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토 L. 곤잘레스, 서영일 옮김, 초대교회사, 은성, 1987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유달리 독특하고, 고유하며, 처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아마 없을 것이다. 기독교신앙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교리가 있다 하더라고 그 교리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분명 그 처음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음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곤잘레스의 말대로 우리들의 채색된 인식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겠다. 채색된 시야가 옳다, 그르다를 떠나 한
번쯤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어떻게 채색되어 왔는지, 그 과정에 얼마만큼의 풍부한 당야한 색채들이 어우러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과정을 되짚어 보지 않고 현시점의 교리를 절대화하고 그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그 교리에 담겨진 풍부함들,
깊이 있는 논의들을 묻히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기 쉽게 만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 기독교 신앙의 처음 자리를 되짚어 본다면 이 책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읽기가 쉽다. 마치 이야기처럼 들려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태도 중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목회적 입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이미 저술한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사상사"에서 목회와 역사에 관심을 둔 유형 C를 앞으로 주목해야하고 회복해야할 신학유형으로
꼽고 있다는 것과 상응한다. 이는 신학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나 해석에서 도드라진다. 안디옥의 이레니우스가 대표적 사례이다. 따라서 저자가 기독교
신학, 기독교 신앙의 철학적이고 사변적 논의나, 법적인 논의에서보다 역사를 통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읽어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교회사가로서, 역사, 곧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그의 입지와도 관련될 수 있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그의
출신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3세계 출신인 그의 입장은 보다 평범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보다 낮은 곳, 평범한 곳을 향한 그의 시각은 수많은 이름없는 기독교 신자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해 준다.
헨리 채드윅의 <초대교회>를 읽다 지쳐 접었던 경험이 문득
떠오르는 지금, 대학 시절 곤잘레스의 책을 먼저 집어들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아쉬움처럼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략한(?) 내용 요약 : Les Goliards의 Notes(http://goliards.egloos.com/1140355)를 통해 비교적 수월하게 정리했음을 밝힌다. Notes 대분을 사용했으며 부분 부분 수정과 추가 내용을
덧붙였다.
제1장 서론
선배 기독 신자들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성경 본문 그 이상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충실한 증인이 되고자 노력하였는가 하는 기록을 남겨주었다. ... 과거는 아직도 우리들의 속에 살아
있어서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독교 메시지를 이해하는 내용을 결정지으므로, 과거를 이해함 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
우리가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신약을 초대 기독교인들과 동일하게 믿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에 불과하며, 또한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의 해석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을 모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들의 시야를 채색하고 있는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전통에 사로잡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과연 우리들이 어떻게 현시점에 위치하게 되었는가?
(pp.14-15)
제2장 때가 차매
기독교가 처음
출현한 팔레스틴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고난과 투쟁을 경험하였다. 옛날에는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소아시아와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주요
통상로의 교차점에 있었다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그리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민들은 계속하여 침략과 정복과 포로생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p.20)
이러한 고난들 속에서 유대교는 서로 다른 형태를 띄게 되었으며, 몇 가지 당파들이 출현하였다. 복음서에
거듭 등장할 뿐만 아니라 후기 유대교가 이로부터 발전하였기에 가장 유명한 당파는 물론 바리새파이다. 바리새파는 로마 통치와 헬라 문명이 가져다
주는 물질적 유익을 누리지 못하였던 일반 대중들의 당이었다. 이들에게는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에 과연 어떻게
하면 일상 생활의 모든 경우에 율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율법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은 이들이 일상의 모든 상황, 그리고 로마의 통치와 헬라주의적 위협 아래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의 고유 신앙이 적용되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외에도 이들은 보다 보수적 유대인들이 단지 상상력의 발로라 주장하였던 최후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들을 믿고
있었다.(p.23)
보다 보수적 유대인들은 사두개파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 귀족 층에 속하였으며, 정치와 종교 양면에 모두
보수적이었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이들은 로마인들의 후원을 통하여 유지하였던 성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사두개인들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많은 교리들을 근거없는 조작이라고 부인하였다. ... 또 다른 중요한 일파는 흔히
사해 사본의 보존으로써 잘 아려진 금욕주의적 에세네파들이다. 이들은 사회 일반으로부터 격리되어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추구하였으며,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는 강렬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 반면 이러한 경향들과 분판들과 집단들의 다양성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공통적으로
기본적인 믿음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는 곧 윤리적 유일신앙이며 종말론적 소망이다. (pp.23-24)
(팔레스틴의 유대인들 외에)
구약 시대부터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기들 선조의 조국과 강한 감정적,
종교적 유대감을 간직하였는데 이들이 곧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다.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기도교회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하여 로마 전역에 새로운 신앙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 전파를 위해 가장 유용한
수단을 제공했으니, 즉 구약의 헬라어 번역이다. ... 70인역은 초대 교회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바로 이 번역판이 신약 기자들에 의해
인용되었으며, 이 대문에 초대교회의 용어들이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초대 신자들은 선교 활동 중 이방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70인역을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유대인 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이 쓰기에 부적합한 다른 번역판들을 만들어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교회가 70인역을 독점하게 되었다.(pp.26-27)
