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2년 ‘서원과 연대’ 여름 호에 실린 것입니다.
새로 짜여지는 진영
우리는 역사의 모든 성공과 실패의 경험 속에서 질이 다른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요소들이 축적되어 왔음을 봅니다.
동시에 그러한 축적은 항상 함정들과 함께 해 왔음을 봅니다. 그 함정의 크기는 아마도 축적의 수준에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과학기술의 고도한 발달은 핵전쟁과 생태계 파괴라는 인류 절멸의 위험한 함정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 함정을 보면 위기이지만, 그 축적을 보면 기회입니다. 위기는 기회를 의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큰 위기의 시대에 틀림없다면, 대전환을 위한 큰 기회의 시대임도 분명합니다.
이 ‘위기’와 ‘기회’의 갈림은 결국 사람이 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기회로 되느냐 하는 것은 주로 인간의 행위능력의 비약적 발달에 달려 있고, 위기의 핵심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능력과 어울리지 않는 심성의 지배를 여전히 받고 있는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심성에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절실한 요구입니다. 이러한 절실한 요구 앞에서 아마도 새로운 진영이 짜여질 것이고, 결국 인류가 기회를 살려 질적으로 비약할 것인지 아니면 함정에 빠져 퇴보와 자멸의 길로 갈 것인지가 이 새로 짜여지는 진영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이 진영은 한 사람의 내부에도 존재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새로운 진영의 짜임은 과거의 여러 진영을 이루고 있던 조건들, 즉 사회구조적 입장 사이의, 사상체계 사이의, 종교와 과학 사이의 대립과 차이로부터 상당히 자유스러운 새로운 특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새로운 특징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를 그 기준으로 가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의 사회적 위치, 사상, 신앙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인간의 질적 변화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서로를 동반자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신(物神)의 지배와 이기(利己)의 늪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종교인과 과학자들은 이제 서로를 가장 신뢰할만한 동료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질적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본성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것이며 이 사실을 인정하는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한 편을 이룰 것입니다. 이 편에는 과거의 진보주의자와 현재의 향락주의자, 물신을 숭배하는 종교인과 세속적인 유물론자들이 해당되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하기보다 친근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개방성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신의 사상 또는 신앙이, 다른 모든 진지한 사상·신앙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유의 길을 가는 여러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상·신앙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들은, 그 사상과 신앙의 차이에서 오는 거부감보다 오히려 깊은 신뢰와 동반자 의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개방적인 불교인, 기독교인, 무신론자, 관념론자, 유물론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자기중심적인 같은 사상·신앙의 소유자들보다 다른 사상·신앙을 가졌지만 개방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깊은 동류 의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진영의 짜임이 벌써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느 진영이 더 커지는가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질적 변화를 믿고 그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들은 개방적인 태도를 갖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자기중심성의 집착을 벗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진영이 확대되어(우리들 개개인의 내면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펼쳐가리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중생과 보살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중생에게는 업의 바다이지만 보살에게는 청정도량입니다. 우리 모두 보살의 길을 갈 것을 서원하고 모든 단위, 모든 형식에서 우리들의 연대가 확대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이 몸, 이 세계가 청정도량이 되도록 함께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