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녹
2016년 4월 13일 본문 말씀: 창세기 5:21-24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5: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진리라는 것은 상호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으로 비로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것이란 사람들에 의해서 희석되고, 무시되고, 즉각 제거되어 버립니다. 남는 것은 그렇고 그런 같은 류의 사람들입니다. 별다른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 대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6대 손 내내, 사람들의 삶의 패턴은 한결 같습니다. 아이 놓고 살다가 늙어 죽는 일정뿐입니다. 에녹이 오기까지 내내 예외없이 그렇게 살아들 왔습니다. 이질적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 동질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에녹에 와서 이질적인 요소가 터집니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즉 ‘죽었더라’로 표현될 그 자리에 죽음 대신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가 등장한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동질성에 흡수될 성질이 아니라 대립될 성질을 견지합니다. 이 이질적인 차이성을 통해서 기존의 삶은 ‘재해석’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저 편하게 인생을 논했던 그 모든 의미가 수정되어야 함을 요구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에녹이 세상을 잘해보자고 힘주어 강조하거나 개혁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아예 세상 자체에서 떠나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현 세상에서 인간들이 그 어떤 아이디어를 내놓더라도 그 자체는 결코 진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떠난 세상은 사라져야 되고 심판받을 속성으로 유지되는 동네인 것이 폭로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무심히 ‘죽었더라’만 반복되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으레 그래야만 하는 것이 마땅한 진리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한 사람, 에녹이 그 세상에서 탈출되었기에 이 세상은 졸지에 문제있는 세상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녹은 착했다’는 식으로 정리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에녹이 착한 존재라면 다른 사람들은 안착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시므로서 말미암아 에녹이 오기 전에 선조로서 먼저 태어났던 흐름 속에 이미 에녹의 성질이 내재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에녹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죽었더라’도 에녹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즉 선조들의 기록된 삶은 그들에 의해서 작성된 의미나 자기 해석이 아니라, 에녹과 동행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부여된 해석에 의해서 표현된 삶입니다. 즉 무의미한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부합되도록 규정된 삶에 맞춰 나가는 삶을 그들이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식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뜻에 의해서 그 선조들도 관련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 원리에 의해서, ‘세상’이라는 이름의 허무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드러나기 위해 의도했던 허무성입니다.
진정한 죽음의 모습은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보려고 설치는 모든 모습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미련을 두고 있고, 이 세상에서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바로 그러한 생존의 모습이 곧 세상됨의 모습이요 죽음의 모습입니다. 에녹은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에녹이 오래 산 것이 아닙니다. 아예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자로서 데려감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됨이 밝혀집니다.
유다서 1:14-15에 보면,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녹이 예언자입니다.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심판받을 세상이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데려감으로서 이 세상이 처하게 될 운명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심판과 더불어 심판받지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확정된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골로새서 3:2-3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성도는 이 세상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끄시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예언이 입각해서 세상 심판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탈출하신 분이 과연 있을까요? 있습니다.
요한복음 12:31-32에 보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살해하므로서 이미 이 세상은 심판되어야 될 세상인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에녹 없이, 예수님 없이 스스로 이 세상에서 탈출하고자 시도하는 바로 그것이 죄가 되고 죽음이 되고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성도의 의미는 본인이 살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다’에서 ‘맞춤 의미’가 발생됩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아야 하기에 자꾸만 예수님과 멀어지고 세상에 가까이 하는 식으로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맞춤 의미’에 적합한 사태로 유지됩니다.
인간의 기억은 오로지 예수님의 살해한 기억뿐입니다. 자신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을 살해해야 하는 그 동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제공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22-23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말씀만 하셔서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고 일시적 상황에 불과하고 결국 세상은 심판과 더불어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인간이라는 것도 실은 가짜일 뿐입니다. 에녹같은 예수님과 연관해서만 의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여기 존재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창 5장 21-24절(에녹)1604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장 21-24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보통 진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중심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가, 그것을 자꾸 진리라고 우기는데, 진리라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한다고 진리가 아니라 나와 달리 살아가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차이 속에서 진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나누신 것은, 하나님은 어느 쪽 편이 아니고 그 둘 사이의 틈새에서 나오시는 그분이 원래 기대했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서로 내 쪽이 진리라고 우기는데 두 쪽으로 나눠놓고 그 둘 사이에서, 그 대립되는 사이에서 진리가 나오면서 그 진리의 자녀, 빛의 자녀로서 새롭게 등장하는 분이 나올 겁니다.
