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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7일 일요일 백두대간 25 회차 백학산 (白鶴山)
자유인 산악회
백학산 : 백두대간 25회차 : 큰재-회룡재-개터재 (옛터재)-윗왕실-백학산-소정재(개머리재)
산행거리 : 약 17 km 산행시간 : 약 6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375891
거리 17.6 km
소요 시간 6h 24m 26s
이동 시간 5h 17m 56s
휴식 시간 1h 6m 30s
평균 속도 3.3 km/h
최고점 632 m
총 획득고도 422 m
난이도 쉬움
백두대간 (白頭大幹) 25 – 백학산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숲에서의 오랜 산책을 마치고 막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다.
친구는 대답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어."
헬렌켈러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숲에서 한 시간 동안 산책하면서 '특별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의아했어요.
나는 눈이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숲에서 나뭇잎의 섬세한 아름다움,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은빛 표면,
소나무의 거칠고 덥수룩한 표면 등 수 백 가지를 발견해요.
당신에게 꼭 이렇게 권하고 싶네요.
마치 내일이면 완전히 시력을 잃어버릴 것처럼 당신의 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요.
내일이면 귀가 완전히 먹어버린 사람이 될 것처럼 공기의 음악, 새의 노래,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를 들어보세요.
내일이면 촉감이 완전히 마비될 것처럼 모든
물건을 만져보고,
내일이면 다시는 냄새를 맡을 수 없을 것처럼 꽃의 향기를 맡아보세요.
내일이면 다시는 맛을 볼 수 없을 것처럼 음식을 먹을 때 한
입 한 입을 음미해보세요.
세상이 당신에게 선물하는 진실과
기쁨, 그리고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될 거예요."
큰재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5시간동안 17 km 의 숲길을 걷고 나온 나에게 헬렌 켈러가 숲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면 난 뭐라고 대답했을까. 큰재에서 회룡재, 개터재, 윗왕실을 거쳐 백학산을 넘고 개머리재로 내려오는 긴 여정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듣고, 무슨 냄새를 맡고 또 무엇을 느낄 수 있었는가.
함께 걸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았는가. 과연 저 긴 산길에 지쳐 쓰러지지 않고 잘 걸어가겠다는 작은 각오가 서려 있는 눈빛을 보고 함께 걷는 동료들의 작은 농담에도 함빡 웃음을 짓는 천진한 웃음 소리를 듣는다.
평소에 이상없이 울리는 알람이 오늘따라 조용하다. 어쩌면 새벽에 두 번인가 깨었다가 다시 깊이 들어 버린 잠 때문에 알람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급하게 일어나 고양이 세수하고, 커피물이 끊는 동안 국물에 말아서 밥을 후루룩 마시고, 커피를 타서 보온병에 넣고 그리고 과일을 손질하여 배낭에 담고는 급히 나와 버스타러 가는데 아뿔사 안경을 두고 나왔다. 시간은 점점 앞으로만 가는데 그래도 안경이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 급히 집으로 돌아가 안경을 찾아 쓰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오 이것이 머피의 법칙인가. 평소 자주 다니던 버스가 5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물리적인 시간은 내 가슴속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가는 것 같다. 결국 양재역에 도착하니 7시 21분이다. 버스가 눈을 깜빡이면서 길가에 서서 나를 기다린다.
처음 내딛는 산길이 편안한 오솔길이다.
2주전 웅이산과 용문산구간 들머리였던 큰재에 평상시처럼 오전 10시에 도착했다. 34명의 작지도 크지도 않은 산행팀이 버스에서 쏟아져 나와 산행채비를 한다. 후끈한 버스에 있다가 내리니 차가운 기운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씨다. 12월 중순에 한 번 눈이 내린뒤 한 달동안 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아 날이 가문데다 겨울답지 않게 춥지도 않아 마치 금방이라도 봄이 찾아 올 것 같다. 이제 저 작은 모퉁이만 돌아가면 설날이고 설이 지나면 사실 봄도 머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눈소식은 없지만 맑은 날씨에 차가운 공기 이것만 있으면 겨울 산행을 즐기기에 충분하겠다.
