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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15.1 km
소요 시간 6h 25m 1s
이동 시간 5h 59m 53s
휴식 시간 25m 8s
평균 속도 2.5 km/h
최고점 985 m
총 획득고도 575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3 - 계절의 반란
양산박
봄인줄 알았지 온갖 꽃이 피어나는
여름이 온다고 아우성쳤지 이젠
봄이 너무 짧다고 투정부렸지 언제부턴가
정말 그랬었어 지난주까지만 해도
봄꽃소식이 물밀듯 올라왔어 전국적으로
매화와 산수유는 이미 져버렸었어
그랬던 계절이 주춤거리네 꽃샘바람에
눈도 내렸어 봄꽃을 시샘하는듯
계절이 한걸음 뒷걸음치네 겨울저편으로
간신히 피어났는데 긴 겨울을 이기고
몸을 한껏 움추려본다 잠시동안만
아무것도 줄것이 없네 벌나비 찾아와도
사당역에 벚꽃이 만발했다
복수초와 현호색꽃을 본 지 한 달은 되었고 남쪽 섬진강가에서는 매화와 산수유 축제가 지난 듯 하다. 집앞 도로가에는 벚꽃이 한창이다. 갑자기 찾아온 봄꽃이 언제 질지 몰라 조바심이 났었다. 지난주까지 정말 봄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었다.
그런 날씨가 지난 금요일에 갑자기 차가와졌다. 약간의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떨어지고 강원산간에 5 cm 눈이 내렸다고 한다. 금요일 밤 봉갑리 천주교 수녀원길을 걷는데 뭔가 얼굴에 닿길래 벚꽃잎인줄 알았는데 눈송이였다. 그리고 토요일엔 찬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어대니 막 피려던 봄꽃들이 잔뜩 움추려드는듯 하다. 엄마와 누나들과 개심사에 갔는데 유명한 왕벚꽃은 아직 필 기미도 안보인다.
덕유산 휴게소 - 밤에 내린 눈으로 봄의 설경을 빚어 냈다.
일요일 산행복장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2주전의 복장을 그대로 챙겨입었다. 더우면 벗을 심산으로 패딩조끼에 고어텍스까지 3겹으로 무장하고 새벽 집을 나섰다. 버스를 기다리는 길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옷속으로 스미는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사당에서 버스를 타고 산행지로 가면서 기흥에 이어 두 번째 들린 곳은 덕유산 휴게소였다. 전에 두 번 들렀던 관촌주차장의 화장실 시설이 불편했던 것을 주최측에 얘기해서 변경한 모양이다. 휴게소에 내리기 전에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강원도에만 내렸을 것으로 생각했던 눈이 버스에서도 보일만큼 고속도로 길 옆으로 쌓여있는게 보인다. 휴게소에서 보이는 주변 산에도 하얀 눈이 덮여 있고 휴게소 조경으로 심어놓은 조팝나무꽃에도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절기상 청명이니 못자리를 준비할 시기인데 땅에 쌓일 만큼 눈이 내리는건 처음보는 풍경이다.
복성이재에 도착하여 산행채비를 갖춘다
산행 들머리인 복성이재에도 양지쪽에는 벚꽃이 활찍 피어 있는데 음지엔 눈이 쌓여 있다. 산행중에도 일찍 핀 진달래는 벌써 동상을 입어 검붉은 색으로 땅에 떨어지거나 아직 나무에 매달린 채 말라가고 있고 회잎나뭇잎도 얼었다 녹았는지 시들시들하다. 남쪽이라 봄꽃을 잔뜩 기대하고 갔지만 계절이 늦겨울에 머문 듯 하다. 철쭉으로 유명한 봉화산 철쭉도 꽃망울이 커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이고 간간이 만나는 진달래도 생장이 멈춘 듯하다. 조금 부지런떨며 일찍 피어난 꽃들은 갑작스런 한기에 깜짝 놀란 듯 땅에 떨어진다.