그 분이 물론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그 틈새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아담의 자손을 깔아놓는 이유가 그 틈 자체에서 삐어져 나오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틈이 뭐냐 하면, 오늘 읽은 본문 앞에 아담의 자손들이 죽 나오는데 그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제 일곱 번째 자손이 에녹인데 에녹은 여섯 번째까지의 사람들과 같은 패턴을 갖고 있지를 않아요.
21절부터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여기서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앞에 있는 패턴대로라면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죽었더라.”의 항목이 무엇으로 바뀌었는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똑같은 인간, 똑같은 아담의 자손인데 두 조각으로 나눠졌습니다.
하나는 그냥 죽었더라, 가 되고 또 하나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돼요. 세상에 있지 아니한 것이 에녹이 소원이었을까, 하는 겁니다. 에녹의 소원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소원일수가 있어요.
누구나 그런 희망이 있습니다. ‘안 죽었으면 좋겠다.’ 다른 말로 하면, ‘안 아팠으면 좋겠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주름살 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는, ‘20대의 청춘이 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청춘을 돌려달라는 그런 이야기지요.
에녹은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그런 생각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면서 에녹의 소원대로 오래오래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이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고 했어요. 이 세상 자체를 떠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아무리 하나님과 동행해도 에녹은 이 세상 사람이에요. 아담부터 시작해서 여섯 명의 선조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다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이라는 점에서, 오래 살고 싶다, 안 죽고 싶다, 각가지 견해가 나올 수 있지만 에녹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것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본인도 기대하지 않은 거예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에녹을 데려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오래 살게 한다, 이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행해서 그를 데려갔다는 이것은 하나님만의 일방적인 아이디어지 에녹이 짐작하거나 기대한 것은 아니에요.
물론 그 앞서 있는 에녹의 선배들, 선조들도 마찬가지로 감히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반대말이 뭐냐? 17절을 봅시다. “그가 팔백 구십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고 합니다.
이 세상 보통 상식에서는 살았다는 것은 숨 쉬는 것을 살았다고 하고 숨이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죽었더라.’의 그 ‘죽었더라.’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나름대로 안다고 여깁니다. 살다 살다 못살면 죽어서 숨 끊어지면 그 만이다, 라는 식으로 삶과 죽음을 다 같이 안고, 그걸 이해하고, 해석하고, 그 의미를 알고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갑니다.
‘그래. 죽기 전에 잘 먹고 열심히 살아야지.’ 그 말은 뭐냐?
죽음이 뭐라는 것을 알고 죽기 전에 여유 있게 살겠다는 포부를 나타내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한 것의 반대말이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죽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데려가는 것이 죽음의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기존의 인간들, 에녹마저 이것을 파악했느냐 하는 문제지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지요. 파악될 수가 없는 겁니다. 파악될 수 없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왔다는 말이지요.
나오면 우리는 이래야 돼요.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성경에서 비로소 새롭게 제공된 의미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돼요.
내가 숨 끊어진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말고. 그러면 숨 안 끊어진 상태를 살았다고 하거든요. 숨 끊어진 것을 가지고 죽었다고 한다면 그 전에 있는 것을 살았다고 자부한다는 말이지요.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살아 있을 때에도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죽을 때도 이 세상 안에서 죽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안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가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살았다거나 죽었다거나 그렇게 결정지은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해석자체를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에녹처럼 동행한다면 이제는 에녹의 경우를 생각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숨 쉰다 - 살았다, 숨 끊어졌다 – 죽었다, 이 해석을 이제는 없애버리고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 했으니까, 그 말이 결국 뭐냐? 이 세상은 없어진다,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세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본인들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이것들이 있다, 이 있는 것들을 뭐라고 하는가? 세상이라고 하자. 현실이라고 하자. 세상은 있다. 현실은 있다. 그렇게 규정을 지은 겁니다.
