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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준비
4월 28일 목요일, 음력으로 3월 23일이었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윤봉길은 자기의 스물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 준엄하고 비장한 시대에 자기의 조국을 위해 자기의 선택을 바쳐야 했다.
눈 덮인 초행길 벌판을 걸어가매
부디 조심하여 곧게 걸어라
오늘의 나의 발자국이
훗날 따르는 이들에게
부디 보기가 되게 하여라
윤봉길은 서산대사의 이 시를 아주 즐겨했다. 이튿날, 윤봉길은 아침 일찍 일어나 김구한테서 가진 남색 양복을 입고 이발관에 가 이발을 한 다음 이화림(李華林)과 함께 홍구공원으로 갔다.
홍구공원의 푸른 잔디 위에 이미 높다란 검열대가 세워져 있었다. 윤봉길은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 검열대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눈짐작과 발걸음으로 대중해 보니 검열대 뒤 10여 미터 되는 지점이 손쓰기가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이때 몇 대의 고급 승용차가 검열대 앞에 와 멈춰 섰다. 20여 명의 일본병사들이 겸열대 주위에 경계선을 쳤고 이어 몇 명의 고급 장령들이 검열대와 회장을 자세히 검사하였다. 윤봉길은 고급 군관들 중에 꼭 시라카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원에서 나온 후 이화림과 같이 홍구부근에 있는 일본 서점에 가 일본침략군 상해 총사령관 시라카와의 사진을 샀다. 윤봉길은 사진을 보고서야 금방 전 회장을 시찰할 때 제일 앞에 선 작자가 바로 시라카와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때 작탄을 갖고 가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그는 또 상점에 가서 일본 국기를 샀다.
의거 전 날인 4월 28일 오후 1시 30분, 윤봉길은 약정한 장소에 가 김구를 만나 준비정황을 보고하였다.
“오늘 이화림 여사와 함께 홍구공원에서 지형을 관찰했었는데…… 참 아쉬웠습니다. 그때 나에게 작탄만 있었더라면 시라카와 놈은 무조건 죽었을 겁니다…… 오늘 그 놈이 바로 제 코앞에 있었거든요.”
김구가 윤봉길의 보고를 들은 다음 한참 거닐다가 엄숙하게 말했다.
“윤 군, 준비작업 잘 했구먼. 내일 내가 물건을 주겠소. 그런데 자네 금방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너무 격동하고 있구먼. 쉽게 격동하면 대사를 그르치오. 절대로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어서는 안 되오. 그래, 내일의 거사에 자신 있소?”
윤봉길이 웃었다.
“선생님, 전 절대로 자신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충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라카와라는 전쟁 미치광이를 보는 순간 수난에 처한 조국과 짓밟히고 있는 이천만 민중이 떠올라 그 놈을 당장 죽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한스러웠을 뿐입니다. 그저 그랬던 거지요.”
김구가 알만 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네의 그 심정을 이해하오. 그리고 자네가 꼭 성공하리라는 것도 믿고 있소. 그러나 위험 앞에서 언제나 태연자약해야 하오. 냉정한 마음가짐이 가장 필요하오. 기억하오. 그리고 원래 화림과 부부로 변장하고 회장에 진입하는 계획을 취소했소. 화림이 일본어를 모르는데다 둘이 움직이면 노출될 위험이 있소. 그러니 혼자 범의 굴로 들어가야 하오. 자넨 지금 혼자 수많은 놈들과 싸우는 특수한 전쟁을 하러 가는 것이오. 하늘 같은 담략과 태산 같은 자약함이 참으로 필요할 때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차분히 갈앉혀야 하오.”
김구는 이어 김상옥(金尙沃) 열사의 비장한 의거를 이야기해 주었다.
1889년에 서울 어의동(漁義洞)에서 태어난 김상옥(金相玉)은 일명 영진(永振)이라고도 한다. 그는 독립운동 중 가장 용감한 투사 중 한 사람이었다. 여섯 번이나 작탄과 수류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여 각종 전투임무를 출중하게 완성한 그는 3.1운동 전에는 『비밀사』를 조직하고 『혁신전보(革新全報)』를 꾸리면서 항일투쟁에 종사하였다.
1920년 8월, 미국의회대표단 40명이 한국에 왔을 때 그들에게 일본식민자들에 대한 한국 민중의 원한을 알리려고 박치의(朴治毅), 김우진(金祐鎭), 신화수(申華秀), 윤익중(尹益重) 등과 함께 암살을 밀모했다가 일본정탐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도망쳤으나 주모자로 결석사형판결을 받았고 수배령이 내려지자 김상옥은 상해로 도망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그때가 바로 평화적 방식과 외교수단으로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세를 차지하던 시기였다. 그들과 견해가 달랐던 그는 외교노력이 거듭 실패하자 임정지도자에게 “앉아서 한탄하기보다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건의를 내 놓았다. 1922년 말에 제의가 채납되어 그는 암살임무를 맡고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1923년 1월, 가장 춥던 겨울에 그는 서울에 잠입하여 반일 지휘중심을 세웠다. 어느 날, 김상옥은 한 패의 청년들을 데리고 싸우는 모양을 꾸미고 밀고 닥치면서 서울 경찰청 문 앞까지 갔다. 그들이 떠들썩하는 소리에 왠 영문인가 하여 경찰들이 뛰쳐나오자 김상옥 등은 돌연 군총을 휘둘러 당장에서 일본 경찰 10여 명을 쏴 죽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기겁하여 집안으로 도망쳤다. 김상옥 등은 목적을 달성하자 총을 걷어가지고 신속하게 자리를 떴는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월 27일 아침 5시, 일경이 김상옥이 들어있는 집을 포위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상옥이 총망히 옷을 입으려고 할 때 경찰이 문을 걷어차고 뛰어 들었다. 이때 김상옥이 번개같이 베개 밑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 사격하였다. 네 명이 죽고 한 놈이 부상을 입고 도망쳤다.
김상옥은 적들이 잠시 물러가자 날쌔게 기둥을 타고 용마루에 올라가 사격을 퍼부었다.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지닌 그는 적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도망친 후 서울에서 몇 십 리 떨어진 한 동지의 집에 가 피신했다. 김상옥이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 추격한 적들은 대량의 병력을 출동하여 서울 동쪽의 40리 주위에서 대 수색을 진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상옥은 다시 서울로 도망쳐 효제동에 있는 이공근(李恭根)의 집에 숨었다.