로마 제국이 이룩한 정치적 통일 때문에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산적들이나 지역 분쟁의 위험없이 여행할 수 있었다. ...1세기에는 잘 포장되고 정비된 도로들을 통하여 먼 지방들이 서로 연락되었다. 당시
상업이 성하였으며 여행객들은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는 단지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인들, 노예들, 기타
여행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지역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환경 중 또 다른 면들은 초대 기독교 신자들에게 위협이요 도전이었다. 제국은 보다
완전한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종교적 통합을 두 가지 방면에서 추구하였다. 하나는 여러 종교들을 무차별 혼합하는 종교적 혼합 정책이요, 다른
하나는 황제 숭배였다.(p.29)
헬라 문화의 와중에서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두 가지 철학적 전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가 그것이다. ...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매력을 느꼈으며 자기들이 무식하고
비종교적이라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이러한 이론들을 사용하였다. 비록 처음에는 이러한 철학적 전통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국외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결국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신앙을 이해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p.33)
제3장
예루살렘 교회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종교의 추종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세계를 통하여 유대인으로 남아 있었다. 열두 사도와 일곱 집사들, 그리고 바울에 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들의
신앙은 유대교의 부정이 아니었고 차라리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확신이었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이야말로 오랫동안 고대했던 메시아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계속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하게 했던
이유였다. ...물론 자기들의 죄를 위하여 특별히 구별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채택한 것으로 보이는 주간 이틀 동안의 금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유대인들처럼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예수님의
배반당하심과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pp.38-39)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배척당했던 그 옛날
유대인 교회는 점차 고립화되었다. 비록 A.D 135년 일단의 유대인 신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으나 나머지 기독교 신자들과의 관계는 거의
끊어진 상태였고, 그 주도권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이전될 수 밖에 없었다.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는 나머지 교회들과의 연결이 절단되었으므로
독자적 노선을 걷게 되었고, 주위의 여러 분파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수세기 후 이방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잊혀진 공동체에 관하여
기록하고자 하였을 때에, 이들은 그들의 이단 학설과 괴상한 관습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pp.41-42)
제4장
이방인에의 전도
최초의 기독교 확장은 주로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해야 했던 헬라파
기독교인들의 사역에 힘입고 있지만, 동시에 모교회가 이들 헬라파 유대인들의 이방인 사역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겼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이 과연 이스라엘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
때문이었다.(pp.44-45)
역사가들이 사도들의 남은 생애를 연구하는 데 방해가 될만한 현상이 2세기 말에 생겨났다. 모든 중요한
도시의 교회들이 사도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p.51)
일부 사도들, 특히 베드로와 요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여행하였고 각처의 교회들을 감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들에 관한 대부분의 전설들은 후기에 나타난 것이다. 즉 사도들이 당시의 세계를
자기들 사이에 배분하였다고 믿어졌을 때, 그리고 각국, 혹은 각 도시의 교회들이 사도적 기원을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실제의 대부분의 전도,
혹은 선교 사역은 사도들이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들, 즉 박해,사역, 혹은 전도열 때문에 각처를 여행하였던 이름없는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p.53)
제5장 최초의 국가와의 대결
초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새로운 종교를 좇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를 배척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비슷하게 이해했다.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 안에 존재하는 이단적 분파였다. ...1세기의 유대교는 단일한 조직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분파와
이론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은 이를 단지 또 다른 분파 정도로 간주하였다. ...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단 종파가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훌륭한 유대인들에게 이단이 되도록 종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독립을 상실했던 이유가 자신들의 선조의 전통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새로운 이단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분노가 다시 이스라엘에 임하시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하였다. ... 기독교인들은 로마 당국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
따라서 로마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당시 일어나고 있던 문제가 유대인들 사이의 내분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pp.56-57)
이방인들 사이에 기독교 개종자가 증가함에 따라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차이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또한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나타났던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열기를 띄어가는 것에 기독교 신자들-특히 이방인들-은 자신들과 이러한 독립운동 사이에 더 큰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로마 당국은 점차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판이한 종교임을 깨달아가기 시작하였다. 네로 시절부터 콘스탄틴의 회심에
이르는 2세기 반에 걸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의 기반에는 이러한 새로운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유대인들이 더 이상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되자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기독교가 로마제국민들 과반수의 추종을 받는 공식 종교가 되자 기독교 신자들
속에서는, 유대인들을 버림받은 민중으로 선포하고 이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p.58)
제6장
2세기의 박해
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네로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1세기에는 이러한 박해의 세부적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2세기부터는 박해에 관한 문제를 다룬 기록들이 증가하며, 순교에 관한 기독교
신자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여러 순교자들의 체포, 재판,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기록한 '순교자 행전'이다. ... 두번째로 우리들은 또 다른 기독교 저술들을 통하여 순교에 관한 기독교 신자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은 노령의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순교의 형장으로 이송되어 가면서 남긴 일곱개의 서신들일 것이다. ...