오전 10시 대간꾼들의 쉼터 (숙박 및 샤워시설)로도 사용된다는 백두대간 생태 교육장을 가로질러 산행을 시작했다. 크지 않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길 양쪽으로 도열하고 있는 대간길은 오솔길처럼 편안하다. 물만난 물고기처럼 자유인 22기 백두대간 팀원들의 발걸음은 지난 1년 동안 갈고 닦은 축지법을 시연하듯이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가 걷는 길은 왼쪽은 상주시 공성면이요 오른쪽은 같은 상주시 모동면이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을 거쳐 남해로 흘러들고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대청호에서 쉬었다가 금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간다. 두 물줄기를 가르는 백두대간길이 평야지대의 너른 들판에 난 낮은 구릉으로 이어진다.
회룡재
나뭇잎을 떨군 참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흔들어댄다. 나뭇가지 위로 비치는 하늘은 더없이 파랗다. 그 파란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맑은 태양에 나목의 긴 그림자가 산비탈에 엎드린다. 끝없이 이어질 듯 하던 산길은 갑자기 나타난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난다. 회룡목장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잠시 걷다가 다시 오른쪽 숲속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이 이처럼 마을로 이어지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늘 험악한 고산준령을 넘나들 것 같은 백두대간이 고앙이같이 얌전한 길을 만나면 좀 황당하다. 산길은 왼쪽으로 회룡목장을 두고 계속 이어진다. 목장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제법 넓은 계곡의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어 수질오염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여름에 이 길을 걸으려면 잠시 냄새에 시달려야 할 것 같다.
회룡재로 가는 시멘트길
큰재를 출발한지 한 시간이 지난 11시경 회룡재에 닿는다. 약 4 km 거리를 한시간 만에 걸었다. 회룡재라는 고개 이름은 이 아래 있는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마을 뒷산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용의 형상이라나. 의정부 사패산 아래 있는 회룡마을의 유래와 비슷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하나도 닮지 않았다. 의정부 회룡마을은 그 산기슭에 있는 회룡사에서 유래했으며 그것은 이성계가 그의 아들 태종에게서 멀리 떨어져 함흥에서 지내다가 여러 차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성가시게 구는 아들의 성화에 못이겨 한양으로 돌아 오면서 마침 절에서 머물고 있던 무학대사를 만나 며칠을 머울렀는데 그 연유로 왕(龍)이 돌아와 묵은 절이라 하여 회룡사(回龍寺)라 부르고 그 아래 있는 마을 이름이 자연스레 회룡마을이 되었다 한다고 한다.
산길에 늙은 느티나무
왼편으로 회룡목장이 따라온다.
개터재
회룡재에서 개터재까지의 1.7 km 구간도 편안한 산길이다. 왼쪽으로 인삼밭을 보면서 마을에서 벗어나 산길로 접어 드는데 가파르게 치고 오를 듯하던 산길이 산허리를 차고 빗겨서 이어진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르자면 이 산의 능선을 따라서 가야 하나 편안함이 몸에 배인 대간꾼들이 앞서 닦아 놓은 편안한 길을 따라 양지바른 오솔길을 조금 걷자니 개터재에 이른다.
회룡재 가까운 곳에 옛 성황당인듯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회룡재에서 개터재로 가는 길 - 대간길 아래로 빗겨 난 편한 길을 걷는다
마치 봄날같은 한겨울이다. 크지 않은 참나무 숲을 지난다.
11:38 개터재에 도착
개터재의 이정목에 누군가 매직으로 ‘옛고개’라 적어 놓았는데 그 연관성을 유추할 수 없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 개와 관련있는 곳이 100개나 된다는데 이는 옛날부터 우리와 친근하게 지내온 동물이라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와 연관된 이름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개터재’라는 이름에서 그 뜻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개는 사람들이 사냥할 때도 데리고 다니고 나무하러 갈 때나 들판에 일하러 갈 때 등 늘 사람들과 함께 한 친근한 동물이다. 그리고 개는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혹시 개터재라는 지명이 옛날 마을사람들이 개를 잡던 고개는 아니었을까 하고 살짝 추정해 본다. 근거가 있어서 하는 생각은 아니고 그냥 갑갑해서 혼자 해보는 소리다.
