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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四君子
梅蘭菊竹... 너무나 익숙하게 들어왔고,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군자.
눈 속에서 꽃부터 피어나 청아한 향기로 봄을 알린다는 매화, 척박한 틈에서 고고한 향기를 내품으며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난초, 서리 내린 늦가을, 모든 꽃들이 지고서야 만개하는 국화, 그리고 속은 비었으나 수직으로 자라며 사시사철 맑은 바람을 품은 대나무...
<이정(1554-1626)/난죽...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알았고,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얻은 최고의 수확...^^ 그는 묵죽의 대가이자, 조선 사군자화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빙자옥질(氷姿玉質), 금란지교(金蘭之交), 오상고절(傲霜孤節), 죽림칠현(竹林七賢)... 모두 사군자와 관련된 고사성어들이다. 대나무와 매화에 소나무까지 포함한 세한삼우(歲寒三友)도 있고, 삼국지에 나오는 매림지갈(梅林止渴), 망매해갈(望梅解渴) 등등의 고사들도 적지 않지만, 아무래도 사군자는 동빙한설(凍氷寒雪)이나 풍월주인(風月主人)을 배경으로 해야 제 맛이 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사군자를 매개로 북풍한설(北風寒雪), 어떤 고난 속에도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고, 음풍농월(吟風弄月), 유유자적 자연을 벗 삼아 은일한 낭만을 즐기거나, 지란지교(芝蘭之交), 고고한 향기처럼 그윽한 우정과 신의를 노래할 때 사군자를 내세웠으며, 때로는 맹종죽(孟宗竹), 반죽(班竹), 연명화(延命花)처럼 효행과 정조, 장수와 번창의 의미로도 인용되었다.
<어몽룡(1566-1617)/묵매... 조선 중기 문인화 삼절로 조선 최고의 묵매화가... 해설 ; 청담하고 고아한 정취를 강조했다... 제시(원대 매화니의 시) ; 종일 봄을 찾았으나 봄이 안보여, 짚신 신고 고갯마루 구름만 밟고 다녔다. 돌아오다 우스개로 매화냄새 비벼봤더니, 봄은 가지 끝에 이미 가득 와 있네.>
그렇게 보면 사군자는 장수, 부귀, 번성 등 현세적 염원을 담기도 했지만, 절조와 은일, 우정과 효행 등 도덕적 이성과 당위의 필요 속에서 공맹의 춘추전국시대부터 함께 해 왔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조선 후기를 지나 일제 강점기까지 조선 사대부들과 유학자들에게 선비가 따라야 하는 군자의 표상, 즉 군자기상(君子氣像)의 소재로 우리들에게 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2. 사군자화는 언제부터, 왜 그렸을까?
그러면 사군자는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왜 그렸을까? 금란지교처럼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는 난초의 향기를 매개로 우정과 신의를 노래했지만, 이것이 유학자들의 시서화중 주요한 주제로 부각된 것은 송나라때(소식, 미불 등의 문인화론, 1100년대), 요나라와 금나라, 소위 중국인들 입장에서보면 변방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한 이후부터 유행이 된듯 싶다.
그 유행이 고려에 전파되면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1100년대)과 정지상 등 유학자에 의해 그려지고, 주자학을 국시로 천명하여 유학자가 사회주도층으로 부상한 조선시대에 필수교양으로 부상된 거 같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산수나 인물보다 대나무 잘 그린 사람을 화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남북방 오랑캐에 불과한 왜국과 청나라의 침탈로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받은 조선중기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다, 다시 1700년대 중반 진경산수의 득세로 잠시 주춤해지지만 조선 유학이 관념의 극치로 내달은 세도정치시기에 크게 확산되고, 일제강점기로 맥을 이어간다.