땅위에 낮게 엎드린 양지꽃은 추운날씨를 미리 감지했는지 꽃망울만 잔뜩 부풀려놓고 아직 터뜨리지 않았다. 제비꽃은 그나마 추위에 잘 견디는지 노랑제비, 흰제비 그리고 알록제비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복서이재에서 매봉까지는 짧은 오르막이다.
왼쪽 철망 너머에는 고사리 등 산나물을 재배하는 곳이다.
산행은 지난번 구간의 날머리였던 복성치에서 시작했다. 백두대간길을 걷는다는 부담감은 언제나 마음속에 담겨 있다. 힘을 안배하여 뒤쳐지지 않도록 일행을 따라가야 한다. 처음 매봉정상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왼쪽으로는 산나물을 재배하는 듯 제대로 된 밭은 아니지만 나무하나 없이 벌거벗은 야산이다. 등산로와 그 밭사이에 길게 울타리가 쳐져 있어 산객들의 무분별한 접근을 차단하였다. 매봉까지 올라가는 짧은 산길에도 음지에는 눈이 쌓여있고 땅에는 진달래꽃이 떨어져있다.
30분도 채 안걸려 올라선 매봉( 712.2 m )에서는 사방이 탁 트여 멋진 조망을 선사한다. 지난 1회차 구간에서 지나온 고남산과 앞으로 가야 할 봉화산 그리고 그 너머로 아득하게 덕유산자락도 빼꼼이 올라온다. 이 매봉에서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철쭉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곳이 철쭉군락지로 각광을 받게 된 사연에 대해 한대장의 설명이 적절한 것 같다. 그리 멀지 않은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의 삶은 가난에 찌들었었다. 난방과 밥을 짓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나무를 베어나르다 보니 나무는 클 사이도 없이 잘려버리고 또 이 곳 산골마을에서 주 수입원으로 삼는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 이렇게 타고난 산에서는 그 이듬해에는 여지없이 고사리와 취나물 등 산나물이 잘 자란다. 그러던 것이 주민들 생활도 조금 풍족해지고 무단 벌채나 산불에 대해 정부에서 규제를 하다 보니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 낮은 구릉 같은 야산에 철쭉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지자체에서는 이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보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봉에서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에서 짓재치재까지의 짧은 구간은 철쭉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어 등산로가 그 철쭉군락의 좁은 사잇길로 나있다. 이 짓재치재 왼편으로 조금 내려가면 큰 길이 나오는데 그 도로변에 커다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철쭉꽃이 필 때의 광경을 가이 상상할 만 하다.
봉수왕국전북가야
짓재치고개에서 봉화산쪽으로 조금 올라서자 조그만 전망대가 나타난다. 철쭉축제때 이곳에서 매봉쪽을 바라보면 철쭉꽃의 화려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전망대에 사람키보다 더 큰 돌을 세우고 비문을 적었는데 “봉수왕국전북가야”라 새겨져 있다. 보통 가야국이라 하면 대가야, 금관가야 등 경상남도 지역을 떠올리는데 전북가야라고 새겨 놓았으니 좀 이채롭다. 비의 뒷면을 보니 제작연도가 2017년 11월 25일이고 전북가야에 대한 간단한 설명문 밑에 전북도지사 및 각 군수의 이름이 적혀있고 맨아래 호남고고학회장의 이름이 적혀있다. 유추해 보건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가야문화재 발굴 및 역사 재조명 방침을 발표한 이후에 호남지역의 정치인들이 호남에도 가야문명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치적쌓기 행위로 보인다. 원칙적인 홍보활동이라면 적어도 고고학회장의 이름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는 전문위원들과 굳이 들어가야 한다면 정치인들의 이름이 들어가야 마땅할 것이다.