‘개터재’에 관한 지명 유추
윗왕실재
능선길을 걸으면 이제나 저제나 전망이 트여 시원한 산줄기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눈도 없고 상고대도 없는 겨울 산에 시원한 조망마저 없으니 너무 삭막한 기분이다. 가끔씩 길가에 나타나는 굵은 참나무를 한 번 쓰다듬어 본다. 표피가 거칠 거칠하게 벗겨진 커다란 물박달나무도 여럿 보인다. 잎이 푸른 침엽수인 노간주나무도 제법 굵다. 저만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걸 보면 이 주변 마을에서는 살림살이가 제법 풍족했던 모양이다.
큰 참나무와 노간주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맑은 하늘에 담긴 나목
12:50 윗왕실재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다
지루한 능선길을 따라 한 시간 반쯤 걸아가니 앞서가던 회원들 몇 명이 길위에 난 동물통행로 위에 서 있고 그 아래 넓은 공터에 모두 둘러 앉아서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이 윗왕실재다. 발음하기도 힘들면서 뭔가 굉장한 것을 숨기고 있는 듯한 이름이다. 왕실(王室)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왕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고개 아래 모동면 효곡리에 있는 왕실마을에서 유래한 고개 이름이다. 이 마을이 백학산 줄기에 둘러 싸여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포란지세(抱卵地勢)의 명당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옹기 종기 모여 앉아 회원들은 약 30분간 오찬을 즐긴다. 대열의 뒷편에서 느린 걸음으로 산보하듯 걷는 별동대도 한갓지게 둘러 앉아 별동대장 현구님과 구진님이 준비한 버너에 물을 끓여 김이 펄펄 나는 라면을 먹었다. 산행에서 먹는 점심은 늘 거나하다. 라면에 밥, 떡, 빵 그리고 커피와 과일까지 성대한 오찬이다.
백학산 (白鶴山 615 미터)
점심을 먹고 오르막 산길을 걷는 몸이 무겁다. “ 배낭을 비우니 가벼워야 하는데 그걸 뱃속에 넣었더니 그게 그거네 “ 하면서 별동대장님 우스개소리를 한다. 갑자기 산이 가파른 오르막이라서 그런건지 정말 점심을 먹어 배가 너무 불러서 그런건지 다들 발걸음이 무겁다. 백두대간길은 그 동안 숱한 산꾼들이 밟고 다져서 메마른 낙엽위로도 길이 선명하다. 그리고 길이 꺽일 때마다 나뭇가지에 걸려 나부끼는 시그널 덕분에 대간길에서는 길을 잃을 일이 없다. 고도가 높아지니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씩 조망이 트인다. 너른 벌판 너머 낮은 산들이 잔뜩 움쿠리고 앉아 있다. 백학산 280미터 지점까지 이어지는 오르막에 회원들의 발걸음이 더디다.
백학산 정상으로 가는길에 단 한 번 조망이 트인다.
대간길 중요한 길목마다 대간꾼들이 달아 놓은 시그널이 나부낀다.
북쪽으로 달리던 산길이 좌측으로 두어번 꺽이더니 마치 말발굽 모양으로 둥굴게 굽어진다. 그리고 오후 2시 45분 마침내 오늘 산행의 목표지점인 백학산에 닿았다. 작은 화강암 돌비석에 한자로 산이름을 새겨 놓았다. 하얀 학이 무리지어 산위에 내려 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겨울이라 그런건지 학의 자취는 찾아 볼 길이 없다.
이 산줄기가 속해 있는 상주(尙州)는 쌀과 누에 그리고 곶감으로 삼백(三白), 즉 세가지 흰색 보물로 유명하다. 그만큼 모든 것이 풍족한 고장이라는 뜻이리라. 우리나라 유명한 산들에 비해 그 높이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 곳 상주의 벌판위에 우뚝 솟은 백학산은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산행을 하는 중에도 길위에 수많은 무덤이 펼쳐져 있는데 이는 많은 이들이 백학산의 정기를 받아 후손들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지대가 높어진 덕에 백학산 정상에서 처음으로 조망이 트인다.
백학산 정상에 선 별동대(別動隊)
백학산 정상에서 나무시이로 트인 조망.