<조지운(1637-1691)/묵매... 해설 ; 과도한 생략이나 평면적인 화면구성, 이완된 필치, 꽃과 가지의 인습적인 묘사로 실재감이 떨어지며, 함축된 기세에서 나오는 탄력과 긴장감도 미약하여 조선중기 묵매화풍이 양식화되는 기미를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거의 비슷한 구도의 묵매화가 있다...>
이런 시각에서 요약하면, 사군자화는 성리학자들이 외세의 침입이나 부패한 권력과 사회에 탄식하며, 한편으론 저항정신의 표출이기도 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도피와 회피, 그리고 망국에 대한 슬픔 등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이와 비슷하게 임진왜란과 양자호란 등 조선 유학자 입장에서는 오랑캐의 침입을 받으면서 오히려 강해지는 중화사상까지 접목시켜 유행한 문인화의 주제였다. 그러면 군자의 표상이자, 문사의 아취, 시인의 풍류, 망국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사군자화를 서사적이며 외적인 이유만으로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 선비들이 즐겨 그렸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문인화의 내적 변화의 계기를 인문적 사상사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3. 조선 사대부, 선비들의 사군자 문인화론
우리에겐 자연을 도의 구현체나 담지자로 인식한 도교적인 소우주관이 오랜 세월 천착하면서 자연의 의인화와 인간의 자연화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인간과 자연을 일치시키려는 관점이 있었고, 사군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효제충신(孝悌忠信)과 학문을 두루 갖춘 군자의 8덕목과 일치하는 소재였다. 여기에 사물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 아니라 이(理)로 본다는 성리학적 사물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미의식은 사군자를 완상(玩賞)하고 상찬(賞讚)하고 창작하면서 상징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사군자를 탐리(探理)한 옛 성인과 문인들에 감응하고 정신을 계승하는 동질화 체험이기도 했다.
또한 작가의 주관적 심의와 흥취에 인격과 교양 및 이상과 염원까지 포괄하려는 문인화의 등장은, 대상물에 내재된 철학적, 문화적 함의를 작가의 품성과 교양을 통해 재창조하는 그림을 요구하였고, 심안(心眼)으로 대상을 궁구하여 군자의 이상과 자연의 도를 발흥시키는 것이 창작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더군다나 사군자의 단순한 조형성은 붓글씨의 형상성과 일치하여 시서화(詩書畵)일치가 강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식은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지시(畵中之詩))”했고, 추사는 “난을 치는 법은 반드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연후에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추가 김정희(1786-1856)/염화취실... 제시 ; 이것은 끝폭이 된다. 새로운 법식으로 그리지도 않았으며, 기이한 격조로 그리지도 않았다. 그런까닭으로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게 되리라. 거사가 명훈에게 그려준다.../ 남들은 싯구없이 시정을 느끼게 한다는데, 추사는 아예 평가도 쓰고, 왜 그렸는지도 당당히(?) 과감히(?) 자신이 쓰고 싶은데로 쓰면서 밝혔다...^^ 단, 그 제시와 낙관, 인장 등을 적절히 배치하여 안정된 구도와 전체적인 짜임새에서 완성도를 높일 줄 아는 미감을 가졌다... 아무튼 추사의 문인화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문인화와 품이 다르다...^^>
싯구가 없어도 시정을 느끼게 하고, 작가의 성정과 학식을 암시하는 그림이라야 이상적 문인화가 되고, 글을 읽고 심신을 수양하면서 일어난 감흥을 화폭에 옮겨내는 것을 문인화의 필수적 특성으로 간주했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사군자는 산수화의 중량감이나 인물화나 화조도가 요구하는 사생적 기술에서 자유롭고, 자연의 섭리와 군자의 이상, 현재의 욕망이 투영된 사군자화는 사대부의 여기(餘技)와 묵희(墨戱)의 방편으로 직업적 화가들과 차별성을 유지하면서, 작가와 감상하는 이들이 교감을 나누며 교류하는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4. 조선 사군자화의 미술사적 전개
1) 그러면 조선에서의 사군자화는 어떤 미술사적 흐름을 가지고 전개되었을까? 앞서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고려시대 김부식과 정지상 등이 대나무와 매화를 잘 그렸다는 말이나, 조선초 화원선발에서 대나무 그림을 1등으로 삼았고, 세종대왕이나 성종 등이 난을 잘 쳤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문헌에 기록되고 1400년대 강희안이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하지만, 실제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드물고, 원대 사군자풍이 남아있는 조선초기 사군자화는 문헌자료와 청화백자 등을 통해 경향성만 유추할 수 있다.
