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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창을 이야기함으로써 오늘의 일본을 본다
- 동아시아가 열어가는 공공세계 -
다음은 일본의 양심적인 언론인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씨가 동일본대지진 직후에 보내온 김태창론이다. 지난호에는 한 일본인 학자가 본 일본에서의 김태창의 사상과 활동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평가한 일본사회에서 김태창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소개한다.
야마모토씨는 오랫동안 사상·종교·철학 분야의 전문기자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독립선언을 한 ‘퍼블릭 저널리스트’이다.
여기서 ‘퍼블릭 저널리스트’란, 야마모토씨에 의하면, “군산(軍産)복합체 하에서 영혼을 빼앗긴 매스컴에 소속되지 않고, 지구와 인류가 영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문명으로 ‘패러다임전환’하기를 바라는 ‘홀로서는·자립하는·독립하는 언론인”을 말한다고 한다. 또한 퍼블릭 저널리스트는 “자율적 양심에 입각해서 어떠한 단체나 조직과도 타협하지 않고, 공명ㆍ공정ㆍ자유로운 언론활동에 의해 하늘이 부여한 사명을 다하고, 단순히 사실을 좇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바탕으로 사실의 배후에 있는 진실ㆍ진상ㆍ본질을 통찰하고, ‘양심’에 눈을 뜬 동지와 공동(共働)해서 도리(道理)가 통하는 공공세계의 공창(共創)을 위해 힘쓴다.”고 한다. 야마모토씨는 이와 같은 ‘공공(하는) 언론’ 정신 하에 현재 「미래공창(共創)신문」이라는 자립신문을 발행하고 있고, 지 난 2011년 4월에는 「월간 공공철학」에 「교토포럼 20년을돌아보며」(제4호)라는글을기고한적이있다.(편집자)
월간 「未來共創新聞」 발행인 및 편집주간 야마모토 쿄시 (山本恭司)
서 론
1990년 2월부터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한 한국인 사상가 김태창씨가 1992년 10월에 낸 한 권의 책이 있 다. 공복의 사상(共福の思想)(合同出版)이다. 1990 년에서 91년에 걸쳐 일본의 여러 군데에서 강연한 기록이다. 한국에서의 경력과 업적을 모두 포기하고 일본
에 온 김태창씨는, 한사람의 한민(한겨레) 학자의 입장에서 본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 이 책에서 진솔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역사의 아이러니로 인해 1934년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일본인’ 카네다 세이치(金田成一) 로 태어났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이 날을 계기로 그는 한국인 ‘김태창’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그의 본바탕은 변함없이 한국의 애국자인 김구 선생이나 김좌진 장군과 같은 안동 김씨 가문에 속하는 명문가 출신이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 다. 공복의 사상이 나온 1992년은 일본의 거품경제 가 걷히기 시작한 때이다. 김태창씨는 이 책에서 당시에 경제대국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던 일본인에 대해서 해외에서는 일본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일본의 장래에 대해서 비관론이나 부정론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자’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인 선성(善性) 을 믿고 있다.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그 나라 최고중의 최고인 사람이 선생이 되지 않으면 그 나라에는장래가 없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카르타고, 앗시
리아, 잉카와 같은 나라들의 멸망의 원인을 조사했을때 내가 발견한 것은, 인간에 대한 신념이 없어지고 물자에 대한 신념이 인간에 대한 신념보다도 강해졌을 때에 멸망한다는 것이다”라면서, 일본은 카르타고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경종은 현실성을 띠고 있다.
거품경제가 걷힌 일본은 그 후 매년 국력이 저하되고있다. 젊은이는 일본의 정치경제에 실망하고, 자신의 장래에 꿈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 학생들의 자신감에 넘친 표정과는 대조적이다. 설상가상으로 올해(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은 일본을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아직까지 수습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후쿠시마의 원전사고. 이 사고는 ‘원자력마을’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일본의 지배계급들이 매스컴을 구슬려서 일본의 풍요로운 국토와 바다의 수확과 인간의 안전을 무시해 온 사실을 온 천하에 드러냈다.