플리니와 트라얀 사이에 교류된 서신도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p.67-68)
역사를 요약해 본다면, 2세기 전체에 걸쳐
기독교 신자들은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비록 제국 전역에 걸쳐 계속 핍박을 받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신앙 생활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
것이었다. 제국의 일반적 대기독교 정책이 트라얀의 그것을 좇았으므로 신자들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만약 누구든지 이들에
관한 악한 소문을 믿게 되면, 신자들은 곧 고발당하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소문들이 허위임을 증명하고 이교도들에게 올바른 기독교의 모습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곧 변증가들의 임무였다. (p.82)
제7장 신앙의 수호
수많은 교양있는 당대의 지식층 이교도들이 기독교를 미워한 것은 순전한 지적 문제가 아니라 계층간의 오해에도
뿌리박고 있었다. 소위 지식있고 교양있는 자들은 무지한 기독교 신자들이 차마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들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기독교라는 것은 결국 그 교훈을 헬라나 로마인들로부터가 아니라 유대인들로부터 이어온 야만인들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p.87)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로부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들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었음으로 불가불 신앙과 이교 문화 사이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로마신들에 대한 예배 의식과 이에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부인해야 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고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했던 국가 의식들에 불참했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또한 평화주의적 확신에서 많은 신자들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고전문학의 연구에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고전문학에서는 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당당하되 온갖 부도덕을 저지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며 이러한 생활 태도에서 어긋나는 일체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이러한
배교자들을 또한 부인하실 것이었다. 그런데 모든 신자들은 우상숭배에는 합의하였으나 고전 이교도 문화에 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 따라서 고전문화의 가치에 관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두가지 서로 상반되는 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pp.90-91)
결론적으로 변증가들의 저술은 초대 기독교 신자들이 처했던 상황의 갈등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각종
이교를 거부하는 동시에 이러한 이교를 통해 귀중한 문화가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들은 철학자들을 통해 진리를 찾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기독교 계시가 이보다 우월함을 주장하였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는 동안에도 신자들은 계속
황제를 위해 기도하고 로마 제국의 평안을 빌었다. (p97)
제8장 신앙의
결정
'신약전서'라 불리는 부분에 있어서는 우선 복음서들이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처음 교회들이 정경 가운데 한 개의 복음서 이상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후기에 들어서는 4복음서 가운데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는 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초대 기독교인들 역시 이러한 차이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한 가지 이상의 복음서를 사용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곧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의 도전(이 부분은
100-105쪽에서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할 것)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었다.(pp.106-107)
...4세기 후반에는 정확하게 어떤
책들이 신약 정경 속에 포함되는지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성립되었다. ...여러 이단들에 대한 교회의 반응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현재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기본 골격은 아마 150년경 로마에서 이루어진 듯 하다. 당시에 이것은 '신앙의 상징'이라 불리웠다. ...이는
황제나 장군들이 그의 사절들에게 주는 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수신자들이 이를 통하여 진정한 사자를 식별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편찬된 '상징'을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당시 유행하고 있던 여러 이단들, 특히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주의에 대항하여 진정한
신자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였다. 누구든 이 신경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는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온주의자일 수
없었다.(p.108)
제9장 교회의 스승들
2세기 말에
나타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은 또다른 반응을 요구하였다. 이들 이단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리체계를 마련하였으므로 교회 일반도 이에
대해 정통 신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이단들의 이론 체계가 너무도 포괄적이고 거대하였으므로 기독교 교사들의 응답 역시
그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전반적인 기독교 진리의 해석을 시도하는 저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그리고 오리겐등의 작품들이 바로 이것이다.(p.116)
이레니우스는 무엇보다도 목회자였다. 그는...교인들을
기독교 생활과 신앙 속으로 이끌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오직 두 개만 현재까지 남아있으니 곧 '사도적 신앙의 증명'과 '소위 지식에 대한
반박'인데, 후자는 흔히 '이단을 반박함'이라는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전자를 통해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강해한다. 후자
속에서는 영지주의를 반박한다. 이 두 저서를 통해 나타난 그의 목표는 그가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신앙을 자기 자신의 의견에 따라 가감함이 없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레니우스의 저술은 2세기 말 교회의 신앙 상태를 보여주는 뛰어난 자료가 된다. ... 우리는 이레니우스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이 역사를 통해 전개된다는 감격적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초점은 성육신이다.(p.117,
121)
클레멘트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박물관, 혹은 뮤즈 신들의 신전에는 도서관이 붙어 있어 오늘날 대학들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고, 각양 각색의 학문의 분야에 봉사하는 학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회합하였다. ...이 도시는 혼합절충주의의 유행을 타고 있었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한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p.122)
터툴리안은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하였다.
...하나님이 전지 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 아니라 위험한 작업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셨는가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고,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무용하고 위험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p.129)
터툴리안은 아마도 몬타누스파의 엄격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법률가로서의 그는 항상 모든 사물들이 질서를 이루고 있는 완전한 체제를 추구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계속되는 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시 교회가 곧 성경의 새로운 시대에 의해 대체될 중간적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 ...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자가 된 후에도
교리적 오류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아마도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일 것이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그후 삼위일체 및 기독론 논쟁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되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였다.(p.131)
오리겐의 저작은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그는 우선 여러 성경 번역판들이 서로 다름에 착안하여 '헥사플라'를 편찬하였다. 헥사플라는 여섯 개의 컬럼으로 구약을 편집한 것이다. ...