이제는 그 규정을 하나님께서 바꾸시려고 하는 거예요. 세상이 없다, 라는 규정으로 새로운 의미 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 세상은 곧 없어질 세상이라고 정리해야 이것이 옳다는 이야기에요.
사라질 세상입니다. 사라질 세상의 아주 적절한 예는 바로 연극무대에요.
연극이 끝난 후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마저 사라지면 거기에는 그저 의자 몇 개 나뒹구는 소품들만 남고 연극이라는 그 사실 자체도 날라 가버려요. 배역 맡았던 배우들도 다 퇴장하고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서 여기서는 에녹이 입을 다물고 잠잠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무슨 말을 했는지 창세기 오늘 본문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유다서라는 성경이 있어요. 유다서 1장 14절에 보면,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창세기에 안 나오는 내용이 유다서, 하나님의 계시 책에 나와 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에서는 에녹이 그냥 조용해요. 그냥 몇 년 동안 살다가 세상에 있지 하니하더라, 이것으로 끝나는데 에녹이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남들이 알지 못한 미래에 대해서 그 시대의 주변 동기생들,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예언자로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심판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주께서 나타나면 이 세상은 날라 가버리고 없어지는 거예요. 부서지고 깨지고. 주께서 찾아오는 것은 진리를 진리답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잖아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서로 대비되는, 서로 상치되는, 서로 안 맞는, 각자의 노선을 따로 고집하는 두 사람사이에서 진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 틈에서 나오는 진리가 에녹같은 노선, 그런 결과물을 형성시켜 놓았어요.
그리고 동행하지 않는 쪽은 그냥 죽치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그런 것으로 꽉 끌어안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난해한 논리에 접어 들어가야 되는데요.
그렇다면 여기 에녹 말고 앞서 있는 사람, 에녹을 낳은 것은 야렛이거든요.
야렛은 누가 낳았는가? 마할랄렐이 낳았고 마할랄렐은 누가 낳았는가? 게난이 낳았고 게난은 에노스가 낳았고 에노스는 셋이 낳았고 셋은 아담이 낳았다는 말이지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등장할 때는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누구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요.
누구누구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그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의 의미를 제공하는 쪽으로 그 자식의 방향이 가요.
쉽게 말해서 자식이 부모를 살리는 겁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 그러면 앞서 있던 아버지 야렛과 마할랄렐, 이 사람들이 다 지옥 갈 사람인가? 이 사람들은 천국가지 말고 다 지옥으로 가야될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은 그저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렇게 연발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라고 할 때 그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들 내부 안에 이미 에녹이 씨앗으로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접힌 안테나를 잡아당기면 속에 있던 안테나가 바깥으로 죽죽 나오듯이, 혹은 셀카봉이 늘어나듯이 씨앗이 중첩되어 있는 그 자식들, 자식이 자식을 낳고 또 자식이 자식을 낳습니다.
그래서 그 7대손 앞에, ‘하나님이 동행했더라. 그래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 곧 세상 자체가 없는 세상이더라, 라는 것을 선포하고 예언하는 자식이 태어났다면 그 자식을 낳게 된 요인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7대손까지 계속해서 흘러내려오고 있었던 거예요.
자 여기서 논리가 어려우니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예수님이지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경영되고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진리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일단 진리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야 됩니다. 인간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그것은 인간이 이미 세상에 갇혀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전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그 의미를 몰라야 돼요.
그러면 그 의미는 뭐냐?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향하여 새롭게 의미를 공유를 해야 되고 제공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 의미를 제공하기 위해서 출생되어야 될 자식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한 에녹이에요.