동일본이 괴멸한다고 해도 서일본이 있다. 하지만 만 약에 후쿠이현(福井県) 와카사만(若狭湾)에 늘어선 14 기의 원자력발전소에 연쇄적 대형사고가 일어난다면, 칸사이(関西)의 인구집지대 전체가 방사능에 오염되 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또한 아오모리현(青森県) 롯카쇼마을(六ヶ所村)에는 방대한 양의 방사성 핵폐기물이 모여 있어서, 이곳이 지진 등에 의해 통제불가능하게 되면 동북지역은 괴멸한다. 극히 위험한 일본의 현실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이 여기에 이르러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여느 때처럼 살고 있는 일본인은 대체 어떤 사람 들인가?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보고 「탈(脫)원전정책」 에 착수한 독일이나 이태리와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일본 한 나라만 망한다면 자업자득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전사고는 세계에 방사능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것도 후쿠시마의 참사를 넘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둔감’은 ‘오만’과 표리를 이룬다. 이런 일본인의 멘탈리티에 대해서 김태창씨는 「공공철학」이 라는 철학적 차원에서 학식자(學識)와 대화하며 병의 뿌리에 메스를 가해 왔다.
그가 교토포럼을 무대로 세계와 일본 국내에서 발언해 온 것 가운데, 공공철학공동연구회에서의 발언록의 일부가 동경대학출판회에서 시리즈 공공철학(전20권) 으로 간행되었다. 이어서 시리즈 공공하는 인간(전5 권)도 순차적으로 간행되고 있다. 국내외의 유식자(有 識) 가운데에서는 김태창씨의 발언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김태창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고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김태창론」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나는 다행히 1992년 이래로 오늘까지 김태창씨의 얘기를 직접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98년에 시 작된 「공공철학공동(共同)연구회」(그 후 「공공철학공동 (共働)연구회」로 개칭)에 참가하여 취재할 기회를 얻었 다. 그리고 ‘공공세계’와 ‘공공인간’을 탐색하는 포럼에도 참가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아가서 포럼 참가자의 발언과 발표를 기사로 정리하면서, 김태창씨의 사상철 학을 살아있는 육성(霊)으로 들어 왔다. 내가 김태창 선생을 ‘논한다’는 것은 참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이런 기회를 놓치게 되면 후세에 뭔가 소중한 것을 전해주지 못하게 되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쓰기로 하였다.
내가 「김태창론」을 쓰게 된 동기는 그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독화론(獨話論)을 펴는 것은 역으로 김태창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졸문이 김태창철학의 핵심이라고 할만한 “함께 더불어 철학한다”, “함께 더불어 공공한다”를 독자와 함께, 그리고 현재 활약하고 계신 김태창 선생과 함께,동아시아와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장래세대와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이 대화-공동하여 만인(萬人)이 함께 행복해지는 (共福) 세계를 개신(開闢)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무시할 수 없는 이웃나라 일본
불타는 애국심을 안고 풀브라이트장학생으로 미국유학의 길에 오른 청년 김태창은, 그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그의 전공인 인간철학과 정치철학·사회철학의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의식적으 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무시”(공복의 사상. 이하 마찬 가지)해 왔다. 그것은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침략한 것에 대한 반동에서”였다. “한국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을 무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더 나라를 발전시켜서, 수준 높은 학문을 닦고 일본 학자보다 뛰어난 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에 새겼다. 김박사는 학자로서 충북대학교 사회과학대 학장을 역임하고, 하늘이 부여한 사명인 교육방면에서는 대형 강의실에 몰려든 학생들에게 정열을 담아 메시지를 전달했다. 학생운동이 한창인 학내에서 제자들로부터는 체제옹호적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반대로 국가권력으로부터는 체제비판적이라고 의심을 받았으며,한때는 체포감금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격동하는 한국사회에서 고뇌하고 신음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지식인이다.
김태창씨는 자신의 생애의 뜻을 일본 경영자들을 상대로 얘기한 적이 있다. 병약했던 15세의 소년 김태창은 치유불가능이라는 선고를 받고 병상에 누웠는데, 거기서 그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한다. 만약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남는다면 “말을 가지고 세상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 그는 극심한 병고 속에서 가진 것이라곤 언어능력밖에 없다는 자기 인식을 뚜렷이 했다는 것이다 (세와쥬크 오사카(盛和塾大阪) 발행 자기를 이긴 벗 (勝己の友)』113호). 매일 매일 가느다란 삶에의 의지를 지키며 “오직 말로서”라는 신념을 전신전념으로 다짐했다. 세계를 좋게 하는 것은 제도도 과학기술도 법률 도 부(富)도 아니다. 말을 통한 공감의 확대가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김태창씨는 확신했던 것이다.
말에 의한 활동의 기본은 진지한 ‘대화’이다. 세계의 4대 성인이라고 불리는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가 남긴 ‘대화’기록이 과거 2500년에 걸쳐 인류사회에 빛을 가져다 준 것을 생각하면, ‘말’에 의해 세상에 공헌하겠다고 결심한 김태창씨의 뜻은 높고 존귀하다.
