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의 진정한 선조들은 루터주의 칼뱅주의를 출생시킨 피에몽 계곡의 교회, 발도인들, 알비인들, 위클리프인들이다/ 바나주/ 권현익
1703년 프랑스 왕당파 군대와 게릴라전을 벌렸던
세벤느 지역의 위그노 카미자르인들은
‘세벤느 주민들이 무기를 들었던 진정한 이유’라는
선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예전에 이 지역에서 활동한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은
오늘날 개혁 교회와 동일한 신앙 공동체이며,
그들이 맹렬히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확고히 지켰던 것처럼
우리 카미자르는 새로운 종교를 원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받아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선조들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
루앙 교회의 목사로서 폐기 칙령이 나왔을 때,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신학자와 역사학자 그리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저서들을 남긴 자크 바나주도 다음과 같은 세밀하고도 적확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동서방 교회들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개혁자들은 바른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에 계속 머물렀다.
그 중심에는 튀랭 주교 클로드가 있었는데, 그가 발도인들 교회를 지도하는 동안
동일한 신앙을 승계한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11세기 베렌가리우스(999-1088)로서
그가 주장한 성찬 교리는 이탈리아, 독일, 플랑드르, 프랑스 전체로 확산되었다.
베렌가리우스의 제자들이 알비인들의 조상이 되었는데,
베렌가리우스의 친구 ‘발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의 제자들은
피에몽 계곡의 보두아 공동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발도인들과 알비인들 두 공동체는
11세기에 이미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각 활동하였음에도
이들 사이에 내면적으로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완전히 동일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반 림보르흐와 같은 학자들은 알비인들이 마니교도 였다고 주장하지만,
알비인들이 1110년에 툴루스에서 한 차례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이후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마니교라고 비판받은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지도자인 피에르 브뤼와 앙리는
아를과 리옹, 르망, 가스코뉴에서 가르쳤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본격적 궤도에 이르기까지
발도인들, 알비인들, 롤라드인들(또는 위클리프인들)과 같은 이름으로 활동하였는데,
그것이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의 신앙으로 용해되어 역사 위에 다시 나타났다.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의 이름으로 살다가 순교한 거룩한 성도들의 신앙 고백은
칼뱅주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명백한 개신교의 순수한 선구자들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신앙을 계승한 프랑스 개혁 교회 역시
사도행전 초대 교회의 신앙을 잇는 정통 교회’임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보쉬에의 주장에 대한 명백하고도 근거 확실한 반박으로서,
적절한 반박과 변증의 자료들 가운데 하나이다.
바나주는 거듭하여, “개신교회의 진정한 선조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루터주의와 칼뱅주의를 출생시켰던
피에몽 계곡의 교회, 발도인들, 알비인들, 위클리크인들, 타보르인들이다”
라고 확고하게 언급했다.
선구 개혁자들에 대한 ‘거짓 역사’가 ‘역사적 사실’로 둔갑하는 과정
기번의 서술(바울인들=마니교) →
필립 샤프의 확인(마니교임을 증명 노력) →
개신교 학자들이 인용(바울인들, 개신교와 무관) →
재 인용(역사적 사실)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