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36-
(농사일을 배우며 -1-)
나는 죽지 않고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게 되었음을 감사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아버지께서는 40대 초반이셨으나 완전히 은퇴를 결심하신 것 같았다. 평생을
교편과 사회 활동을 하셨던 분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닐 것인데
말이다.
충청북도 교 육청에서 교육계로 복귀해달라는 여러 번의 요청을 간곡히 거절하
신 뜻을 그때 나는 이해하질 못했다. 아버님의 다른 친구 분들은 모두 주요한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자녀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는 아버님의 강직한
고집 때문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때의 나로
서는 원망과 체념으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맨주먹으로 귀국을 했기에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심지
어 밥그릇조차 부족했다. 나는 어머님과 같이 청주 외가와 남일면에 있는 고모
네 집에 들려 그릇이며 옷이며 살림에 보탤 물건들을 수시로 100리길을 걸어
서 얻으로 다녀와야 했다.
청주에 있는 외가나 고모네 집에 갈려면 충청남북도 경계선에 있는 와정리의 고
개를 넘어 충청남도 땅인 동면의 모래산 골짜기를 내려가서 탐산이라는 동네를
지나면 금강이 나온다.
금강을 나룻배로 건너서 강가를 따라 2~3십리를 내려가면 금강이 좌측으로 구
부러져 공주 쪽으로 흘러간다.
거기서 우측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따라 계속 올라 가다가 큰 산을 넘으면 문의
면이 나온다. 다시 거기서 신작로를 따라 1~2십리를 더 가노라면 남일면의 고
모네 집 나온다. 그때는 교통이 말이 아니었으니 부득불 걸어서 다녀야 했었다.
병약하신 어머님께서는 긴장을 해서인지 그 먼 길을 나하고 같이 다니시면서도
별로 힘들다는 말씀이 없으셨다.
나의 외가집 이야기를 해야겠다. 우리 어머님은 무남독녀로 소학교도 하인에게
업혀서 다니셨다 한다. 그래서인지 매우 병약하셨다.
외할머니가 시집오실 때는 하녀까지 데려오셨으며 혼수를 이고 지고 오는 행렬
이 끝이 보이질 않았다 한다.
그러나 말년에는 자식이(아들) 없음으로 인하여 매우 쓸쓸히 지내셨고 양아들
이 한분 계셨으나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던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께서 6.25
후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방문 하셨을 때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우리 어머
님도 돌아가신 후였기에 매우 외로워 보였다.
그때 외할아버지께서는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내 가 외로울 때는 외할아버지로서 너의 집을 자주 찾아와도 되겠지”.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교통도 불편한 시골에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 우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나 보다. 갑자기 목이 메어 할 말을
잊었었다. 지금 같았으면 못가시게 하고 우리 집에서 모셨을 텐데...
그리고 다음해에 외할아버지께서는 외롭게 돌아가셨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는 처지였기에 지금까지 한이 되어 그때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아려오고 목이 메인다.
첫 해는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 살았으며 그해의 추수를 하고 부터는 자급자족
이 되었다. 농사는 할아버지만 할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은 생소한 것이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오랜 교편생활과 사회활동을 하셨기에 지게 한번 져보지 못
하였던 분이었고 나 또한 전혀 문외한이었다.
형님은 곧 초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취직이 되어 고개 너머 충청남도의 탑산국민
학교에 출근을 하셨고 할아버지와 나만 농사일을 해야 했기에 머슴을 두었다.
머슴으로 오신 분이 건너 마을 거먹골에 사는 나이 든(50이 넘었을 것이다) 분
이었으며 항상 할아버지로부터 일을 잘 못한다고 핀잔을 받았다.
아들만 5명이 있었는데 얼마나 가난했는지 겨울에도 바지 없이 윗도리만 걸치
고 아랫도리는 내놓고 눈 위에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히안하게도 그 아
이들은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였다. 지금의 아이들은 여름에도 감기가 걸
리는데 말이다......
나는 처음 지게를 지니 지게가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 하여 곤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열심히 농사일을 거들며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우선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종이가 없어 남일면 고모네집에서 얻어온 책으로
공책을 만들어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전부 누런 재생지에 등사
한 책이였다. 반을 접어 책을 만들었기에 뒤집으면 글씨 없는 면이 된다.
잉크는 물감을 물에 풀어서 만들었고 펜은 형님께 부탁하여 학교에서 얻어왔다.
우선 날짜와 날씨 및 그날 일어난 일들을 하루도 빼지 않고 열심히 적었다.
이렇게 3년치의 일기를 정리하고 보니 농사짓는 일이 한눈에 들어 왔다. 이때
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미리미리 농사일을 때에 맞추어 준비
하고 계획을 짤 수가 있었다.
그때는 이 고장에서 고구마를 심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남일면의 고모네 집에
서 고구마씨를 얻어 와서 이른 봄 일찍이 사랑방의 아랫목에다가 흙에 묻어 싹
을 키워 넝쿨이 자라면 적당한 길이로 끊어 밭에다 심었다.
산비탈발에 심었더니 고구마가 밤과 같이 포삭포삭하여 아주 맛이 있었다. 그
래서 이름을 밤고구마라 하였다. 고구마는 습하면 질퍽하며 평지의 밭에는 둔
덕을 높이하여 그위에 심어야 한다. 다음해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구마씨
를 나누어 주었다.
