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版 『뉘른베르크』? 被告들 詭辯과 傍聽席의 空氣
正氣蘇生
反民者處斷의 高喊은 解放萬歲와 同時에 이러났다. 그러나 當時의 美軍은 全혀 不干涉의 態度를 보였고 『너의들의 일은 너의들이』라는 觀點에서 政府가 樹立된 뒤에 하는 것이 옳다는 結論을 떠러트렸다. 이래서 荏莆 四年의 기나긴 歲月을 그대로 흘려버렸다. 當場에라도 民族의 審判이 있을 것을 믿었던 國民은 ?實히 서운한 느낌이라기보다 公憤에 못이기는 沈鬱을 直感하였던 것이다. 間或 同情을 보이기도 하고 그들의 非行을 合理化하려는 部類도 있었다. 그러나 民族의 이름으로 民族의 審判은 나려 民族? ?을 씻고 이로써 民族의 正氣를 살려야 하는 것이 絶大要請인 이상 『늦었으되 늦지 않었으니 지금이라도』하는 與論은 政府 樹立 후 더 한층 높아갔다. 이래서 國會는 政府 樹立 後 第三日인 昨年 八月 十七日 드디어 反民法案을 上程시켰다. 이로써 다음달 九月 八日 國會를 通過 政府에 回送하였고 이 달 二十二日 李大統領은 同法을 正式公布하여 解放 四年만에 겨우 反民者處斷이 그 法的 根據를 얻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今年 一月 八日 第一着手로 朴興植의 收監을 비롯하여 反民特委의 實質的 行動이 開始되었고 그 一部의 公判이 지난 週 二十八日부터 열리게 된 것이다. 이래서 도로 찾는 民族正氣는 겨우 蘇生의 실마리를 잡게된 것이다.
『뉘른베르크』의 敎訓은?
지난 三月 二十八일부터 開廷을 본 反民族行爲者特別裁判은 三日에 걸친 第一次公判에서 여덟名의 被疑者에 對한 事實審理가 있었거니와 同裁判이 가지는 歷史的 社會的 意義는 다시 말할 必要도 없으리만큼 重大한 것임으로 同公判에 보내는 民族 全體의 關心도 不可不 非常한 바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過去 半世紀에 걸처 民族의 피를 빨어 배불르고 살찐 이들 反民族의 무리들을 公判하는 날 公判廷으로 물밀리듯이 몰린 傍職者의 얼골들에는 한결같이 오랫동안의 民族的 怨讐의 處斷을 聲援하고 痛快히 역이는 表情이 감추어질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뉘른베르크』와 『東京』에서 그들 非人道 破廉恥의 極致를 이룬 軍國主義者들이 어떻게 그 最後를 끝마추었으며 또한 同戰犯裁判을 契機로 하여 平和를 사랑하는 世界人民들이 어떻게 그 決意를 새롭게 하였던가를 歷歷히 記憶하고 있는 者이다.
實로 『뉘른베르크』와 『東京』의 산 實例는 帝國主義의 野獸와 같은 慾望으로 世界全體人民의 生命과 財産과 모든 文化財를 掠奪한 파시즘의 무리들을 處罰하지 않고서는 地坪우에 平和의 날이 오지 않고 말 것이며, 그들의 餘命을 維持시키는 限 그 毒素와 같은 뿌리는 雜草처럼 成長하여 世界를 다시 混亂과 戰火로 뒤엎을 것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人類 最高의 至上命令 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戰犯裁判은 오직 罪를 젔으니 處罰한다는 刑法學的 適用에만 끝이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世界平和의 癌을 未然에 手術해버리려는 豫防學的 意義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잊을 수도 없었다. 그만큼 그 裁判이 가지는 意義는 크고도 또 깊은 바 있었다고 할 것이다.
▲ 포승줄에 묶인 채 반민특위 특별재판정에 출두하고 있는 친일파 군상. 왼쪽부터 노덕술, 김연수, 최린, 이풍한. |
縮小版 戰犯者의 무리들
그런데 돌아보아 우리들의 處地는 어떠한가? 이들 反民者는 民族的 罪過를 犯하였으니 民族正氣上 그것을 處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至極히 當然한 소리다. 그런데 그 當然한 소리가 至極히 當然한 것이 되지 못하고만 지난 四年 동안의 解放 記錄을 여기 다시 새삼스럽게 뒤저볼 必要는 없거니와 지금 이들 反民者의 무리를 處斷함에 있어서 우리가 잊어서 안될 것은 그들이야말로 다름 아닌 韓國版 戰犯者의 群像이라는 一點이다.
軍國主義者들의 侵略行爲를 忠實히 방助한 이들 親日派들은 文字그대로 힛틀러와 東條의 핏줄기를 받어 한솥의 밥을 먹어온 血緣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戰後 隣邦 中國에서는 所謂 漢奸輩들을 그들 自體의 손으로 處斷한 바 있썼고 이와 同曲으로 佛蘭西에서도 親獨派들의 肅淸工作이 活潑히 展開되었던 것이 아닌가?
應當 韓國版 戰犯들도 이들과 運命을 같이 해야만 옳을 것임에도 不拘하고 이 땅이 稀有의 溫床地帶로 化하여 마음껏 다스한 햇볕을 아직까지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들 韓國版 戰犯을 肅淸하지 않고 民族은 끝내 福될 수 없고 槿域 三千里는 끝내 平和로울 수 없다는 嚴肅한 命題는 瞬時도 ??서는 안될 것이다. 親帝國主義의 무리들이 그대로 ??을 계속 하고 있는 社會에 어찌 民族의 自主獨立이 許容될 수 있는 것이 ??가? 그것이 不可能함은 三尺童子라는 손쉽게 알 수 있는 眞理인 것이다.