2) 사림의 태두 조광조의 몰락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중기 ;
조선적인 성리학 체계와 문화가 기반을 잡아가면서 새로운 시도들이 일어나면서 수묵문인화가 유행하고 임진왜란과 양자호란을 통해 정립된 조선의 정체성과 사대성이 사군자화를 통해 표출된 시기였다. 율곡 이이에 의해 정립된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초창기 이념미가 강하게 표출된 조선 문인화가 탄생한다. 문인화 삼절로 조선 묵죽(墨竹)의 최고봉이라는 이정과 묵매(墨梅)의 최고라는 어몽룡, 황집중이 그들이다. 소재의 특징이 명료하게 부각되는 화면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한 조형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정의 묵죽화는 조선 묵죽화의 전범이 되었다 한다.
<이정/풍죽...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인 이정의 그림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 해설 ; 중국의 풍죽은 대체로 바람이 보이는 듯하고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게 기세를 발산하여 그린다면, 이정의 풍죽은 바람이나 또는 바람이 부는 정경을 묘사하기 보다는 이를 견뎌내는 대나무의 응축된 시게를 표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 이런 이유로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강렬하면서도 순간적인 인상을 준다.>
또한 대나무나 매화에 비해 비중과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난초와 국화도 이 시기에 그려지기 시작하는데 이정 등의 난그림을 보면 명대 이후 봉안, 상안, 파봉안 등의 기법과 전혀 다른 초기 형태도 알 수 있지만, 조선 초기의 건실함과 역동성, 왜란 호란 등의 위기가 주는 절박함과 비장함, 이를 극복한 자신감 등이 투영된 이 시기 사군자화는 직설적일 만큼 강경하고 명징하게 강조되는 주제의 상징성이 이 시기 특징이다.
<이정/난죽... 해설 ; 난을 치는 기법중 난엽이 시작하는 부분의 구성과 난엽이 뻗어 나가는 방향과 방법에 따라 화자별 시대별 특징들이 달라지는데, 이 그림은 조선후기 김정희 이후의 난그림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다르다.../ 또한 꽃대에 여러송이의 꽃이 난엽을 따라 피어난 걸 보면, 이것은 난초라기보다 혜초가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 추사의 그림도 내가 보기에는 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3) 명의 몰락과 청나라가 등장하는 전환기의 1600년대 후반에서부터 1700년대 시기 ;
북종화풍 영향과, 관념적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사실성과 현장감이 전제된 진경산수풍속화가 유행하고 사생적 회화미가 강조되면서 사군자화는 부진해지다가 1700년대 중반 남종화풍의 문인화가 본격 등장한다. 유덕장, 윤득신 등에 의해 조선고유색이 계승되다가 심사정, 강세황에 의해 남종화풍이 수용되어 유행하고, 김홍도의 서정적 사생화와 강세황의 남조화풍은 추사 김정희 주도의 청조 문인화풍으로 변하게 된다.