김태창씨는 한국에서는 명강의로 대학 내외에서 유명했고, 국제학술회의에서는 발군의 어학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대학이나 연구소들을 다니면서 세계를 알고 국제 감각을 연마한 김태창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키게 된
다. 그럴 무렵에 그는 나중에 동경대학총장이 되는 사사키 타케시(佐々木毅) 법학부 교수와 한국에서 해후 하게 된다. 사사키 교수는 해박한 지식을 가진 김태창교수가 “일본을 깊게 아는” 것의 중요성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사사키 교수 등의 주선으로 김태창씨는 1990년에 동경대학 법학부의 객원교수 자격으로 일본에 온다. 사실 김태창씨는 지금까지 일본과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친은 일본 식민지시대의 일본인학교 교사에게 장래가 촉망된다고 평가받아, 일본에 와서 상업을 하게 되고 대성공을 거둔다. 부친이 생전에 경애한 일본인은 니노미아 손토쿠(二宮德. 1787~1856) 라고 한다. 아버지는 손토쿠의 인간미 넘치는 얘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어머니는 영시를 사랑하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할아버지는 한학자였다. 김태창씨의 가정은 다문화가 혼재해 있었다. 김태창씨가 실제로 일본에 와서 일본인과 접해서 느낀 것은 “밖에서 본 일본보다도 안에 들어와서 직접 살면서 본 일본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나라”(공복의 사상)였다. 김태창씨 안에 있던 일본무시는 엄격한 비판적 시각에서 나오는
일본존중으로 바뀌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민(民)의 공공’ 또는 ‘관(官)의 공공’
메이지 이후에 일본에 와서 일본을 사랑한 외국인은 많다. 그러나 라프카디오 한(Patrick Lafcadio Hearn.1850~1904)1)을 비롯해 많은 친일본적인 외국인이 체험한 것보다 훨씬 넓고 깊고 많이 일본을 살피고 일본인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일본의 참모습을 탐구했다. 그
런 가운데 김태창씨가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은 ‘언어경시’의 일본과 ‘타자부재’의 일본이다. 그 두 개의 일본상은 결국 ‘닫혀진 일본’이다. ‘일본인’이라는 동질의 이웃 이외에는 모두 경원과 제외의 대상으로서의 ‘이질적인 타자’이다. 도쿠가와시대에 쇄국을 했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상당히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인의 외국인에 대한 이질감이라고 할 만한 심성은 어떤 계기가 생기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그것은 가령 일본도를 만졌을 때의 그 싸늘한 감각일까?
그런 일본을 타자에게 열려있는 사회로 바꾸기 위한 철학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김태창씨의 눈에는 일본이 옹색한 ‘공’적(公的) 사회로 비치게 된다. 일본의 ‘공’은 서양의 ‘public’처럼 열려있다는 느낌이 희박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는 규범개념으로서의 ‘공공’이
빈번하게 논의되게 된다. 만화가인 고바야시 요시노리 (林よしのり)씨는 좌익을 깎아내리는 발언 속에서, ‘공’ 보다도 이기주의의 ‘사’로 기우는 전후 일본의 세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공을 되찾자!”고 하는 사조가 “일본사회는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논조가 되어 퍼져
나간다. ‘공’과 ‘공공’이 선이고 ‘사’는 악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김태창씨를 코디네이터로 하는 제1회 공공철학공동연구회가 열린 것은 1998년 4월이다. 논의는 「공과 사의 사상사」에서 시작되었다. ‘공’은 공간적으로 열리고 ‘사’는 닫힌다고 하는 논의다. 중국에는 “공은 선이고 사는 악”이라는 가치서열 이 있어서, 그것이 현대중국의 ‘파사입공’(破私立公)이 라는 슬로건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김태창씨는 지적한다. 즉 ‘공’은 규범개념이고 ‘사’는 반규범개념이라는 분류가 된다. 그리고 ‘공공’은 ‘공’에 친성이 있고, ‘사’의 반대에 위치한다는 것이 제1회 연구회의 기조를 이루었다.