失笑․倦怠! 傍聽客의 表情
이제 우리는 첫 公判 三日을 通하여 나타난 被告들의 言動에 있어서 決코 疎忽히 할 수 없는 重大한 事實을 發見하고 새삼스러운 놀램과 不安과 激憤을 禁치 못해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들의 말대로 하면 그들은 모두 愛國者들이다. 말하자면 親日的 愛國者인데 그렇니까 따지고 보면 그들의 말하는 愛國은 우리나라가 그 對象이 아니라 바다 건너 日本땅이 되지 말한 법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裁判長에 對한 言言句句는 모두 詭辯과 憶說과 辨明과 廻遊에 끝이고 말뿐 過去의 罪를 뉘우치는 者 極少數임을 생각할 때 우리 겨레들은 다시 毛骨이 송然치 않을 수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甚至於 어떤 被告는 日帝 警察의 讚揚論까지 期하지 않고 辯論하기에 이르는 것은 기맥힌 現象이오 그들이 어떻게 그 뼈속까지 日帝의 赤子들이 되어있는 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들 被告들의 答辯을 둘러싸고 일어난 傍聽席의 ?氣를 또한 우리는 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때때로 일어나는 失笑와 苦笑 불시로 터지는 倦怠感의 하품과 嫌症-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三日間 公判廷에 나타난 傍聽客들의 얼골에서 엿들을 수 있는 期待에 어그러지는 듯한 失望感과 不快感은 하나의 重要한 暗示를 던저 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傍聽客들은 모두 알 수 없는 一沫의 懷疑感을 지닌 채 어떤 후련할 수 없는 感情을 가지고 各其 公判廷門을 나서는 것이었다.
한결같이 鐵面皮 그대로의 이들 被告에 對한 秋霜烈口의 處斷이 없지 않고서 傍聽客들은 결코 후련할 수 없을 것이며 또 民族이 容納할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할 때 反民特委 當路者들은 一層의 覺悟와 決意를 굳건히 하지 않고는 안될 것이다. 결코 傍聽席의 懷疑感이 어떤 將來할 것의 結果를 미리 看取한데서 온 것이 아닐 것은 勿論이지만 앞으로 公判을 展開하고 最後的인 審判을 나림에 있어서 民族의 ?憤이 깨끗이 시처지지 않는 例가 없기를 民衆들은 衷心으로 至今부터 期待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民主的 祖國 再建의 앞길을 터 닦는데 있어서 이들 反民者의 處斷이 圓滑 且 完全히 되지 않고서는 그것이 容易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생각할 때 傍聽席의 失笑와 憎惡感을 산 敎訓으로 하여 公判의 完美로운 結果를 바래는 마음 切切한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韓國의 民主建設은 그대로 世界의 그것과 通하는 것이며 이 땅의 平和는 그대로 世界平和로 나아가는 길이다. 파시스트 殘黨과 그 走狗들을 掃蕩함이 없이는 데모크라시와 世界平和의 將來도 위태로울 것이다. 뉴른베르그와 東京은 지금 서울에서 進行되는 特別裁判에 그 빠통을 던저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裁判이 가지는 巨大한 民族的 意義를 살리는 마당에 모든 眞實과 偏見은 禁物이다. 『反民者處斷』의 擧族的 課業이 한낱의 『泰山鳴動一匹』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人民의 壓力에 依하여 마지못해 『해보는』 程度의 떳떳 미지근한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안되기를 期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그대로 反民特委?路者의 마음이 되어 주기를 바래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되리하고 굳게 믿는 바이다. 앞으로 公判의 結果를 全人民이 注視하고 있다.
『주간서울』1949년 4월 4일자 1면에 실림
1949년 3월 28일 - 이날도 해는 동으로부터 솟아 서산으로 졌다. 이날에 별다른 유서는 없는 것이다.
다만 해방 후 가장 먼저 나온 민족의 구호이던 『친일파 민족반역자처단』의 첫심리를 공개하는 날일 뿐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百一조에 의한 특별법의 첫공사인 것이다.
첫 공사라는 점 『반민행위자』를 처단할 것이냐 아니다 시기가 일으다 늦다는 따위의 종잡을 수 없던 실정에서 어쨋던 단연 지목되던 혐의자들을 구금 문초하고 마침내 공판에 회부한 점. 그 뜻은 저윽히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종로의 거상 박흥식(朴興植)과 이왕가(李王家)의 근친 이기용(李琦鎔)자작의 심리와 아울러 한편 같은 울안의 공판정에서는 전수도청 수사사장 노덕술(盧德述) 등의 『반민법반대음모사건』공판이 열린 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하겠다.
李琦鎔 『賣國料는 三萬圓也』
정동마루턱에 六法全書 싸어놓은 인상이 나던 속층 재판소 문앞엔 이날 이른아침부터 방청하러 뫃여든 군중으로 꽉차있다.
오전아홉시가 약간지나 한데의 윤나는 『빅크』차가 서슴치않고 정문의 군중을 뚫고 재판소 현관 왼편에 소리없이 멋는다.
이어 차에서 나린 몸짓 좋은 신사한분과 『고발트』빛 두루마기의 차림에 흰 가제『마스크』로 얼골의 반을 가린 중년부인 살같이 그 큰집 안으로 사라진다.
『이-박흥식부인-』 소리나는 쪽을 보니 무데기진 『특위기자』(特委記者)들이 보인다. 공판정으로 지정된 대법정(大法廷)이 있는 서문(西門)엔 더많은 방청객들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오전열시 十五분전- 방청인 입정(入廷) 개시- 제一착으로 중경(重慶)시정부의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씨가 드러선다. 기자가 몸 아래위의 수색을 다 마치고 법정에 드러섰을 때에는 거이 방청석은 꽉차있었다.