에녹은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는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동행의 혜택이전의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동행하는 혜택을 입기 이 전에는 그냥 세상 안에서 눌러 살아야 돼요. 죽고 살고, 살고 죽고, 그냥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동행의 혜택이 있는 사람은 그게 전부라고 여기는 그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바로 아담의 자손에 내재적으로 흘러와서 7대손에서 드디어 에녹의 모습이 등장했다는 그 말은 뭐냐?
의미를 해석할 때 거꾸로, 에녹부터 시작해서 아담 쪽으로 거꾸로 내려서 해석을 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냐? 그들의 삶, 그들이 자식을 낳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고 규정한 원칙에 맞춰나가는 패턴으로서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그 패턴이 진리지 인간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패턴에 맞춰야 돼요. 어떤 패턴? 세상에서 벗어난 어떤 특정인물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에녹 말고 모든 사람은 좀 죽어줘야 돼요. 갇혀줘야 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패턴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보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아까 제가 언급한 세상이야기고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땅에서 들린다는 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땅에서 들려요.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어떠한 죽음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숨 끊어지는 그것을 두고 죽는다고 하지요.
죽음의 의미란, 그 죽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가 함유된 채 자기 죽음을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규정한 패턴에 맞춰져 있는 성도로서의 죽음이 되는 거예요. 에녹같은 위치가 예수님입니다.
에녹은 이 세상에서 들립니다.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면 빠져나오는 그 공간, 그 위치에 이 세상 사람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리라.” 라고 했어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불러내겠다, 내가 끄집어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뭘 아느냐?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세상, 그리고 죽음이나 삶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가상적인 세상에서 가상적인 자신을 가상적인 나, 가상적인 자아라고 일방적으로 간주해 놓은 겁니다.
그렇게 간주해놓은 나, ‘이 놈의 나, 이놈의 인간을 어떻게 하면 살려볼까?’ 하는 이것도 다 헛짓이라 그 말입니다.
그게 다 꿈속에서 헛발질 하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있지도 않은 허상을 살리겠다고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도 설쳐대는 거예요. 내가 있지도 않은데!
나라는 것은 어디서 만들었는가 하면, 세상에서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세상을 심판한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심판하게 되면 그 심판당해야 될 세상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가? 이미 내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나에게 의미를 주고,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규정된 그 모든 규정은 주님 앞에서 심판당해도 마땅한, 구겨버려야 될, 찢어버려야 될, 거짓개념입니다.
주님께서는 에녹이 오기 전에 ……, 한번 상상해 봅시다. 에녹이 오기 전의 야렛까지를 봅시다. 아직 에녹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에녹 이전이 야렛까지 오게 되면, 그들은 조상에게 들었던 것, 배웠던 것, 가치, 세상 살면서 느꼈던 정보들이 있을 거예요.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은 그냥 살다가 자식 낳고 죽으면 그만이다. 그런 것이 계속 반복해서 위에서부터,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그게 인생이야. 그것이 바로 인간이야. 인간은 그것뿐이야.’라고 그것이 진리이고 정답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너무나 차이나는, 예상도 못한 다른 어떤 존재의 출현과 맞닥뜨리면서 거기서 진리가 나오는 겁니다.
에녹은 진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동행이 진리라는 말이지요. 에녹을 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안 보여요. 에녹도 똑같은 패턴대로 살아가요.
세상 살고, 밥 먹고, 자식 낳고 그냥 삽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상 밖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에녹도 그렇게 죽어야 되는데 에녹은 죽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 하거든요.
에녹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갔다면 그동안 이 세상 안에서 살던 우리는 통째로 뭐냐는 말이지요. 통째로 가짜에요, 가짜! 통째로 가짜인 겁니다. 인간도 아니에요. 사람도 물론 아니고. 사람도 인간도 아니니 삶이라는 것도 없고 인생이라는 것도 없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러면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자살이나 하지 왜 삽니까?” 하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성경이 있는 거예요.
