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 독립운동유적지 탐방
나라사랑 봉사자 박 점석
나라사랑 봉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기념관 전시실 안내를 하다가 만주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을 하게 되었다. 만주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의 목적은 민족을 위해 살다간 안동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고 그분들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자 함이었지만 여행을 한다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며 참여하게 되었다.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과 함께한 탐방이여서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으로 참가한 탐방은 여행의 즐거움을 넘어선 감동의 연속이었다.
첫날은 심양의 고궁을 방문하고, 이튿날은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용정을 방문하여 용정중학교를 방문하고 윤동주 생가를 방문하였다. 일본유학시절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2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 생가에서 학창시절 영문도 모르고 즐겨 외웠던 “서시”를 가슴속으로 나지막이 읊어보았다. 일제가 우리말 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했을 때 친일 문학을 하지 않은 시인은 윤동주 와 이육사, 송몽규, 한용운 등 이라고 한다. 학창시절 별 헤는 밤을 즐겨 외우며 시가 좋아 무조건 따라 불렸던 구절 하나하나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버스에 올라 돌아오는 길에 내내 말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일송정 정자가 있는 산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고개를 돌리니 비암산이 바라보이고 산기슭에는 해란강이 흐르고 있었다. 해란강을 따라오면서 일송 김동삼 선생님을 회상하니 해란강가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모습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서대문 감옥 옥중 유언에서 남기신 말을 기억하며 백두산으로 향한다. 백두산 천지 주변에는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되고, 잦은 일기 변화로 일 년 중 10일 만 천지를 볼 수 있다는 천지의 모습을, 맑은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풍경을 스크린속의 영상을 감상하는 것처럼, 희열을 느끼며 바라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 보기가 어려워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데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신 선조님들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나라사랑봉사단의 자부심을 느끼며, 나라위해 몸을 바치신 분들께 감사를 드렸다.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옛 고구려 땅이었던 우리나라 문화재를 중국인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것에 분노하면서 갑자기 나라사랑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안동인의 만주지역 이동 경노를 찾아 나섰다.
백하 김대락과 석주 이상룡 일가가 압록강을 건너 처음 머물던 지역은 항도촌이였다. 망명지에 도착한 후 토착 중국인들의 견제와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청의 이주한인에 대한 조치가 완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큰 혼란을 겪으며 유하현 삼원포로 옮겨왔던 곳이다. 이동하는 도중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였고 토착 중국인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교유하는 데에 불편한 점이 많았으며 복장이 서로 달라 만주인들이 크게 꺼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주식이 좁쌀이나 강냉이였으므로 정착 초기 이주한인들은 식생활에 큰 곤란을 겪었고, 아울러 주거 환경도 열악할 뿐만 아니라, 집을 쉽게 빌리지도 못하여 곤란하였다고 한다. 기후 조건도 좋지 않고, 낯선 풍토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의 관청이 규정한 제도에 맞추지 않을 경우에는 공적인 활동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한계 때문에 석주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위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중국식 옷을 입고 생활하면서, 서간도의 농업환경과 경작방식도 검토하여 농업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계와 기술 보급으로 수전 개간을 확대시켜 나갔다고 한다.
삼원포 추가가는 석주가 이주 동포의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중국당국과 중국주민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1911년 서간도지역 최초의 한인사회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였던 곳이며, 또한 신흥무관학교의 모태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추가가의 대고산은 경학사 결사에 대한 논의를 하였던 곳이다. 논의가 본격화된 6월 이상룡은 “경학사 취지서”를 완성하여 경학사 사장으로 추대되어 한인사회를 주도하게 되었던, 대고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옛 신흥무관학교 터를 찾아 나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옥수수 밭, 조국의 독립을 위해 머나먼 이국땅을 찾아 헤매던 대한민국 안동사람들을 생각하며 침목이 흐를 때, 어디선가 나지막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으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신 할머니께서 부르시는 군가였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 되어 할머니의 노래에 맞추어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할머니의 노래가 끝나자 앙코르를 요구해서 할머니의 또 다른 노래가 이어졌다.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는 군가였고, 조국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의를 담은 노래였다. 그때 어느 봉사자가 우리함께 부르는 것이 좋겠어요. 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적어가면서 같이 합창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아! 아! 대한민국 아!아! 우리조국을....... 하늘도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신흥무관학교터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굶은 빗줄기가 휘몰아쳤지만 우린 그냥 비를 맞으며 학교터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 이곳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독립전쟁을 하기위해 땀 흘렸으리라, 잠시 묵념을 하고 백서 농장으로 이동 하였다.
백서농장은 신흥무관학교 학우단이 주동이 되어 심산 밀림고원에 제2군영을 만들어 정예부대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 군영이었고, 백서농장의 장주가 일송 김동삼 이였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가 부족하여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서 일 년에 6개월가량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하는 밀림지대에 들어와 독립전쟁을 하기위해 고생하신 선조들의 높은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나?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오고, 한참동안 걸어서 찾아온 백서농장 역시 옥수수 밭으로 변해있었다. 선조들의 얼이 서린 곳에 발자국을 남기며, 착잡한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아쉬움을 대신하여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서 나올 때, 하염없이 내리는 봄비는 조국을 위해 살다 가신 선조님의 눈물이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길림시내에 돌아와서 의열단 결성지를 답사하고 다음날에는 석주의 순국지 소과전자촌을 답사하였다.
서란현 소과전자촌은 석주가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생활했던 지역이다. 석주는 늙고 병든 몸이 되어 더는 조선인의 광복운동을 영도 할 수 없게 되자, 서란현 이도향 소과전자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석주 이상룡은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여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자처하여, 머나먼 만주로 건너와 동포들의 삶의 토대를 마련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민족교육을 추진하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향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전쟁을 위해서 독립군양성을 하시다가 조국이 독립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선생의 병세가 더욱더 악화되어 1932년 5월 12일, 75세의 일기로 서거한 곳이다. 마을에 도착하여 집이 있었다는 곳을 가보니 이미 주위에 중국인의 집들이 있고, 우물터에는 담장울타리가 세워지고 나무가 쌓여 있어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옛 모습을 회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석주의 산소가 있었다는 무덤자리를 찾아가니, 산등성이 역시 옥수수 밭으로 변해 버려서 어디쯤인지 확인이 불가능 했다. 1990년에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국립묘지에 모셨다가, 1996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역에 안장하였으니 다행한 일이다.
이후 안중근 의사가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역을 답사하여 안중근 의사가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의 모습을 흉내 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난날 안중근 의사는 생과 사를 넘나들며 고뇌하였을 이 장소에서 오늘우리는 그 모습을 흉내 내고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지하에 계신 안중근 의사가 노여워하실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김동삼과 영양출신의 남자현여사가 잡혀와 고초를 겪었던 일본총영사관을 방문하였다. 5박6일 마지막 날에는 일본731부대를 방문하였다. 세균전을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731부대 본부건물과 일부유적지가 남아있어, 일본 관동군 세균부대의 잔혹상을 확인하고 나서, 안중근기념 전시관을 들려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과 안중근 의사님께, 오늘 우리가 이렇게 웃으며 전시관을 방문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함을 남기고, 인천 공향으로 돌아왔다.
여행이 좋아서 참가한 만주지역 유적지 탐방은, 나라를 사랑하는 기회가 되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하신 안동인 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