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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작곡가 안성현, 그는 누구인가
나주 출신... 일본서 성악 전공한 로맨티스트 김선기/광주타임즈 문화부장
불운했던 한국 현대사에 매몰돼 금지곡 아닌, 금지곡으로 진흙 속에 묻어 두어야만 했던 노래 ‘부용산’.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몇 해전부터 이 노래는 국민들의 입을 통해 열창되고 있다. 본지는 ‘월북 작곡가’라는 이유 때문에 반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나주 출신 ‘부용산’의 작곡가 안성현을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 주>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작사ㆍ안성현 작곡>
구전가요 ‘부용산’은 슬픈 가사에 애조 띤 가락이 잘 어우러진 노래다. 지난 시절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고, 전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맥이 이어지고 있다.
부르지 못한 노래 ‘부용산’이 반세기 만에 다시 불려지고 있다. 누가 공식적으로 금지시킨 것도 아니면서 쉬쉬하며 숨은 입에서 숨은 입으로만 전해오던 노래가 누가 공식적으로 해금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실컷 목청을 뽑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999년 5월 29일 밤, 목포의 대형 레스토랑 뉴프린스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 씨(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초청 음악회에는 250여 명이 모여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이 자리에서 송씨는 박기동 시 안성현 곡의 ‘부용산’을 불렀고 피날레에는 목포시립합창단이 이 노래를 합창했다. 휴식시간에는 국회의원 한화갑, 탤런트 임동진 씨 등이 나와 이 노래를 경창했다. 이날 밤은 ‘부용산’의 광복 음악회였다.
‘부용산’은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있던 작시/작곡자에 의해 만들어져 목포에서 맨 처음 불리기 시작했고, 6?25때 작곡자가 월북하고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면서 지하로 숨어 호남지역에서만 구전되어 왔다.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해 지은 시가 애제자이던 소녀의 죽음을 추모한 곡으로 변한 이 노래는 전혀 사상성이 없이 그 애조가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이 곡이 빛을 보면서 정식으로 음반에 수록된 것은 가수 이동원 씨에 의해서이고 지난 1999년 3월 CD가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노래는 가사가 1절밖에 없었다. 그 후 송광선 씨가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2절을 보충할 방법을 모색, 박기동 씨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김성우 씨(한국일보 논설위원)를 통해 2절 가사를 팩스로 전해 받았다.
‘부용산’1절이 나온 지 52년 만에 작사자에 의해 2절이 나온 셈이다. 내용은 이렇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 노래 행운의 2절은 목포 음악회에서 처음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박씨는 이 가사를 김성우 씨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써놓고 보니 좀 껄끄럽게 된 것도 같고 너무 애상적으로 흐른 느낌이 없진 않지만 원래 ‘부용산’이란 시와 곡에는 그런 뉘앙스가 다분히 흐르고 있으니 어떡합니까. 눅눅한 음지만을 헤매던 이 곡이 소리의 주인공을 만나 햇볕 쏟아지는 양지로 나온다니 반갑습니다. 아옹다옹 쫓기고, 뜯기고 할퀴면서 이것도 사람 사는 동네인가 싶을 만큼 썩어 문드러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 중 몇 명이라도 이 노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얼마 후 ‘부용산’의 악보를 찾아냈던 목포 출신의 배우 김성옥 씨가 시드니로 가서 박씨를 직접 면담하고 왔고, 목포의 음악회는 김씨가 주선한 것이다.
‘부용산’ 광복음악회는 목포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노래의 가사의 원산지는 작시자의 고향이자 실제로 부용산이 있는 보성군의 벌교다. 벌교에서는 1999년 6월 하순께 가수 이동원 씨를 초청해 ‘부용산’을 시창(始唱)하고 노래비도 세웠다.
‘부용산’은 실은 목포에서의 광복에 한발 앞서 경북 포항에서 불려졌다. 지난 1999년 5월 ‘삶과 꿈 싱어즈’(대표 신갑순)가 포항공대와 포스코에서의 공연에서 이 노래를 합창으로 소개했다. 이것은 ‘부용산’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호남의 노래인 이 곡이 영남에서 불린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연배 이상의 호남인이라면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고 영남인 중에서는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래가 숨어다니는 동안 영,호남의 경계인 지리산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부용산’은 합일(合一)의 기호(記號)였다.
해방직후 광주서 첫 작곡 발표회 마련
‘부용산’과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진 나주 남평 출신 안성현(1920~?)의 ‘제2 안성현 작곡집’이 출간된 지 51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지난 2002년 8월 15일 필자의 집요한 취재로 발굴된 이 작곡집은 1948년 8월 목포에서 발간된 것으로써 그동안 안씨의 처조카 성경래 씨(49?광주시 북구 연제동)가 보관해오다 이날 공개한 것이다.
