 때로 기억된다.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 유난히 강조하셨던 시구詩句가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그 선생님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처럼 유독 턱수염과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해, 선배들이 링컨이란 별명을 붙였던 선생님이셨다. 당시 정년이 임박할 정도였으니 우리 아이들끼리는 할아버지 선생님이라고도 부르곤 했었는데, 그때 가르쳐주신 시詩가 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 시대의 유학자인 주희朱熹의 우성偶成이란 제목의 시였는데, 명심보감에도 등재된, 익히 알려진 시다.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 학난성)하니, / 一寸光陰不可輕 (일촌광음 불가경) 하니라.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당 춘초몽)이라 / 階前梧葉已秋聲 (계전오엽 이추성) 이로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 일촌의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 연못가의 봄풀이 아직 채 꿈을 깨기도 전에, / 계단 앞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선생님께서는 위 시를 꼼꼼히 설명하시고는 덧붙이셨다. 중학생 아이들이 잘 알아듣기 쉽도록 예시例示까지 드셨는데, 그 예시가. 60년대 초의 너나없이 산길 아니면 들판 길을 오로지 걸어 다니던 전형적인 시골 학생들이었던 우리들께 가장 절묘하고도, 우스꽝스러운 것이었기에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된 것 같다.
“너희들이 등교할 때나, 학교를 파하고 친구들과 귀가하거나, 함께 소풍이라도 가면서 논둑길이나 산등성이 길을 가다가, 소변이 마렵다고 가정하고 생각해 봐라. 그러면 너희는 잠시 머물러 볼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그 짧은 시간 동안, 같이 가던 친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앞서가게 되더냐?”고 하셨다.
결국 촌음寸陰도 아껴가며 공부에 열중하라는 지극히 교훈적인 내용의 시를 재미있는 예시와 곁들여 설명하셨던 것이지만, 우리들 철부지 아이들이야 그 깊은 뜻보다는 선생님의 그 이야기 자체에 빠져 웃으며 왁자지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세월의 빠름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절실하게 느껴진다. 평소에는 그런 사실에 무관한 듯 시치미를 떼고 멍하게 지내다가, 오늘 미처 예상치 못한 입춘첩을 보고서야 새삼 놀란 듯 호들갑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흘러가 버린 시간의 아쉬움을 모두 세월의 빠름에다 뒤집어씌우듯, 변명 같지도 않은 자기변명까지 늘어놓는 스스로가 참 꼴불견이구나 싶기도 하다는 생각에서다.
누구는 그랬다. 그만큼 여생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그게 정답일 것 같기도 하다.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도 있겠다. 오늘이 입춘인데 위 시에서 말하듯, 얼렁뚱땅하는 사이, 어느 날 아침에 문득 계단 앞 오동나무에서 가을 소리를 듣게 되리라. 그렇게 세월은 무심하게 흐른다. 너희들, 인간들이야 원망을 하든, 환호하든.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로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듯이. -끝-
<계간 영호남 문학 2024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