오리겐은 이 방대한 저술외에도 성경의 여러 책들에 관한 주석들을 썼으며, 이미 인용한 바있는 '켈수스를 반박함'이라는 변증서, 그리고
'제일원리들에 관하여'라는 조직신학서도 저술하였다. ... 오리겐의 신학적 경향성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즉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하던 철학 사조였던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p.134)
제10장 3세기의 박해
2세기 말은 비교적
평화를 향유하였다. 안으로는 내란에 시달리면서 밖으로는 야만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바빴던 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둘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와 신들에게 예배하기를 거부할 때에는 처벌하되 적극적으로 색출할 필요가 없다는 트라얀 황제의 명령이 계속 수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박해는 지역적이고 간헐적이었다. 그러나 3세기에 들어 사태가 변화하였다.(p.139)
황제(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할 필요를 느껴 혼합절충 정책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솔 인빅투스 ,즉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였다. 바로 이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다른 신들을 허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의 명령은 곧 그의 종교 혼합
정책에 반발하였던 두 집단들과 격돌할 수밖에 없었으니 다름아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었다. ...황제는 이 두 종교들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기독교나 유대교에 개종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당시까지 시행되고 있던 트라얀의 법령에 추가되어 수행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개종자들과 혹은 전파자들을 겨냥한 보다 혹심한 박해가 가증되었다. 따라서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해졌던 서기202년은
기독교 박해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p.140)
데시우스의 목적은 기독교 신자들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을 숭배하는 것에
있었으므로 실제 순교자들의 숫자는 미미하였다. 그러나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하고 각종 회유와 협박과 고문을 통해 신앙의 부인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박해의 결과 교회 내에 새로운 칭호가 생겼으니 곧 '고백자'라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체포되어 신앙을 끝까지 지킨
자들은 대부분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데시우스에 의해 수행된 정책으로 말미암아 잔인한 고문 속에서도 계속 신앙을 지켰으나 순교의 면류관을 얻지
않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신앙을 지키고 생존한 인물들에게 '고백자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으니 이들은 물론 다른 신자들에게 높이
존경받았다.(p.147)
...교회 앞에 던져진 큰 문제는 과연 '변절자'즉 박해 기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저버렸던 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 교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사건의 핵심은 결국 순수성, 혹은
용서하는 사랑 중 무엇이 교회의 특성으로서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엇다. (p.148, 151)
제 11장 신자들의
생활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연구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자료들이 당시의 상황 전체를 공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p.153)
...교양있는 이교도들의 안목으로 볼 때에 기독교 신자들은 말할수 없이 비천한
계층이었다. 이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들의 다수가 사회 하류층 출신이었다는 증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 도미틸라와 퍼페투아처럼 비교적 상류 계층 출신의 기독교 신자들도 있었으나, 보다 교육과 지식 정도가 낮은 기독교
신자들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p.154)
...성만찬을 중심으로 했던 처음 예배는 고난의 금요일이 아니라 희열의 부활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열리고 있었으므로 그 주인공이 되는 기독교 신자들은 함께 모여 이를 축하하였던 것이다. 그 때부터
역사 전체에 걸쳐 기독교회는 성찬을 통해 예배의 정수를 찾았다.(p.156)
아마도 2세기부터 성찬 예배 의식은 두 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우선 처음에 성경봉독과 간단한 해석, 그리고 기도와 찬양이 1부를 이루었다. ...그후에 평화의 입맞춤으로 시작되는
성찬식이 거행된다. ...초대 성찬식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오직 세례받은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풍습은 신자들의
무덤에 모여 성찬식을 거쟁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카나톰, 즉 지하 묘지가 등장하는 이유이다. (pp.158-159)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지켰던 가장 오래된 축일은 1월 6일의 주현절(Epiphany)이었다. 원래는 주현절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그후, 특히 라틴계 서방에서 12월 25일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12월 25일은 원래 이교조들의 축제일로서 콘스탄틴 황제 이후
크리스마스로 대체되었다. ....성찬 외에도 세례식 또한 기독교 예배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점차 교회 내에 이방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세례식을 위한 교육과 준비를 행할 기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세례 준비 기간으로서 3세기 초부터 실시되었다. 이러한 세례
준비 기간은 대개 3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세례 준비자들은 기독교리에 관한 교훈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생활 속에서 증명하여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세례받기 직전 이들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세례를 받고 세례자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p.161)
2세기
초의 교회에는 세 가지 지도자 직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곧 감독, 장로 그리고 집사이다.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에 걸쳐 발생한
이단들에 대응하여 감독들의 권위와 사도 전승 이론이 강조되었다. 교회 내에 이방인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단들의 위험도 더욱 커졌으며 이
때문에 감독들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2세기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가 그 권위를 중앙집권화하면서, 이러한 과정의 한
결과로 여성들은 교회 지도층에서 이탈된 것으로 보인다.(pp.163-164)
또 한 가지 기독교 초대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신약 시대 이후에는 바울이나 바나바같은 순회 전도자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 시대에 나타난 폭발적 복음의 전파는
전문인 전도인, 혹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업이나 공무를 위해 여행해야 했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우선 도시들에 먼저 퍼져나갔으며, 농촌 지역에 대한 전도는 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오랜
시절이 지난 후에야 기독교는 비로소 농촌들과 변경에까지 퍼져나갔다. (p166)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들 전용의 묘지들과 교회들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예술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예술은 대부분 지하 묘지나 교회의 벽에 나타난 벽화들이다. 또한 보다 부유한 기독교
신자들의 유해를 담은 석관의 장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p168)
결론적으로 말해 고대 기독교회는 만왕의 왕의 상속자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였던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쁨은 그들의 예배, 그들의 예술, 그들의 공동
생활, 그리고 그들의 용기있는 죽음들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의 질박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필코 그들이 처했던 어두운 부정의와 우상 숭배들을 파괴하고야 말 새로운 빛의 소망 속에서 기쁨을 잃지
않았다. (p.168)
제12장 대박해와 최후의
승리
콘스탄틴은 제국 서부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 콘스탄틴의 개종이 기독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틀림없다. 이와 함께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스스로를 가르켜 목수의 종들이라 부르며 어부들과 노예들과 국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던 범죄자를