왜 사는가 하면, 나중에 올 에녹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야렛이 있고 아담이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우리라는 존재가 여기 있는 것은, “주님만이 진리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자각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라.”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끌어내겠다는데 내가 이쪽에서 꿈쩍거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주께서 이끌겠다는데.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바르게 살 생각하지 말고 막 사세요. 우리보기에는 막 사는 것이 의미가 없지만 우리가 막 사는 것도 에녹 입장에서는 의미가 제공된 하나님의 해석이 되는 거예요.
에녹과 동행한 하나님의 해석이 아담부터 에녹까지의 인생과정이었습니다.
자식 낳고 죽는 것, 허무하냐? 그게 우리보기에는 허무해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는 허무해요.
그런데 주님 쪽에서는 전혀 허무하지 않고 그래야만 되는 거예요. 그 패턴에 맞아야 되는 겁니다.
어떤 행동 하나하나, 자식 낳고 오래 살고, 그거 하나하나가 무의미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내린 해석 그 자체, 예수님의 해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오류는 뭐냐? 내 인생을 내가 해석하는 그것이 오류입니다. “이만큼 살았는데 나 어떻습니까?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나 어땠습니까?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는데 어땠습니까?”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게 되면, 그것은 단절입니다. 그 단절을 뭐라고 하는가? 그 단절을 죽음이라고 해요.
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진정한 에녹, 예수님과의 의미가 끊어진 것을 가지고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이 세상에서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에녹이 살았던 그 세상 자체를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담은 지옥 가는가? 아니지요. 그 아담 속에 이미 에녹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어요.
에녹은 아담의 칠대손입니다. 아담 안에 이미 에녹이 들어 있어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아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패턴이 된다는 거예요. 어떤 패턴, 모든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의롭게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다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그 사람이 막 살고 어떤 짓을 했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진리에요. 이게 바로 복음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이 소식을 왜 거부하는가? 그것은 본인해석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판단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주는 이 자체를 죽음이라고 간주하기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멀쩡히 살아서 살아있는 나를 내가 살리겠다는데 이게 뭐가 나쁜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음인데.
왜 그런가? 그 사람은 세상 안에 갇혀 있어서 기껏 보는 것이 세상 것만 보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두고 ‘세상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있다. 나는 어떤 자리에 있다.’라고 파악하는 겁니다.
세상 밖에 나갈 생각을 못하고 세상 안에서 존재가치를, 의미를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죽음이라 하는 것은 숨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이 세상 바깥에서, 필히 이 세상, 예수님과 반대되는 성질의 세상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그것이 주님이 창세전부터 의도했던 계획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꼼짝없이 죽음 안에서 못 빠져 나와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게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어려워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합니다.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팔팔하게 살아 있고, 지금 설교하고 있는데 죽었다는 거예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이야기 하면 여러분이 ‘아하, 그런 뜻이구나.’ 할 거예요.
세상에서는 악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잖아요. 삑!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벌을 받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복음을 안 받아들이고 주님을 안 믿는가 하면, 그쪽과 친해야 되거든요. 주님 소식이 없는 쪽과 친해줘야 돼요.
왜? 그 사람이 벌 받기 위해서는 이쪽에 오면 안돼요. 그쪽으로 가야 돼요. 복음 없는 곳으로 가야 돼요.
이런 소리가 세상 사람들 듣기에 얼마나 기분 나쁜지 몰라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했거든요. 예수님이 하는 말은 그거예요.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은 말씀에 입각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너희들도 너희 마음대로 안 된다.” 하는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그 말, “너희가 죄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네 행동이 네 선택이나 결단이나 의지에서 되는 행동이 아니야. 너는 반드시 저주받는 자로 태어났기에 너는 나와 떨어져줘야 해. 가룟유다야!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아! 너희는 지옥의 형벌을 못 면해.” “왜?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잘못된 것은 없어요. 잘못된 것은 없는데 예수님을 보내서, 에녹을 보내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게 하는 방식으로, 너희들 쪽은 이미 끝난 쪽이라는 말이지요.
고함질러서 이해될 것 같으면 고함이라도 지르겠는데, 참…….