22일 아침, 200여 명의 군경과 100여 명의 밀탐들이 이공근의 집을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적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사이에 7,8개의 담장을 뛰어넘어 번개같이 사라졌다. 하여 그는 잠시 김학순(金學淳)의 집에 숨었다. 그런데 적들이 또 찾아왔다. 김상옥은 혼자 200여 명의 적들과 세 시간 싸웠다. 일본군경들은 그가 혼자임을 보고 투항하라 하였다. 이에 김상옥이 큰 소리로 웃고는 말하였다.
“내 죽을지언정 네놈들의 손에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마지막 남은 한 알의 탄알을 자기에 머리에 쏘고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김상옥이 장열하게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상해에 전해지자 김상옥의 중국인 벗 황육화(黃育華)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만마 속을 헤가르며
용맹한 호랑이가
세상을 질타하니
하늘땅이 진동하누나![1]
김구는 또 나석주와 김기섭의 이야기도 들려주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열사는 모두 조국과 삼천만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쳐 최후의 순간까지 싸웠소.”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김상옥과 나석주, 김기섭 세 열사는 저의 선배고, 저의 본보기입니다. 저의 생사관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선생님, 죽는 것도 두렵지 않는데 이제 무엇이 또 겁나겠습니까?”
윤봉길이 김구 앞에 시 한 수를 내놓았다.
“제가 쓴 시입니다. 내일이면 선생님과 영영 작별할지도 모르니 이 시를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김구가 시를 받아 읽어 보았다.
우뚝 솟은 청산은 천 년에 이룩된 것이요(蘶蘶靑山兮, 載有物萬)
울창한 청솔은 사계절 변함없어라(鬱鬱蒼松兮, 不變四時)
봉황이 나래 펼쳐 만 리 창공 날아예고(濯濯鳳翔兮, 高飛千仞)
온 세상이 어지러운데 선생만은 청고하여라(擧世皆濁兮, 先生獨淸)
노당익장하니 선생의 의기충천하고(老當益壯兮, 先生意氣)
수십 년 와신상담하니 선생의 충성 알리로다(臥薪嘗膽兮, 先生赤誠)
김구가 시를 보고 말했다.
“한시를 잘 쓰누만. 하지만 나한텐 너무나 과분한 칭찬이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너무나 훌륭한 독립투사인데 제 시가 선생님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민족역사에 소나무처럼 굳은 절개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분투한 영웅들은 너무나 많았소. 안중근 의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고 금방 말한 김상옥 열사나 나석주, 이봉창, 김지섭 등 의사들이 모두 그러하지. 윤 군도 그러한 사람들처럼 될 것이라는 걸 나는 확신하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와 윤봉길이 투숙하는 여관 쪽으로 걸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 여러 가지 하고픈 말들을 나누었다. 김구가 다시 한 번 윤봉길을 쳐다보았다. 아,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이런 사람을 또 어디 가서 찾으랴. 수난의 조국이여, 당신에게 이런 훌륭한 자식들이 있다는 것으로 하여 자호와 긍지를 느끼리라. 그들에게는 뜨거운 심장이 있고 크나큰 담략이 있고 고매한 정신이 있다. 역사는 영원히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윤봉길을 여관까지 데려다준 김구는 혼자 오랫동안 깊은 생각을 하다가 김해산[2]의 집으로 갔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왜 그리 표정이 엄숙하십니까?”
“아무 일도 없네.”
“그럼……”
김해산은 더 물으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김구를 몹시 존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조계의 모든 한인들이 김구를 자기들의 친인이라고 생각했다.
“해산 군, 자네한테 신세를 져야겠네.”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 한 청년이 아주 먼 길을 떠나게 되오. 내일 아침 한 끼 잘 대접해서 그를 보내야겠소.”
“당연하죠. 푸짐한 아침식사를 마련하겠습니다.”
김구가 돌아올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저 먼 하늘에서 별 몇 개가 눈을 뜨고 반짝이고 있었다.
4월 29일 아침, 김구는 해산의 집에서 윤봉길과 최후의 식탁을 함께 했다. 김구가 밥을 먹으면서 가만히 윤봉길의 기색을 살펴보니 마치도 농부가 일 밭에 나가기 위해 넉넉히 밥을 먹는 것처럼 그렇듯 태연자약하였다[3].
[주]
[1] 「조선당인들이 서울에서 투쟁한 소식」,『신보』1923년 2월 7일.
[2] 김정묵(金正默): 별칭, 김해산(金海山), 김규환(金奎煥). 1884년 경상북도 선산 출생. 독립운동가.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경상도의원으로 선출.『통일책진회』 설립, 독립신문사 지국장, 『한국독립유일당』 창당과『북경촉성회』 성립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 윤봉길 의사가 의거하던 날 아침, 김구의 분부로 아침식사를 풍성히 준비하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윤봉길을 위해 식사 마련함.
[3] 『백범일지』, 252페이지.
홍구를 피로 물들이다
시라카와의 사유는 군사가 답게 늘 전쟁과 이어져 있었다. 그는 천장절 경축대회와 열병식을 한 차례의 전쟁으로 생각하고 세밀한 검사와 엄밀한 경비를 요구하였다.
그는 우에다 중장과 야촌 사령의 배동 하에 경축대회의 안전을 위해 공공조계와 홍구 일대의 일군의 방선을 시찰하였고 아주 공공연히 중국군대가 철수한 곤산과 소주일대를 시찰하였다. 시라카와는 포동과 소주하 일대에 중국군대가 확실히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였다. 중국군대의 가장 정예한 부대인 19노군은 이미 다른 데로 가고 없었다. 보아하니 『송호정전협정』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시라카와는 일본군계에서 지모가 뛰어난 유명인물이었다. 그는 중국군대에 대해 안심했지만 상해의 민중이나 한인들의 가능하게 행할 수 있는 암살행위를 걱정하였다. 그는 홍구공원을 중심으로 각 도로와 길목, 교차로에 경비역량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경축절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사령부에서 회의를 열고 정황을 보고 받았다.
열병식 총지휘자이며 일군 19사단 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이 탱크, 장갑차, 중형포, 박격포, 운수대의 수량과 출발지점, 경과지점, 검열 후의 회귀노선을 면밀히 분석하고 최후로 확정하였다. 그는 공군대대의 18대의 비행기가 비행표현을 하게 된다는 등에 대해 보고를 하였다.
