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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심심학교에서 2015.3.12일부터 5회 강의 예정
주제 : 논어를 통해 본 사람
<3.12>
1. 감각, 판단, 소통, 탐구
인간의 특성; 관념을 가진 존재
인간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한 지구 상에서 관념을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인간의 우수함입니다.
그런데 이 관념이 대단히 쉽게 굳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명체 일반이 갖는 <자기중심성>보다 훨씬 강한 경직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보통 아집이라고 부릅니다.
공자는 무아집 같은 말은 한 적이 별로 없지만, 실제로 인간 관념의 함정을 정확히 보고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관념의 정상화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집단들 사이의 대립· 분쟁, 종교(사상) 간의 대립·분쟁 등이 이 관념의 정상화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생각해 보고 싶은 테마
1. 화쟁, 연찬
2.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판단한다는 것
3. 사이좋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제1편 학이)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일지라도 충(忠)과 신(信)에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5편 공야장)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께서 자로에게 말씀하셨다. “유야, 너는 육언육폐(六言六蔽)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느냐?”
자로가 대답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앉거라. 내가 너에게 그것을 말해 주겠다. 인을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어지고, 지혜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허황해지고, 신의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의를 해치게 되고, 정직함을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가혹해지고, 용기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고, 굳세기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무모해지는 것이다.”
(제17편 양화)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對曰, 未也 居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진 사람을 보면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해야 하며,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돌이켜 자신을 살펴야 한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이인 제4편)>
<자하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굳건하게 하며, 본질을 묻되, 구체적으로 탐구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다”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장 편)>
단상
인문운동은 생명운동이며, 우리시대 변혁운동의 한 축이다.
물신(物神)의 지배와 자기중심성은 반(反)생명이다.
세월호 이후의 일상은 어떻게 변해야할까?
우리의 아이들과 희생자들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 욕구는 억압하기에는 너무 우리의 몸에 붙어버렸다. 정신적ᆞ예술적 욕구를 확대하는 것이다. 챙기고 탐내는 것보다 나누고 베푸는 것이 훨씬 기쁜 것이라는 것을, 한송이 들꽃의 아름다움이 다이아반지보다 더 마음을 기쁘게하는 감성의 변화를 일상의 삶에서 확대하는 것이다.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기쁨의 원천이, 그 질이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문운동이다.
나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제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내가 옳다'는 아집이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과학적 자각을 떠올린다.
이것이 인문운동이다.
이것이 '자치'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자치가 안 되는 곳에 독재와 관료주의의 온상이 마련된다.
아파트에서 마을에서 동료들끼리 회사에서 이 자치를 확대해가야 한다.협동운동과 마을운동은 아주 좋은 연습장이다.
자치는 상대방에게서 좋은 점을, 긍정적 에너지를, 진정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공기 속에서만 자랄 수 있다.
이기적 경쟁은 자본주의 생산력의 근본적 추진력이다.
그것은 반생명적인 생산력이다.
이제 자기실현의 건강한 노동의 자율적 자주적 협동적 조직에 의한 생산력이 이 반생명적 생산력에 지고야만다는 지금까지의 현상을 넘어서는 실례들을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서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한세기 이상의 세계적 실험의 실패를 극복하는 위대한 걸음의 시작이다.
이것을 가능케하는 인간의 동기를 확대하는 것이 인문운동이다.
신자유주의의 야만성이나 독재 ᆞ부패ᆞ관료주의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변혁운동은 이 인문운동을 속살로 갖출 때라야 실질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두 흐름이 서로 만나 큰 강을 이루는 곳에 세월호의 희생이 고귀하게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난게 아니라오. 나는 천개의 바람이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곳 어디에나 함께 있다오'
인디언의 노래가 이 새벽 가슴 깊이 파고 든다.
<3.19>
2. 인간의 특성 --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食)의(衣)주(住)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됩니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됩니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는 공자의 태도 또한 현대의 삶 속에서 극단적이지 않는 조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생각해보고 싶은 테마들
1. 자발적 가난
2. 소유
3. 토대와 상부구조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여쭈었다.
“《시경》에서 말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란 바로 이를 말하는 건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구나. 하나를 말하면 그 다음을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學而 第一)>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를 구함이 옳은 것이라면 비록 마부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살리라.”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제 7편 술이)>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라가 있고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한다. 대체로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합하면 부족함이 없고, 안정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제 16편 계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배개를 하고 살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니, 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제 7편 술이 >
단상(5.7)
팽목항에서 어떤 40대 아버지와 10대 딸 대화라고 한다.
‘아빠, 이게 다 공짜야?’ ‘쉿, 알아서 챙겨’
10대만 되어도 소유관념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그 공급자는 아버지를 비롯한 이 사회다.
이 부녀는 아마 아주 가난하고, 이 아버지는 아마도 비열한(卑劣漢)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대화는 아마도 무주공산의 신천지로 알고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한 이른바 교양과 부를 갖춘 백인 부녀 사이에도 있었을 수 있고, 스스로 지도층이라고 생각하는 권력가나 재력가의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라의 부(富)에 대해 이런 속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 동안 불평등한 소유사회에 살아오면서 어쩌면 보통 사람들의 유전자 속까지 침투해서 무의식의 세계에 짙게 깔려 있는 관념일지 모른다.