최동오(崔東旿)씨가 회색두루마기 차림에 수염을 쓰다드므며 어색한 빛으로 수위로부터의 몸수색을 받고 특별방청석로 드러온다. 박흥식 부인 한인하(韓仁河)씨도 어느새 화신상무 김갑린(金甲麟)씨와 나란히 앞으로 셋째줄에 앉아있다.
그옆 그뒤에 앉은 이 누구라고 다들 말할 수는 없다. 필시 『특위』에 걸린 자들의 가족으로 인정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법정 정면엔 태극기 바른편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사진 왼편엔 기름한 독립선언서의 족자틀이 걸려있고 그 아래로 한단 높게 재판관석 그리고 한단 아래로 피고석 변호인석이 마련되어있다.
이름하여 이 법정을 『대법정』이라고 한다고-
일본제국주의 실천자들이 우리의 허다한 애국혁명지사를 죄주기 위하여 지어논 법정-더욱 一九三五년 간도『間島』공산당의 五十여 애국지사를 판결하기 위하여 일불어 지어논 이 법정 그때의 첫 공판에 十八명의 선열을 사형대의 이슬로 모라 놓고야만 일을 필두로 일제의 무시무시한 죄과의 역사는 그뒤 이때에 이 법정에서 소위 사상사건이란 이름아래 결행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일제』에 아부하고 그네들의 개로써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여 닥치는대로 삿삿치 깡그리 살들이 사슬을 채워 이 법정으로 모라놓던 그 무리들이 역사는 바뀌었다쳐도 여전히 해가 동에서 서쪽으로 지는 평범한 날에 심판을 받게 된 사실에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지음-재판관석 외편단상에 키가 후리후리한 六十가까운 정리(廷吏)한분 선득 나타나 『조용하시오. 이제부터 이기용과 박흥식의 재판이 시작됩니다. 이대통령의 명을 봉대한 재판장만이 언권이 있으니 방청인들은 저 뒤에도 주의서를 써부치었지만 제각금 이야기 마시고 함부로 출인하지 마러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앞이(前齒)가 다빠진 그는 격을 가추어 타일르는 것이었다.
검정두루마기의 피고 이기용이 네형무관에 인도되어 피고석에 나타났다. 최태원(崔台源), 김태한(金台漢 ) 두 변호사가 자리잡는다. 다음 재판관 뒤 통용문이 열리자 흰두루마기의 정홍거(鄭弘巨), 긴 수염의 신현기(申鉉琦), 재판관과 서용길(徐容吉) 검찰관 등이 들어와 피고석과 약간 떠러진 자리의 특별방청석으로 이어 이날의 주심재판관 신태익(申泰益)씨 서류보를 안고 드러오고 서성달(徐成達) 검찰관 그리고 오택관(吳澤寬), 홍순옥(洪淳玉), 이종만(李鍾免), 김석정(金錫禎) 등 네 재판관과 두 서기관이 들어와 스자
『차-렷』소리와 함께 一동은 일어서 한번 『예』(禮)를 한다음 앉았다.
서류봉투를 만지자 피고석의 이기용은 일어선다.
만당의 시선과 귀가 한테로 모아졌을 무렵 신재판관은 『피고의 주소는 서울시 서대문구…』하며 통상적인 인정심문(人定審問)을 시작한다.
아차! 그래도 민족의 이름에 의하여 벌러진 이제것의 우리역사상에는 처음있는 반민족행위에 대한 처단인데! 아무런 벽두선언도 없는가! 문득 기자는 기자대로의 생각이 들었다.
심문(審問)은 재판관석과 피고사이에서만 들릴 정도로 아조 가늘고 유하게 진행되었다.
서검찰관 역시 잘 알어듣기 어려운 어조로 『被告人은 大院君 李昰應의 長侄로 完林君 李載元의 長子이며 高宗皇帝의 堂侄인바로 시작된 反民法第二條違反으로 공소한다는 간단한 공소문을 낭독한다.
이어 신재판장은 피고의 재산 종교 정당관계를 묻자 피고는 생활 말이 아니며 공부는 별로 안했고 벼슬은 二十二세때 세마(洗馬)벼슬을 석달동안 했고 종교는 유교이며 관계한 단체는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뿐이었다고 답변 이어 재판관은 대원군과의 관계 한일합방전후의 정세 귀족원의 원으로서의 제세경민(濟世經民)의 이념 등을 물었으나 아무런 이념도 없고 다만 일본인들에게 억눌리어 작위도 받았고 귀족원의원도 되었으며 다만 자기는 창덕궁을 대표합격으로 의원이 되었었다고 거심없이 답변한다.
피고는 금년 六十七세이다.
裁 귀족원의원이되었을 때의 감상은 被 그저 의원이 되엇다니까 되었나부다 하였고 일본도 가라니까 가서 궁성에 가서 기장(記帳)도 하였을 따름이지 별반 생각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귀족원엔 가 구경가자하여 끌려갔다가 마침 공습으로 지하실에서 서너시간 있다가 나온 뒤로는 무서워서…잘 모릅니다. 裁 피고는 화족도 아니오 일본학사회원 아니고 多額納稅者도 아닌데 어째서 의원이 되었는가요. 被 창덕궁을 대표하여 의원이 되는 것을 싫다고 하면 박해가 있을가바 뒤집어 씨우는대로 된 것입니다. 裁 피고는 일요과의 怨망이 조선국민의 전체의 의사가 아니었다는 것도 알었습니까(若干 추궁하는 어조) 被 네 알았습니다. 裁 反日 운동이 있었다는 것도 압니까 被 네 압니다. 裁 그런데 피고는 형박관념에 쌓여 작을 말고 귀족원의원이 되었다니 우습지 않습니까. 被 그러기에 고통으로 생각합니다. 裁 정치사상은 군주정치와 민주정치 중 어느것이 좋습니까.