까마귀밥나무
생강나무꽃
양지꽃
이 짓채치고개에서 봉화산정상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가끔씩 소나무숲도 보이지만 대부분이 참나무, 층층나무, 물푸레나무 등 일반 낙엽교목이고 특히 북쪽에서는 볼수 없는 노각나무가 눈에 띈다.
봉화산( 烽火山 919.8 m )은 말그대로 예전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적의 동태를 알리는 봉화를 피우던 산이다. 주로 삼국시대 백제 신라간의 전쟁 때 이 봉화가 이용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나 그 이후에는 봉화를 대치하는 통신방법이 개발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밀집된 국경의 빈번한 침입과 왜구의 출현으로 그 중요성이 요구되던 봉화가 통일된 신라나 고려 그리고 그 이후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문서를 이용한 보고체계인 파발이 주요 통신수단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도 전국적으로 봉화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50여개 있다고 하니 그 당시 봉화의 중요성이 가히 짐작된다. 그러니까 요즘 문자와 동영상을 무선으로 주고 받으면서 영상통화도 하는 스마트폰이 생겨나면서 가정집에서 쓰는 유선전화와 공중전화가 급격히 사라져가듯이 통일정부에서 문자를 사용하는 파발서비스가 생겨나면서 제한적인 신호체계인 봉화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화산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앞으로 가야 할 길
봉화산 정상석
봉화대 -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원래 봉화산에서 피우는 연기나 불꽃신호가 멀리까지 전달되려면 사방으로 조망이 좋아야 하는데 이 봉화산도 그런 입지를 잘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이 곳에서는 멀리 지리산과 덕유산까지 조망된다. 이 봉화산은 북진방향으로 왼쪽에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경상남도 함양군 아영면의 경계를 이룬다.
봉화산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봉화산에서 광대치까지는 아주 평이한 능선길이다. 사진을 찍는다고 일행에게 조금 떨어져 뛰다시피 걸어가는데 얼마 안가서 넓은 공터가 나오고 조그만 정자도 있는데 우리 일행과 다른 팀이 모두 모여서 점심을 먹고가기로 하였다. 시간이 12시 30분쯤 되었으니 출발한지 두시간쯤 되었다. 나도 이번에는 밥을 싸왔으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단체사진 쵤영을 한 후 다시 광대치와 월경산을 향해 출발했다.
점심식사를 했던 백두대간 안내판이 설치된 장소에서 10여분 갈대 우거진 산길을 올라가니 이름표가 낡아 쓰러진 것을 누군가 나무에 기대어 놓은 무명봉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 곳에서 연비지맥이 분기한다고 어느 산악회에서 나무에 조그만 표식을 걸어 놓았는데 정작 이 산은 이름이 없다는 “무명봉 (無名峰)”이라고 하니 참 우스운 일이다. 기왕 이곳에서 연비지맥이 분기한다 하니 이 산이름을 연비산 (燕飛山) 또는 제비산도 좋겠고 어느 지도에 보니 “아홉새드리”라고 표시되어 있던데 이런 이름을 공식화해서 산이름표를 세워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무명봉 정상에는 돌로 축대를 쌓았던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무명봉에서 조금 걸어가니 백두대간길 한가운데 잘 다듬어진 무덤이 나타나는데 그 무덤 봉분위에 할미꽃이 피어있다. 지난해까지도 볼수 없었던 할미꽃을 이번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볼수 있으니 참 좋다. 속이 진한 자줏빛을 띠고 겉은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으면서 그 꽃봉오리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미꽃은 어느 때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꽃도 며칠간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꽃망울이 활짝 피지는 않고 햇볕이 비치는 남쪽을 향해 다소곳이 서서 따뜻해지길 기다리는 것 같다.
