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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스위스 신앙고백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A.D. 1566)
(1) 제 2스위스 신앙고백의 역사적 배경.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Zwingli의 제자였던 블링거(Henry Bullinger)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그는 스스로 이 신앙고백에 따라서 살고, 죽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수행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1562년 라틴어로 초본이 작성되었는데 그 자신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기 얼마 전에 이 고백서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순교자 피터(Peter Martyr)에게 고백서의 초안을 보여주고 자신이 죽으면 이것을 잘 다듬어서 추리히 시장에게 보내주기를 부탁하면서 이 고백서는 공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성된 본 신앙고백서는 대륙의 개혁 교회 신조들 중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제외하고는 가장 널리 인정을 받아 큰 권위를 부여받았던 것이기도 하다. 특별히 이것은 역사적인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독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고백서가 공적으로 빛을 보게 만들어 주었다.
즉 앞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역사적 배경에서도 보았듯이 팔라티네이트의 경건한 선제후 프레드릭 3세(Fredrik Ⅲ)는 개혁 교회를 승인하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공포함으로써 평화조약을 위배했다는 루터주의 제후들의 위협을 받게 되자, 불링거에게 요청하여(1565) 이단이나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또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분명하고도 자세한 개혁파 신앙 해설서를 준비해 주도록 요청했다. 바로 그 때 불링거는 자신의 신앙고백서 필사본을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달된 본 신앙고백서는 1566년 아우구스부르그 회의때 Fredrik 3세가 왕과 루터주의자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큰 격변기에 개혁교회의 순수성을 지켜 주었던 본 신앙고백서는 철저하게 사도적 신앙과 니케아 신조 그리고 이단 사상들을 배제 시킨 380개의 황제 칙령(공인된 져스틴의 기록)의 내용을 따르고 있기도 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2) 제 2스위스 신앙고백의 교리적 특징
본 신앙고백의 가장 뚜렷한 특색은 교회와 목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자상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구조도 보면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16장까지는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고, 17-30장까지는 교회와 성례 등 실제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본 신앙고백서는 신앙고백서가 가지고 있는 필요성 중에서 이단 사상에 대한 정립과 교회를 그런 사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듯이 이 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매 장들마다 개혁신학의 입장을 정리해 주고 난 후에 이런 정통적인 신앙과 반대되는 형태의 신학분파가 무엇이며 또한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핵심적인 오류의 신학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본 신앙고백서에 제시되어 있는 이런 비(非)개혁 신학적 내용들을 잘 정립해 두면 오늘날 엄밀한 개혁파신학을 정립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신학적 입장이 매우 모호하고 또한 혼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어떤 입장과 표현이 바른 것이고 또한 잘못된 이단 사상인지를 전혀 분간하지 못하는 실정에 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은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장.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성경에 관하여.
“ 우리는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께서 기록하신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인 것과, 성경은 사람이 아닌 그 자체로서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선조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말씀이 교회에서 합당하게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어진다면, 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이므로 신자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하늘로부터 다른 말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비록 악하고 또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선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사역 없이도 그의 성신이나 천사의 봉사만으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넬료를 가르칠 수 있으셨다. 그럼에도 베드로를 통해서 네가 이르도록 하였다.“
여기서는 성경은 철저히 성경 자체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교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1장에서는 아르테몬, 마니교, 발렌티누스, 켈돈,말시온 등을 제시하면서 이들이 "성경의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는 성경의 일부를 왜곡시키거나 삽입시키는" 일을 행하므로 이런 행위는 이단으로 정죄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도 동일하게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정신임을 알 수 있다.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칼빈주의적인 성경 관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장 성경의 해석과 교부들, 공의회들 및 전통들에 관하여
여기서 바른 성경 해석의 원리로는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나온 성경 해석이라야 정통적이요, 참되다고 주장하며, 신앙과 사랑의 규범에 일치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크게 공헌하는 성경 해석이라야 정통적이며 참되다고 주장한다"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또한 신조와 같은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제시하는 정신도 "교회 공의회들이 결정하여 선포한 교령들, 교리들, 교회법 역시 성경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 판정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성경에 의하여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이고, 우리가 무엇을 따라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나를 선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라고 명백하게 정리되고 있다.
이런 정신은 철저하게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고백의 정신과 상통함을 알 수 있다. 즉 신조의 자리는 철저하고 성경을 통해서 끊임없이 증거를 받아야 하며 또한 그 최종 목적도 성경 자체를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3장. 하나님, 그의 통일성과 삼위일체에 관하여.