총영사 무라이는 상해임시정부와 한인 독립운동의 동태에 대해 목전 한국임시정부는 거의 붕괴 상태에 빠져 있으며 이승만은 탄핵을 받은 후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이동휘는 탐오에 연유되어 총리 직을 사직하고 소련에 갔고 신규식, 노백린, 박은식은 선후하여 병사했으며 김의선, 이광수, 정인과는 자수하는 바람에 김구,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이유필 등 사람들만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또 이런 사람들의 일체 활동은 일본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며 일본영사관과 헌병대, 경찰국의 사복경찰 및 고용한 중국인, 한인 정보원들이 시시각각으로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고 그들이 일단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체포할 수 있으며 시케토오(重藤) 중령이 영도하는 300명의 헌병과 15대의 대형트럭이 수시로 출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무라이는 또 한인폭력사건에 대해 1922년 3월 28일, 상해외탄 신 부두에서 다나카 대장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김익상(金益相), 오성륜(吳成崙)은 의열단 성원인데 그 조직이 지금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두목 김원봉(김약산)이 가끔 북경 일대에서 출몰하고 있을 뿐인데 이봉창 소속인 한국애국단은 아직까진 별다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가정부』(假政府, 일본인들이 상해임시정부를 이르는 말)에 대해서도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이상의 분석으로 보면 경축대회와 열병식에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보고를 들은 시라카와는 아주 흡족해 하였다. 그는 무이라의 분석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무이라 군, 내 명의로 우니카이도리(犬養毅) 수상에게 천장절 활동을 계획대로 진행한다고 전보를 보내게. 그리고 천황의 장수를 축원한다는 구절을 잊지 말게.”
이 시각, 윤봉길은 프랑스조계의 한 여관에서 부모와 처와 아들에게 마지막 유서를 쓰고 있었다. 아들한테 쓴 편지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약 너희들의 몸속에서 의연히 피가 끓는다면 장래에 꼭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용사가 되어라.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나의 외로운 무덤에 와서 뜨거운 술을 부어 구천이 있는 나의 영혼을 위로해 다오. 내가 이제 곧 떠나지만 너무 서러워 말라. 너희들에게는 인자하고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니 너희들을 관심하고 사랑해 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 장래에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바란다. 역사를 보면 아시아의 성현 공자나 구라파의 위인 나폴레옹,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 등 인물들은 모두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 성공한 사람들이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가 너희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워줄 것이다.
잘 있거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아![1]
유서를 다 쓰니 날이 희붐히 밝았다.
경축회가 열리던 날, 일군의 경계가 더 없이 삼엄하였다. 홍구공원 일대에 탱크, 비행기,기관포가 배치되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수천 명의 사병들이 길을 순라하고 공원의 담에 기관총을 설치하였으며 주의의 거리와 각 교통요로, 공원입구에 전부 일본인 순라대를 배치하였다. 한 마디로 경비가 철통같았다. 김해산의 집 앞에서 김구와 윤봉길이 헤어졌다. 김구는 늙은 운전사 차림을 하였다. 윤봉길은 새 양복을 입었고 붉은 넥타이를 매었고 어깨에 일본 군용물통을 메었으며 손에다 휴대식 도시락을 들었는데 그 모습은 완연 일본 귀공자였다. 그의 곁에는 일본 옷을 입은 한 미녀가 앉아 있었다.
차에서 내린 후 김구가 윤봉길의 귀에 다고 몇 마디 했다. 그 소리는 비록 낮으나 너무나 무겁고 비장하였다.
“난 자네가 자랑스럽네. 꼭 성공하게, 우리 이제 내세(來世)에서 다시 만나세!”
악수를 하고 갈라진 뒤 김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7시 40분 좌우, 윤봉길이 일본 교민들 무리에 끼어들어 순조롭게 공원으로 들어갔다[2].
공원입구에서 눈물로 윤봉길을 떠나보내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이화림이었다.
10시, 검열 총지휘 우에다가 경축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하였다. 먼저 사병들이 검열대 앞에서 군사조련표현을 하였다. 검열은 보병, 중형포, 박격포, 운수대, 탱크, 장갑차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열병식은 거의 한 시간 걸렸다. 열병식이 끝나자 일본 어린이들이 일본 국가를 불렀다. 그 시간, 윤봉길은 검열대 뒤에서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어깨에서 물통을 내렸다. 11시가 좀 넘었을 때 하늘이 사람의 뜻을 따르는지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면서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나라의 외교관들이 하나 둘 검열대에서 내려왔다. 시게미츠와 무라이의 축사가 끝나자 검열대 아래의 일본인들이 국가를 높이 불렀고 하늘에서는 18대의 비행기가 공연을 시작하였다. 떠들썩하는 속에 이미 준비를 마친 윤봉길이 물병을 높이 추켜들고 검열대를 향해 힘껏 던졌다. 물통은 면바로 사라카와, 가와바다 등 사람들의 발밑에 떨어졌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천지가 진동하고 검열대가 와그르르 무너져 내렸다. 회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애국가가 장송곡으로 변했다. 검열대에서 기고만장하게 서 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일본 거류민단 단장 가와바다가 당장에서 즉사하고, 상해 파견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일본군 제3함대 해군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19사단 우에다 중장 등 나머지 놈들도 중상을 입었다. 어떤 놈들은 눈을 잃었고 어떤 놈들은 다리를 잃었다. 시라카와는 전신에 24개 파편을 맞고 5월 26일에 병원에서 죽었다. 당시 중국 주재 일본공사였던 시게미츠도 다리를 잃었다. 그는 13년 후인 1945년 9월 2일, 패전국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투항문서에 조인했다. 그 날 11시 40분, 거류민단장 가와바다와 두 명의 일본 기녀, 두 명의 일본 기자도 경상을 입었다.
십분도 안 되는 사이에 일본 군대가 주위 3리 구간을 완전히 포위하고 사람마다 엄밀하게 심문하여 당장에서 한인 8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는 미처 몸을 빼지 못한 윤봉길도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중국인도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강만로(江灣路)에 있는 일본 헌병사령부에 압송되었다. 심문 시 윤봉길은 기타 사람들을 연유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가 한 일이라고 떳떳하게 인정하였다[3].