영웅으로 삼았던 인물들이 갑자기 제국의 영화와 권력에 둘러싸이게 될 때에 어떤 현상이 발생하겠는가? 이들이 과연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야수들과 고문들에도 굴하지 않던 인물들이 사회적 특권과 풍족한 생활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그 다음 세기의 기독교회가 직면해야만 했던 도전들이었다. (p.178)
제13장 콘스탄틴
아마도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진실로 믿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해가 곧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기독교 신자들의 경험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p.194)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한 가장
직접적 결과는 박해의 종식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은 항상 박해의 공포 속에 살았으며 많은 이들은 순교를 꿈꾸고 있었다.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이러한 공포와 소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콘스탄틴 이후 등장하였던 몇명의 이교도 황제듥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교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서 많은 이들이 소위 '어용신학'(Official theology)이라 부르는
경향이 나타난다. 황제가 교회에 베풀었던 은혜에 감격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콘스탄틴이야말로 역사속에서 교회와 국가를 한데 묶어 그 양성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반대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들은 황제들이 스스로
기독교 신자임을 선언하고 이러한 이ㅠ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교회에 모여드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커다란 배교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사막으로
은거하여 이곳에서 명상과 금욕의 생활을 했다. .. 또한 콘스탄틴의 개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일부 인사들은 이제 제국 교회가 되어버린 기존
교회와의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은둔이나 분파의 길을 택하는 대신 교회에 계속 남아있던 이들 가운데서는 무엇보다도 지적 활동이
꽃피었다. (pp.198-199)
콘스탄틴의 시대까지 기독교 예배는 상당히 소박하였다. 처음에는 신자들 개인의 집에서 모여
예배드렸다. 그후 로마의 지하묘지등 공동 묘지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3세기 경에는 따로 예배만을 위한 건물들이 나타났다. ... 기독교 예배가
황실의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던 향불이 기독교회 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상복을
입고 의식을 주관하던 목회자들이 보다 사치스런 예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 경의를 표시는 여러 몸짓들이 기독교 예배의 일부가 되었다.
... 결국 일반 회중들은 예배에 있어서 보다 수동적 역할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p.200)
제14장 공식적 영향,
혹은 어용신학
유세비우스는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교회사'를
저술하였다. 그가 후에 다시 개정 증보한 이 작품이야말로 후대 기독교 사가들에게 비할 수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없었다면 고대 교회사 자료의 대부분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p.209)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의 군신도, 아주 가까운 친구도
아니었다. 콘스탄틴이 콘스탄티노플, 혹은 제국의 다른 지방에서 정사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가이사랴 및 인근 지역에서 교회를
위해 바쳤다. 양자의 접촉은 간헐적이며 단기간에 걸친 것이었다. 당시 유세비우스는 많은 동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황제는 그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또한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인물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황제를 지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그의 교회사 최종판은 단지 고대 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난 여러 사건들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특별히 로마
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본 인간 역사의 궁극적 목표가 곧 기독교임을 보여 주기 위한 변증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p.212)
...중요한 것은 유세비우스 작품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형성되면서 전통적 주제들 가운데
일부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 신학이 어떻게 적응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세 가지 보기들이 있다.
첫째로, 초대 교회와 신약 속에는 복음이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므로 특히 부유한 자들은 이를 받아 들이기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콘스탄틴으로 부터 시작하여 부의 가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당시
건축되고 있던 화려한 예배당의 모습을 기쁨과 자랑 속에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들과 여기서 비롯된 예배 의식에 의해 의해 세속
귀족층과 흡사한 종교 귀족층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의 간격은 넓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유세비웃는 자기가
발전시킨 역사의 구조 때문에 초기 기독교 교훈의 근본적 주제 가운데 하나를 상실케 되었으니 이는 곧 하나님 왕국의 도래이다.
(pp.214-215)
제15장 수도주의 운동과 반동
교히가 세상 권력에 야합하고 사치와 허식이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되며 사회 전체가
좁은 문을 넓은 길로 만들고자 할 때 어떻게 신자는 자신이 처한 시대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사치스러운 저택에서
호의 호식하고 순교를 통한 신앙의 증명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 신자들은 어떻게 자기의 머리 둘곳도 없었던 가난한 인물, 곧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많은 이들은 수도생활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p.218)
수도원주의는 교회 안과 밖에서 모두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 내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주님을 보다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는 바울의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
몇몇 외부적 영향들도 기독교 수도원주의 운동을 보다 발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몇몇 고전 철학파들은 육체야말로 영혼의 감옥, 혹은 무덤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육체의 제한성을 능가해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pp.219-220)
이들의 재산은 최소한의
의복과 깔고 잘 거적에 불과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교만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서적의 소유를 배격하였다. 이들은 기억에만 의존하여 성경 전체,
특히 시편과 신약을 서로 가르쳤다. ...이러한 사막 생활은 거대한 도시에 살면서 특권과 권력을 누리던 감독들로 구성된 교회의 계급 조직과는
맞지 않았다. ... 이때 콘스탄틴의 개종이 가져온 변화의 하나로 기독교 목회자들을 '사제'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수도사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대부분의 감독들이나 교회 지도자들보다 성결하였으므로, 공식적 교회 지도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올바른 기독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사들 대부분이 무지하였고 열광주의로 쉽게 흘렀으므로, 이들은 결국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은자들을 조정하였던 보다 교육받고, 권력있고, 교활한 인물들에 의해 이용되기가 쉽상이었다. 결국 5세기 이런 경향은 폭도로 변한 수도사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자기들이 정통 교리라 생각했던 이론을 교회에 강요하게 되는 데까지 이른다.(pp.227-228)
점차 홀로 거주하는
수도생활의 모습은 공동 생활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 이러한 공동체에서 수도생활의 모습은 공동 생활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 이러한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자들 역시 스스로를 '수도사'라 불렀다. 이는 원래 고독하다는 의미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닌 세속으로 부터 분리된 생활을 의미하게 되었다.