나는 김태창씨에게는 속깊은 전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서술하듯이 거품경제가 붕괴된 후의 일본에는 ‘공공’이라는 이름하에 ‘관료사회’의 특징인 ‘공’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조가 있었다. ‘공’ 쪽에 있는 지배계급이 ‘선(善)’을 독점하고, ‘사’인 민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그런 전전(戰前), 메이지, 에도시대로의 회귀 를 꿈꾸는 향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태창씨는 먼저 ‘공’의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사’의 부정적인 면을 보아온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적ㆍ정치적 경향성을 과거의 사실로서 인정한다. 대륙인인 김태창씨의 깊은 생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공공철학공동연구회의 논의 과정에서 김태창씨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는 슬로건을 제시 하고, ‘공’쪽에 편향된 일본인들의 정신풍토에 변화를 일으키고 ‘사’의 긍정적인 측면을 점차 부각시켜 나간다. 그리고 ‘사’를 살아있는 개개인의 원초적 행복의지
로 재해석하고 그것이야말로 제도적 지배가치에 우선하는 참된 인간적 가치의 자연적 기반이 아니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한다. ‘공천하국가’(公天下國家)로서의 일본을 송두리째 탈구축하려는 심산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공적 성향이 강한 제도권 학자들의 반발과
적개심을 사기도 해서 충돌과 불화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에서 ‘사’로 비중이 이동하는 가운데, 포럼참가자로부터 ‘공공’(公共)보다도 ‘사공’(私共)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하는 의견까지 나오게 된다. 그리고 ‘관의 공공’에서 ‘민의 공공’으로, ‘공공’의 위상이 민(=인간) 쪽으로 이동한다. 그런 맥락에서 사기(史記) 에 소개된 일화를 인용하면서 중국고전에 나오는 ‘공공’ 의 용례가 “천하만민과 함께 공공한다”는 의미임을 상기시키고, ‘공공’이 ‘관’보다도 ‘민’(=천하) 쪽에 중심이 놓인 규범개념임을 밝혀 나간다. 또한 메이지유신의 사상 적 근거를 제공한 요코이 쇼난(横井楠)이 “천지공공 의 도리”(天地公共の道理)라고 한 ‘공공’은 ‘일본’이라는 틀을 넘어, 만국(=세계)에 열린 보편적인 규범개념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이르러 ‘공’에 포섭되려고 했던
‘공공’을, ‘민’의 ‘사’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서양의 ‘public’ 과도 다른, 동아시아발(發)의 (백성과 함께) ‘공공한다’는 논의에 도달한다. 이것이 ‘공’ㆍ‘사’ㆍ‘공공’의 삼차원상관 관계이다. 과연 이 정도 스케일의 사상적 구축활동이 근대 이후의 일본에서 행해진 적이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공공철학공동연구회의 논의는 ‘사상사’에만 머물지 않고, 시민사회, 국가, 경제, 중간집단, 과학기술, 지구환경, 자치, 법률, 도시, 리더십론, 종교, 지 식인, 조직, 경영, 건강, 의료, 세대간 관계, 자기론(自 己論), 매스미디어, 언어, 교육, 비교사상, 각 나라별 공 사문제, 고도정보화사회, 세대계승생생성(世代継承生生 性. generativity), 성차(性差)의 문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각 분야의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학자ㆍ지식인을 초대하여 ‘공공’의 시점과 관점에서 학제간 토론을 매달 일회의 빈도를 지키며 삼일간에 걸쳐서, 아침 9시부
터 저녁 6시까지 중간에 점심시간으로 1시간만 쉬는,시종일관 변함없는 빡빡한 대화일정을 지속해왔다.
적어도 내가 참가한 모든 포럼에서는 김태창씨의 논의는, 양심적인 성실함에 입각한 거시적ㆍ복안적(複眼的)ㆍ철학적ㆍ윤리적ㆍ실천적인 대화력에 뒷받침되어, 각 분야의 최고급 전문학자들과도 당당하게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해나가는데 조금도 굽힘이나 모자람이 없었다. 공자가 말하는 “대인 유학자”(大人儒)로서의 인간 적 기초 위에 학문을 쌓아온 김태창씨는, 모든 분야의 학문의 본질과 과제를 ‘공공’의 시점에서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공공철학’에 대한 공감은 일본 국 내의 유식자(有識) 뿐만 아니라 한자문화의 발상지 인 중국을 비롯하여 대만ㆍ홍콩ㆍ싱가폴에까지도 확대 되는 가운데, 시리즈 공공철학 전10권의 중국어판이 2009년에 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김태창씨의 탁월함은 ‘대화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천력과 발신력에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적 학술활동에서 김태창씨가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한 때의 업적을 보아도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 국내외의 약 2천여명에 달하는 일급 전문학자들을 참가시키면서 주도해 온 「공공철학 교토포럼」을 통해서 손색없이 발휘한 조직력ㆍ추진력ㆍ포용력도 가히 경탄할 만하다.
황폐한 땅에 뿌린 씨앗은 싹이 나도 금방 말라버리지만, 풍요로운 토양에 뿌린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리고 크게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예수가 든 비유인데, 김태창씨가 오로지 대화, 대화, 대화를 해 온것은 실은 밭을 경작하고, 뿌리를 깊고 깊게 땅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철학적 활동이었다. 에도시대를 포함 해서 300년 이상에 걸쳐 ‘공’이 일원적으로 민(民)을 짓눌러온 일본에서 ‘공공’을 “민과 함께 하는 공공”으로 의미변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이론구축이 필요하다.