여기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믿음의 내용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면서 고대 신조에 깊이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3장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들로 유대인과, 회교도등이 정죄되고 있으며 또한 초대교부시대 때의 이단들도 함께 정리되어 정죄되고 있다. 즉 군주신론자, 노바티안, 프락세아스, 성부수난주의자들, 양태론자(사벨리우스), 사모사타 바울, 아에티우스, 마케도니우스, 신인동형론자들, 아리우스 등을 제시하고 있다.
4장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성자들의 우상들과 형상들에 관하여
본 신앙고백서에서 4장은 도르트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은 형상 문제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를 자세히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성부, 성자, 성신의 형상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져서는 안 됨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시고, 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본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어떤 예술이나 형상으로 표현되어질 수가 없다.” 또한 “예수님은 성신을 통하여 우리와 영원토록 임재해 계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특히 예수님에 대한 형상이 많이 표현되고 있는 당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비록 육체로 잠시 이 땅에 오셨을지라도 결코 예수님도 형상화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신학적 깊이는 성자(聖者)들의 형상들, 즉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많은 인물들도 형상화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마귀나 천사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을 제시해 주는 "계시"이기 때문에 이 성경 자체를 형상화해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이런 신학적 이해는 매우 놀라운 이해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은 고대 교부의 신학적 정신과도 연결되어 있는 개혁교회의 참된 정신임을 밝혀 주고 있다.(락탄티우스나 에피파니우스와 제롬)
5장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숭배와 예배와 기원
본 장에서는 개혁교회의 예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되” 그가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요4:24) 즉 미신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그의 말씀에 의거하여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자의적인 숭배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만 행해야 한다는 정신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배 정신뿐만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오늘날 '열린 예배'니, '찬양 예배', '치유 예배' 등등 운운하면서 각종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여러 가지 예배를 도입하고 만들어 내는 현대 교회의 신학적 정신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지침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께서만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도 돌리지도 않는다. ”(사42:8) 여기서는 성자들(Saints)에 대한 그 어떤 숭배나 예배나 기도, 맹세 등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시 '성자 유물 숭배 사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성자들의 유해나 유물 등을 가지고 이것을 통해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들을 조장시키는 행위들을 제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당시의 로마 카톨릭의 신앙적 형태를 철저하게 거부하고자 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성자들을 멸시하거나,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들이요, 예배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거기에 칭송을 할 따름이다.“
6장.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이 부분에서도 칼빈주의적인 개혁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의 목적을 설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시작을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들을 정하셨기 때문이다"라고 제시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만사를 자신의 주권으로 다스리시며, 또한 그 섭리가 이루어지는 수단도 이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추천하는 수단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응시켜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는 철저하게 어거스틴의 신학적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7장. 만물의 창조, 즉 천사와 마귀와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7장에서는 마니교도와 말씨온주의자들을 배격한다. “따라서 악하게도 두개의 본체나 근원, 즉 선한 본체와 악한 본체를 주장하거나, 또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시작이나 선한 신과 악한 신을 주장하는 마니교도들과 말씨온 주의자들을 배격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을 다른 실체로 이해하고 신, 구약의 통일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7장에서는 소종 파들(the sects)를 지적하면서 개혁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통해서 어떤 정신으로 이단을 정죄했는 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신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라도 그것이 창조와 천사와 마귀와 사람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사도적 교회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준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모든 의견을 정죄 한다.” 개혁교회라는 것은 철저하게 사도적 전통에 연결되어 있는 교회를 말하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의견에 동조를 얻고 있는다고 해도 철저하게 거부되어야 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신앙고백의 바른 표현을 통해서 얼마나 참된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8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죄의 원인에 관하여
다음으로 8장에서는 원죄 론을 부정하는 소종 파들로서 펠라기우스와 그 추종자들, 그리고 스토아학파와 모든 죄를 동일시하는 요비니우스주의자들(Jovinians), 그리고 이레니우스와 대립된 플로리누스(Florinus), 불라스투스가 정죄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죄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모든 이단들도 정죄되고 있다. 특히 본 장에 제시하고 있는 놀라운 신학적인 깊이는 "하나님은 죄의 저작자가 아니다. 여기서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사상을 개혁신앙의 기초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입문서:Enchiridion]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도 놀랍고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지못해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쾌히 허락하신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이 저질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필경 하나님은 전능하신 까닭에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실 수 있기에 악을 허용하시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위와 같은 어거스틴의 내용을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단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능력의 관점에서는 악한 것이 아닌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사단과 우리의 뜻의 관점에서 악한 것이다"라고 정리하면서 이상과 같은 모든 내용들에 대해서는 헛된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서는 안 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 답을 구해서도 안 된다는 철저한 개혁신앙의 성경신앙 정신이 제시되고 있다.