연비지맥 분기점인 무명봉
산을 다니다보면 길가에 뭔가 도구를 이용하여 판 듯 아주 깊이 그리고 집중적으로 땅을 파헤쳐놓은 흔적을 자주 본다. 이 산에도 나무가 우거지지 않은 잡목 주변으로 검은 흙을 파혜친 구덩이가 많이 보인다. 나는 약초꾼들이 산마를 캐 간 자국인것으로 생각했는데 함께 걷던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멧돼지가 풀이나 나무뿌리를 캤던가 아니면 두더지를 잡아먹기 위해 파헤친 것이라 한다. 글쎄, 이렇게 멋진 산길을 파헤쳐 놓은 것이 과연 약초꾼들인지 멧돼지인지 앞으로 관심있게 살펴봐야겠다.
이번 백두대간구간은 특별히 위험구간이나 기억에 남는 멋진 바위나 큰 나무 등이 없다. 봉화산에서 광대치로 가는 동안 전망바위라고 할 만한 조금 널찍한 바위가 있어 이 곳에서는 지리산 능선이 제법 뚜렷하게 보인다. 급작스런 한파(?)로 인해 봄꽃들은 움추러들었으나 대신 미세먼지가 날아가고 이렇게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여 산행하는 내내 기분이 맑아진다. 이제까지는 미세먼지 때문에 조망다운 조망이 없었는데 이번 산행만큼은 봄날에 여간해서 볼 수 없는 그런 금빛조망이다. 위험구간이라고 팻말이 쓰여진 바위구간이 한 군데 있지만 이곳도 다른 산에 비해 아주 평번한 구간이다.
전망바위를 지나며
바라본 지리산 줄기
산줄기 모양이 흐릿하다
이렇게 평이한 산길을 걸어 내려가니 회원들이 모여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광대치고개다. 1회차부터 산행패턴을 보면 가끔씩 이렇게 모여서 물을 마시고 과일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특히 오르막코스를 앞전에 두고는 꼭 이렇게 쉬었다 가는 경향이 있다. 나도 배낭에서 사과와 오이를 꺼내 주변 사람과 나눠먹고 물을 마셨다. 평소 산행할 때는 앉아서 쉬거나 과일을 먹는 것이 귀챦아 왠만하면 그냥 다니는데 이렇게 쉬어가는 것도 좋아 보인다.
기린초 새싹이 자라고 있다
개별꽃
넓고 큰 고개라는 뜻의 광대치 (廣大峙)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행렬은 다시 능선길을 따라 오른다. 이곳지리에 익숙치 않으니 그냥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가고 사람들 흔적이 뚜렷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백두대간길이고 이정표가 잘 돼 있어서 왠만해서는 길을 잃을 염려는 안해도 된다. 산길은 오르막 능선을 치고 올라가 왼편으로 꺽이는데 그 산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아주 조밀한 철조망이 쳐져있다. 이 산비탈에 약초를 심어 가꾸고 있는 듯 길안내 표시판에 “산약초 시범단지”라고 적혀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위해 지나다니는 산길에 이런 흉물을 설치해 놓은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
광대치에서 짧은 휴식을 갖는다
월경산(月境山 981.8 m )은 백두대간에서 조금 빗겨 서 있는 산이다. 광대치에서 중재로 가는 길에 월경산이라는 팻말이 서 있고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약 300 미터를 가야 한다. 백두대간길이 아니지만 이 봉화산 구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니만큼 우리 회원들은 대부분 이 월경산을 찾아간다. 실제로 산 위에는 크지 않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자라고 있고 이 곳을 찾아왔던 산악회 리본이 어지럽게 바람에 펄럭인다. 이 조망도 없는 월경산에 그냥 다녀 왔다는 그래서 호기심을 해소 했다는데 위안을 삼으면서 이제 하산을 시작한다.
노랑제비꽃
바위와 나무와 꽃이 보이면 서서 사진에 담으면서 가다보니 발 빠른 회원들이 앞서 지나가고 나는 뒤에 쳐져서 뛰어가다가 걷기를 반복한다. 내리막길이나 평지에서 보면 우리 회원들은 마치 발에 날개를 단 것처럼 걸음이 무척 빠르다. 그래도 늘 후미를 책임지고 안전산행을 이끌어주는 대원이 있어 대열에서 이탈될 염려는 안해도 된다.