1932년 5월 10일, 김구는 여러 사람을 구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만 천하에 똑똑히 알리기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뒤로 밀어놓은 채 홍구사건을 책임지는 성명 『홍구사건진상』을 발표하였다. 그 후 일제는 미친개처럼 날뛰며 보복을 감행했다.
일본군 참모부와 해군부에서는 군사법정을 조직하고 5월 25일에 윤봉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주모인 김구를 체포한 후 함께 도쿄로 압송하여 처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1월까지도 김구를 체포하지 못하자 윤봉길을 먼저 일본으로 압송하였다.
11월 18일, 윤봉길은 『태양호』윤선에 실려 일본에 간 후 오사카 육군무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1월 19일에는 시라카와 대장의 고향인 가나자와(金澤)으로 이송되었다.
1933년 1월 19일 아침 5시 30분, 윤봉길이 사형장으로 압송되었다. 그 시각,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윤봉길이 형차에서 내렸다.
형무소 소장이 윤봉길에게 물었다.
“할 말이 없는가?”
윤봉길이 평온한 눈길로 형무소장을 돌아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동방하늘을 바라보았다,
윤봉길에게 있어서 생명은 치욕을 초탈하는 영광이었다. 한국의 우수한 자식으로 나라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거늘 무슨 후회나 한이 있겠는가.
“종이와 펜을 달라!”
윤봉길이 조용히 말하였다.
형무소장이 종이와 펜을 넘겨주자 윤봉길은 태연한 자태로 필을 날렸다.
“죽음을 미리 각오하고 사나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으니 이 이상의 만족이 없노라!”
윤봉길이 여기까지 쓰고는 잠깐 멈추었다. 이 간단한 몇 마디가 그가 최후에 남긴 생명의 유언이었으며 생명의 여정에 남기는 아름다운 마침표였다.
그는 다시 필을 날리며 아들에게 유언을 쓰기 시작하였다.
네가 이후 씩씩한 대장부로 자라나 반드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용감히 싸울 것을 바라노라.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 날, 네 부디 잊지 말고 나의 무덤 앞에 태극기를 꽂고 술 한 잔 부어다오.
6시 40분 바로 해가 뜰 무렵, 일본 하수인들이 총을 쏘았다. 한국의 위대한 사나이가 땅에 넘어졌다.
일본헌병 사령관은 보고서에 이렇게 쓰고 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카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 법칙 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에게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시라카와 사령의 고향인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육군공병 작업장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19사단군법회의 경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스타로의 지휘 하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6척을 파서 매장하였다.
처형 직전에 윤봉길이 “죽음을 미리 각오하고 사나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말했는데 말은 명료하였고 미소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있고 침착하였다.
살인마도 영웅한테 탄복한 것이다.
[참고문서]
[1] 『윤봉길전』, 1933년, 제89쪽.
[2] 『도왜실기』(屠倭實記), 11쪽.
[3] 『도왜실기』(屠倭實記), 11쪽.
최후의 승리를
위해 건배
윤봉길과 작별한 후, 김구는 프랑스조계지에 있는 김상섭(金尙燮)의 상점에 가 안창호에게 쪽지를 썼다.
“도산 선생, 오늘 오후 10시 이후로 절대 집에 계시지 마십시오. 중대한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김구는 쪽지를 점원 김영린(金永麟)에게 주어 도산의 집에 보냈다. 안창호가 걱정되어 보낸 것이지만 가석하게도 안창호는 그날 집에 없어 쪽지를 받지 못하였다.
김구는 애국단의 한 사람인 김의한(金毅漢)의 집으로 갔다. 김의한의 부친 김가진(金嘉鎭)은 일찍 이조왕조의 이품관 정헌대부, 농상공 대신, 대한독립회 회장을 지낸 적이 있으며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김가진이 조선총독부에서 봉작을 받는 귀족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했기에 그 정치영향력이 아주 컸다. 그는 1927년에 상해에서 병사했다. 그 뒤 김의한 부부도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김의한은 처음에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서 일하면서 한중청년동맹 상해지부 집행위원, 재정, 간사 등 직무를 맡아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 동맹지부의 위원장은 조한용(趙漢用)이었고 주요 골간으로는 무정(武亭)과 조시원(趙時元)이었다. 그 중 무정은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1929년 상해폭동에 참가했으며 폭동이 실패하자 강소에 가 중국공농홍군에 참가하였다. 그 후, 연장, 영장, 단장, 팔로군포병사령관을 역임했고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역임했다.
김의한은 제일 처음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 정정화(鄭貞花)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는데 임시정부의 파견을 받고 선후로 6차례나 국내에 들어가 모금하였다. 그들 부부는 김구를 부모처럼 생각하였다.
김구는 김의한의 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김구는 정정화더러 몇 사람이 먹을 점심을 준비 하라고 이르고는 총망히 떠나 한인 교포사무소에 가 이동녕을 만나 윤봉길을 홍구공원에 파견한 시실을 이야기했다. 점심때가 거의 될 무렵 중국직원이 와 윤봉길이 투탄에 성공했으며 시라카와 등 일본요인들이 폭사 당했고 운봉길은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석오 형, 당신과 조완구 선생은 김의한의 집에 가 날 기다리시오. 우리 함께 점심식사 합시다.”
김구가 인차 일어섰다.
“당신은 어디로 가시우.”
“엄항섭한테 가겠습니다. 그더러 사람들을 파견하여 우리 사람들을 모두 피하게 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도산에겐 통지했습니까?”
“이미 쪽지로 통지했습니다.”
김구는 엄항섭을 찾아가 간단하게 설명한 후 속히 사람을 파견해 유관인원들더러 잠시 피신하게 하라고 분부했다.
거리에 나서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홍구폭발사건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인이 한 짓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의 소행이라고 했다.
김구가 김의한의 집에 이르니 이동녕과 조완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완구가 말했다.
“보아하니 작탄 하나가 일본열병식장을 장례식장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조완구는 이번 일을 김구가 계획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소식이 영통하구만.”
“당신 외 누가 이런 담이 있겠습니까?”
정정화가 밥과 반찬을 올렸다. 식사가 끝났을 때는 오후 3시가 거의 되었을 때였다. 김구가 정정화더러 거리에 나가 신문 한 장과 술 한 병을 사오라고 일렀다.