시게는 十二시 二十五분가르킨다.
신태원 변호인으로부터 『피고인은 혈압이 二百二十이나되어 건강에 우려됩니다』라고 말하자 재판장은 『혈압이 놓은 데에는 구금생활이 제一 좋습니다.』라고 하고 一단 휴정을 선언, 이로써 이기용에 대한 제一회 심리는 끝나고 오후 한시부터는 박흥식에 대한 심리가 었다.
민족의 주시가운데 열린 재판으로는 약간 깊다란듯한 문답을 일일이 기록하더라고 약간 피로를 느낀 기자가 원고를 정리하려고 재판소안의 신문기자실로 와본즉 그 곳 탁자위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의 재판장 태익씨의 경력을 골필로 쓴 것이 서너 너덧벌 놓여 있었다.
▲ 申泰益 略歷
一. 日本大學校法科 卒業
二. 辯護士試驗合格
三. 咸興에서 辯護士業開業. 一九二九年 咸興公會堂 事件이로 懲役 八個月 一九四三年 短波無電事件으로 懲役 八個月.
朴興植 『나는 創氏도 안했오』
政治關聯 云云엔 否認 親日 談話는 記者所行이라는 復言 황황이 기사를 써 社로 보내고 다서 대법정으로 되도라오니 임이 피고 박흥식은 자리에 나섰었다.
진한 잿빛의 두루마기에 뚱뚱하고도 육중한 몸집통 운동화 신은 다리 버티고 있다.
누구보다도 긴장한 낯빛을 띄운 이는 앞서부터 와있던 그 부인 한인하 씨이고 그의 가제마스크위로 내다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로일환(盧鎰煥)검찰과 신재판장 그리고 남편의 뒤모습을 번가러가며 주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심중에 오락가락하는 것은 무엇이었 리오
기자는 난데없이-二十萬圓짜리의 보석반지-이런 열 한자가 생각나 무심코 원고지에 이 한자를 『메모』하여보았다.
법정정면에 달린 시게 땅-하고 한시를 고한다.
자리잡은 검찰관 재판관 피고 변호인 배정현(裵廷鉉), 박원삼(朴元三), 김병관(金炳觀), 박응무(朴應武) 특별방청석의 면면 그리고 일반방청석을 한번 휘 둘러본 신태익 재판장 주소성명 외인신문으로 드러간다.
다음순간 둥글넓적한 얼골에 갓 이발한 언론계 출신에 한민당 소장파 국회의원으로 한목보는 로일환 검찰관 몸을 약간 비튼채 독특한 전라도 사투리를 서꺼가며
『피고 박흥식은 명색없는 一지방상인으로서…』의 허두로 시작된 七항목으로 구분 열거된 一萬餘字의 범리사실을 낭독하기 무려 五十분간이나 걸렸다.
-기자는 해방되던 날 오후 화신백화점 앞 전기시게 유리에 크게 써부친 東震共和國의 組閣發表文이 더욱 인상깊게 떠올랐다!
신재판관은 피고의 『취미』는 서부터 시작되었다. 용어는 『습니까』이다.
被 사업에 대한 외에는 아무런 취미도 없습니다. 재판장은 화신의 자매관게와 흥한(興韓) 재단의 재산에 대하여 묻자 그 재산은 처음엔 一억二천만원 정도이었으나 현재는 그 배가 된다고 답변.
裁 東拓監事로 언제 드러갔으며 그 경위 등은
被 해방전 한 三四년 전에 드러갔는데 주(株)는 千주 가졌고 조선인으로서는 내가 처음 간부가 되었습니다.
裁 東拓이 조선의 고혈을 착취하는 기관인 줄을 알었습니까.
被 합방 당시는 식민지 정책을 썼으나 내가 드러간 뒤부터는 이민은 중지되고 토지매매와 금융관게 사무만 보았기 때문에 단순한 착취기관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裁 이민이나 토지매수 하는 것만 착취이고 다른 방법에 의한 것은 착취라고 보지않습니까(약간 거센 추궁하는 어조)
被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드러간 동기의 하나는 그런데에라도 조선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서 발언권을 얻으려 하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재판관의 심문하는 어조는 순한 듯 하면서도 꼭꼭 따저가다가는 『일본연대로 말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시오』하며 진술의 기회를 준다.
재판관은 기소사실에 따라 피고가 산업경제인 대표로 일황(日皇)을 맞났을 때 『拜謁의 光榮에 못이겨 感泣』『內鮮一體의 實踐을 意味하는 內鮮結婚을 獎勵함으로써 皇民化運動을 하자』는 따위의 담화를 비롯하여 중일전쟁 중 번번히 발표된 담화내용을 쪼차 친 친일의 숨길수 없는 행적을 추궁하자
번번히 『그런 담화에 대하여서 지금 책임을 아니진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런 담화는 대개가 신문기자들이 쓴 것입니다』라고 고집 변명하자 재판관도 어이가 없는 소리라는 듯 『아무리 그때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이었기로서니 더구나 피고가 감사역으로있던 신문(每日新報를 말함)에서 피고같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말을 썼다고는 그때 사정으로보아 믿어지지 않지 않습니까…
다음
심문이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이르르자 피고는 마치 자기가 창씨를 하지 않은 것이 큰 애국적 행동인양 진술한다.
