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동상. 64세의 강우규는 신임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지고 사라졌으나 친일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⑥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일제는 1919년 8월 칙령으로 “조선 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 중에서 임용할 수 있다”고 바꾸고서도 3대 조선총독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고토(齋藤實)를 임명했다. 여전히 한국을 군사점령지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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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군 예산 증액에 비판적이었던 일본 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야당인 입헌동지회·입헌국민당·중정회(中正會)는 내각 탄핵 결의안을 상정했다. 2월 10일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내각 탄핵 국민대회 개최 도중 164 대 205표로 탄핵안이 부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민중이 의사당을 포위하고 구내로 들어가 경찰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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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치안을 담당하는 부총독 격의 정무총감에는 도쿄대 법학과 출신의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가 임명됐다. 1919년 8월 12일 도쿄에서 신임 총독·정무총감 취임식을 치렀는데 사이토에게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3·1운동 이후에 일본 안팎에선 ‘일본이 한국을 계속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사이토와 미즈노는 신문기자들은 물론 추밀원·내각·법제국·척식국·대장성·내무성·육해군 등 한국 지배와 관련 있는 기관의 인사들과 잇따라 초대회를 열었고 사카타니(阪谷)·요시노(吉野) 같은 조선문제 전문가들의 의견도 경청했다.
8월 25일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가 베푸는 만찬회가 있었다. 드디어 28일 사이토는 정무총감 미즈노, 경무국장(경찰총수) 노구치(野口), 식산(殖産)국장 니시무라(西村), 비서관 모리야(守屋) 등 20여 명의 일행과 함께 도쿄를 출발했다. 마치 전선이라도 가는 듯 수백 명이 역으로 나왔다. ‘삼천리’ 1936년 11월호는 ‘남대문 역두일기(驛頭日記)’라는 사이토의 부임 수기를 싣고 있는데, 교토(京都)로 가는 도중 이세산전(伊勢山田)에서 1박했다. 일본 왕실의 선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사이토 일행과 함께했던 야마가미(山上昶)는 “조선 통치를 위해 지성을 경주할 것을 신 앞에 맹세하겠다”는 뜻이라고 전하고 있다(조선총독부 편찬,
교토로 가는 기차 안에서 미즈노 총감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신심(神心)마저 감동하게 이루어간다면/어찌 백성들이 복종하며 따라오지 않으리”라는 시가를 읊조렸다. 이에 아카이케(赤池濃)는 “오랜 역사 속에서 거칠 대로 거칠어진 고려 황야를/아침 햇살 눈부시는 국가로 성장시키리/풍랑이 아무리 거칠게 밀어닥친다 해도/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고려 백성들/…조선에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위업을 이루리”라는 시로 화답했다.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일본 극우파들의 정신병자 같은 의식 수준을 잘 보여주는 시구다.
교토 택문(澤文)호텔에 도착한 이들에게 ‘조선의 형세가 아주 심각하고, 총독 암살 계획이 세상 풍문으로 들려오고 있으며, 각지에서 소요가 발발할 우려가 있다’는 서울발 전문(電文)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사이토는 도조(東條) 해군 대좌와 후쿠토리(福島) 중위를 먼저 한국으로 보냈다. 사이토는 8월 30일 일왕 메이지(明治)의 교토 모모야마릉(桃山陵)을 참배하고 오사카(大阪)호텔에 투숙했다.
이곳에서 총독부 경무국장 노구치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경찰 총수가 급사하자 사이토 일행의 사기는 다시 꺾였다. 8월 31일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해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는데, 새로 경무국장을 맡게 되는 아카이케가 배 안에서 경무관계자들과 조선 치안 방책을 논의했다. 아카이케는 “모두가 예상보다 훨씬 형세가 열악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부산·대구·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총독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란 정보가 전해지면서 사이토는 9월 2일 오전 7시에 부산을 출발하기로 했던 시간을 전격적으로 바꾸고 무장군대까지 탑승시켰다. 순종이 보낸 이왕직(李王職) 사무관 엄주승(嚴柱承)과 총독부의 고쿠분(國分三亥), 조선 귀족 대표 이완용이 함께 탑승해 서울로 향했다. 야마가미(山上)는 이때 사이토가 수원에서 해군대장 군복으로 갈아입었다고 전한다. 문관총독 따위는 없다는 시위였다.
이날 오후 5시쯤 특별열차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총독부 관리들과 조선 귀족, 이왕직 직원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예포 17발이 울려퍼졌다. 사이토와 미즈노가 마차로 바꿔 타고 출발한 직후 갑자기 폭발소리가 들렸다. 예포가 계속되는지 의아해하는 와중에 갑자기 “폭탄이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라다(村田) 육군소장, 고무다(小牟田) 혼마치(本町) 경찰서장, 구보(久保) 만주철도 이사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이토의 뒤를 따라 도주하던 미즈토 총감 마차의 마부도 파편에 맞았다. 미즈노는 ‘언덕 아래 문 앞에서 내려 도보로 관저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아카이케는 “사방이 어두워졌는데도 총독부에서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점등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민중의 습격이 두려워 총독부의 불도 켜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카이케가 “폭탄 소동은 의외라면 의외였고, 예상이라 하면 예상대로였지만 이 사건으로 우리들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고 전하는 것처럼 일행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카이케는 다음날인 9월 3일 ‘경성에 있는 대부분의 상가가 정치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철시했다’고 전한다. 또 “감옥 내에서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고, 이전까지 친밀했던 사람조차 일본인과는 소식이나 왕래가 끊어졌다. 민족자결, 조선독립, 조선자치라는 말이 왕왕 제창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 경찰은 폭탄 투척 범인을 검거할 단서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사 보름 뒤인 9월 17일 친일 경찰 김태석(金泰錫)이 서울 루하동(樓下洞) 임재화(林在和)의 집에서 64세의 노인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체포함으로써 무너져가던 일본 경찰을 살렸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역사가 김승학은
1920년 4월 27일 재판장 와타나베(渡邊暢)를 비롯해 다섯 명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고등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윤식은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30분 서대문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 ‘경신년의 거둠’은 사형 전날 “의연히 성경을 탐독하며 태연자약했다”면서 마지막 유시(遺詩)를 전하고 있다.
“동포들은 내 용모를 더듬거릴 수 없겠지만/하늘이 내린 충렬 뼈에 새겼네/죽음과 삶의 자취 지금 다시 찾아보니/낙원에는 이미 의사림이 활짝 열렸네”
(同胞莫期我容貌/天賜忠烈銘骨/死生踪跡方更尋/樂園已開義士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