이에 정정화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김구는 종래로 점심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황차 점심식사도 끝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정정화는 더 묻지 않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의논이 분분하였다.
“일본 놈들이 수태 죽었다누만,”
“중국인이 작탄을 던졌다오.”
정정화는 그제야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정정화가 신문과 술을 사 들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조완구가 신문을 들고 큰 소리로 읽었다.
“11시 반, 일군의 열병식이 끝나자 각국 영사대표들이 퇴석하였다. 일본인들은 계속하여 천장절 행사를 이어갔다. 시라카와 사령, 우에다 사단장, 노무라 사령, 시게미츠 공사, 무라이 총영사, 및 일본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다, 거류민 비서장 우야 등 7인이 연단에 올랐다. 시게미츠와 무라이가 축사를 하고 일본교포들이 국가를 불렀다. 노래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폭탄 한 개가 날아와 시게미츠 공사와 노무라 사령의 뒤, 우에다 사단장의 왼쪽에 떨어졌다. 여러 사람들은 작탄을 보고 혼비백산하였다. 4,5초 후에 폭탄이 터졌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게미츠 공사 등 7명이 쓰러졌다. 온 회장이 크게 놀랐고 삽시에 수라장이 되었다. 때는 오전 11시 40분이었다.”[1]
조완구가 신문을 다 읽자 김구가 술잔을 들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해 건배!”
이동녕과 조완구가 잔을 들었다. 세 사람은 한 모금에 잔을 비웠다.
김구가 술을 부으면서 말했다.
“전략적으로 보면 우리 임시정부는 오늘부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전 단계에서 침체되었던 우리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열조가 일어날 것이고 중국 국민당정부와 중국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동녕이 잔을 들었다.
“새로운 승리를 맞이하기 위해 건배!”
이날 세 사람은 비할 데 없이 기뻤다.
그날 오후, 일본 신문들은 처음에는 폭발사건이 중국인이 한 것이라는 보도를 실었다가 몇 시간 후에 진상이 밝혀지자 일본 놈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미칠 듯이 보복을 감행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이 사건에 유관된 한인들을 체포하려고 날뛰었다. 일본영사관은 프랑스 조계당국에 엄중한 항의를 제출하였고 프랑스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날 오후 3시에 중국경찰로 분장하고 프랑스 조계지의 한인 거주지를 습격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제일 먼저 한인 교민회장 이유필(李裕弼)[2]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이유필은 김구의 통지를 받고 벌써 피했던 것이다. 하여 일본경찰들은 이유필의 집에 잠복했다.
안창호도 일본영사관에서 주목하는 요시찰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날 도산은 아침 일찍 외출했기에 홍구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유필의 집에 가서 잠복한 일본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안창호는 자신이 중국 국적이며 이유필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일본 헌병들은 불문곡직하고 그를 일본 조계지에 있는 감옥으로 끌고 가 6월 초에 서울 감옥으로 이송했다.
이 번 사건이 도쿄를 뒤흔들었다. 일이 발생한 날, 일본 경시청과 조선총독부는 일본주재 상해영사관과 상해주재 일군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 정한 기일 내에 막후 지휘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날 저녁, 일본경찰청의 후루타(古田), 가미야마(龜山) 정탐과 검찰청의 오가와(小川) 서기, 일본경시청의 야마키타(山形) 등 특고형사, 만주관동군 고급간첩 구쭈시이(掘誠)와 시케토오(重藤) 헌병대장이 비밀리에 윤봉길을 심문하였고 김구 등 14명의 체포명단을 작성하였다.
30일 새벽 2시, 일본주재 상해 총영사관 44명의 경찰, 22명의 사복 헌병, 프랑스 조계의 12명의 외국 형사, 48명의 중국 형사들이 12대의 트럭을 타고 프랑스 조계에 덮쳐들어 수색을 감행하였다. 안창호를 비롯하여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17명이 체포되었다. 5월 1일, 일본영사관 경찰국에서 17명에 대해 가혹하게 심문하였다.
심문 중 한국 청년 김덕근(金德根)의 입을 통해 김구의 처소를 알게 된 후 일본 헌병 30여인이 프랑스 조계의 동의도 없이 김구의 처소를 돌연 습격했으나 헛물을 켜고 말았다.
일본 관방은 5월 6일 홍구공원 폭발건과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하였다.
상해 홍구공원 폭발안
1) 범인 윤봉길, 26세, 원적, 조선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덕신면(德新面) 〇陵里139호, 현재 상해 조계지 비윤로(非倫路)동로 동방아파트 20호.
2) 범인은 4월 29일 오전 7시 45분에 홍구공원에 혼입하였다.
3) 축하회가 끝나 관민이 연합하여 바로 일본국 국가를 부르기 시작한 11시 40분 좌우, 범인이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 주석대에 작탄을 던져 시라카와, 우에다, 시게미츠, 우야가 중상을 입고 가와바다는 당장에서 죽었다.
4) 범인은 현병대에 의해 당장 체포되어 현재 헌병대에 구류 중이다. 심문 후 군법회의에 넘길 예정이다.
5) 사용한 작탄은 두개, 하나는 물통형이고 하나는 도시락형이다. 폭발한 것은 물통형이고 도시락형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6) 공술에 의하면 프랑스 조계지에 거주하는 다수의 한인단체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이에 즉시 프랑스 조계지에서 29일부터 30일까지 대 수색을 한 결과 안정광(安正光) 등 17명을 체포하였고 지금 심문 중이다[3].
프랑스 조계 당국은 일본 총영사관에 항의를 제출하고 일방에서 만약 프랑스 조계지를 수색하려면 반드시 30분 전에 통보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일본헌병대의 기염이 잠시나마 수그러지게 되었다.
[주]
[1] 상해『신보』, 1932년 4월 29일.
[2] 이유필(李裕弼): (1885-1945) 호 춘산(春山).본관 경주. 1910년대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이 조직한 신민회에 참가. 1919년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 4월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 1921년 4월 중국인 오산(吳山)과 함께 한중호조사 성립에 참가. 1924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1925년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 1931년 김구, 조완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 총무이사로 피선, 이봉창, 윤봉길 거사 이후 1933년 3월 일본경찰에 체포, 한반도로 송환,3 년 징역, 해방 후 북에 가서 평안북도 임시인민정부 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조만식 등과 반공지도자로 활약, 소련군이 진주하고 김일성을 비롯해 공산주의세력이 커지자 월남하다가 심장병으로 사망.