『그러기에 피고나 한상용(韓相龍), 김연수(金秊洙), 민규식(閔圭植) 등은 그렇게 창씨를 하지않으면 어린들에게까지 못살게 굴던 그 사람들이 내버려두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도리혀 얼마나 친일을 한 자이라는 것의 증거이고 아부한 결과 임을 알어야된다』고 이때는 재판장도 약간 노기띈 어조로-말한다.
이 때의 피고 묵묵무답 약간 들었던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피고는 경제적인 부면에 대한 활동은 인정하나 총력연맹 등 정치적 분야에는 이름만 부득이 걸려있을 뿐이지 관게가 깊지는 않았다는 것과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대화동맹(大和同盟) 등 단체는 어떠한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일체 관게가 없었다고 힘있게 부인하였다.
이밖에도 南총독을 자부(慈父)라고 하였다 하던가에 대한 질문이 있고 『왜 피고는 그 자들한테 그렇게 이용당했는가』하고 재판관은 간간히 그 때의 정상을 서로 딱하게 여기는 듯한 어조의 질문이 세시가 넘도록 게속 되었다.
긴장되었던 방청석엔 지리한 문답에 흥미를 잃은 것 같었다. 三시 二十分
재판장은 추후에 제二회 심문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슨다.
방청석도 일제히 일어났다. 방청객이 채 재판소 정문을 나가기도 전에 앞서 공판이 시작되기 전에 본 『빅크』 윤나는 차는 몬지를 풍기며 사람떼를 헤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반민』심판 제一일은 지났다.
공파제二일 박흥식의 빠통을 받어쥐고 나타난 사람은 세칭 고문왕이라고 불리워지는 전 중추원참의 김태석이었다(以上0기자)
金泰錫 『우리집서도 獨立萬歲』
훌쩍 큰 키에 몹시 부드럽게 보이는 비단 두루매기를 입고 쇠고랑을 차고 공판정에 출두한 김태석의 면모에는 옛날의 추상같은 권세의 자최도 덧없이 오직 여전한 八자 수염과 허옇게 서리맞은 머리가 유달리 들어나 보일 뿐이다. 발에는 죠코레트 빛깔의 미군구두가 윤끼를 발한다.
이윽고 노진설 재파장의 주심 곽상훈검찰관 입회로 개정 듣기에도 끔직끔직하게 찬연(?)한 부일반역의 죄상이 곽검찰관의 공소문 낭독으로 들어나자 방청석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하고 당자 김태석은 늙은 머리를 숙여 그의 업적을 재음미(吟味)하고 섰다.
피고 김은 일직이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혁혁 스타-트를 끊은 이래 그의 일생은 일제경찰의 주구로써 무수한 애국지사를 투옥 고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당시의 재등총독에게 폭단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강우규의사를 체포하여 사형케 한 것으로 일제 경찰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장본이다.
재 『왜 경찰로 들어갔는가?』
김 『전들 조선민족의 한사람인데 민족정신을 저바릴 수야 있겠읍니까…햄…지가 경찰로 들어간 것을 말슴드린다면 이렀읍죠. 다들 아실테지만 사내(寺內)총독암살사건 공판이 있을 때 방청을 갔더니 놈들이 한다는 짓이 사건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공연히 만들어서 그런단 말슴이야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를 이래서는 안되겠다. 경찰도 들어가서 흑백(黑白)을 가려야겠다는 비장한 생각으루다가…』
그러니까 피고 김태석은 끌어오르는 애국심에서 일제경찰게로 들어간 셈이다.
재 『그 뒤 경무총감부 소속의 고등경찰과에 근무했다는데 대단한 영전이 아닌가. 거기서 한일은 무엇인가』
김 『그저 한 꼬스까이(使童) 노릇밖에 더한 게 있습니까. 그놈들이 어디 조선사람을 신용하나요. 어림도 없으니까…』라고 도리어 분개하는 어조(語調)다.
재 『三
一운동때 활동을 많이 했다는데…』
김 『원체 만세사건이라는 것이 범위가 넓어서요. 아 피고의 집에서도 만세를 불렀는데 어디 활동이고 무엇이고 할 여지가 있습니까』
이때 방청석에는 웃음소리가 폭팔이다. 친일반역의 거두 김태석의 집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나왔다니까 확실히 조선민족의 독립정신이 장하고 또 쾌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 그뿐인가. 김은 三․一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 비밀을 알아채렸으나 자기도 조선사람인데 어찌 그것을 밀고할까부냐고 완전히 비밀을 직혀 주었다는 것이며 또 그뿐만이 아니라…』
김 『이건 제 자랑같읍니다만 만일 지가 그 사건을 사전에 세상에 폭로했더라면 글세요…기미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을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구요. 지가 이 자리에 나와서게 됐을는지도 몰으겠습니다. 저도 말하자면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부를 하고 싶습니다.』
방청석 뒤에까지 들리라는 듯 아직까지의 낮은 소리를 높여서 이렇게 말하는 피고의 뱃심에는 누구나 감탄을 애낄 수 없으리라.
재 『그후에는 고등경찰에서 혹독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김 『거…고등경찰이라는 것을 통촉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고등경찰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거 뭐 고문이라던가 그런 것을 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보고를 하고 사무를 보고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까요. 헌병대에서는 고문도 했다는 말을 들었읍니다만 고등경찰에서는 고문을 하지 않습니다.』
일제경찰도 고문을 안하는 것을 보니까 민주경찰인 모양이다. 이렇게 고문을 안하는 일제 민주경찰에서 수많은 애국자가 죽어나왔다는 사실은 해괴한 일이오, 생각에 딸아서는 조곰도 해괴할 것이 없는 『유치장병사』가 많았던 모양이다. 뜻하지 않고 피고는 일제경찰 찬양 후 일석을 베푼 셈이다. 그후 김태석은 경찰에서 오래쌓은 공로에 딸아 군수를 거쳐 참여관으로 영전일로의 코-스를 줄다름질쳐 올라갔는데 참여관 때 그는 내무부장도 손을 못대는 우원총독 제창의 농촌진흥운동을 솔선진두에서 지휘했노라고 또 무훈담을 회고하는 것이다.