개머리재
백학산에서 정점을 찍은 산길은 올라 온 만큼 다시 급하게 떨어진다. 메마른 낙엽이 켜켜이 쌓인 산길에 먼지가 뽀얗게 피어난다. 바라볼 풍경도 없고 숨가쁘게 올라야 할 봉우리도 없는 산길을 미끌어지듯이 내닫는다. 백학산을 올라 오면서 잠시 간식을 먹는 동안 휭하니 앞서나간 선두팀은 어느새 그림자도 안보인다. 누군가 우리 대열을 보고는 특수부대가 배낭을 메고 진군하는 모습같다고 농담삼아 얘기한다. 그 만큼 빠르고 거침없다는 말이다.
산길이 낮아지고 평평해지더니 길 왼편으로 작은 논밭이 보이고 동네 사람인 듯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대간길이 대부분 외진 곳이라 이렇게 동네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문데 이 곳 산이 낮다 보니 아래 왕실마을에서 산책삼아 올라온 모양이다. 그렇게 산모퉁이를 지나 조금 내려가니 대포리로 이어지는 임도가 나타나고 그 건너편에 앞서 간 회원들이 모여서 사진끽기 놀이를 하고 있다.
대포리 임도
임도의 길모퉁이에서 작은 여흥을 가진 후 출발하기 전 - 너무 쉬운 길을 걸은 탓인지 표정이 모두 밝다
모양새를 보니 이제 오늘 산행도 거의 끝이 나는 것 같다. 임도 한켠 넓은 곳에서 간식을 먹고 삼삼 오오 모여 사진도 찍으며 잠시 긴장을 풀어 본다. 사실 산길이 워낙 편안한 까닭에 긴장이 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쉬면 다음 산행이 편해진다. 휴식을 마치고 출발에 앞서 총대장님이 이번에는 별동대가 선두로 나서라고 뜻밖의 제안을 한다. 벌써 6개월은 넘었을 법한 석교산 산행때 우리 별동대가 이슬을 털며 선두에 서서 삼도봉을 향해 갔던 이후로 처음이다. 별동대라는 이름도 사실 그 때 지어진 이름이다. 늘 대열의 뒤를 따르니 후미팀이라 부르지만 모처럼 선두에 서서 가니 후미가 아니라 특별한 부대란 뜻으로 별동대라 이름지었었다.
이번에도 선두에 자리잡은 별동대는 정해진 보법대로 당당하게 앞서간다. 크지 않은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걸어 작은 산봉우리를 넘으니 다시 임도와 넓은 밭이 나타난다. 사과나무 과수원을 끼고 조금 걸어가니 시야가 트이고 포도와 복숭아 과수원길 사잇길 끄트머리에 버스가 서 있다. 대부분의 대간길이 끝나고 나면 얼마간의 접속구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갑자기 버스가 나타나니 낯설기도 하지만 반가운 마음이 더욱 크다.
대간길을 갉아 먹는 과수원 옆길을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산행의 종점인 개머리재에 도착한다
개머리재에서 기다리는 버스가 반갑다
오후 4시 15분 마침내 개머리재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원래 지기재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애매한 탓에 이 개머리재에서 산행을 마치고 작은 뒤풀이를 가졌다. 개머리재는 이곳 산세가 개의 머리모양이라서 그리 불렀다 하나 어디가 개머리 모양인지 내가 알아채지 못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하챦은 것에 ‘개’자를 붙여 불렀는데 이 고개의 이름도 별달리 이름 붙이기 번거로와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닐까. 개머리라고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개머리판이다. 그게 어찌 개의 머리모양을 연상시키는지 모르지만 총을 쏠 때 어깨에 받치는 소총의 머리부분을 개머리판이라 불렀다.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개’자를 넣어서 불렀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다. 정말로 이 곳 지형이 개의 머리 모습을 띠고 있는 건지 다음 구간 산행 때 자세히 봐 둬야겠다.
개머리재 포도밭 비닐하우스를 바람막이 삼아 농로에 둘러 앉아 조촐한 식사 겸 하산주를 마신다.
산천초목이 동면에 들어간 듯 고요한 정경이다.
