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여성단체연합 제 23차 정기 대의원총회 2015.2.26
< 특강> "시민운동, 그 새로운 상상"
이남곡(인문운동가)
우리는 반세기의 짧은 기간에 최빈국으로부터 세계경제 10위권의 나라로, 독재국가로부터 평화적 정권교체가 정착하고 있는 민주화된 나라로 변모하였다.
사실 이런 성과들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행복도(幸福度)는 OECD 국가 가운데서는 최하위권이고, 여러 가지 최악 수준의 인간존엄지수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 원인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양극화의 심화와 실업, 천민자본주의의 물신지배, 경쟁이 주는 스트레스, 개인중심의 민주주의가 나타내는 이기주의의 차가움 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의 민주화, 복지제도의 확충, 물질적 수단의 확보 등이 요청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 또한 명백해 보인다.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이 바뀌지 않으면 ‘따뜻한 사회’로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 핵심은 반생명적(反生命的) 문명을 변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호의 참극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초기에 하나로 되었던 ‘거룩한 마음’이 편가름의 블랙홀에 빠져 안갯 속으로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생기지 않으면 나라가 망(亡)할지도 모른다.
사회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 있다.
국가(정치), 시장, 시민사회가 그것이다.
그런데 정부나 시장(市場)에 맡겨서는 불안하다.
이제 현대의 의병(義兵)이 출현해야 할 것 같다.
다만 구한말의 의병이 망국의 위기에 신식병기로 무장한 외부침략자들에게 열악한 무장으로 목숨바쳐 싸웠다면, 현대의 '의병'은 ‘돈이 지배하는 차가운 사회’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따뜻한 사회’로 나라의 기틀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이 의병의 무장(武裝)은 '사랑'이며, 이 의병의 용기(勇氣)는 '기쁨'이다.
시민운동이 의병을 일으키는 운동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현대의 의병은 저항을 넘어 주체로 되는 운동이다.
시민운동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본다.
1. 저항-독재와 부패, 특권과 차별에 대한 저항
우리 민주화과정의 특징의 하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이루지 못한 조건에서 수입된 민주주의가 그나마 1960년 4월과 1987년 6월을 거치면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뿌리내렸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이 시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저항 주체로서의 시민’의 형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재, 부패, 특권, 차별 등에 대해 저항하는, 즉 국가 대 국민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가 발상(發祥)한 유럽의 경우 오랜 과정을 통해 ‘시민’이 형성되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진정한 주체로서의 ‘시민’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빠른 역사의 진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민주주의가 풀어야 할 과제로 되고 있다.
‘저항 주체’로서의 시민은 지금까지의 제도의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에는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하였지만, 문화로서의 민주주의나 자치능력을 갖는데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수직사회로부터 수평사회로 이행하는데, 그 하드웨어는 많이 나아갔지만 소프트웨어는 그다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 괴리(일종의 문화지체)가 많은 문제들을 나타내고 있다.
저항주체로서의 시민 또는 시민운동은 여전히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어떤 선 아래로 후퇴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침체 후퇴하기 쉽고, 계속 저항의 형태로만 부침(浮沈)할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시민 주체로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면에서 진전이 있어야 한다.
2. 책임-진정한 주체
제도는 수평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에도 의식은 여전히 수직사회의 그것으로 있다.
자신이 갑을 관계에서 을(乙)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잘 보면 자기보다 약한 대상에게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갑(甲)질을 한다.
늘 피해자의식이나 약자(弱者) 의식을 갖는다.
자신이 책임 있는 사람의 하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든 책임을 특정한 타자에게 투사해 버린다.
사실과는 맞지 않는 관념이다.
이것이 수평사회를 만들기 힘든 원인의 하나이다.
작년 세월호의 비극을 겪고 나서, 한 때 ‘잘 못했다. 용서해라’라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만든 사회의 일원(一員)인 자신의 책임도 통감하는 심정이 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런 마음은 옅어지고 말았다.
물론 책임의 경중은 있을 수 있다.
부패와 부정을 직접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물신(物神)지배의 차가운 사회를 만들어 온데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투사해 버리고, 자신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유체(遺體)이탈 사고’다.
내가 빠져 있는 것이다. 주체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시스템을 띄우고 있는 물이다.
시민의식이 이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주체로 되는 길이다.
3. 관용-수평적 관계
저항의식은 억압이나 수탈에 대항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지만, 수평사회를 만들어가는데는 부족하다.
수평관계에서 소통하고 의사결정을 해가며, 다수의 결정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자치의 능력이다.
이런 의식들이 성숙할 기회를 그다지 갖지 못했다.
모든 분야에서 이 자치능력이 자라지 못하면,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은 내용이 빈약하거나 왜곡된 모습을 띌 수밖에 없다.
‘대립’이나 ‘저항’에 익숙하다보니, 수평사회를 운영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관용’이 잘 안된다.
‘편가르기’가 유독 심했던 역사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이제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성숙한 민주 사회로 되기 힘들다.
그 바탕에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아무 근거 없는 비과학적 아집이 도사리고 있다.
흔히 똘레랑스라고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서(恕)’라고 하는 오래된 덕목이 있다.
이것이 수평사회를 만드는데 가장 핵심적인 시민의식으로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성(女性性)은 이 ‘서(恕)’와 통하는 점이 크다고 본다.
양보와 배려의 문화가 일상의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시민운동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공공성
우리 사회가 이기적인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는데다가,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공공성이 자라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있다.
공공장소(식당, 목욕탕, 공원, 거리 등)에서 제멋대로 하는 아이들을 ‘기를 키운다’는 부모들이 만들고 있다.
기를 키워서 자유로운 아이들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공성이 결여된 극히 부자유한 아이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권리는 주장하지만, 책임은 회피하고, 저항은 하지만 주위는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라는 것이다.
이제 그 바탕을 바꾸는 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공공성으로부터 멀어진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에 물들어 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떤 문화에 익숙해 있는지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일정한 속도를 지키고, 차간 거리를 유지하며, 경적을 울리지 않는 운전 습관만 가지게 되어도 그 속에서 공공성이 신장될 것이다.
특히 아이들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심층을 나타내는 단면이기 때문이다.
교육, 특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의 부모들에 의한 ‘공공성’을 신장시키는 것, 그것이 학교와 지역사회의 교육과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운동의 중요한 영역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5. 세계시민
우리 사회도 다문화 사회로 되고 있다.
지금도 나타나지만, 아마도 머지않아 이민(移民)이 많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심각하게 될 것이다.
타민족이나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이 변화하지 않으면 대단히 우려할만한 사태로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시민운동이 이 분야에서 심도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사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세계시민의식이다.
얼마전 노르웨이에서 아랍인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을 때, 노르웨이 사람들의 태도는 높은 시민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이 세계시민의식이다.
일본의 군국주의나 패권주의에 반대하지만, 일본의 시민과는 하나의 세계시민이다.
일본의 반성 없는 우경화에 한국과 일본의 세계시민들이 함께 연대하고 함께 반대하며,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인과 미국과 전 세계의 세계시민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 시민운동은 세계시민으로 성숙하는 운동을 자신의 중요한 역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상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귀한 기회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북 여성단체연합의 발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