재 『그 당시의 경기도 경찰이 어느 중국요리점에서 말하기를 김태석경시는 중요한 고등경찰사사건 중 八활을 담당했다고 칭찬했다는데 사실인가?』
김 『황송합니다만 피고와 같은 일게 히라경시가 고등경찰사건을 그렇게 많이 취급했다는 말이 됩니까』
재 『황옥(黃珏)증인이 그렇게 말했는데 거짓말이란 말인가』
김 『거 알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재 『그 때 사람들은 김태석이라고하면 산천초목도 떨만큼 무서워 했다는데!』
하고 재판장은 증인 정태준의 증인록을 낭독하였다.
김 『므슨 일을 그 사람이 …쯧 거 그 사람 정신이상이 됐는지 몰으겠습니다』
재 『강우규의사 사건도 그러면 피고가 하지않었단 말인가?』
피 『그러문은 내가 그 사건을 취급했다면 값이 얼마게요?』
방청석은 또 웃음이 터진다. 반일투사 강의사 사건을 취급하도록 매국반역배라야만 값이 높다는 피고의 가치론(價値論)은 써 경층하기에 족하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번 주(註)를 달아 가로되
『김태석은 죽어도 조선민족의 정신으로 적(敵)의 진영으로 들어가 일했습니다. 지금 태극기 아래서 이렇게 공판을 받게 되니 감개무량할 뿐입니다』라고 『애국자』김태석은 울부짖는다.
재판관의 질문이 끈나자 곽검찰관은 하나하나 반증을 들어가며 피고의 괴소공군(巢共軍)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한인공산당원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애국지사 五십여명을 체포하고 그중 십七명을 학살한 무시무시한 죄상을 가진 자이다. 그뿐더러 만보산(萬寶山)사건 때에는 일본영사관의 주구 노릇을 감행하여 당시의 조선일보사 장춘지국장 김이삼(金利三)씨를 그의 부하를 시켜 사살한 외에도 일제 군경에 아부하여 수많은 독립운동자를 보고 또는 투옥시킨 끔직끔직한 반역자인 것이다.
李鍾滎 『내 그슴에 勳章』을
그런데 이 반역자 이종형이 해방후 애국자로 행세하게 된 것은 어찌된 조화속인지 물론 알다가도 몰을 일이다.
이상과 같은 공소문 낭독을 듣고 당자 이종형은 한손을 뒤허리에 걸친 채 분함을 익일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전신을 떨며 가로되 『공산당을 타도했다고 이 재판소에 서게 된다는 것은 천하에 무도한 짓이오 도대체 이 법정이 뉘 법정이냐 말이오 응? 김일성이의 법정이 아닐진대 나를 여기에 잡아내올 수는 없단 말이오 흥! 학살 밀고 도대체 그 따위 사실은 어데서 주서 온 거요』
하고 장내가 떠나갈 듯이 소리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애국자 이종형의 일대 사자후(獅子吼)가 반민족행위자 처단의 특별법정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재판정은 그러니까 흑백을 가리기 위하여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타일른 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라고 말하자 이종형의 언성은 더한층 높아가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로 말하라면 하겠오. 대답하는 것과 참고로 대답하는 것은 다른 것이오?』 하고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재판장이 만주에서 한 독립운동의 내용이란 어떤 것이냐고 묻자 피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어저가며 이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노상 정치 연설로 들어가는데 또 다시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지를 않은가.
『들어보시오. 내가 만주에 있을 때는 마치 해방 후에 대동신문을 시작한 것과 다름없는 때란 말이요. 대동신문을 해가지고 인민공화국을 때려부신 것처럼 내가 만주에서 가서 공산당을 때려부시고 민족운동의 체계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은 것이 아니겠오?』
한쪽 선을 처들어서 내 후들으는 품이 연단에 몹시 익숙한 솜씨다. 공산당을 쳐부수어 독립운동의 체계를 세웠다고 보면 그때의 공산당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애국자를 가슴에 훈장을 채워주지 못하나마 그래 이 팔에도 쇠고랑을 채워야 옳단 말이오. 아 그래야 옳단 말이냐 말이오. 심지어 우리 여편네까지 잡아다 넣었으니 당신네들 맘이 편하기는 허겠소』
그러자 피고는 목을 휙돌리어 방청석 쪽을 가르키며 『보시오 저기 우리 고아원에 보낸 어린 자식이 있소?』하고 아주 비통해 못견디겠다는 부르짖음이다. 도대체 이런 정열적 애국자를 누가 이 법정에다 끌어내왔느냐 말이어. 오호라! 천지신명은 구버 살피시라. 누가 애국지사고 누가 반역자란 말인지 흔한 애국자의 사태 속에서 백성들은 구역과 같은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종시일관하여 애국자 이종형은 사실심리를 거부하는 태도로 법정투쟁을 전개함으로 공판은 할 일 없이 일단락을 짓지 않을 수 없었으니 민족의 이름으로 열려진 반민처단의 법정은 순간 그 무색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애국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 될 것인가. 싱거운 듯 입맛을 다시는 어느 방청인이 입을 열어 혼자 중얼거리기를 『내 재판구경을 여러 번 다녔어야 이런 놈의 재판은 보길 처음일세...』하고 실소(失笑)를 금치 못해 하는 것이다.