요한복음 15장 24절에 보면,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설명한다면, 너희들은 그냥 가만있으면 죄가 없어요. 그런데 너희들이 이해 못할 일을 예수가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오기 전에는 죄가 없었는데 내가 옴으로써 죄가 생겨버렸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냐? 자꾸 행동을 조심하려고 하고, 경건하려고 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해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거룩하고 경건하겠다는 그 모든 취지와 규정된 그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가? 나를 안 죽이겠다는 시도에서 나온 거예요.
이 몸이 이 땅에서는 죽지만 천국 가서는 오래 살겠다, 천국 가서 영화를 보겠다. 그런 노림수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 발상, 그런 아이디어 자체가 죽음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2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함으로 이제는 죄가 있게 된 거예요.
“죄 없는 자인 줄 알았지? 이제는 네가 죄덩어리야. 왜? 너희는 내가 밉기 때문에. 왜 너희들이 내가 미운 줄 알아? 내가 너희에게 미움이 되도록 하는 말만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미움 받는 짓과 멘트만 날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논리가 어처구니가 없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에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세상이 그래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모든 사람에게 쫓겨서 추방을 당해야 그 다음에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이끌겠노라.”가 성립돼요.
그러니까 네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는 곳은 네가 찾아가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내가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곳에 내가 강제로 이끌어서 가게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이끌 때 네가 너의 의미를 놔버리라는 말이지요. 왜냐? 너라는 의미는 주님에게서 계속 유입되기에 그렇습니다.
“아, 목사님 말씀 들으면 허무합니다.” 허무하다고 하지 마세요. 허무하다는 것은 네가 아직도 너에게 미련이 있으니까 허무한데 정답은 뭐냐? “허무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어야지요.
허무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막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죄인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죽은 자 되게 하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태어났지요. 세상과 더불어 태어나서 백일쯤 된 사람이 있어요. 좋다고, 움직인다고 설치는데 그게 그대로 크면 그게 아는 세상의 전부에요.
‘살아야지, 살아야지. 어떻게? 젖 먹고 살아야지. 좀 있다가는 이유식으로 살아야지. 그 다음에는 밥 먹고 살아야지. 그 다음에는 돈 먹고 살아야지. 늙으면 안 돼. 80이 되면 알아서 갈게.’ 이게 바로 인간의 의미라는 거예요. 이게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골로새서 3장은 말합니다. “이미 너희는 죽었고”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만 살았고 그 외에는 다 죽었고, 그런데 우리를 두고 ‘죽었고’라고 하는 그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가 의인되었고, 의인되어야 했고, 우리는 주의 의가 살아 있는 사람이기에 이제는 에녹과 그 앞서 있는 선조들의 연결점, 연결고리를 한꺼번에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문신 같아요. 인간의 모든 기억들, 모든 살아가는 것은 신체에 다 기억됩니다.
메멘토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어요. 십분 밖에 기억을 못하는 사람이 잊지 않기 위해서 모든 기억을 자기신체에 새겨 넣어요. ‘내 아내 누가 죽였지?’ 하는데 누가 죽이기는요, 자기가 죽여 놓고는. 범인을 찾겠다고 설치는 본인이 자기아내를 죽였어요.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는 내가 메멘토라.
메멘토라는 것은 죽음의 증표, 이미 죽은 자가 왜 죽었는지를 주님 앞에 보이기 위해서 평생토록 살아야지, 살아야지, 외치는 이 모양새, 바로 이런 나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 죽였던 그 증표가 되는 겁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주께서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에녹 빼놓고 전부, 이것은 아주 특이한 상황이고 정말 우리가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에녹이라는 그 증표를 통해서, 똑같은 신체인데 그 신체를 주께서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망해야 되고, 무너져야 되고, 구겨져야 될 세상, 다른 세상에 우리의 생명이 있어야지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별 볼일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신다면 우리 안에 에녹이 살아있고 주님 살아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에녹을 데려가심으로, 동행하심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삶이고 별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인데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저희들을 몰고 가시니 우리가 바로 에녹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주님 계시 곳에 우리의 생명이 이미 가 있으니 이 세상 목숨에 연연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