9장. 자유의지와 인간의 능력
여기서 세 가지 상태의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죄를 범하기 이전의 사람으로 지혜롭고 의롭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에로 기울어질 수도 있고, 악에로 기울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악에 기울어졌다.
둘째로, 타락한 이후의 사람이다. 이해력이 사라지고 전에 자유로웠던 의지는 죄의 노예가 되어서 고의적으로 죄만을 섬긴다. 자기 뜻으로 악을 행한다. 아담을 따라 난 사람은 구원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선을 행할 자유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중생한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 성신의 조명을 받은 이해력은 하나님의 뜻과 신비를 깨달을 수 있다. 의지도 변화를 받아서 능력을 부여 받아서 선을 바랄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모든 자유 의지는 살아 있는 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아담의 흔적과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인간성의 부패함 때문에 연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악의 기원이 선하게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마니교 추종자들이 정죄 되고 있으며, 또한 악한 인간이 하나님의 명하신 율법을 충분한 자유 의지력으로 행할 수 있다고 하는 펠라기우스도 정죄 되고 있다.
10장. 하나님의 예정과 성도의 선택에 관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어떤 공로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는 함부로 어떤 사람이 버려진 사람이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가 적을 것인지 많을 것인지에 헤아리기 보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1장.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시오,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본 장에서는 성자 하나님의 아들 됨을 반대하는 아리우스주의와 미카엘 세베르투스와 그 동조자도 혐오한다. 양태론자인 사벨리우스 추종자들이 모두 정죄 되고 있다. 유노미노스가 가르쳤던 영혼이 없는 육체만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도 정죄한다. 특히 이들을 향하여 "사단은 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이단 사설을 지옥으로부터 끌어내어 아주 뻔뻔스럽고 불경스럽게 이 세상에 확산시켰다"라고 평가하면서 개혁신앙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는 한 분 그리스도를 둘로 나누어서 인격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인성의 특성을 파괴하려고 하는 유티케스와 단의론자들(Monothelites), 혹은 단성론자(Monophysites)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성과 인성의 고유한 성격("Extra Calvinisticum")을 무시하고 혼동한 슈벵크펠트(Schwenkfeld)도 정죄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한 참 부활을 부인하는 예루살렘의 요하네스 히에로소리미타누스와 같이 영화로운 육체를 왜곡되게 생각하는 자들을 정죄 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종말론에 있어서 "우리는 최후 심판의 날 이전에 이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고, 경건한 자들이 결국엔 모든 불신의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을 소유할 것이라고 하는 유대교적 꿈을 정죄 한다"라고 제시하면서 이들이 "세대적 천년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서의 정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표현이 본 장에 제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선은 기독론에 관련된 모든 내용에 있어서 개혁교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에서 열린 탁월한 처음 네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신조들과 결정들에 내포된 것은 무엇이든지 진지한 심정으로 믿고 입을 열어 자유롭게 고백한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이와 비슷한 신조들을 역시 귀히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정죄 한다"라고 내용과 같이 철저하게 고대신조의 전통적인 신학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신앙고백을 소중하게 간직해 오고 이 신앙고백을 끊임없이 성경의 내용에 비추어서 정립해 가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른 개혁교회의 정신임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12장.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가 자신의 허물과 죄와 정죄아래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기의 힘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멀리 할 것을 가르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이단들을 정죄한다.
14장. 회개와 회심에 관하여
회개란 성신을 통한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죄악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어 그 복음을 참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죄악된 사람은 이것으로 자신의 본성적인 부패와 자기의 모든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바라보며, 마음으로 그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한 수치를 슬퍼하면서 기탄없이 고백할 뿐만 아니라, 분개함으로 그 죄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거룩하게 살기를 실천하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런 신실한 죄의 고백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개별적으로 드려질 수 있고 일반적인 죄를 고백하는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 죄를 사해달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사제(신부)앞에서 고백하는 것과 사면의 내용들, 즉 고해성사와 성직 매매, 면죄부 등이 정죄 하고 있다.