<겸재 정선(1676-1759)/석국... 해설 ; 국화를 통해 문인적인 아취를 드러내려 하지도 않았고, 필력을 과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연 상태의 국화를 사실적이고 아름답게 옮겨내고자 했다...>
담백하고 원만한 필치와, 여유롭고 서술적인 화면구성과 서정적인 묵죽으로 유일하게 맥을 이어간 유덕장, 사실성을 중시하여 진경산수화풍으로 대상을 아름답게 옮겨낸 겸재 정선의 자연스러운 석국에 이어, 명의 화풍을 수용하여 묵희의 필치로 사의성을 강조하고, 회화성에 기초해 시정과 서정성을 고양시켜, 서예적 필치와 군자의 상징성에 얽매였던 조선중기 사군자화를 과감하게 벗어나 변화를 꾀했던 심사정과, 문인적인 아취와 엄정함을 동시에 갖추며 진경산수풍속화풍에서 사군자화를 주류로 부상시킨 강세황이 이 시기의 대표인물인데, 바로 다음 김홍도 대에 와서는 사군자화의 긴장감과 서정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심사정(1707-1769)/괴석형란... 해설 ; 건습,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특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난엽, 난화를 펼쳤는데 가볍고 소박한 필치로 화흥이 쫓아 붓 가는대로 그려냈다. 조선중기 사군자화의 강경하고 집약된 기세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절조와 기개를 느끼기도 어렵다. 다만 자신의 위취를 담아내고 묵희를 즐기면 그뿐이다.>
<강세황(1713-1791)/묵란... 해설 ; 단아정중한 문기... 통활한 여백에 단정하고 명징한 필치로 쳐나간 난엽과 난화가 만들어 내는 조화에서 탈속한 여유로움과 담박함이 흘러 넘친다.../ 심사정과 비교해보면 훨씬 부드럽다...>
4)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를 전후한 조선후기 ; 단원 김홍도, 임희지 등에 의해 계승된 사군자화는 지조나 절개의 상징의미와 법식이 완전 퇴색하고, 파격적 자유로움으로 화자의 희노애락과 감흥을 풀어내는 매개체로서 표현자체에 탐닉하는 다양한 소재에 대한 그림 중 하나로 바뀐다.
<김홍도(1745-1876)/신죽함로... 해설 ; 죽간을 왼쪽으로 대담하게 쳐올리면서 화면을 대각선으로 양분하는 통쾌한 화면 구성법이나, 죽지를 좌우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윤필법은 아무나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이 아니다... / 사실 김홍도는 풍속화뿐만 아니라 도화서의 전문화원으로 왕실행사에 대한 그림,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불교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천부적 자질과 독창성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강세황은 극찬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신위(1769-1847)/편연수죽... 해설 ; 신위는 명청대 각종화보, 스승인 강세황의 묵죽화풍, 새로 유입된 청대 묵죽화풍을 적절히 소화시켜 자신만의 묵죽화풍을 정립시킨다... 그의 대나무는 절개와 지조가 아닌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대한 표현이다... / 거의 같은 시기 두사람의 그림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18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조선말기, 고려부터 시작된 사군자화와 문인화에 법고(法鼓)창신(創新)으로 조선말기 화단의 주류로 부상하는 게 청조 고증학에 기반, 일세(一世)통유(通儒)한 김정희의 추사화파다.
<김정희(1786-1856)/산상난화... 제시 ; 산 위의 난초꽃은 아침에 피나, 산허리 난초꽃은 아직 봉올다. 그린 사람뜻한 맘 더디 피란 것, 동풍만 수고로이 사이에 넣나. 이는 그윽하고 청순한 한떨기 꽃, 알려지기 싫어서 연하에 숨다. 오가는 나무꾼 혹시 길낼까, 높은 산 하나 그려 막아놓았다. 두구절 모두 판교의 시다. 거사.../ 추사 난법의 요체로 삼전(三轉)법이라는 게 있는데, 한마디로 난엽(잎파리)을 그릴 때 강약 조절을 세번 한다는 말이다... 누르고 떼기를 서너번 반복하여 태세를 조절하였는데, 이는 난엽의 형태에 변화를 주어 운율감을 중진시킬 뿐만 아니라 기필에서 수필까지 동일한 필력을 유지하게 하는 비결로, 단정함과 활달함, 강건함과 유연함이 절묘한 대비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백인산 연구위원은 설명하고 있다...>
사실 추사는 글씨로만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화단 등과 조선 문예활동에서 그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으로 서화동원(書畵同源)론에 입각해 구축한 추상적 이념미와 그의 난죽법은 국제화 될 정도로 자장이 지대했다. 김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군자의 고전적 특징인 고고한 이념미의 표출과 서예적 법식의 준용을 강조하면서 추상적 이념미의 구현에 골몰하는데, 이정, 유덕장과 함께 조선 3대 묵죽화가인 신위부터 시작하여 발전하고, 추사화풍은 단정함과 활달함, 강건함과 유연함이 절묘한 대비와 조화를 이뤄 이하응, 민영익으로 계승된다.