갑자기 ‘민의 공공’을 표방하여 실천해봤자 모두가 달려들어 짓밟으려 할 것이 뻔하다. 일본에서 ‘관의 공’을 탈구축하는 싸움은 5년이나 10년으로 승부가 날 일이 아니다. 공공철학을 동아시아삼국의 범위에서 확실하게 구축한 상태에서 공동실천으로 들어간다는 전략이다. 동일본이 미증유의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입은 지금이 그 때이다. 지금부터 일본에서 ‘공’과 (민의) ‘공공’의 언론전(論戰)이 시작된다. 그 향방은 세계문명 의 전환이 되는가 못 되는가 와도 관계된다. 일본사상 사의 ‘세키가하라’(関ヶ原)2)이자 터닝 포인트이다.
무위국가(武威国家)
전전(戦前)의 일본에서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 는 슬로건이 주창되었다. ‘나’와 ‘사’는 ‘공’을 받들고 ‘공’에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때의 일본에서 ‘공’이란 국가이자 천황이었다. 이것은 ‘관’ (官)신앙의 히스테리적 고양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전 면 부인하는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전후에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가 들어오게 되자 ‘멸사봉공’은 ‘멸공봉사’(滅公奉私)로 180도 바뀌었다. 전자가 ‘공의 사사화 (私事化)’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의 사사화(私事化)’이다. ‘사사화’라는 도덕적 위기는 그대로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민(民)의) 사사화가 아니라 민(民)의 공공화이다.
일본에는 “꽃은 사쿠라, 사람은 무사”라는 말이 있다. 많은 일본인은 일본에는 ‘무사도’(武士道)라고 하는, 세계에 자랑할만한 정신문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왕벚나무는 바람에 미련없이 흩어진다. 그것은 마치 깨끗하게 할복하는 무사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무사도를 특징짓는 것이 할복일 것이다. 할복은 카마쿠라시대(1192년~) 무렵부터 널리 퍼졌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센노 리큐우(千利休. 1522~1591)에게 할복할 것을 명령하고, 오우슈우(奥州)의 패자인 다테 마사무 네(伊達政宗. 1567~1636)의 신하들은 마사무네의 뒤를 따라 할복했다(15명 이상).
도쿠가와막부가 무사에 대한 형벌로 정한 것이 할복이다. 그런데 이 할복은 겉으로는 “주군에 대한 충성 (忠義)의 증거”로 여겨져 왔다. 자기가 범한 죄를 배를 가름으로써(自死) 속죄하는 것인데, 주군으로부터 할복 의 명을 받고 자살하는 것을 “죽음을 하사받다”라고 한다. 그 의미는, 원래는 멸문지화를 당하고 효수형에 처해져야 하는데 주군에 의해서 죄를 감면받은 결과가 할복이라는 것이다. 할복은 자비로운 주군에 대한 충성 (忠義)의 증거이자 명예로운 행위로까지 여겨진다. 불 충(혹은 법률위반)을 사죄하는 가장 큰 방법이 이 자학 사(自虐死)였다. 이 가혹하기 짝이 없는 형벌제도는 “주군의 은혜(恩義)에 목숨을 바쳐 갚는다”고 하는 ‘일본문화’가 되었 는데, 그 ‘은혜’(恩義)란 실제로 베풀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뒷받침된 은혜는 결코 아니다. 주군과 무사는 단순한 태생의 차이이다. 실로 주군을 섬기는 무사의 인간으로서의 ‘사’는 인정되지 않고 막부제도라는 상자 속에서 무사는 주군에 대한 백퍼센트의 충성 즉 ‘멸사봉공’(滅私奉公)이 의사(疑似)규범이 되었다. ‘사’가 ‘윗 사람’을 상대할 때에 ‘사’는 무가치가 되고 ‘공’이 일방적으로 억압하였다. 그런 일본을 김태창씨는 ‘무위국가’(武国家)라고 본다. 무위국가체제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계속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일본국헌법이 공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쌀쌀한 비도리세계(非道理世界)에 등을 돌리고 여행 을 떠난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키소님 (木曾殿)과 등을 맞대고 지내는 밤의 추위로다”, “말을 하면 입술이 찬 가을바람”이라고 읊었다. 에도시대 270년의 ‘평화’는 무위에 의해 완전 억압된 ‘침묵’에 지나지 않았다. 덧붙여 말하면 몽테스퀴외는 법의 정신(1748 년)에서 도쿠가와(德川)시대 일본의 전제정치에 대해서 “곳곳에서 두려움에 떨어 한층 잔학해진 혼은, 보다 커다란 잔학에 의하지 않으면 이끌리지 않게 되었다”라고 쓰고, “이것이 일본 법률의 기원이자 정신이다”(野田良 之외 역 法の精神(岩波文庫, 1989))라고, 무시무시한 도쿠가와 독재국가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다. 이른바 ‘태생’에 의해서 사농공상의 ‘사’(士)의 신분 을 보증받았던 사무라이만이 칼의 휴대가 허용되었다.