이 관념이 ‘원죄’다.
아마도 정말로 천진무구한 아이가 봤다면, 진짜 있어야할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본 것이다.
‘거저 주는 것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모습을 ...
이것은 꿈으로 끝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는 비록 한시적이지만, 재난의 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런 사회를 실현한 경험이 많은 백성이다.
그것이 일상 속에서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요, 진화다.
그것이 이른바 ‘원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다.
비록 쉽지 않은 길이고 아직은 희미하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그 단초들이 나타나고 있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그 예이다.
<3.26>
3. 인(仁)--생명력의 신장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입니다.
공자의 인(仁)도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합니다.
그 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습니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굳어져서 오히려 목적처럼 되어버린 것이 공자를 오해하게 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 시대와 사회에 맞다고 생각해서 공자가 제시한 규범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마치 그것이 목적처럼 인식된 것이지요.
그것이야말로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 못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다음의 문장들을 그런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싶은 테마
1. 규범(도덕, 법)의 목적
2. 불의(不義)와 불인(不仁)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것인가?
3.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협동은 어떤 상태에서 가능할까?
4.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 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제12편 안연)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시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니라.”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 자공이 여쭈었다. “만일 널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능히 대중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면 어떠합니까? 인자(仁者)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자에 그치랴. 반드시 성인(聖人)이로다. 요순(堯舜)도 오 히려 근심하신 바이니라. 인자란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우며,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이루어주느니라. 능히 자신을 미루어 남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인에 이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느니라.” (제6편 옹야)
子貢曰, 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
생각해 보고 싶은 구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제 4편 이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인을 좋아하는 자와 불인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인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을 위함에 있어서 불인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4.2>
4. 인간의 진화--소인에서 군자로
공자는 인간이 진화할 목표를 군자(君子)라는 인간상(人間像)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물신’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고 싶은 테마
1. 자기중심성은 나쁜 것인가?
2. 현대 인류가 만나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은?
3. 군자는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 변혁가인가? 도덕군자인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君子 上達 小人 下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주공(周公)과 같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지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子曰,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못하다.”
子曰,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子曰,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
정치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德)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마치 북극성이 그 제자리에 있어 도 여러 별들이 이를 향하여 도는 것과 같다.” (제2편 위정)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 共之>
<안연 편 22장을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 묻는다. 그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대답한다.
번지가 이어서 “지(知)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知人)”이라고 말한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인(仁)과 지(知)를 결부하여 답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실현된다고 말한 것이다. 번지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인은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굽은 사람도 능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말한다.
번지라는 제자가 그다지 총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공자가 말한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다른 제자인 자하에게 공자의 말씀을 되물었다. 그러자 자하는 “뜻이 넓고 큰 말씀이오. 옛날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고요(皐陶)를 등용하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으며, 또 탕 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골라 등용하시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소.”(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擧伊尹 不仁者遠矣)라고 부연 설명한다. 자하는 인을 정치의 요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技術)이다’라는 공자의 이상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공이 공자께 여쭈었다. “한마디의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 한마디로 그 뜻을 나타낼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일러오기를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였으니, 만일 임금 되기가 어려운 줄을 안다면 이것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말했다. “그러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 하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 한마디로 그 뜻을 나타낼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일러오기를 ‘나는 임금이 된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내가 말을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못하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임금의 말이 옳기 때문에 아무도 어기지 못한다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 말이 옳지 않은데도 어기지 못한다면 이것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제13편 자로)
定公 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 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 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
< 안연 편 11장에서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여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픙족하게 하고, 군비(軍備)를 충족하게 하며, 백성이 믿게 하는 것이다.”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부득이 셋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비를 버려야 한다.”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또 부득이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다 죽음이 있기 마련이거니와,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하게 된다.” (제12편 안연)
子貢 問政 子曰, 足食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 不立>
<계강자의 정치에 관한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치(政)란 바름(正)이니, 그대가 만일 바름으로써 통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顔淵 第十二)
계강자가 도둑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공자께 묻자 공자는 대답한다. “진실로 그대가 탐욕하지 않는다면, 상을 준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오.”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 不竊>
<어떤 사람이 자산(子産)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애로운 사람이다.” 자서(子西)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저 그런 사람이다.”
관중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이다. 백씨의 병읍 300호를 빼앗았으되,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며 살다 죽었지만 관중을 원망하지 않았다.”