<조희룡(1789-1866)/난생유분... 부채를 흔들어 바람이 불면 난 향기가 저렇게 끊어질듯 이어지며 청아한 바람이 될까?^^ 이번 전시와 내가 본 사군자화중 제일 해학적이고 재미있었던 그림이다...>
한가지 기억할 것은 추사의 제자인 조희룡, 소치 허유, 오경석 등에 의해 난초가 많이 그려지고 매화사랑이 크게 확산되어 조선 문인화 특유의 화법과 정신이 전승되었지만, 1800년대 후반 이념미를 강조한 고답적 문인화풍이 정차 형식화되어 가고 청조 문인화풍이나 화훼적 상해파 등의 영향이 커지면서 장승업(1843-1897)으로 대표되는 기교적이며 장식성이 강한 화풍이 각광을 받았는데, 이때 허유도 군자의 덕목과 품성을 상징하는 사군자화보다는 부귀의 상징인 모란화에 치중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1898)/묵란... 제시 ; 검은 가죽의 작은 안석과 푸른 깁 창문, 화분 속 몇줄기 난초에 감탄한다. 강남의 비구름은 만천리지만, 청산의 나의 외갓집이리...>
<이하응/묵란... 제시(주역의 13번째 괘, 천하동인에 나오는 말) ; 같은 마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 / 김정희의 제자 이하응은 난엽을 치면서 추사의 삼전법을 따르기는 했지만 끝부분이 완전히 다름을 비교할 수 있다...>
<민영익(1860-1914)/석죽... 해설 ; 분방한 필치의 비위와 죽엽이 화면을 가득 채운 이 작품에서 공통되게 느껴지는 주된 정서와 미감은 압축된 정제감이나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풍부한 표현성이다. 이렇듯 강렬한 표현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청대 양주화파 묵죽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조선말기 묵죽화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죽간, 죽엽, 죽절 등 대나무 각 부위의 형태를 명확히 유지하면서 강경한 기세를 담아내고 있으며, 죽엽의 조합과 묘사에서도 일정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어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정돈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대소 죽엽군들의 위치와 은형의 안배를 적절히 구사하여 화면의 긴장감과 집중도를 높였다. 상해파에 비해 훨씬 엄정하고 소산한 느낌을 준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족으로 20대에 조선의 병권과 재무권, 외교권을 장악한 당대 최고의 실력자가 된다... 중도개혁파로 친청의 입장을 고수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에 의해 제1호 암살대상이기도 했고, 민영익이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기도 했다... 친러 정책에 반대 1차 망명하고, 을사조약후 고종폐위와 관련 상해로 2차망명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굳이 민영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조선말기 최고 실력자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그림에서 망국의 한이 느껴지는가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송나라와 명나라 유학자와 권세층이 느끼는 망국과 조선의 망국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그런 변화속에서도 추사의 사군자화풍은 석파와 운미로 이어지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왕가의 엄중한 풍모와 당당한 기개가 있었다면, 조선 사군자화의 대미를 장식한 민영익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명료하고 엄정한 필치로 정제된 느낌의 전통적 미감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다양한 난죽화법이 있었지만, 그 맥은 독립운동가였던 김진우 등을 거쳐 옥봉 조기순에 의해 2000년까지 이어진다.