... 파코미우스는 그 형태를 결정적으로 완성시킨 인물이다.(p.228) 파코미우스 수도사들의 일상 생활은 노동과 예배로 구성되어있는데,
파코미우스는 가장 힘든 일을 직접 수행함으로써 남은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p.230)
수도 운동의 이상을 확장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것은 이집트 사막의 생활을 답습하였던 은자들이 아니라 이러한 수도 운동의 모습 속에서 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장점과 가치를
발견하였던 일단의 감독들과 신학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초기 이집트 수도 운동은 교회의 계급 제도와는 별개로 혹은 이에 대치하는 개념으로
존재하였으나 결국 그 가장 큰 효과는 바로 이러한 계급 체제 속에 남아있던 인물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p.233)
수도원적
이상을 일반화시키는 데 가장 뛰어난 모범을 제공한 것은 누구보다도 투우르의 마틴이다. 설피티우스 세베루스가 저술한 '성마틴의 생애'는 수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이었으며 서방 교회 수도원의 모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였다.(p.234)
마틴이 사망하자 많은 이들은 그가 성자였다고 확신하였다. 그이 명성과 모범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은 진정한
감독이라면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고 화신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 감독들의 세속성과 사치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였던 수도주의 운동이 결국 성직
제도가 추구해야 하는 이상으로 남게 된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도 운동 자체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처음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들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피신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도주의 운동은-특히 서방에서는-교회의 구제와 선교를 담당하는
도구가 되었다.(p.237)
제16장 분파주의적 반동 :도나티즘
수도 운동의 길을 택한 이들은 사막으로 찾아감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데 반해 다른
이들은 기존 교회가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선포하고 오직 자기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집단들이 여럿 있었으나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것은 도나티스트(Donatists),즉 도나투스주의자들이었다.도나투스파논쟁은 변절자들에 관한 처리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인 또 다른 사례였다. (p.239)
도나투스파의 분리의 진정한 원인는 무엇이었을까? ... 분파의 직접적
원인은 과연 박해시에 신앙을 포기한 자들을 어떻게 취급해야할까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도나투스주의자들에 의하면 카이실리안에게 안수했던 세
감독들 가운데 하나는 배반자이었다. 따라서 카이실리안의 성직 임명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다. 카이실리안과 그의 지지자들은 문제의 감독이 배반자가
아니었으며, 설령 그가 배반자라 할지라도 그가 행한 성직 임명 자체는 계속 유효하다고 응답하였다. 따라서 이 문제의 감독이 과연 배반자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적 상황과 함께 과연 자격없는 감독에 의해 실시된 안수, 혹은 성직 임명이 유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행위의 유효성 여부는 이를 시행하는 감독의 자격과 가치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pp.241-243)
(위의 문제외에 고려해야하는 것이 더 있다) 두 집단들이 사회적, 그리고 지리적 분계선을 따라
분리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카르타고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카이실리안과 그의 지지자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보다 서쪽의 누미디아와
모라타니아지방에서는 도나투스파들이 보다 우세하였다.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는 카르타고 및 인근 지역에 비하여 보다 덜 로마화되어 있었다.
로마화 되지 않은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조상 전래의 언어와 전통들을 유지하고, 로마 및 이와 관련된 것들을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 세력으로
보았다. 반면 카르타고 시내에는 이미 상당히 라틴화된 계층의 지주들, 대상인들, 장교들이 존재했으며...이들에게 있어서는 로마와 아울러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기독교는 누미디아인들과 총독령 아프리카의 하층
계급 사이에 깊이 침투하고 있었으며 이보다는 못하지만 모리타니아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동시에 보다 소수의 카르타고 내 로마화된
계층에 속한 인물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 내에도 사회 일반에서 볼 수 있었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개종한 인물들은 그들의 기존 사회적 접촉을 단절하였으므로 교회 내에서의 갈등과 긴장은 예상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등장과
아울러 교회가 평화를 누리게 됨에 따라 이 상황은 극변하였다. ...훌륭한 로마 시민인 동시에 충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상류층 인사들은 이 현상을 긍정적 발전으로 이해하였다. ... 그러나 보다 하류층 출신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사건의 전재를 교회가 부패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였다. ... 새로이 개종한 유력 인사들이 이교신들을 섬기고 있을 때, 소위
무식하고 무지하였던 누미디아인과 모리타니아인들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pp.244-246)
...도나투스주의가 처음부터 의식적인 정치적 움직임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초기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제국이 아니라 '세상'에 대적하고 있었다. ... 그런데 340년 경 도나투스파들 가운데 "써쿰켈리온"이라 불리우는 집단이
나타난다. ...이들은 열광과 맹목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순교자들의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죽음은 없다고
확신했으며 이제 옛날 찾아볼 수 있던 박해가 사라졌으므로 순수한 신앙을 더럽히는 전쟁에서 죽는 것 또한 순교자들이라 생각하였다. ....