或 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沒齒 無怨言>
<4.9>
5. 삶, 화광동진, 행복
편안하고 즐거운 삶
<공자께서 안연에게 말씀하셨다. “쓰이면 나아가 행하고, 쓰이지 않으면 간직하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로가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호랑이에게 덤비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어려운 일에 임하여는 두려워하며, 미리 계획을 세워서 일을 성사시키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제7편 술이)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도를 목숨 바쳐 지켜야 한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말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일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태백(泰伯) 편 13장)>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길을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그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고 빈천도 그 지조를 바꾸지 못하며 위무도 그 뜻을 꺾지 못한다.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 不能淫 貧賤 不能移 威武 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
< 안연 편 23장을 보면, 벗을 사귐에 대한 물음에 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충고하여 잘 이끌어주되, 듣지 않거든 그만두어 스스로 욕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 안연 편 24장에서 증자는 “군자는 학문으로써 벗과 만나고, 벗과 함께 함으로써 인을 향상한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제1편 학이)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뜻이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함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그대로 들리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제2편 위정)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익한 좋아함이 세 가지 있고, 해로운 좋아함이 세 가지 있다. 먼저 예악으로 절제하기를 즐기고, 남의 좋은 점 말하기를 즐기며, 좋은 벗이 많기를 즐기면 유익하다. 또 교만한 쾌락을 즐기고, 안일하게 노니는 것을 즐기며, 주색(酒色)의 향락을 즐기면 해롭다.” (제16편 계씨) 孔子曰, 益者三樂 損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宴樂 損矣>
< 공야장 편을 보면 사제 간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간다.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말해보지 않겠느냐?”
자로가 말씀드렸다. “저는 수레와 말과 옷과 가벼운 털옷가지 등을 친구와 함께 쓰다가 그것들이 해져 못쓰게 되어도 섭섭해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안연이 말씀드렸다. “저는 착한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세우고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로가 여쭈었다. “선생님의 바람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노인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벗들에게 미더우며, 젊은이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顔淵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
중용(中庸)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다.”라는 말은 극단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극단을 겪어 왔고, 그것이 갖는 폐해 또한 경험했다. 가령 집단주의의 폐단이 심하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나오기 쉽다. 물질주의의 폐단이 심하게 나타나면 이번에는 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을 해치는 정도가 심각하면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번엔 극단적인 생태주의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현상들을 보면 역사는 극단과 극단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의 변화를 잘 살펴보면 거칠긴 하지만 중도(中道)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와 경제 생산력의 향상, 인지(人知)의 발전이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를 가능케 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말한 극단은 공자가 말한 이단과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비슷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특정한 사상체계가 지배적인 힘과 결합되어, 다른 생각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시대에는 이단이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사조였던 경우도 많았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사상도 수구․반동사상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처럼 다양성이 바탕이 되는 세상에서 생각해 본다면, 자기와 다른 것을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종교적인 입장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지나치게 한 면만을 강조하는 극단(極端)을 경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공자의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면서 역사상 많은 지식인들이 희생되었던 것은 사상이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화될 때 나타나는 위험성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경계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공호이단(攻乎異端)에서 ‘공(攻)’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는데, ‘이단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공자가 과연 그런 뜻으로 이야기를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대단히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을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다른 것을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진리를 향한 올바른 길이 아니다.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무엇이 진리인가?’를 탐구해 가는 것이 중용이나 중도의 길에 가까운 것이다. 공자의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대 민주주의에서라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빛나는 말로 들린다. 세상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수 많은 스펙트럼으로 나뉜다. 진리는 그 가운데 어딘가에 있다. 무엇을 이단으로 배제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단정’이나 ‘독선’이 될 수 있다. 세상은 늘 변하는 것이어서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로, 어제의 이단이 오늘의 주류로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해서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인 것이다’
실제로 사람의 생각은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삼군의 장수는 뺏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꺾지 못한다’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제 9편 25장)는 것도 이러한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극단적이고 반지성적어서 시의에 적절치 못한 생각들이 주류무대를 장악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예컨데 극좌나 극우를 비롯해 반지성적인 경향들이 자연스럽게 주변화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배제나 말살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류의 흐름이 건강하고 풍부해지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선진 편 15장>
<‘중용의 덕은 지극한 것이다(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옹야 편 27장>
< “중용의 길을 행하는 사람을 얻어 가르치지 못할 바에는 광자나 견자를 가르치리라(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자로 편 21장>
*광자(狂者)는 어떤 사람인가. 뜻은 높은데 아직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견자(狷者)는 지식은 모자라나 절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둘 다 중용의 덕을 실행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같이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이라고 본 것이리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야만으로 흐르기 쉽고, 문(文)이 질(質)을 이기면 겉치레에 흐르기 쉬우니, 문(文)과 질(質)이 어울려 조화를 이뤄야 군자다.”(제6편)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 彬彬然後 君子>
선진 편에 보면 다음의 문장이 나온다.
<자로가 여쭈었다. “좋은 일을 들으면 곧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부형이 살아 계시는데 어찌 들은 것을 그대로 행하겠는가.”
염유가 여쭈었다. “좋은 일을 들으면 곧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듣거든 곧 행해야 한다.”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여쭈었다. “유(由)가 ‘들으면 곧 행해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는 ‘부형이 살아 계시니’ 하시고, 구(求)가 ‘들으면 곧 행해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는 ‘들으면 곧 행해야 한다’고 하시니, 저는 어리둥절하여 감히 여쭈고자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求)는 매사가 물러서는 편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由)는 너무 나아가기 때문에 물러서게 한 것이다.”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 進之 由也兼人 故 退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