[3] 천진『大公報』, 1932년 5월 7일.
김구가 홍구작탄사건
진상을 밝히다
일본 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그들은 경찰, 헌병, 특무들을 총 동원하여 대수색을 감행했다. 이튿날 김구와 안공근, 엄항섭이 상해교통대학의 한인 체육교원 신국권(申國權)의 도움을 받아 김철(金澈)과 내왕이 있는 미국 인사 피취 선생을 만났다. 엄항섭이 영어로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김구의 안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피취 선생이 흔쾌히 동의했다. 우선 자기 집 이층 전부를 내 주어 김구가 쓰도록 하였다. 하여 김구와 김철, 안공근, 엄항섭이 모두 잠시 피취 선생의 집에 자리를 잡았고 피취 선생의 부인이 친히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김구는 피취 선생의 집에서도 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전화로 프랑스 조차지의 한인들과 연락하여 누가 체포되었다고 하면 서양인 변호사들을 청해 구하게 하였다. 일본 경찰들에게는 그러한 방법이 먹혀 들어가지 않자 김구는 체포된 사람들의 가족과 피난한 동지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 독립운동가 안창호, 장철근, 김덕근 외에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일본 놈들은 도처에서 미친 듯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비단 임시정부나 민단의 직원 뿐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고용한 중국인 서현달(徐顯達)도 체포하였다.
이때 김구의 귀에 원망의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이유필 등은 “이번 홍구사건에 주모자가 있는데 그는 숨어버리고 애매한 사람들이 체포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김구는 즉시 외계에 도쿄사건과 이번 홍구사건의 주모자를 공포하려고 작정했다. 그러자 안공근이 막아 나섰다.
“우리는 지금 프랑스 조계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건 천만 위험합니다.”
김구가 말했다.
“나 개인의 안위는 작은 일이고 무고한 동지들과 동포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하오. 그래야 여러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소.”
김구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엄항섭과 안공근은 결국 김구가 글을 써 진상을 밝히자는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 김구가 구술하고 엄항섭이 정리하고 피취 부인이 영어로 번역하였는데 문장 제목은 『홍구 공원 작탄사건 진상 』이었다.
홍구공원작탄사건 진상
홍구공원사건에 대해 일본이 목적과 진상을 알고 싶어 한다. 이 사건은 모 기관과 관연이 있어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상해의 한인들이 추호도 죄가 없음에도 재난을 당하고 있다. 이에 나는(이 사건의 지휘자이며 획책자) 인도주의에서 출발하여 전 세계를 향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바다. 나의 친구들이 계속 분발하여 일본 침략자들과 끝까지 싸우기를 바란다.
1. 계획과 실행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하고 만주를 점령하고 또 아무런 이유 없이 상해에 침입하여 동아와 세계평화를 파괴하였다. 고로 나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일제를 복수할 결심을 굳게 다졌다. 첫 행동으로 이봉창을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천황을 사살하게 하였다. 그는 1월 8일에 천황을 폭사시키려고 했지만 작탄이 불발탄이어서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 윤봉길을 홍구공원에 파견하여 일본 군사수령을 폭사시키라고 했다. 이번 행동은 성공했다. 지금 나는 당당하게 전 세계를 향해 홍구공원사건의 시말을 알리려고 한다. 도쿄사건에 대해선 이후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말하겠다.
4월 7일 (29일) 아침, 한국애국단 단원 윤봉길을 불러 그에게 작탄 두 개를 주었다. 한 개로는 우리 조국의 철천지원수인 일본군정 요인들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되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부탁했다. 일본인 민중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렀다. 다른 한 개의 작탄은 일을 완성한 후 순국용으로 쓰라고 하였다. 윤봉길은 나의 명령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 두 사람은 눈물을 뿌리며 작별했다. 그리고 내세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차 한 대를 세 내어 그를 홍구공원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작별하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그의 성공을 빌었다. 사건의 경과는 이러했다.
2. 윤봉길의 약력
윤봉길은 1908년, 한국 충청도 예산군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출생했다. 자는 용기(鏞起)고 본명은 우의(禹)이며 봉길은 별명이다. 지금 그의 양 부모가 생존하며 처와 아들 둘이 있다. 그는 어릴 적에 아주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시재가 뛰어나 300여 수의 한시를 썼고 『명추(鳴推)』, 『옥수(玉睡)』, 『임추(任椎)』 등 시집을 발간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일본제국주의를 극도로 증오하였다. 17세에 야학을 꾸리고 『농민독본』을 저술했으며 5년간 농민에게 글을 가르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짓밟는 것을 목격한 그는 결연히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 복수의 길에 올랐다. 목적은 상해였으나 청도까지 와서 여비가 떨어져 부득불 청도에서 일 년 간 막노동을 하다가 여비가 마련되자 상해로 왔다. 작년 8월에 상해로 온 후 부두에서도 일하고 홍구시장에서 채소도 팔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최근 그와 나는 의기상투하여 그는 한국애국단 단원이 되었다.
한국애국단
한국애국단은 나와 애국투사들이 세운 하나의 조직이다. 우리의 목적은 빼앗긴 나라를 찾는 것이다. 무릇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싸우려는 사람은 모두 애국단에 가입할 수 있다. 단원의 입대, 접수, 임무 하달은 나 혼자서 결정한다. 단원이라 해도 다른 단원의 이름과 내력을 모르며 절대로 회의를 하지 않는다. 나의 사업은 일체 비밀이다. 나와 우리 동지들의 목적은 적들의 중요한 인물들을 암살하고 적들의 중요한 군사시설들을 파괴하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돈도 없고 군대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상해의 시라카와 사령관과 싸우려고 한다. 모든 일본인들과 싸우려고 한다. 맨 손으로라도 싸우려고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의 이름은 김구다. 몸과 마음을 몽땅 구국사업에 바친 사람이다. 1919년 3월, 한국에서 전국 규모의 반일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나는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탈옥한 후 중국으로 왔다. 그때로부터 김구는 일본인들과 악전고투를 벌려왔다. 나한테 무기란 몇 자루의 권총과 몇 개의 작탄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2].
