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합의(合意)만이 우리의 살 길
1992. ‘서원과 연대’ 가을호
근심걱정을 함께 공유할 수만 있다면
사람마다 다 근심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특히 요즈음은 큰 전환기를 맞아 그 걱정근심의 도가 아주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많은 사람들·집단들·민족들·국가들이 이 근심걱정을 공유하지 않고 제각기 제입장에서 따로 따로 근심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 큰 위기라 할지라도 공동체 성원들이 근심걱정을 함게 공유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풀 길이 생기고 위기는 기회로 전환될 것입니다. 그 원인을 근원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전 법계(法界)와 연기되어 있다할지라도 사람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이 그만이 담당할 수 밖에 없는 성질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조차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의 아픔을 남이 같이 아파해주면 한결 그 아픔이 줄어들고, 평화로운 삶 속에서는 죽음조차 평온할 수 있습니다.
‘슬픔은 같이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같이 나누면 배로 증가합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에서는 비교적 이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큰 단위로 나아갈수록 내부의 상호작용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크게 보면 그 사회를 통합시키는 상호작용과 그 사회를 해체시키려는 상호작용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회 내부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심할 수록 갈등의 폭이 커져 그 사회를 해체시키려는 힘이 커지지만, 잠재해 있던 부조리와 불합리한 요소들이 현재적 갈등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잘 극복하기만 하면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속담대로 사회의 통합력은 진실한 바탕을 갖게 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야말로 낡은 통합력의 위기와 새로운 통합력의 기회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주위에는 제각기 다른 입장에서 수많은 근심걱정과 대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가지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근심걱정들-경제성장 · 민주화 · 새로운 문명과 의식개혁
우선 우리의 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던 경제 부문을 살펴 보면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 문제 제기의 공통점인데 그 무엇이 이대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기업가 · 중소기업가 · 노동운동가 · 경제학자 · 시민운동단체 · 경제관료 · 심지어는 정부의 각 부처끼리도 조금씩 또는 심하게 다르다보니 처방전 또한 여러 가지입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입장에서 하는 논의는 속이 들여다보여서 논외로 하고, 의미 있는 주장들을 종합해보면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경제가 성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경제의 효율성이 계속 유지되려면 종전의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에 따른 질서와 관행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효율은 정의(형평)에서’라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기왕에 우리의 경제를 ‘한강의 기적’으로 만들어 왔던 대외지향적 경제의 성격을 지금 당장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요즘 세계시장에서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샌드위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을 위한 획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위해 근본적인 의식혁명이 필요하다는 것 등입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사회의 진보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여 왔던 쪽에서 다양한 내용의 문제 제기가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어떤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논의는 논외로 하고 의미 있는 근심들을 모아보면 우리 사회가 보수화(?) 물결 속에 종래의 진보주의가 설 땅이 점점 좁아져가는 , 단적인 예로 진보와 민주화 운동의 심장이었던 대학가에 사회과학서점들이 문을 닫거나 다른 서적들로 바꾸어 영업을 해야하며, 학생들이 이기적 개인주의에 탐닉하는 흐름을 보면서 인류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이 땅의 진보주의가 어떠한 사상과 이론으로 어떠한 실천적 장을 가져야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실천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논의들의 근저에는 실사구시의 사고가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 입장은 크게 두 조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보다 현실주의에 접근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이상의 지평을 열기 위한 기반으로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진보주의는 제3세계에 역사적 · 정서적 뿌리를 두었으되 현재의 객관적 조건에서는 제3세계를 벗어나 있는 특수성을 어떻게 반영하여 외래 사상의 단순한 수용이 아닌 우리의 현실과 고뇌를 반영한 새로운 이상의 이정표를 사상과 실천 속에 세워갈 수 있는가에 그 고뇌의 핵심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문제 제기는 인간의 근본적 소외·환경문제 등으로부터 현대 산업문명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제 계급이나 민족을 넘어서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생산력 위주의 발전사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의 문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고도로 발달한 행위능력과 전통적 가치이념체계 사이의 모순은 이제 심각한 단계에 와 있으며, 그것의 외형적 표현은 생태계 파괴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면에 있는 것은 물신(物神)지배의 보편화와 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기주의의 극단화로서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류는 아마도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최초의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일견 보면 현실감이 없는 것 같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자료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일상성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사고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면 우리는 그 위험한 징후들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근심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크게 보면 대단히 비관적 전망을 하고 있는 입장도 있고, 지금의 현실적 위기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피부로 느낄 만큼 가까이 오면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도 인간의 질적 변화를 추진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하고 또 그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고민이 담고 있는 긍정성들을 방치하거나 적대하고 있는 현실
위에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근심걱정 가운데 세가지를 골라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만, 문제는 이런 근심걱정들이 공존하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상대방의 고민에 대해 이해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고민을 이상한 것 심지어는 불필요하거나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고 그 고민들이 담고 있는 긍정성들을 방치 심지어 적대하는데 있습니다.