16장에서는 선행에 대해서도 불필요하다거나 혹은 무관심하게 대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거나 구원에는 선행이 필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행함은 믿음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 선행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신을 통하여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덕과 선행과 참된 의무이다. 그러나 사람의 공로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력화시키려는 자들을 정죄한다고 하였다.
17장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거룩한 교회와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에 관하여
교회는 오직 하나 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카톨릭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세계적이어서 세상 어느 곳에나 퍼져 있으며,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있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한 지역에 국한 시키는 도나티스파를 정죄한다. 또 로마교회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로마 카톨릭이 정죄 되고 있다. 교회의 머리에 대해서도 주님만이 교회의 머리이다. 대리자는 그가 안 계실 때에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시고, 계속해서 생명을 주시는 머리이시기 때문에 다른 머리가 필요 없다.
18장 교회의 교역자들, 이들의 제정 및 이들의 의무에 관하여
18장에서는 교회 정치와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들이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즉 교역자들의 정체성과 소명의 방식에 대해서, 교역자의 권한과 의무가 무엇인지 제시되고 있다.
교회를 다스리고 보존할 때에 항상 사역자들을 사용하신다. 지금도 그러하시고 교회가 남아 있는 한 앞으로 그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아무런 수단 없이 사람들을 불러서 교회를 세우실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을 사역자로 세워서 사람들을 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으로는 그의 사역자를 통해서,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성신을 통해서 그의 택하신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설득하여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하신다. 구약에서는 족장들을 , 혹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뒤 독생자가 오셨으며, 그는 제자들을 택하여 부르시고 사도로 삼으셨다. 그들은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므로 온 세상에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모든 교회들에다 목사와 교사들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교회를 가르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 감독은 교회를 감독하고 살피면서, 교회의 먹을 것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자이다. 장로는 교회의 연장자로서 사실상 교회의 원로와 아버지가 되어서 권면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자이다. 목사는 양무리를 보살핌과 동시에 교회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자이다. 초대 교회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 다재하고 정교함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지식이 많아서 교만한 사람보다 더 유익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에도 정직하고 소박한 사람들을 지식과 학문에서 모자라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는다.
19장.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례에 관하여
하나님은 성례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자신의 큰 축복들이 그의 교회 안에서 계속하여 기억되어지고, 또 마음에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고 성례들을 통해서 자신의 약속들을 인치시고 자신이 내면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의 눈에 보여지도록 외면적으로 드러내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을 통한 믿음의 강화와 성장이 있게 하신다. 먼저 성례전에 대한 목회적인 실제적 내용들로서는 다른 어떤 신조들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세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성례전의 뜻과 가치, 요소, 열매 등이 제시되어 있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들과 관련이 있다. 반드시 믿음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례의 창시자이셨던 것처럼, 성례가 정당하게 거행되는 교회 안에서 계속 역사를 하고 계신다. 따라서 성도들은 목사에게서 성례를 받을 때에, 주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역사하심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성례를 받는 것이다. 목사의 결점이 성례에 손상을 입힐 수는 없다. 성도들은 성례의 효력이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례를 성례되게 한다. 말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음으로 이단 사상에 대해서는 성례전에 대한 양극단에 해당되는 자들이 정죄 되고 있다. 즉 성례전을 집행하는 사람에 의해서 성례전이 거룩케 된다거나, 성례전 자체가 구원이나 성화를 주는 것이라든지, 또는 그 반대로 성례전의 성화의 수단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그래서 성례전의 가시적인 측면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을 정죄 하고 있다(멧살리아주의자들).
20장.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세례에서는 세례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으며, 세례의 형식과 이것을 집행하는 교역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특히 그 집례 자에 있어서는 "여자들과 산파들에 의해서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아주 명확히 개혁신앙의 전통적 입장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 이단 사상에 대해서는 재세례파가 정죄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아들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22, 23장 교회의 집회에 관하여
모든 사람이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피차의 권면을 통해서 참 종교를 가꾸어 나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전파되고, 기도와 간구가 공적으로 행해지고, 또 성례가 합법적으로 거행되며, 가난한 자를 위한 연보와 모든 필요에 대한 지불이나 교회가 있어야 할 것들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거룩한 모임들이 필요하다. 사도시대의 교회나 초대 교회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임을 멸시하거나 멀리하는 많은 사람들은 참 종교를 경멸하는 자들이므로 완고하게 거룩한 모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목회자들이나 경건한 행정관리를 통해서 막아야 한다.