이 글이『명보(明報)』,『신보(申報)』 등 신문에 발표된 후 강열한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애국지사들의 영용한 행위는 중국민중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 글이 발표된 후 안창호를 제외한 수십 명의 용의자들이 석방되었다. 안창호는 중국의 많은 진보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하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안창호를 구출하려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안창호는 중국 국적이라는 것, 안창호가 본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안창호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예를 들면 상해변호사협회, 상해총공회, 각 대학교수 항일회, 노동지식협회, 대학연합회, 한중항일대동맹, 중화연합회, 청년구국대동맹, 국민촉진회 등이었다. 그중에서 상해변호사협회가 국민정부 사법부와 외교부에 올린 청구서 하나만 보기로 하자.
사법부, 외교부 앞
올해 4월 29일에 우리나라 국적인 안창호(安昌浩)가 일본경찰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지금 일본군대에 넘어갔다. 이에 우리 변호사협회는 강력한 항의를 제출한다. 晏彰昊, 원명 安昌浩는 민국 11년에 제 853호로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였다. 사법부와 외교부에서 이를 확인한 후 일본당국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엄정하게 교섭하여 국권을 보호하기를 앙망한다.
상해변호사협회 拜上
민국 21년 5월 3일[3]
그러나 일제는 모든 항의와 여론을 무시하고 그 해 6월초에 안창호를 서울로 압송하여 4년 도형에 처했고 안창호는 1938년에 감옥에서 병사했다.
안창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모든 한국인들과 중국의 진보인사들이 비통해 하면서 걸출한 혁명거자를 침통하게 추모하였다. 그들은 안창호를“위대한 혁명가이며 예리한 정치가이며 진보적인 교육가이며 유능한 실업가”라 높이 평가하였으며“위대한 정신이 하늘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주]
[1] 상해『신보』, 1932년 5월 10일,『명보』, 1932년 10일.
[2] 상해『신보』, 1932년 5월 3일.
[3] 石源华,『혁명의 거장-안창호』,『한국독립운동과 중국과의 관계』, 252쪽.
독립투사이며 체육건장인
신국권
많은 사람들이 신국권(申国权)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있다. 그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아무 때든 진모를 드러낸다. 제일 정직한 것이 역사고 제일 속이지 못하는 것이 역사다.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이민(李敏)이 2008년 『중국민족』잡지 5호에 《신국권, 중국 첫 올림픽대표단의 조선족》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신국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국권은 1986년에 서울의 한 양반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항민(巷敏)이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에 중국 상해로 가 상해교통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또한 1919년에 대학부에 들어가 1923년 1월에 남양대학(상해교통대학 전신) 전기과를 졸업하였다.
신국권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암암리에서 많은 일들을 하였다. 1918년 8월 20일에 중국 상해의 조계지에서 여운형, 선우혁, 장덕수, 김철, 조동호 등 6인의 발기 하에 반일결사조직인 『신한청년당』이 창립되었다. 당시 교통대학에서 공부하던 신국권도 이 당에 가입하였다.
1920년 6월, 금방 태어난 한국임시정부가 한창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견한 톰스가 의회대표단을 데리고 중국과 조선, 일본을 돌아보게 되었다. 대표단은 상의원이 3명이고 하원이 25명이었다. 명의상에서는 유람이었지만 실질은 이 지역의 정치와 경제정황을 시찰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일본이 자기들의 침략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의회방문단의 방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갖은 수작을 부리면서 정치회유를 하였다. 한국임시정부도 이 기회에 어떻게 하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죄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독립을 갈망하는 한민족의 정당한 의지를 세상에 알리려고 무등 노력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전문 접대위원회를 성립하였고 영어를 잘 하는 안창호가 접대위원장을 맡았으며 미국의회대표단에 올릴 진정서를 작성하였다. 손중산과 교분이 깊은 신규식은 광주에 있는 손중산 선생한테 편지를 띄워 미국의회단을 만나면 일본을 질타하고 한국임시정부에 이로운 말을 많이 해 달라고 신신부탁하였다.
8월 5일, 임시정부 대표이며 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 등 36명이 서명한 진정서와 한국독립당, 학생연합외가 서명한 진정서 36부를 대표단에 교부하였다. 교부한 사람이 바로 신국권이고 두 부의 진정서를 영어로 쓴 사람도 신국권이다. 그는 당시 학생이었지만 영어실력이 대단하였다.
1920년 8월 5일에 상해에 있는 21개의 한인단체들이 남경로에 있는 대동여관에서 미국의회대표단을 환영하는 만찬회를 가졌고, 8월 8일에는 한국유학생협회가 역시 대동여관에서 미국의회대표단을 환영하는 의식을 가졌다. 미국대표단과의 대화는 거의 신국권이 맡았다. 9월에 미국의회대표단이 남경으로 가자 한국이시정부는 신국권과 임춘희를 남경에 파견하여 두 번째 진정서를 올리게 하였다.
1932년 4월 28일, 홍구폭탄사건으로 혈안이 된 일제는 김구를 체포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이 때 김구를 미국인 피취의 집에 피신시켜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험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신국권이다. 신국권은 학생 때도 그랬고 교수직에 있을 때도 그랬고 가금씩 김구를 찾아와 임시정부의 정황을 물었고 한국의 미래에 대해 논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김구가 상해를 떠난 뒤 내왕이 없어졌다가 일본이 망하고 김구가 귀국길에 올라 상해에 왔을 때에야 상봉하게 되었다. 피취는 신국권과 분이 두터웠고 정의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런고로 큰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를 포함한 여러 명의 임시정부요인들을 자기 집에 있게 하였고 김구가 가흥으로 갈 때 직접 차를 몰고 안전지대까지 피신시켰던 것이다.
상해 교통대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신국권이 항일지사이며 한국임시정부가 영도하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두들 남양에서 온 화교라고 하면서 비밀을 지켜주었다.
신국권은 한국의 독립투쟁 뿐 아니라 중국인민들의 반일애국투쟁을 지지하고 성원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발생한 〈5.30참안〉 당시, 진호음 열사가 총탄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 가 온밤 간호했으며, 진호음이 희생된 후에는 『진군이 희생된 경위』, 『피 묻은 옷』이란 문장을 써서 〈5.30참안〉의 원흉들을 규탄했다.