한편 당시의 한반도에서는 조선왕조 500년간 선비라고 불리는 유학자(儒士)가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선비’는 유학에 밝은 문인학자로, 문덕(文德)에 의해 타자를 감화한다. 때로는 비도(非道)ㆍ비리(非理)를 바 로잡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싸우는 용사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동학농민운동으로, 그것의 윤리적 근거는 ‘도리’였다. 일본의 무위에는 ‘도리’와 같은 윤리적근거는 없다. 일본의 무위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역사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임진왜란)이 있고, 근대에는 한일합방(식민지지배)이 있다. 동학운동의 지민(志民. 김태창씨의 조어)들은 나라가 처한 존망의 위기에 일본의 무위세력과 싸웠지만 진압되었고, 일본은 무위를 강요했다. 히데요시 절대주의가 도쿠가와 절대주의로, 그리고 일본 절대주의로 이동했지만, 그것의 윤리적 근거는 없었다.
공사공매(公私共媒)
김태창씨의 철학은 어느 한쪽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서로의 장점과 결점을 잘 파악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間)에서 간주관적으 로 보다 높은 가치를 선택하고 그것을 지켜 나간다. 이러한 행위를 김태창씨는 ‘간발’(間發)이라고도 한다. 차이를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야말로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낼 가능성의 근거라고 본다. ‘사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상은 일본에 없는 것은 아니다. 랜가(連歌)는3) ‘사이의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어긋남의 사이에서, 그 관계성 속에서 쌍방 이 호립(互立)하면서 행동해 나가는 것이 ‘간발’로, 이 간발의 원리는 ‘공’과 ‘사’ 사이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을 김태창씨는 ‘공사공매’(公私共媒)라고 한다. 일본적 사고의 패턴의 특징은 A가 아니면 B, B가 아니면 A, ‘공’이 아니면 ‘사’, ‘사’가 아니면 ‘공’이라는 식으로 ‘공’과 ‘사’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이원론이다.
이에 대해 김태창철학의 특징은 ‘공사공매’이다. ‘공’과 ‘사’, ‘사’와 ‘사’가 격렬하게 대립(相克)하는 것을 싫어 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상대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끈질 김(相和)이 있어 상대를 서로 살린다(相生). 이렇게 서 로 매개하고 계발하여, 어느 한쪽에 의지하지 않고서 새로운 관계를 서로 만들어 내는 것이 공매(共媒)의 작용이다. ‘공사공매’라는 발상은 ‘멸사봉공’이나 ‘멸공봉사’가 아니라, ‘공’과 ‘사’의 ‘가운데’에서 새로운 관계 로 ‘바꾸는’(변혁ㆍ전환ㆍ신구축) 것이기도 하다(公共 哲学 제20권, 430쪽). 이런 관계를 김태창씨는 ‘활사 개공ㆍ공사공매’라고 부르고 있다.
활사개공(活私開公)
‘활사개공’이라는 실천철학은 한반도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한반도 사람들은 서로는 중국의 역대왕조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동으로는 일본이라는 무위국가와의 문화교류유지에 힘씀으로써 자국의 안전과 안녕에 노력해 왔다. 민중의 일상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서로 의사가 통할 수 있도록 의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활사개공’이라고 할때에 살려지는 대상(‘사’)은 자신이 아니라 타자이다.
타자를 살리는 것이 곧 자신의 생명의 유지와 활성화로 이어진다.