이른 봄에 중학교 때 배운 병아리 부화방법을 실험해보기로 하였다. 우선 나무
판자로 상자를 만들어 호롱불로 온도를 맞추는 부화장치를 만들었다.
골방에 장치하고 거기서 밤낮을 기거하였다. 이유는 온도 조절을 수동으로 수
시로 해야 했고 호롱불이 꺼지면 모두가 도루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이었다.
오리알은 달걀보다 일주일 더디게 부화하기 때문에 오리알은 일주일 먼저 넣었
으며 수시로 달걀을 굴리고 장소를 바꾸어 주었다.
드디어 부화되어 병아리와 오리새끼가 한몫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부화율은
90%였다. 나는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고 할아버지께서도 아주 흡족해 하셨다.
그러나 나는 거의 한 달을 밤잠도 제대로 못자는 정말로 힘이 드는 일이였기에
이일을 그 후로는 그만두기로 하였다.
작년 가을 벼수확을 한 논에 심은 보리가 6월이되여 누렇게 익으면 보리수확을
하였다. 보리타작은 마당에 보리를 깔고 도리깨로 두들겨 패야한다.
덥고 껄끄러워 매우 힘든 작업이었으나 도리없이 치러야하는 과정이기에 참아
야했다. 도리깨질도 요령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도리깨가 제멋대로 움직여
곤혹스러웠으나 차차 요령이 생겨 나중에는 곧잘 하게 되었다.
겉보리는 동네 연자방앗간에 가서 보리쌀로 만들어 왔다. 큰 돌 판 위에 있는 큰
원형의 돌(직경 약 2m 정도)을 소로 끌며 돌고 도는 방법이었다. 연신 옆에서
는 물을 뿌리면서 밖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안으로 걷어 들이면서 보리쌀이 될
때까지 소를 돌렸다
적은 양은 우리 집 헛간에 디딜방아를 만들어 놓고 여기서도 보리를 쪘다. 둘이
서 디딜방아를 밟았다 놓으면 방아꽁이가 돌로 된 절구 속의 물에 불은 보리를
찧고 나면 다시 밟고 한사람은 연신 찧고 난 후 흩뜨리러진 보리를 쓸어넣고....
보리수확이 끝나면 산에 가서 연한 나뭇잎이나 풀을 베어서 논에 골고루 깔아
쟁기로 갈아엎어 놓고 기다렸다가 비가 오면 논에 물을 대고 쓰레질을 한 후 모
심기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보니 소로 논도 갈 줄 알게 되였고 쓰레질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소를 몰
고 금강을 건너 험한 산속으로 가서 봄에는 모심기 위한 나뭇잎을, 가을에는 겨
울에 땔 나무를 하러 머슴 없이 동네사람을 따라 다녔다.
강을 건널 때는 소등을 타고 건너는데 요령이 필요하다. 얕은 데는 소가 땅바닥
을 밟으며 걸어가는데 물이 깊어지면 약간 옆으로 살짝 누우면서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그때에 잘못하면 강물에 빠질 수가 있다. 짐을 싣고 돌아올 때는 소꼬리를 잡고
뒤따라 강을 건너면 되었다. 소는 둔해 보여도 헤엄을 잘 친다. 배우지 안했는
데도 말이다.
한참 기운 쓸 나이였으므로 그럭저럭 농사일에 익숙해졌으며 일 년 후에는 머슴
보다 내가 일을 더 잘하게 되었다.
밭에는 콩도 심고 목화도 심었다. 콩밭에는 열무씨를 뿌려 콩잎 그늘에서 크는
열무는 연하고 맛이 있었다. 비탈밭 위쪽에는 호밀을 심었다. 호밀은 땅이 비옥
하면 키가 너무 커서 쓰러지니 땅이 토박하여야 한다. 밭둑에는 호박을 심었고
완두콩도 심었다. 완두콩이 섞인 밥은 참으로 맛이 있었다.
텃밭에는 감자를 심고 감자를 캔 다음에는 곧바로 김장을 위한 무와 배추를 심
었다. 무와 배추를 수확한 후에는 바로 시금치와 하루나를 심었다. 이것들은
겨울의 눈 속에서도 얼어죽지 않고 이른 봄에 파란 채소로 먹을수 있어 좋았다.
지금이야 비닐하우스에서 사시사철 파란 채소를 먹을 수가 있으나 그때는 어림
없을 때였으니 이른 봄의 새파란 채소는 무척 귀한 채소임에 틀림없었다.
-계속-
첫댓글 수고하신 글 잘 보았습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좋은 내용 즐감하였기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다복하시고 건강하소서,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잘 보고
나감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자세하게 쓰신 농사일기 그때 그 심정을 생각하며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찾마주시고 좋은말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잘 보고 감사합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잘 보고감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올려 주셨군요. 정말 옆에서 보는듯 느끼게 잘도 쓰셨네요.
찾마주시고 좋은말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찾마주시고 좋은말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찾마주시고 좋은말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나의 옛날 이야기 글.36부 감사한 마음으로 즐감하고 나갑니다 수고하여 올려 주신 덕분에
편히 앉아서 잠시 즐기면서 머물다 갑니다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찾마주시고 좋은말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여러가지 좋은 글을 올려주시어 잘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늘 줄겁고 행복한날 되시기 바랍니다.
찾마주시고 좋은말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고생담 잘 보구갑니다 감사합니다
찾마주시고 댓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