써쿰켈리온들은 분파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도나투스파 지도자들은) 직접 전투에 투입할 인력이 필요할 때면 바로 이 써쿰켈리온들에게
호소하였다. ... 이에 대응하여 로마 당국 역시 폭력을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을 설복하고,학살하고, 무력으로 점령하는 박해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써쿰켈리온들이야말로 당시 주민들 사이에 있던 깊은 불만의 표현이었으며, 제국은 이 움직임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pp.246-247)
결론적으로 말해 도나투스주의 운동-특히 그 극단적인 모습인 써쿰켈리온들=은 콘스탄틴의 개종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상황들에 대항한 반응이었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운 질서를 환영한 반면, 다른 이들은 사막으로 도피해 갔으며,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제 제국의 둥지로 변한 교회의 존재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이들이 교회본질과 성례의 유효성에 관해 던진 심각한 신학적
난제들은 다른 기독교 신자들, 특히 성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깊이 씨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p.248)
제17장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종교회의
기독교 역사는 시초부터
신학적 논쟁들로 점철되었다. 바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후 영지주의적 사변에 관한 결정적
논쟁들이 야기되었다. 시프리안이 카르타고의감독으로 있던 3세기 논쟁의 초점은 변절자들의 복원 문제였다. ... 초기 시대에 이러한 논쟁들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샐틈없는 논리와 생활의 성경을 통해서였다. 당시 세속당국은 교회 내의 신학적 논쟁들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므로 논쟁에 관련된 당파들은 논쟁에서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세속 당국에 호소하거나, 신학적 패배를 세속 당국과의 연합을 통해 번복하고자
시도하지도 않았따. 그러나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사태가 변화하였다. 이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권위를 동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제국은 콘스탄틴이 제국을 결속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를 소망하였던 교회의 통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곧 권력을
사용하여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학적 문제에 동의하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pp.249-250)
아리우스 논쟁의 기원은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던 신학적 발전에서 찾아야만 한다. 실제로 이 논쟁은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여러 학자들의
사역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던 형태의 직접적 결과였다. 초대 기독교 신자들이 제국전체에 그들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을 때 이들은 눈에 보이는 신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무지한 무신론자들이라고 취급되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일부 학식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많은 이들에 의해 지혜자로 추앙을 받고 있던 고전적 철학자들의 권위에 호소하게 되었다. ...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소개한 지존의 존재를 신앙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란 바로 이를 가르키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 이는 또한 매우 위험한
이론이었다. 즉 자신들의 신앙과 고전적 철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밝히기 위한 열심 때문에 신자들은 선지자들과 기타 성경 저자들의 방법이
아니라 플라톤, 플로티누스, 기타 철학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p.251)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불변이고 고정적인 지존의 존재라는 고전적 개념을 조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 알레고리 해석은 매우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무언가 '가치 없는 방법으로'표현할 때마다
이러한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 이지적으로 이 방법은 많은 지성인들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미흡한 바가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 생활은 인격적 하나님과 직접관계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 위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존의 존재에
관한 철학적 개념과 성경의 증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 이는 곧 저스틴,클레멘트,오리겐등에 의해
발전된 로고스의 교리이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비록 지존의 존재(성부)가 불변이요, 고정적인 것은 틀림없으나 동시에 사상 및 인간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존재, 즉 로고스, 말씀-혹은 하나님의 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스틴에 의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곧 하나님의 로고스가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p.252)
가장 중요한 논쟁의 초점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느냐는 것이다. ... 알렉산드리아는 말씀께서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아리우스는
말씀이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 이는 별로 큰 차이가 아닌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말씀의 신성이 여기에 달려
있다. (p.254)
원래 로마에서 기원하였던 "사도신경"(Apostles'Creed)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부터 비롯된 서방에 기원을 둔 교회들 사이에서만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반면 니케아 신경은 이러한 서방 교회들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 즉
그리스 정교,러시아 정교등에 의해서도 인정되었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은 무엇보다도 성자, 혹은 말씀-로고스-이 피조물이거나 혹은 신성에
있어서 성부보다 떨어진자는 개념을 배격하여야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교회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호모우시오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보통 "동일본질"이라고 번역된다. 이 단어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또한 그후 니케아 신경에 대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체의 구별을 부인함으로서
성부 고난설을 시사하는 듯이 생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 교회 문제에 세속적 처벌을 첨가한 행위는 그 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리의 정통 여부 문제에 관하여 세속 권력이 개입한 전례를 남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p.261-262)
제18장 이교도들의 반동 : 배교자 줄리앙
제19장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의 출생에 대한 점들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아마도
나일강 유역의 조그마한 촌락 출신이었던 듯 하다. 그가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언어인 콥트어를 사용하였고, 그의 안색이 콥트인들처럼 검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아마도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거듭 정복되었던 콥트족의 일원이었으며 이집트의 하층 계급 출신이었을 공산이 크다.