이 작곡집은 일제 강점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민들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詩)를 비롯해 ‘부용산’(박기동 詩), ‘낙엽’(안성현 작사?작곡), ‘앞날의 꿈’(조희관 詩), ‘진달래’(박기동 詩), ‘내 고향’(조희관 詩) 등 암울했던 민족의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노래한 23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안씨는 1920년 7월13일 나주 남평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 일본 동경 동방음악대학 성악부를 졸업한 신지식인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안씨는 장흥출신 성동월 씨(82?현재 부산시 진구 초읍동 거주)와 1944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특히 안씨는 해방 직후 광주에서는 처음으로 작곡발표회를 갖는 등 음악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가 작곡한 ‘부용산’은 당시 빨치산들에 의해 애창됐던 노래로 한때 금지곡으로 묶이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안씨의 처조카 성경래 씨는 “고모부의 음악적 행적을 찾기 위해 10여 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어렵사리 작곡집을 구해 간직해 왔다”며 “이번 기회를 계기로 ‘작곡가 안성현’의 올바른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안씨는 광주사범학교를 거쳐 조선대 음대 강사, 전남여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목포 항도여중에 재직하던 1940년대 후반 무렵 행방불명됐다.
부인 성동월 씨 부산에 생존
감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고 가슴 속으로만 불렀던 노래 ‘부용산’이 50여 년 만에 노래비로 부활했다. 아름다운 노래말과 애절한 곡조로 사랑받았던 노래 ‘부용산’의 시비가 지난 1999년 10월 1일 보성군 벌교읍 부용산 오리길에 세워진 것이다.
이날 제막식에는 노랫말을 쓴 시인 박기동 씨(84?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거주)와 작곡가 고 안성현의 미망인 송동월 씨 등 많은 출향민들이 모여들었다.
‘부용산’은 박기동 씨가 1947년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묻고 돌아와 쓴 시에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재직하던 안성현(월북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이 1948년 곡을 붙인 노래다. 수년 전,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남재희 씨가 어떤 인터뷰에서 “남도에서 ‘부용산’ 모르면 간첩”이라며 열창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곡이다.
노래 ‘부용산’은 해방과 전쟁 뒤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의 최대 히트곡이 됐지만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하면서 지하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하자 이 노래도 공식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가슴과 가슴속에서만 불려지게 되었다.
박 시인은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안 선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노래가 자신들의 신세와 비슷해서 그들이 즐겨 불렀던 것 같아요. 작곡가 안성현은 목포 항도여중 교사 시절 저와 단짝이었는데, 예술을 좋아하는 ‘엄마야 누나야’ 같은 낭만주의자였다.”며 “안성현의 아름다운 곡조 때문에 ‘부용산’ 시가 살았다”고 작곡가에게 그 공을 돌렸다.
이런 ‘부용산’의 사연이 지식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97년 가수 이동원과 안치환에 의해 처음 무대에서 불려졌고 지난 1999년 5월에는 ‘삶과 꿈 싱어즈’에 의해 포항공대와 포스코 공연에서 합창으로 소개됐다. 또 그해 5월 말께는 목포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초청음악회에서 불려졌다. 송광선 씨의 초청음악회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박기동 시인이 가사 1절이 나온 지 52년 만에 2절을 보내와 처음으로 공개된 자리이기도 했다. 가사 2절에는 1절의 애상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비극적 생애 뮤지컬로 재현
요절한 누이와 애제자를 추모한 노래 ‘부용산’이 60여년 만에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뮤지컬로 부활될 것으로 보인다.
1997년 가수 안치환이 불러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목포?벌교 일대에서 구전 되어온 노래 ‘부용산’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빠르면 올 가을께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뮤지컬 부용산’제작을 위해 지난 5월부터 화가를 비롯해 문인, 언론인, 연극인, 무용인, 국악인 등 지역 문화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현재 차분히 준비 중에 있으며, 이 작품은 광주시 궁동 예술극장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소설가 이지흔 씨의 미발표 소설 ‘부용산’을 원작으로 이씨가 직접 각색 중인 이 뮤지컬은 1940년대 목포 항도여중(현재 목포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박기동 씨(86)와 안성현 씨(6·25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가 각각 작사 ?작곡을 맡은 노래 ‘부용산’을 바탕으로 그려지고 있다.
요절한 누이와 제자를 그린 안타까움이 절절히 배인 이 노래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을 했다. 그러나 애절한 곡조로 인해 한때 빨치산이 애창, ‘금지곡 아닌 금지곡’ 신세가 된 ‘비운의 노래’이기도 하다.
