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교회가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영적 선조로 확인, 이를 공표하다!/ 권현익
칼뱅의 말년이던 15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교회에는 카타르인들 혹은 알비인들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위그노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왕성해지면서 로마 교회가 이단 척결의 필연성을 알리는 소책자들을 속속 내놓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서 이들 카타르인들과 알비인들도 개혁 교회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559년 파리 고등법원 의장인 질 르 메트르는 ‘과거 로마 교회를 허물었던 알비인들과 리옹의 발도 이단들’을 하루에 600명이나 화형시켰던 필리프 2세를 예로 들면서, 위그노들에게도 극형 판결을 내리는 것이 온당함을 변호하였다.
1561년 툴루즈 고등법원의 장 가이는 세르네 수도사 피에르의 ‘알비인들의 역사’를 발췌한 편집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단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는 죄악 그 자체이며, 알비인들을 일소한 것은 역사의 웅변적인 본보기이다. 툴루즈의 위그노들도 알비인들과 동일한 운명을 맞도록 완벽히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 이단이 알비인들을 계승하고 있으며, 심지어 루터교도 알비인들 이단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격적인 언동이 시사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 선구 개혁자들의 정체성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들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선배와 후배요, 선조와 자손이요, 동일한 공동체의 다른 시대 새 버전일 따름이었다’라는 증언이 되는 셈이다.
이런 소책자들이 등장하면서 프랑스 개혁 교회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조상, 즉 자신들의 선구자들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개혁 교회의 선조는 루터가 중심이 된 독일 교회일 수가 있을까? 아니면 프랑스 왕국 내 다른 선조들이 존재했을까? 위그노들의 주 활동 지역인 랑그독에서 오래전에 활동하였던 알비인들은 과연 자기네 위그노와 어떤 신앙적인 연관성과 영속성을 갖고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과 결론을 얻는 일은 루터교회보다 프랑스 개혁 교회 자신에게 더 시급하였으므로, 1572년 님므 총회는 알비인들에 관한 본격적인 역사 연구를 결의하였고, 1595년에 이르러 몽토방과 몽펠리에의 목사 장 샤사니용은 ‘알비인들 역사’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알비인들은 알비 지역에 정착하여 위그노를 배출하게 되는 발도인들이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니콜라 비니에는 세 권으로 된 ‘적그리스도의 현장’에서 ‘알비인들’,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보헤미아 형제단’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전횡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헌신적인 노력을 한 개혁자들이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로마 교회에 항거하여 투쟁한 마르틴 루터보다 400년이나 먼저 우리와 동일한 교리로 신앙 고백을 하던 선조들로서, 우리와 동일한 신앙을 이유로 박해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는데, 어떻게 그 선조들을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지되어 오늘 우리의 시대까지 계속된 것이 아닌가?”
루터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인 마티아스는 이 카타르인들, 즉 알비인들을 발도인들과 동일한 증인으로 개신교회의 진정한 영적 계통에 속했다고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최근에 발견된 13세기의 문서들은 1300년경에 카타르인들이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발도인들)’의 교리를 충돌 없이 수용하면서 순순히 발도인들 공동체로 유입되고 동화되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우르센은 다음과 같이 썻다. “알비인들은 오늘날의 개신교를 낳은 개혁 계보의 기원에 위치하면서 당대 신앙 전파에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박해자들이 분개하며 잔혹하게 핍박하였음에도 그들은 신앙과 교리를 언제 어디에서든지 용감하게 전파하였다. 그 결과 잉글랜드의 위클리프인들, 보혜미아의 후스인들, 그리고 14세기와 15세기에 알어난 각 처의 개신교회들의 출현에 불쏘시개갸 되었다. 피에르 발도의 한 추종자인 올리비에는 발도의 종교적 신념을 알비 도시로 전달하였고, 발도의 성경 번역을 통하여 성경을 읽기 원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독서와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국 이것은 루터의 메시지였고, 바로 발도인들과 후스인들의 메시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알비인들과 발도인들의 가르침은 후스인들을 통해 루터에게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발도인들과 후스인들의 가르침이 루터를 통해 역사 위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타당하다.”
윌리암 존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발도인들, 카타르인들, 알비인들, 심지어 바울인들조차도 그들이 적들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뿐 사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신앙의 그룹들이었다.”
발도인들의 역사를 기록한 페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도인들은 매우 오래된 언어, 즉 그들이 거주하는 계곡 언어로 양피지에 쓴 신약 성경을 갖고 있었으며, 피에르 발도의 출생 20년 전인 1120년경에 이미 그들의 언어로 된 ‘무엇이 적그리스도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갖고 있었다. 예수회의 존 글레처조차도 1177년과 1178년에 툴루즈인들과 알비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교리, 규율, 생활, 교리적 오류는 모두 발도인들의 그것들과 동일한 것으로 그들은 발도인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독일의 카타르인들이나 밀라노의 파타린인들도 같은 시대의 신앙인들로서 발도인들과 동일한 신앙과 교리를 갖고 있었다.”