5) 이렇게 사군자화에 대한 시대적 변천을 요약하면 ;
유학이 국가 지도이념으로 부상한 송의 영향으로 고려시대 대나무와 매화그림을 통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이이의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탄은 이정과 어몽룡은 초창기 이념미가 강조된 대나무와 매화를 그렸고, 이때 최립에 의하면 대나무를 으뜸으로 삼고, 난과 매화를 다음으로 쳐주고, 국화는 제일 적었던 것 같다.
<안중식(1861-1919)/추국가색... 제시 ; 가을국화는 아름다운 빛깔이 있다.../ 중국화를 많이 모방했던 장승업의 제자이며, 그 역시 청조의 관념적 청록산수와 고사인물도 등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도영(1884-1933)/묵국... 화제 ; 수우(오랜친구)... 해설 ; 최북의 금국, 심사정의 오상고절 등과 비교하면 이도영의 묵국이 사생성이 뛰어나다. 위 그림 안중식의 제자로(스승과 제자의 그림을 비교해보라) 정통묵국을 마지막으로 쳐낸 이가 이도영이다...>
진경산수와 풍속화풍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 퇴조한 사군자화의 명맥은 유덕장을 통해 외롭게 이어질 때, 남종화풍을 수용한 심사정에 의해 변화의 단초가 만들어지고, 이를 완성한 강세황에 의해 다시 주류로 부상, 단원 김홍도에 이르러 사생적 회화성이 강조되었다가 신위가 청조 사군자화풍을 이어받아 재차 변화하고, 다시 추상적 이념미를 강조한 추사 김정희에 의해 일통되어 난초를 중심으로 매화그림이 크게 유행하였다. 석파 이하응과 민영익을 통해 전승된 사군자화는 일제강점기 김진우에 의해 대나무가 대미를 장식한 것 같다.
<조동윤(1871-1923)/채란... 제시 ; 깊은 숲의 종자라 이르지만, 꽃 골짝 향기는 오히려 어여쁘다. 바람의 힘에 감기지 않는다면, 오찌 소상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영운인형법정(영운 김용진에게 선물하다는 뜻)... / 이 그림과 아래 그림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김진우(1883-1950)/묵죽...해설 ; 죽간은 창처럼 곧고 댓잎은 칼처럼 삼엄하여 식물이 아니라 마치 금속 같아서 병장기 창고 같은 모습이다. 이는 일제를 향한 저항의식의 표출이었으니 이로써 조선묵죽은 전에 없던 상징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통죽간의 굳센 마디는 결코 부러지지도 않을 것 같은 강인함 그 자체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진우의 묵죽은 추사화파 이전의 구성방식으로 돌아간 셈이 된다... 민영익 이전 묵죽이 대개 사선으로 올라갔던(김홍도) 것과 차이가 나며, 대 아래가 돌로 감춰진 민영익 석죽과도 다르다.../ 김진우는 12세에 의병대장 유인석의 문하에 입문하여 항일광복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였으며, 묵죽으로 항일의지를 포출한 당대 최고의 묵죽화였고, 상해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다 3년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감옥에 있을 때 자가 묵죽화풍을 이루었다... /
그리고 바로 위 그림을 그린 조동윤은 신정왕후의 조카로 조선말기에는 무관으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는 친일 행로를, 한일합방에 커다란 공로를 세우고, 영친왕 강제 결혼 추진, 고종황제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르게 하는 등 친일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림으로 사람의 한 생애와 정신을 완전하게 추적할 수 없지만, 같은 시기 같은 시대에 정반대 길을 걸었던 두사람의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나란히 붙여봤다...>