(p.274)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하기 이전 이미 '이방인들에 대항하여'와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등 두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를 읽어보면 그의 신학이 가지는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클레멘트나 오리겐의 사변적 경향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
작품들은 전체 인간들의 역사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되는 사건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깊은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 속에 인간으로서 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 이것이야말로 아타나시우스가 이해하였던 기독교의 진수였다. ... 말할 것도 없이
역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의 초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아리우스주의야말로 기독교의 진수를 위협하는 심각한
오류라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 아리우스 논쟁은 단지 복잡한 신학 문제 이상의 것이었다. 바로 그 가운데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
자체가 걸려있었다. (pp.275-276)
결국 A.D.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소집된 회의 석상에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구별을 무시하지 않는 한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가르켜 "동일 본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동시에
마치 세 신들을 주장하는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한 "세 본질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해의 기반 위에서
대부분의 교회들은 니케아 종교회의를 지지하게 되었으니, 니케아 회의의 교리는 결국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소집된 제2차 세계종교회의에서
비준되었다.(p.284)
제20장 위대한 캅파토키아인들
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제21장 밀란의 암브로즈
제22장
존 크리소스톰
우리들은 크리스토톰과 암브로즈의 생애를 비교하면서,동서방교회의 미래가
서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암브로즈는 당대의 가장 유력한 황제에 대항하여 승리한 반면, 크리소스톰은 심약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배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 때부터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방 교회는 제국의 약화에 반비례하여 점차로 더
강성해져갔다. 반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는 제국이 그 후 1000년 이상 그 힘을 유지한다. 옛 로마 제국의 후예인 동방 비잔틴 제국은
세월에 따른 그 세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통제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테우도시우스가 라틴어를 사용하는 감독에게 무릎을 꿇었던
마지막 서방 황제가 아니었듯이 존 크리소스톰이 동방 황제의 손에 의해 유배의 길을 걸었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감독도 아니었다.
(p.316)
제23장
제롬
그는 정욕과 유혹을 잊고 자기의 마음을 다른것으로 채우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괴상스러운 알파벳과 문법으로 구성된 이 언어는 그의 눈에 야만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이 언어로 쓰여진 것을
보면 무언가 성스러운 면이 있을거라 스스로를 달래었다. ...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는데 이곳에서 사람을 잘 볼 줄 아는 눈이 있던 다마수스의
감독이 그를 자신의 개인 비서로 임명하고 연구와 저술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다. 또한 그후 제롬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 되었으며 후세인들에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작업을 처음 권유한 것도 그였다. 그 작업은 곧 성경의 새로운 라틴어 번역이었다. (p.319)
이
때에는 이미 다른 번역판들도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히브리 원어의 헬라어 번역판인 70인역에 기초하고 있었다. 히브리 원어의 헬라어 번역판에
기초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제롬은 히브리어를 직접 번역하기로 한다. 제롬은 비록 방대한 서신 왕래에 시간을 빼앗기고, 로마 세계를 흔든
재난에 의해 작업을 중단당할 때도 있었으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결국 이 방대한 작업을 완수하였다.(p.322)
흔히 불가타로 알려진
제롬의 번역판은 결국 전체 라틴어 사용 교회에서 표준 성경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제롬이 뜻한 바처럼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는
못하였다. ...새로운 번역은 사람들이 좋아하던 일부 구절들을 바꾸었고,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은 과연 누가 제롬에게 성경의 표현을 좌지우지할
권위를 주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은 70인역의 번역은 72명의 서로 독립된 번역가들이 번역이 완성된 후 이들을 맞추어
보고 서로가 완전히 일치하였다는 전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전설 때문에 70인역이 히브리 원문 만큼이나 영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어
왔었다. (p.322)
제24장 히포의 어거스틴
어거스틴의 초기 저서들 가운데 많은 책들은 마니교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주로 성경의 권위, 악의 근원, 자유 의지의 문제 등을 취급하고 있다. 마니교에 대항한 논쟁에서 의지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마니교 신자들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는 대표자가 되었다.(p.336)
어거스틴이 반박해야 했던 또 하나의 이론은 도나투스주의였다.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과연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 존경받을만 하지 못한 감독들이 집례한 성직 임명이 유효한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교회의 어떤 예식도 이를 집전하는 인간의 도덕적 합법성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응답하였다. ...그가 감독으로서의 인품과 신앙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도 예식 자체는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서방 교회의 대부분은 어거스틴의 동의하였으며 교회와 성례의 유효성에 관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그 후 서방 교회의 규범을 이룬다. ...어거스틴이 정당한 전쟁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 것도 도나투스 판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다.
... 그러나 어거스틴이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 작품들을 남긴 것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대적한 논쟁에서였다. (pp.336-338)
제25장 한 시대의 종말
콘스탄틴 대제가 시작한 제국 교회는 그후에도 비잔틴 제국
안에서 1000년을 존속한다. 그러나 서방에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 수세기가 지나서야 도로와 건축물과 상하수도 시설등 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 등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이 모든 분야에서 과거와의 연계성을 제공한 것은 교회였다. ...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회는 제국의 멸망에 따른 힘의 공백을 채웠다. 수세기 후, 서방에서 다시 제국이 성립하게 된 것도 교회의 손에 의해서였다. 교회가
대응해야할 새로운 도전들도 나타났다. 침략자들의 대다수는 이교도였으므로 피정복민들은 정복자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게르만 전통 뿐만 아니라 고전적 그레코-로마 문화를 이어받는 새로운 문명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흔히 중세시대라고 일컫는 1000년의 기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pp.346-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