지난 세기 2,30년대 상해교통대학에서 『남영군(南洋君)』신국권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1923년 1월에 남양대학(교통대학) 전기과를 졸업하였는데 후에 유명한 전기 전문가로 된 종조림(宗祖林), 주물화(朱物화), 도서관 학자 두정우(杜精宇) 등이 그의 동창이었다. 신국권은 영어가 유창하고 외모가 출중하였으며 재간이 많았고 체격이 우람지고 건장하였다. 그는 축구, 배구, 농구 등에서 기량이 출중하여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대학 총장 당문치(唐文治)의 총애를 받았다. 신국권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 당 충장은 신국권의 학비며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신국권은 대학시절에 남방의 대학교 체육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육상, 축구, 농구, 야구, 테니스 등 종목마다 모두 훌륭하였다. 특히 그의 11미터 허들기록(跨欄)은 수십 년 동안 갱신하는 사람이 없었다. 화동대학운동대회에서 그는 여러 개 종목의 금메달을 따냈으며 축구건장으로 학교 축구팀을 이끌고 수차 우승을 따내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1923년 여름에는 국가축구팀에 선발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국제 축구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여 상해교통대학의 축구건장 이대성(李大成), 이수목(李秀木)과 함께 〈남양의 삼총사〉라 불렸으며 남양대학교 체육회 회장, 남양대학교 청년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상해교통대학은 그 모체인 〈남양공학〉시기부터 체육을 중시했고 또 운동기질이 출중한 신국권이 학교를 위해 큰 공헌을 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남양군〉이라고 불렀다. 〈남양군〉은 당시 학생들의 숭배대상이었다. 학교를 졸업 할 때 동기생들은 아주 의미 있는 평가를 했는데 그는 “키가 제일 크고 운동을 제일 잘 하고 영어로 연설을 제일 잘 하는” 등 세 가지 종목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신국권은 많은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국권한테 여학생들이 수많은 꽃 편지들이 날아들었는데 신국권의 부인 손미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상해의 중국인들이 한국인(조선인)들을 제2의 일본 놈이라고 여기면서 기시하고 타매하였지만 이봉창과 윤봉길의 장렬한 의거, 그리고 신국권과 영화 황제로 떠받들리던 김염 같은 인재들이 상해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한국인의 위상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상해교통대학을 졸업 한 후 신국권은 남양건축회사에서 공정사로 얼마간 있다고 모교로 돌아와 체육교원, 체육학과 주임으로 있었다.
1925년, 신국권은 미국 오벨린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 서울의 연세전문학교에서 2년간 체육과 주임으로 있다가 1929년에 동북대학 총장을 겸하고 있던 장학량 장군의 초빙을 받고 동북대학의 체육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0년에 상해교통대학 여조환 총장의 초빙을 받고 모교에 돌아와 체육관 주임겸 체육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의 체육사업의 발전을 위해 힘을 다 하였다. 1942년에 왕정위의 괴뢰정부가 대학을 접수하자 신국권은 결연히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일제를 무한히 증오하였을 뿐 아니라 매국적 왕정위에 대해서도 몹시 증오하였던 것이다.
신국권이 중국 체육사상 첫 올림픽대표임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1932년 7월 30일 14시 30분, 미국 로스앤젤레스 대경장에서 제10회 올림픽 대회가 정식으로 개막되었다. 10만 5천 명을 수용하는 관람석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2천 여 명의 선수들이 입장하였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대표단을 파견한 중국 올림픽대표단은 여덟 번째로 입장하였다. 헌데 인원이 고작 6명이었고 그 중 선수는 단 한명이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온 나라가 엉망인 형편에서 그 정도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일한 선수인 유장춘(劉長春)이 국기를 들고 앞에 서고 그 뒤에 대표단 성원들인 감독 송군복(宋君福), 심사량(沈嗣良), 유설송(劉雪松: 재미유학생), 신국권, 미국인 토핑이 뒤따랐다.
관람석에서 내려다보는 중국 올림픽 대표단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인구 4억인 동방 대국이 파견한 대표단은 선수가 제일 적은 대표팀으로 되어 서양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실컷 받았다. 그러나 6명의 대표들은 중국 역사에서 올림픽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딘 사람들이었고 올림픽 무대에 처음으로 중국의 국기를 내건 사람들이었다.
하다면 신국권이 어찌하여 중국 올림픽대표단의 성원으로 되었는가.
중국이 1932년에 처음으로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때의 상황은 비참할 정도로 초라하였다. 대표단성원들은 정부에서 조직한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 체육단체와 사회 유지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임시군대〉였다. 사회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국민당정부는 공산당과 싸우는데 총력을 집중하였고, 거기다 일본이 동북을 침범하고 내륙침략을 노리고 있어 말 그대로 내우외환에 시달리다보니 정부가 올림픽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여 〈경비부족〉이라는 구실을 대면서 올림픽출전을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유장춘은 중국대표단은 〈짜깁기〉를 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부를 비꼬았다.
유일한 육상선수자격으로 올림픽대회에 참가하게 된 유장춘(당시 유장춘은 동북대학 학생이었고 신국권의 제자였음)은 위만국의 선수로 되지 않기 위해 장학량의 지원을 받아 감독 송군복과 함께 총망히 미국으로 떠났다.
중화체육협회 총 간사며 상해 성요대학 총장인 심사량은 정부에서 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체육협회의 도움을 받아 경비를 마련하였다.
당시 상해교통대학 체육관 주임이던 신국권은 원래 학교의 위탁을 받고 올림픽을 견학하러 간 것이었으나 이외로 중국의 첫 올림픽 대표단 성원으로 되는 행운을 갖고 중국의 올림픽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932년 6월, 신국권은 상해교총대학 총장 여조환에게 교통대학의 체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에 가 올림픽경기를 견학할 것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덕, 지, 체의 전면발전을 주창하는 여조환 총장은 이 보고서를 보고 흔쾌히 동의하였다.
1932년 6월 24일, 신국권은 부인 손미려(孫美麗) 여사와 함께 輪船을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 부부가 상해를 떠난 것은 유장춘 일행보다 반달이나 빨라 시간상 일정한 여유가 있었다. 7월 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신국권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주일간 머문 후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올림픽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7월 28일, 유장춘과 송군복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였다. 신국권 부부와 심사량, 그리고 수백 명의 화교들이 부두에 나가 그들을 환영했는데 그 장면은 아주 감동적이었다.(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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