국토(國土)를 매도하고 민족을 배반하여 그 대가(代價)로서 얼마든지 비대하게 자라났던 반민자 도배(叛民者徒輩)에 대한 민족적인 처단의 제三일은 그러나 초일과 조곰도 다름없이 멀리 정동골목이 미어지도록 참집한 방청객의 시선 아레에 여전히 서울재판소(裁判所) 대법정(大法廷)에서 개최되었다. 이날은 제二일 보다 훨씬 화창한 날씨여서 모여든 관중들이 아침부터 가벼운 차림새였고 그리하여 외투를 입지 않을 수 없도록 쌀쌀하였던 제二일 보다 필연 百명쯤은 더 공판정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방청객은 한이 없이 모여 들었고 그리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머물러 있게 된 사람들은 혹은 이 날씨가 더 더워서 아주 얇은 옷을 입고 오게 되었으면 하였으리라(以上 M記者)
李豊漢 『萬歲를 불르고 도망질』
열시가 가깝게 되어오자 급작스레 밖앝쪽이 소란하더니 이윽고 병원차와 흡사한 완전 피개차(完全 被蓋車)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안마당으로 달려왔다. 물론 그때까지는 그안에 누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을 일이로되 그러나 그 차체를 주시하는 군중들의 시선은 필연코 그속에 투시(透視)되었을 것이다. 차가 정거를 하고 노덕술(盧德述)을 선두로 한 꾸레미로 꾀이듯이 한줄이 되어있는 피고인들 네명이 나려왔다. 그 순간 숨어있던 카메라맨들의 기민한 동작이 전개되었고 연달아 샤타소리가 수 十대의 시계의 진음(震音)처럼 솟아난다. 피고들은 그런 돌연한 카메라맨의 출현은 전연 에기하지 못했는지 급작스리 고개를 숙으리며 얼굴을 감추기 시작하였으나 그러나 물론 그들의 외면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만일 여러 대중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워서 그들이 시선을 피하려고 외면을 했다면 혹은 남아있는 양심 조각의 소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문지상에서 자기네들의 얼굴이 흉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못마땅해서 고개를 돌리려고 하였다면 그 얼마나 다기(唾棄)한 일이겠는가. 가족들이 와서 바라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돌려보지 않아야만 하는 그들은 과연 어느 편에 속하는 심사였는지?
열時二十五분이 되자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五백여명의 눈길을 받으며 피고 이풍한(李豊漢)이 나타났다.
그러자 열시반이 되어 『民族正氣』라고 예서(隸書)체로 쓴 오세창(吳世昌)옹의 현판이 반입되었고 이윽고 그 현판이 벽에 걸렸다. 그 현판을 바라보는 피고들은 그 중에도 한때 三十三人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崔麟)은 과연 무슨 마음이 솟을 것인가.
열시四十분이 되자 재판관들이 들어왔고 이서 개정이 선언된 뒤에 검찰관의 기소문 낭독이 있은 다음에 이풍한에 대한 재판장의 심문이 개시되었다.
일반적인 피고의 내력 환경 등을 들은 다음 재판장과 피고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裁 『합방이후에는 관리 노릇 같은 것을 한일이 없나?』 被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명예직도 없었습니다. 일본말도 할 줄 모르는 걸 뭘합니까?』
이때의 피고의 대답은 단순한 심문에 대하는 대답이 아닌 상 싶어 보였다. 확실히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지 보일양으로 있는 재주를 다하여 그런 사실을 부인하는 듯한 그런 몸짓이며 말소리었다. 여달아
裁 『그럼 취미는 뭐요?』 被 『아무 취미도 없습니다. 집에 가마니 들어앉어 있는 것 밖에 없읍니다. 방안에 꼭 들어 앉어서 그저 책만 읽었읍니다』
그러자 방청석에서는 정정의 주의가 있었는데도 역시 웃어운 모양에는 하는 수 없이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나왔다. 아무런 취미도 없이 방안에 꼭 들어 앉어 있었다고 하며 머리와 몸을 흔들어 변명하는 태도가 너무나 어이없는 대문이었다. 그리다가 약간의 문답이 지나간 뒤에
裁 『기미년의 운동을 아는가?』 被 『네 압니다. 알구 말구요』 裁 『그 운동이 어떻게 생각되었는가?』 被 『아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죠』 裁 『그러면 그때 피고는 그 운동에 대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슨 협조를 한 것이 있나?』 被 『그러무뇨 있죠. 종로서 만세도 한번 불러보고 도망을 했는데요』 裁 『만세를 한번 불르고 도망을 쳤다?』 被 『네 네』
하자 또 방청석에서 웃음 소리가 났다. 혹은 만세를 한번 쯤 부르면서 도망질을 쳤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그 다라나는 모양이 젊었을 그때의 피고로서가 아니라 지금의 허둥대는 피고로서 연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장과 피고의 문답은 그뒤 열한시 五十분까지 그러니까 시작에서부터 만 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의 망부(亡父)에 대한 심문, 수작(受爵)에 대한 심문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요컨대 피고는 종시 일관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질문이면 명확한 연월일의(年月日) 이나 사건을 진술하였으나 재판장의 유도심문에는 그저 아무것도 자기는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진술하고 있는 상 싶어 보였다.
재판이 끝냐자 한 변호사가 일어나 태극기 한폭을 제시하며 『이것은 이풍한이 ?년간 감추어 두었다 해방직후에 높이 매??었으니 이걸 증거로??서...........』하고 말하자 재판장은 그것은 사유를 써서 내어달라고 하는데 답으로 즉시 수리되지는 못하였는데 그러면 사십년간 피고가 감추어두었던 태극기가 이 다음의 공판에는 어떤 결과를 피고인에게 가져오게 될 것인지?