<조옥봉(1913-2010)/묵죽(1991년작)... 제시 ; 한 시내 흐르는 물 졸졸 소리내고, 시내 위 늘어선 대는 저녁 연기에 닿았네, 누구라 문여가 그림을 시로 읊을 수 있으랴만, 붓끝은 작은 강과 하늘을 옮길 수 있을 걸세... / 옥봉스님은 바로 위 그림을 그린 김진우의 유일한 제자로 김진우의 명으로 도산 안창호의 옥바라지를 하고 김창숙과는 부녀지의를 맺으며 묵죽으로 이름을 떨치다 동학사로 출가 주지를 역임했다... / 해설 ; 앞과 뒤 대의 농담을 달리한 점, 죽각과 죽엽의 농담을 같이 한 점, 죽간이 곧게 올라간 점, 댓잎을 아래로 향하게 한 점, 돌과 땅을 그리지 않은 점, 키 큰대는 종이 끝까지 닿아있는 점은 김진우 묵죽의 특색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대나무가 많아 풍부해지고 댓잎이 부드러운 것은 스승과 제자 차이일까, 살았던 시대의 차이일까.../
마지막으로 이 그림을 올린 이유는 옥봉 조기순은 여성이라는 점, 스님이었다는 점, 2010년까지 생존해 계셨다는 점, 그리고 조선 사군자화의 마지막 맥을 이은 김진우의 유일한 제자였다는 점과 사군자화의 시작이 대나무였는데, 이제 마지막도 대나무 그림이었다는 점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임진왜란 전후, 양자호란을 거치고 다시 전란을 극복하고, 사림이 득세하고 왕권이 추락하고, 탕평책이 실시되고, 다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민란이 일어나고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이 붕괴하기 시작하고, 일제의 강점과 함께 몰락할 때 그들의 정신세계는 무엇이었고, 그런 그림을 당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는지...
조선이 몰락하고 일제 강점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사군자화에는 아직까지 춘추전국시대의 고사성어와 일화들까지 새겨진다.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사대주의와 중화주의는 그렇게 지독하고 깊었을까? 김정희의 서릿발 같은 강고함으로 날카롭게 새겨진 묵란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나라의 안위가 반영됐을까? 대각선으로 과감하게 그어버린 대줄기의 허허로움은 김홍도의 유려한 선에 묻혀버린 자족감은 아닐까? 의식(意識)과 의식주(衣食住)의 변화를 반영한 심사정과 강세황은 당대 어느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을까? 세종대왕의 현손 이정과 조선말기를 주도한 이하응은 왕손으로서 사회지도층으로서 무엇을 그리고 싶었을까? 이제는 그림을 통해 예술을 보는 게 아니라 나는 그들의 정신과 역할과 영향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조희룡/인천안목(人天眼目)... 그가 형태와 기법에서 추사를 충실하게 계승하려는 제자라는 점도 있지만, 나는 도록을 다시 볼때까지 이 그림이 추사의 그림이라고 착각했었다...^^ 백인산위원은 필선의 골기가 떨어지고 표현이 다소 번다하여 김정희의 묵란에서 느껴지는 강인함과 절제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평하고, 그의 필력과 미감이 성취를 이룬 대상은 매화와 대나무였다고 말한다... 한양의 도회적 분위기에서 배어나오는 감각적 세련미를 갖추었다는데, 아무튼 영인판본이 없다는 게 아쉽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오래 보았었다... 오른쪽 화면 밖으로까지 뻗어나간 난엽하나로 왼편의 모든 무게를 감당하는 구도도 인상적이었지만, 화제가 참 맘에 들었었다...>
<심사정(1761년 55세)/운근동죽(雲根凍竹)... 강세황의 청죽함로와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서, 극명하게 차이나는 두 사람의 화풍이 비교되어 더더욱 인상적이었다... 백인산 연구위원은 작품해설을 통해, 그의 이 그림이 생동감 표출이나 사생적인 배려, 서예적 법식 준수 등 모든 면에서 이전의 묵죽과 많은 차이가 있다(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상처받고 움추려든 대나무의 모습에서 현재 자신의 처지와 심회를 담아낸게 아닐런지 모르겠다고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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