특히 작사가 박기동 씨는 금지곡을 썼다는 이유로 40여 년 간을 떠돌다 지난 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고, 작곡가 안성현은 월북해 생사도 모르고 있을 정도다.
특히 이 뮤지컬은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이기도 한 안성현 씨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으로, 박윤모 광주시 연극협회장이 연출을 맡고, 기타리스트 서만재 씨(한국교원대 출강)가 음악을 맡아 안성현 씨의 미발표 곡 20여 곡을 소개, 그의 음악세계를 재조명하게 된다.
70년만의 수필집 ‘부용산’의 박기동씨
▲ =70년 만에 싹 틔운 문학의 씨앗
▲ =‘부용산’시인 박기동씨 수필집‘부용산’발간
▲ =운명적 삶 통해 미약한 존재 아픔 담아내
▲ =요절 누이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뭉클’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빨치산의 애창곡’이란 딱지 때문에 지난 세월동안 ‘금지곡 아닌 금지곡’으로 지하에 묻혀있다 최근에야 빛을 보게된 ‘부용산’. 이 시의 지은이 박기동 시인(85)이 붓을 잡은 지 70년 만에 시집이 아닌 수필집 ‘부용산’(삶과 꿈 刊)을 내놓아 뭉클한 감동을 주고있다.
이 책은 역사 앞에 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운명적 삶을 통해 미약한 존재의 삶과 아픔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그렸다. 또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시대와 조국 광복 후의 격동기, 6.25 동란의 민족 상잔기, 그리고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의 다사다난하고 암울했던 한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가슴 저미는 이야기를 이 책은 싣고 있다.
박 시인은 1947년 순천사범 재직할 당시 아리따운 누이를 폐결핵으로 저 세상으로 보낸다. 박 시인은 고향 벌교의 뒷산인 부용산에 누이를 묻고 내려오는 길에 짤막한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바로 그의 운명과 결부된 ‘부용산’이었다.
이듬해 항도여중(현 목포여고) 3학년으로 ‘천재 문학소녀’라 불리던 한 학생이 또다시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다. 제자를 아꼈던 동료교사 안성현씨(동요 ‘엄마야 누나야’ 작곡자)는 우연히 박 시인의 시작노트에 적힌 ‘부용산’이라는 시를 보고 감동을 받아 곡을 붙이게 된다.
안씨는 뒤에 무용가 최승희의 권유로 북으로 갔다. 이때부터 ‘부용산’은 수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6.25때 빨치산이 애창했다는 말이 돌면서부터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박 시인은 이같은 ‘이념의 오해’ 때문에 국가 기관의 감시대상으로 분류됐다. 교사직을 내놓고 40여년을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난 1993년 호주로 이민, 현재 7평 남짓한 방에서 홀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선기/광주타임즈 2002년 06월 03일
안성현씨 작곡집 50년만에 빛보다
‘부용산’과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진 나주 남평출신 안성현씨(1920~?)의 ‘제2 안성현 작곡집’이 출간된 지 50년 만에 빛을 보게 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4일 오후 본사 취재팀에 의해 발굴된 이 작곡집은 1948년 8월 목포에서 발간된 것으로써 그동안 안씨의 처조카 성경래씨(48·광주시 북구 연제동)가 보관해오다 이날 공개한 것.
이 작곡집은 일제 강점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민들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詩)를 비롯 ‘부용산’(박기동 詩), ‘낙엽’(안성현 작사·작곡),‘앞날의 꿈’(조희관 詩), ‘진달래’(박기동 詩), ‘내 고향’(조희관 詩) 등 암울했던 민족의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노래한 23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안씨는 1920년 7월13일 나주 남평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 일본 동경 동방음악대학 성악부를 졸업한 신지식인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안씨는 장흥출신 성동월씨(80·부산시 진구 초읍동 거주)와 1944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특히 안씨는 해방직후 광주에서는 처음으로 작곡발표회를 갖는 등 음악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가 작곡한 ‘부용산’은 당시 빨치산들에 의해 애창됐던 노래로 한때 금지곡으로 묶이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안씨의 처조카 성씨는 “고모부의 음악적 행적을 찾기위해 10여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어렵사리 작곡집을 구해 간직해 왔다”며 “이번 기회를 계기로 ‘작곡가 안성현’의 올바른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안씨는 광주사범학교를 거쳐 조선대 음대 강사, 전남여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목포항도여중에 재직하던 1940년대 후반 무렵 행방불명됐다.
김선기/ 홍선희 광주타임즈 2002년 0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