밋밋한 산줄기지만 엄연히 백두대간의 일부분인 큰재-개머리재 구간을 마쳤다. 17 km 산행하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헬렌 켈러가 물었다. 앞머리가 벗겨지고 초라한 모습을 한 동장군을 보았다. 6 시간 산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느꼈느냐고 묻는다. 이제 대한민국 백두대간 긴 줄기의 반을 마쳐가는 중이다. 크고 작은 산줄기에 아름다운 산세도 있지만 오늘 걸었던 대간길처럼 찟기고 할켜진 모습이라도 언젠가는 잘 가꾸어진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에필로그 1. 맥주집 모임과 회장선출
모처럼 산행이 일찍 끝난 덕분에 양재역에 8시경에 도착했다. 여름같으면 아직 사방이 훤한 시간이다. 버스에서 김용호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재 벙개 치맥을 제안했다. 자유인 22기 백두대간팀이 결성된 이후 이제까지 한번도 함께 모여 술한잔 한적이 없다면서 양재역 근처 맥주집으로 초대했다. 술과 인정이 고픈 사람들은 박수로 환영하고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잠깐 시간을 내어 “치킨처럼”이라는 맥주집으로 향한다. 넓은 식당의 반을 차지하고 앉아서 바삭하게 구운 통닭에 맥주로 좌중이 무르익을 무렵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양성기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 벙개모임의 취지에 대해 운을 띄운다.
돌아 오는 길에 속리산 후게소에서 - 저 뒤에 펼쳐진 구병산의 모습이 아름답다
산행중에 몇몇 회원들끼리 얘기가 오갔던 모양이다. 자유인 백두대간 22기 팀의 지속적인 유지 발전을 위해 회장을 선출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제까지는 자유인 산악회의 운영자이자 산행 총대장인 한문희 대장님의 인솔하에 김옥신 총무가 모임을 이끌어 왔으나 이제 조금 있으면 4월 7일 23기 대간팀이 첫 산행을 시작하는데 격주로 두 팀이 운영된다 해도 우리팀 자체적으로도 조직을 공고히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나 보다.
치킨처럼 맥주집에서
회장직 수락연설을 하고
양성기씨는 그의 맞은 편 앞에 앉은 지홍기씨를 초대 회장으로 추천하고 회원들은 반대의견 없이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지홍기 회장은 평소에도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다. 백두대간이 없는 주말에는 오지산행팀을 따라 설악산 등 힘든 코스를 즐겨 찾아 다닌다고 한다. 지난 여름 내가 이석증으로 어지러워 설악산 영시암까지 다녀왔을 때도 길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지회장은 앞으로 약 1년 남은 대간산행 이후에도 모임이 지속되어 정맥과 지맥산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모임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포부를 천명했다.
모쪼록 이 모임이 큰 사고 없이 유지될 수 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2.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14세이던 1940년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 등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성적 착취를 당하다가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할 때 싱가폴에서 일본군 간호사로 인식되어 미군에 체포되었다가 1947년 만 8년만에 귀국하였다.
45년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옛날 어렸을적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듯 1992년 마치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고 일본정부의 사과를 요청하고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2019년 1월 28일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세계여성들의 성착취 및 성노예 근절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또한 나비기금을 모아 성적 피해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수요집회에 참석하여 함께 싸워주는 정대협 회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해자인 일본정부를 향해 공식적으로 잘못에 대해 사과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일본 정부를 향해 ‘분노’한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시사만평
나는 이제까지 정대협의 수요집회에 대해서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 쓴 많은 이야기를 접했으나 그 심각성을 깊이 느끼지는 못했었다. 사실 고통은 본인이 겪지 않으면 느끼기 쉽지 않은 법이다. 철모르는 14살 나이에 군대로 끌려가서 5년간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산다는 것은 그 고통이 어떠할지 가히 상상할 수 없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돌아왔으나 강제적이나마 일본군의 성적 위안부로 살았었다는 사실 앞에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서 거친 삶을 살았을 정신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살아 남았고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가슴 깊이 응어리진 과거의 피맺힌 잔상을 털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던 삶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가슴속에 숨겨왔던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또한 어쩌면 죽기보다 더 힘든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년에 개봉된 ‘아이 캔 스피크 ( I can speak )’라는 영화가 떠 오른다. 이 영화의 소재 또한 정신대 할머니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참았었는데 실제로 그 할머니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로 살았다고 밝힌 정대협 회원 할머니 그리고 차마 부끄러워 그 사실을 가삼속에만 꼭 숨겨둔 채 살아가야 했던 더 많은 사람들의 이승에서의 행복을 빌며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아울러 지난 세기에 행해졌던 전쟁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본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반드시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