경제문제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나 특히 새로운 문명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로 치부하고 생존을 건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민족국가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자기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종래의 진보주의자들은 재벌이나 대기업이 주도하는 정치 경제질서는 사회정의의 실현에 역행하는 것이며 그들에 의한 성장은 오직 지배 집단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들의 이른바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새로운 문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허황한 비과학적 논리라고 비판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경제주의자들과 궤를 같이 합니다.
새로운 문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산력 위주의 발전사관과 힘과 이익의 논리에 바탕을 둔 경제주의자 · 민족주의자 · 전통적 진보주의자들에 대해 그런 방식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근본소외와 생태계의 파멸을 막지 못하고 결국 자타가 공멸하는 길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고민들이 여러 입장에서 상충하고 심지어 한 사람 한 집단의 내부에서도 이런 상충되는 고민들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말을 뒤집으면 그러한 고민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현실이 함께 존재한다는 말로 됩니다.
공생공존(共生共存)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현존하는 고민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런 고민들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해 가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세히 따져 보면 서로의 주장과 논리가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도움과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될지 모르나 실제적으로는 다른 입장이 그의 일을 잘 해야 자신의 입장도 잘 풀리는 것이 우리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런 고민들의 진실성이란 무었입니까?
그것은 누구를 위해 고민하고 왜 고민하느냐를 살펴봄으로서 판단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그 고민이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국민 혹은 민중 또는 인류의 입장에 서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자기 문제 해결의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하는 허위에 불과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이 상대방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적어도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고 명시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더라도 묵시적으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를 갖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엄숙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효율성은 이제 권위주의적 질서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어야만 더욱 신장할 수 있으며, 경제 제도만 바꾸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당사자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따라서 분배정의를 위한 진보주의 운동과 새로운 문명을 위한 의식의 근본변혁을 주장하는 운동은 실제적으로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결정적 도움을 줄 것입니다.
또한 진보주의 운동도 전체적인 나라 경제의 선진화가 진보를 위한 물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한 치열한 국제경쟁의 세계 속에서 ‘국가’라는 단위가 침몰해 버린다면 진보나 정의가 운위될 수 있는 입지가 더욱 악화된다는 점에서 건전한 선진경제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하는 보수적 입장에 대해 이해하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보운동은 세계사의 현 단계에서 무엇이 진보를 저해하는 결정적인 요소인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앞으로 새로운 진보의 망은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입장을 경청하는데서 세워질 수 있다는 점에 전향적 자세를 갖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새로운 인간은 물신(物神)의 지배와 이기(利己)의 늪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출현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새로은 문명을 주장하는 생태주의자나 공동체적 이상주의자들도 그들의 주장이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은 후진 저개발국보다는 선진복지국가에서 훨씬 높다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극단적인 양분법적 사고로 문명비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적어도 효율과 정의가 실현되는 선진사회의 틀 속에서 새로운 문명을 위한 노력들이 뿌리를 내려갈 것입니다. 역사는 결코 한꺼번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연속과 축적 위에서 전진과 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문명을 주장하는 운동들은 그 운동의 특성에 의해서도 모든 다른 분야의 운동 속에 삼투작용을 함으로서 자신의 목소리와 역량을 키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큰 합의(合意)-부강한 나라의 틀 속에 새로운 문명을 담자
이상의 여러 가지 입장의 고민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간다고 할 때 우리가 대강 합의할 수 있는 통일국가의 위상은 다음 두 가지 모습일 것이비니다.
첫째, 그것은 국가 단위로 진행되는 세계사의 조건 속에서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나 우리 경제의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여 자립도가 높은 ‘중심교역국가’의 위상이 될 것입니다.
둘째, 현단계 인류가 부딪치고 있는 심각한 현대적 문제들을 고려할 때 새로운 문명의 중심국가로서의 위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위에서 이야기한 큰 줄기에 합의한다면 우리의 능력은 능히 이런 일견 상충되게 보이는 목표를 조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중심의 의미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주변으로서의 위상을 청산하고 세계사 속에 당당히 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부강한 나라의 틀 속에 새로운 문명의 내용.
이런 목표의 추구 위에서 계급 계층 간의 갈등, 동서의 지역 갈등이나 남북의 갈등 들도 비로소 용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변의 역사, 오욕의 역사를 영원히 청산하기 위해 모든 입장, 모든 세력들이 이와 같은 방향으로 큰 합의를 이룰 수 있기를 진심으로 호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