열려져야 하는 ‘공’은 에도시대로 말하면 도쿠가와 막부체제라고 하는 대의(大義) 없는 사적 권력이었다. 물론 ‘정이대장군’(征夷大軍)이라고 하는 직책을 천 황으로부터 받은 것을 대의라고 한다면, 대의가 있기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조 정(천황과 황실)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는 형식적인 명분으로서의 ‘대의’였다. 도쿠가와시대의 천황 은 독재권력에게 의사(擬似)종교적 정당성을 인상지우 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장식을 ‘신’(神)에 빗대어 붉은 비단의 깃발(錦の 御旗) 아래 새롭게 수립된 일원적 절대권력체제가 “근 대적 단장을 한 막부”인 메이지정부였다. 즉 메이지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열려야 하는 ‘공’은 민중억압의 행정(국가)권력이라는 ‘공’인 것이다. 관료중재라 고 하는 일본의 특질은 2011년의 노다(野田)정권 탄생 의 시점에도 바뀌지 않고 있다. 김태창씨가 말하는 ‘개 공’(開公)은 작금의 과제로, 그 원동력이 되는 것이 활 성화된 ‘사’이다. 관료중재는 비단 행정권력에 한하지 않는다. 중앙관료가 만든 근대의 여러 제도들, 가령 학교제도, 의료제도, 연금제도, 농림수산제도, 공무원제도 등은 모두 민중의 시점에서 민(民)주도로 열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운동이 일본변혁의 중심세력이 되었을 때에 일본은 비로소 일본국헌법의 민주주의적 이념을 명실공이 자기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은 지금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공무원을 야유하는 말투로 ‘위어른’(오카미)이라고 한다. ‘위어른’은 “민은 이것에 의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게 해서는 안 된 다”(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논어「태백」)를 기본자세로 삼는다. ‘위어른’은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기득권을 놓지 않고 ‘무위집단’의 상위에 위치해 있는 자들이다. 민간에서 ‘위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원자력마을에 군림해 온 동경전력이고, 보다 넓게는 전기사업연합회이다. 그들은 원전사고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기득권을 사수하려고 하고 있다. 일본대지진 이후에도 이 견고하고 대규모적인 ‘위어른공동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원자력마을’ 사람들은 일본국민의 생존권과 인류의 장래를 찬탈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 해악은 일본국내에 한하지 않는다. 전 지구를 오염시키는 원흉이 되고 있다.
이 마을의 해체는 동아시아삼국의 과제이기도 했다.
먼저 삼국 중에서 자각한 사람들이 연대하고, 대화ㆍ공동하여 신속하게 마을의 해체작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이익독점구조에 안주하고 있는 자들은 오만한 ‘독불장군’이자 ‘우물 안 개구리’로, 세계에는 에베레스트와 같은 고봉이나 대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자기들의 기득권은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무사도’라는 냉혹하고 강압적인 전제적 반도덕체제가 낳은 시대착오적인 프랑켄쉬타인으로, 지금도 무사도야말로 일본의 독자적인 뛰어난 문화라고 굳게 믿으려하고 있다. 나는 무사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일본에 만연해 있는 ‘무사도미신’을 타파하는 것이 일본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공공하는 철학
김태창씨는 ‘공공’과 ‘법’이 직접 연결된 중국고전의 문장을 사기에서 발견했다. “법이란 천자가 천하만민과 더불어 공공하는 바이다”(法, 天子所天下公共 也)가 그것이다. 이 말이 사용된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생략하겠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바’(所)는 ‘시공’이나 ‘장소’라는 의미이다. ‘법’이란 천자라고 해도 천하만민과 함께 현장에서 공공하는 데에서 성립한다고 해석하지 않으면 문장의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김태창씨는 말한다. 즉 ‘공공’이라는 용어가 명사로서가 아니라 ‘공공한다’라는 동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학자에 의한 일본어 번역의 대부분은 “법은 공공의 것으로서 지켜야한다”는 식으로 ‘공공’을 명사적인 규범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공공’이라는 말을 서양의 ‘법’이나 ‘public’과 같은 정태적(靜態的)이고 고정적인 규범개념 으로서가 아니라 동태적인 실천규범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김태창씨는 인도유럽계 언어가 존재론적인데 반해 한국어나 일본어와 같은 몽골계 언어는 생성론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철학의 희랍어나 로마 법학의 라틴어의 특색이 존재론적인 데 반해 히브리어로 된 예수의 말은 생명론적이고 생성론적이라고 그는 지
적한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의 한자는 명사와 형용사가 주도하는 정태적 세계를 표상하는데 비해서, 한국어는 동사표현에 의한 동태적 세계를 그리는 측면이 분명하고, 일본어는 그 중간쯤이 아닌가라고 김태창씨는 생각하고 있다.
서양에서 명사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사용되는 ‘public’ (‘공’이나 ‘공공’의 어느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과, 동아시아의 동사적 규범개념으로서의 ‘공공하다’와의 차이는, 서양의 가설-분석-결론과 같은 과학적 진리추구형과, 동아시아의 현장ㆍ현실에서 시작되어 증거와 도리에 입각해서 윤리도덕적 실천의 추구를 학문의 주류로 삼아온 도덕형과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태적 ‘공공철학’을 동태적 ‘공공하는 철학’으로 의미변용시킨 데에 김태창씨의 형안이 있다.