金秊洙 『정말로 懺悔하는가?』
피고 이풍한이 나간 뒤에 김연수가 들어왔다. 다른 피고는 대개 뚱뚱한 몸을 하였었는데 이는 그 중에서 그중 가는 몸이다. 얼굴이 힌 것은 감방에서의 생활때문도 있겠지만 추측컨대 전부터 힌 빛이 있으리라. 그 위에 깨끗한 힌 두루매기까지 입고 있어 영오의 생활에서 나온 사람보다는 어떤 병원에서 나오는 사람같이 여겨졌다.
세상에서 듣던 바는 그가 조선 실업계의 가장 거대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외만한 실업가도 수억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우리로서는 그리하여 그가 혹은 수 十億원이라도 가진 사람이거니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이 얼마냐는 질문에 약 三千萬원이라고 하였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데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반대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에의 심문은 불과 십분도 끌지 못하고 이내 끝나 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로는 그의 재산이 어째 그밖에 없는가를 알 도리가 없게 되고 말았다. 다음에 그와의 인정심문을 제외하는 짧은 문답 전부를 적어보자.
裁 『교육은?』 被 『경도제국대학을 마췄읍니다』 裁 『어떤 학부를 다녔는가?』 被 『경제학부입니다』 裁 『재산은?』 被 『글세 약 三千萬원 내외겠지요 』 裁 『가족은?』 被 『 二十一名입니다』 裁 『모도 한군데 사나?』 被 『아닙니다. 따로따로 살고 있습니다』 裁 『학교를 마친 뒤의 경력은 무엇인가?』 被 『지금까지 그저 실업계에 ― 』 裁 『실업계?』 被 『네에』 盧德述
김연수가 나가고 문제의 노덕술(盧德述)이 장내에 들어왔다. 너무나 그 땅에 급작스리 알리워진 이름이고 한편 너무나 무시무시한 범죄의 피의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를 맞이하는 장내는 우선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를 보려고 모두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반백이 된 몸체에 진흙빛 두루매기를 입고 테 굵은 안경에 구두를 신은 그는 감방생활에서의 쇠약한 기색이 조곰도 나타나지 않었다.
그가 자리에 앉고 재판장이 신분인정의 심문을 끝낸 다음 담당 검찰관 서성달(徐成達)씨가 일어섰다. 피고와 원고(검찰관)을 비교할 때 얼른 생각하기에 원고가 확실히 피고에게 압도되는 것같이 보였다. 그만큼 피고는 기골이 장대하였고 검찰관은 적은 몸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예기와는 다르게 검찰관은 우선 놀랄만한 소리로 기소문을 낭독하였다. 그냥 그 목소리가 큰것 뿐만이 아니라 완전히 강약(强弱)을 맞후는 우렁찬 열변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목소리에 장대는 모도 숨을 죽인듯이 정숙해졌고 그만큼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동시에 그의 낭독은 힘과 열이 있었던 것이며 한편 거기 기록된 죄상은 무시무시한 것이었고 따라서 조고만 몸집인 원고는 완전히 피고를 압도하고 말았다. 낭독이 끝나고 『심리하기를 요청한다』 하였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객들은 무슨 변고에 놀랜 사람들인듯이 숨소리를 『푸우』하고 내뿜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간단한 신분 심문에 뒤이어
裁 『학력은?』 被 『十二三 때 보통학교를.....』 裁 『그전에는 한문공부를 했나?』 被 『네』 裁 『가족은?』 被 『十四五명 됩니다』 裁 『일제시대에는 경관만 했나?』 被 『네』 裁 『그럼 무슨 계급까지 올라 갔었나?』 被 『순사 순사부장 경부보 경부 경시까지......』
그런데 고만 여기서 재판장은 이번의 심리를 뒷날로 미룬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방청객들은 모다 실망하는 기색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할 수는 없어 그냥 퇴장하는 피고만 쏘와 보는 것이다.
崔麟
이십분의 휴게 시간이 끝나 한시가 되자 이어 문화계의 반역 피고인 최린(崔麟)이 들어와 오늘의 마지막인 심리를 받게 되었다. 그는 머리가 거진 파뿌리처럼 히고 안경을 쓰고 얼굴이 약간 파리하게 보였다.
그는 재판정의 심문에 조급하지 않고 그렇다고 일부러 뽐내지 않는 태도로 마치 친구와 상대하는 듯이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재판장의 간단한 질문에 오래 끌며 대답하는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구태어 자기를 변명하려고만 하는 듯한 그런 태도는 나타내지 않었다. 자기의 친일 죄과와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때문이겠지만 지나간 일에 대한 그의 진술은 한 개의 태연한 회고담인 듯한 점이 보였었다.
예를 들면 재판장이
『어떤 한 사람의 혁명가가 자기의 취한 행동이 성공을 못하였을 때 그렇다면 그때의 그 혁명가의 취할 태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그때는 다만 한 가지의 길로만 나갈 것이 아니라 시의에 적합하게 해야 할 것이다. 자기를 히생시키는 급진적인 방법과 유순히 행하는 방법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등이다.
그러나 그에의 심문도 약 한 시간 가량이 걸렸으되 결국은 그의 친일죄과에 대한 심문은 한 마디도 『터취』하지 않은 채 두시 五분이 되자 고만 폐정이 선언되고 말았다. 이번에 유유한 태도였던 최린이 그러면 뒷날은 어떠한 태도로 대답하여 나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