또한 매우 특이한 것은 "교회의 본당이 모든 사치스러운 치장들과 모든 교만과 기독교적 겸손과 훈련과 절제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참된 장식은 상아나 금. 은 보석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검소함과 경건함과 덕망으로 꾸며지는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교회 안에 사치스러운 모든 치장들을 제거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온갖 좋은 것들로 교회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예배의 언어로서 알아들을 수 있는 자국어를 강조하고 알지 못하는 "방언"을 금지 시키고 있다. 그리고 공중기도와 사기도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공적인 기도도 역시 지나치게 길거나 지루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모임의 대부분의 시간은 복음을 가르치는데 할애하도록 하자. 찬송 부분에서는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였던 "그레고리안 챤트"를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비평하고 개혁교회는 이것을 철저하게 거절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24장에서는 절기와 의식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고 있다. 우선 어떤 날에 대한 미신적인 준수가 거절되고 있다. 만일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따라서 주님의 출생일, 할례일, 고난일, 부활일, 승천일, 제자들에게 임하는 성신 강림 일을 기억하는 날들을 지킨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이나 죽은 성자를 위한 축제일은 용납할 수가 없다. 이런 날들에 대해서 본 신앙고백서는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참으로 겸손을 보이고 칭찬을 받으려 하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더욱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25-30장까지.
먼저 25장에서는 세례 받은 사람의 교육과 환자의 위로와 심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그리고 26장에서는 연옥에 관한 로마 카톨릭 사상이 정죄되고 있으며, 시신의 매장과 죽은 자들에 대한 바른 자세가 제시되어 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지나친 슬퍼하거나 애곡하는 자들과 (그러나 허용하신 적당한 슬픔은 억제할 수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슬픔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28장에서는 교회의 재산에 대한 관리에 대하여 다룬다. 교회 학교 교육과, 모든 예배나 의식들을 포함한 거룩한 모임과, 교회 건물의 유지와, 끝으로 다른 필요한 것과 더불어서 교사와 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 주로 가난한 자의 도움과 구제에 사용되는 것이다. 교회재산의 집행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즉 지혜롭고 자기 집을 관리함에서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
29장에서는 독신생활, 결혼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독신의 은사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순전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독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심각하게 욕정에 불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러한 하늘에서 내려주신 은사를 부여받은 것으로 느낄 수 있는 한, 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고 또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날마다 단순함과 겸손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가정적인 일들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보다는 하늘의 것을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결혼은 주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가장 풍성하게 축복하셨으며, 원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하나가 되어, 서로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 결혼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기도와 축복 속에 거행되어야 한다. 즉 결혼에 대한 합법적인 승인과 이를 취급하는 "결혼 재판소" 설립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자녀들의 양육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0장에서는 공직자와 백성의 의무를 제시하고 있으며, 특별한 것은 전쟁에 대한 개혁신학의 입장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 관리의 주요 임무는 평화와 공적인 안정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행정관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참된 종교를 가질 때, 즉 주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던 가장 거룩한 왕들과 방백들의 모범을 따라서 진리를 전파하고, 순전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지며, 불경건함과 우상과 더불어서 거짓과 모든 미신을 뿌리 뽑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킬 때에라야 가장 행복하게 다르실 수 있다. 그러므로 행정관리는 그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이 가르치는 것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행정관리는 뇌물에 움직여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연약한 고아나 과부를 보호해야 한다. 불의한 것, 속임수나 폭력을 막론하고 억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칼을 들어야 한다. 행정 관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비방하고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키고 마침내는 교회를 파괴시키는 완고한 이단들을 억제해야 한다. 또 "공직자는 백성의 안전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필요할 경우 가능한 한 평화를 모색하되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는 전쟁을 집행해야 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이런 국가 질서를 부정하는 재세례파를 배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도가 공직의 일을 맡는 것을 부인하고, 또한 공직자의 전쟁 집행권과, 사형 집행권을 거부하고, 왕 등의 공직자에 대한 서약을 부인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정관리를 마치 하나님의 종처럼 존경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자기의 아버지처럼 위하여서 기도해야 한다. 그의 모든 정당하고 공평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세금과 다른 모든 의무를 부담하되
신실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안전과 정의를 위하여 전쟁을 수행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쁘고 즐겁고 용감하게 자기 생활을 포기하고 국가의 안전과 행정 관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 한다. 왜냐하면 행정관리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즉 공직자를 경멸하는 사람들과, 반역자들, 국가의 적들, 치안 방해자들, 또한 자신의 의무를 공공연히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