장 폴 페랭 목사는 총회와 노회의 지원으로 1618년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당시까지의 관점을 완전히 뒤엎는 것으로서 카타르인들과 개신교회 사상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해 주는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알비인들과 동류로 함께 인식되었던 발도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 콘스탄티노플 출신으로서 레옹에 거주한 어떤 이가 교회의 세속적 부요함에 항거하던 때로부터 연원하였다. 이는 결국 위그노들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617년 비트레 총회의 의장인 앙드레 리베는 총회 기간 중에 공식적으로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은 신앙과 교리에 있어서 개혁 교회와 완전히 동일함’을 다시 확인하였다. 같은 해 소뮈르 아카데미 교수인 존 카메론도 요한계시록의 박해받는 하나님의 교회 두 촛대를 ‘가난한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이라고 발언하였다. 위그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교자들의 책’(1554년)의 저자인 장 크레스팽은 “알비인들과 발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을 계승하였다”라고 명백히 말하였다. 존 폭스도 알비인들을 ‘개혁 신앙을 가졌던 집단’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그는 알비인들을 발도인들로 칭하기도 하였다.
교단의 공식적인 결정과 여러 저자들의 알비인들에 대한 재평가 덕분에 프랑스 개혁 교인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영적 선조를 확신하는 공감과 이해를 갖게 되었다. 결국 이 두 개혁 공동체들은 이전 시대에 “주님 앞에 선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11:4)로 여겨지게 되었고, 알비인들은 발도인들 교회의 일부로 여겨졌던 것이다.
‘위그노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프랑스 개혁 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필리프 모르네(1549-1623)는 ‘죄악의 신비’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항거는 모든 세대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다른 저서인 ‘교회론’에서는 “알비인들과 발도인들은 적그리스도에 항거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들이었으며, 교리와 관련하여 위클리프와 후스가 일치하였던 것처럼 알비인들과 발도인들 역시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는데, 이를 더 직접적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오늘 우리 개혁 교회와도 완전히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황주의의 역사’에서도 “이 시기에 우리 프랑스에서 발도인들 또는 알비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로마 교회의 모든 그릇된 전통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피에몽, 도피네, 비브레, 랑그독, 기엔 게곡들에서 교황주의의 부패와 인위적 교리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순수함과 단순함 안에서 강건하게 지켜 냈다. 알비인들은 초대 교회와 동일하게 ‘남은 자들의 진정한 혈통’에 속했으며, 알비인들에게서 마니교의 흔적 따위는 아무것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라고 밝혔다.
아그립파 도비네는 ‘비극’에서 사도들이 가르침을 보존한 진리의 증인들 가운데 발도인들과 함께 카타르인들, 얀 후스를 포함시켰고, ‘보편사’에서는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이 초대 교회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 사상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1620년 알레스 총회에서 투르의 목사 마티유 코티에르가 다시 한 번 알비인들을 개혁 선구자로 변호하였다. 1623년 샤랑통 총회는 스당의 목사 틸루아에게 새로운 알비인들의 역사 편찬을 요청하였다. 파리 샤랑통 교회의 목사 갸를 드레랑쿠르(1595-1669)는 “유럽 전역에서 로마 교회의 오류와 악습에 대항하는 개혁자들이 계속적으로 존재하여 왔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개혁자들은 요한 폰 베젤, 얀 후스, 프라하의 제롬, 존 위클리프, 그리고 좀 더 오래전에는 피에르 발도,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의 지도자였던 피에르 브뤼, 앙리 로잔, 베렌가리우스가 있었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복음적 교리가 고대 알비인들과 유사함을 증명하기 위해 더 이상의 자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알비인들과 발도인들은 로마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그들은 개혁 교회와 동일한 하나의 신앙을 가진 개혁 교회의 형제들이었다.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은 이미 500년 전에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일, 불가리아, 보헤미아, 잉글랜드, 프로방스, 피에몽, 롬바르디아, 칼라브르, 시실리, 피카르디 지역에 그들의 신앙을 전하였고, 이 신앙은 위클리프에게까지 전달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1669년 발도인들 교회의 목사 장 레제는 ‘보두아 혹은 피에몽 계곡의 복음적 교회의 일반 역사’에서 “알비인들의 신앙적 관점은 프랑스 개혁교회의 것과 동일했다”라고 말하였다.
1796년 자크 브레 목사 역시 “발도인들은 초대 교회 교리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네로 황제의 혹독한 박해’로부터 도망친 바울 사도처럼 도피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복음이 피에몽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클로드 튀랭, 베렌가리우스, 피에르 브뤼, 앙리 로잔, 아르노 브레시아, 피에르 발도에 의해 발도인들의 교리는 널리 전파되었다. 장 칼뱅도 발도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는데, 그의 사촌형 올리베탕이 발도인들 공동체의 바르브였다. 알비인들을 포함하는 이 개혁 운동의 근원은 피에몽의 첫 그리스도인에게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서술한다.
알비인들을 가장 결정적으로 변호를 한 사람은 런던의 위그노 교회 목사인 피에르 알릭스(1641-1717)라 할 수 있다. 그는 ‘알비인들, 고대 교회의 교회사에 관한 논평’에서 “알비인들과 발도인들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이 사도적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은 하나의 ‘개혁된 카톨릭’으로서. 끊임없이 이어진 교황주의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혹독한 폭력의 칼 앞에서 멸절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라틴 교회의 허무한 미신 사상에 물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13세기 뿐 아니라 16세기 이후에도 두 신앙 공동체들은 성경적 교리의 모든 부분에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알프스 계곡에 보존되었던 초대 기독교 신앙을 중세 미신의 시대에도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순수하게 보존하는 중대한 역할을 충실하고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참 교회의 역사>, PP 504-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