월경산은 백두대간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멋진 조망을 기대하고 찾아 갔으나 월경산 정상은 잡목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산봉우리다.
백운산과 월경산의 중간에 있어 중치(中峙)라 부른다는 고개에서 왼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우리는 산대장의 안내에 따라 이 곳에서 얕으막한 산을 하나 더 넘어 1.7 km 를 더 가서 이번 3회차 대간길의 종착역인 중고개재에 닿는다. 이 정도의 산길은 아주 쉬운 길인데도 이미 13 km 정도를 걸어 온 때문인지 중재에서 중고개재까지 가는 길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 비해 좀 무거운 느낌이 든다. 무엇이든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추가로 해야 할 일이 크든 작든 생겨나면 하기 싫은 것처럼 산행 마지막 구간에 오르막길이 나타나면 부부담스러운 것 인지상정인가보다.
중치 오른쪽으로 바로 앞까지 자동차가 올라 올 수 있다.
그래도 고도가 낮아지면서 길가에 많은 풀들이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진범, 품솜대, 무릇, 양지꽃 등 작은 풀들이 뜨거운 여름을 꿈꾸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들은 땅이 녹자마자 마치 100 미터 달리기를 하는 운동선수들처럼 다시 날이 추워지기전에 서둘러 하나의 주기를 완성해야 한다. 얼어있는 땅속에 있을 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계를 하고 그 설계에 따라서 쉬지 않고 부지런히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워 벌나비를 불러야 한다. 그 때를 놓지면 대를 잇지 못하고 소멸하고 마는 생존의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볼때는 그저 아무렇게나 자라고 시들어버리는 풀나무지만 그들에게는 정말 치열한 생존의 스퍼트인 셈이다.
진범
무릇
흰제비꽃
중고개재에는 수령이 꽤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어느 블로그에는 이 중고개재에 얽힌 유래를 적어 놓았는데 독립선언문을 제창한 33인중 한 명인 용성스님은 평소 선농일치 (禪農一致)를 주창하였는데 이 고개에서 가까운 곳에 몸소 호미를 들고 화과원이라는 농장을 만들었는데 그 농장에 들락거리는 많은 중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어 사람들이 중고개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 그런 이야기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선농일치라는 생활철학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불교도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매스컴을 통해 듣는 그런 피상적인 종교는 아닐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중고개재 느티나무
중고개재에서 버스가 서 있는 삼거리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계곡길이다. 길옆으로 현호색 꽃이 만발해 있고 애기괭이눈도 노랗게 불을 밝힌다. 흰제비꽃과 알록제비꽃도 피어 있어 발목을 잡는다. 길가에는 제법 키가 큰 조릿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장수군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지지계곡의 물을 건너고 산행을 마무리했다. 계곡 끄트머리 하늘에 맞닿아 있는 영취산과 그 오른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백운산구간이 다음번에 걸어갈 길이다. 이제 백두대간 산책길도 점점 속세에서 멀어져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현호색
괭이눈
알록제비꽃
중고개재에서 30분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큰 냇물을 건너고 산행이 종료된다.
오는 길에 영취산과 장수산 사이에 있는 산행의 들날머리인 무룡고개에서 잠시 내려 기념쵤영을 하고 또 주촌마을에 조성한 의암 주논개의 생가에 들러 잠시 둘러보고 서울로 향했다. 갑자기 쌀쌀해지는 날씨에 서울에서는 비도 꽤 내렸다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도 그치고 기온도 그다지 차지는 않았다. 양재역에 9시 50분쯤 도착하여 집에는 11시 좀 못되어 도착했다. 또 하나의 꿈길이 뒤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