리(理)ㆍ기(氣)ㆍ장(場)
김태창씨는 중국의 에토스(윤리적인 심적 태도)가 ‘리’라고 한다면, 한국은 ‘기’이고, 일본은 ‘장’이라고 분류한다. 그리고 한국철학을 한마디로 하면 ‘한’이라한다. ‘한’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한중일 동아시아삼국의 사상적 특징을 김태창씨의 언설에 따라 살펴보면서 한국의 ‘한’에 접근하고자 한다.
리(理)
‘리’ㆍ‘기’ㆍ‘장’이라는 위상의 차이는 한중일의 민중의 생활태도에 현저하게 드러난다고 김태창씨는 말한다. 중국인은 남자건 여자건 말이 많고 따지기를 좋아한다. 공자는 지나치게 논리적이어서 덕을 해치는 사람에게 “말이 그럴듯하고 표정이 위선적인 사람 중에 어진 자는 드물다”(巧令色鮮矣仁)라고 했는데, 대단히 변론적인 중국인의 장점도 그것이 사사화(私事化)되면 단점이 된다.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나 중국에서 생겨난 유교와 노장사상을 거대한 이론체계로 구축한 중국인의 문화생성력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한자라고 하는 세계최고의 표의문자를 만든 중국인은 구체적인 현상의 배후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보고, 그것을 ‘천리’(天理)라고 하는 보편적 차 원으로 고양시켰다. 그와 동시에 “왕은 백성을 천하로 삼는다”(한서(漢書))라고 하는 것처럼, 백성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시리즈 공공철학 제1권, 39쪽). 즉 중국의 ‘공’은 권력자의 일 원적 지배를 말하면서도 그 정당성의 근거를 민의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왕민공공’(王民公共)의 이치가 고대 로부터 확립되고 있었다.
인민출판사의 철학분야 담당자가 일본에 와서 우연 히 서점에서 시리즈 공공철학(전10권)을 사고는, 그 자리에서 이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어야 하는 책이라고 그 가치를 평가한 식견은 인정할만하다. 그가 이 시리즈에서 찾아낸 가치는 높은 지적 수준이기도
할 것이다. 다루고 있는 분야가 광범위한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논의도 일본이나 아시아에 닫혀있지 않고 세계의 역사, 철학, 종교 등 광범위한 시야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에 놀랐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공철학 제1 기 10권이 중국어로 출판되기 위해서는 5년이라는 세
월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출판이 일본처럼 전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점과도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경전의 한역출판과도 비교될만한 대단한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중국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를 한자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일대의 설법을 시간축을 가미한 체계로 만들 어냈던(천태 지의의 ‘오시팔교설’(五時八敎說)), 인도에 서조차 하지 못했던 수준에 도달했던 점과 어딘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송학(宋學)이나 신유학에서는 과거의 문화유 산을 활용하여 이론적이고 자료적으로 그 사상을 재구축해 나가는 활동이 계승되고 있다. 그런 중국의 이론 화하고 체계화하는 힘을 생각해도, 중국 독서계에 공 공철학이 공개(=출판)됨으로써 일본발(發) 공공철학이 마침내 중국의 지식인과의 대화와 공동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개신되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이 대화와 공동과 개신 활동에 한국의 지식층이 더해져서 동아시아삼국의 민중과 지식인이 함께 공공하게 되면, 공공철학이 사상적 뿌리가 되어 장차 ‘아시아판EU’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에는 북한도 들어간다. 러시아도 들어가면 더 좋다.
장(場)
일본의 에토스는 ‘장’에서 작용한다고 김태창씨는 말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의 견해는 이러하다. 근대 이래 일본이 낳은 독창적인 철학자로 알려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의 너무나 일본적인 철 학의 특징은 ‘장소의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니시 다는 ‘자기’를 “절대무(絶無)의 장소”로 이해한다. 니 시다철학에는 니시다의 절친한 친구로 ‘일본적 영성’을 부르짖은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가 일 생동한 탐구한 ‘선’(禪)의 실천적 표현이라는 일면이 있 다. 그리고 가령 니시다가 주창한 “주객미분의 순수경 험”은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이 생겨나야 한다”(應無 所住而生其心)의 사변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실존이 정태적인지 동태적인지를 불문 하고 ‘장소’라고 하는 공간개념에서 ‘선’(善)의 근거를 찾고 있다. 그러나 원래 ‘선’이라는 것이 ‘장소’라는 무기질적인 공간개념과 어울리는 것일까?
니시다철학에서 볼 수 있는 장소론적 특징은 일본인 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장(場)의 공기(空気=분위기)를 읽는다”는 말이 바로 그것일 것 이다. 일본사회에서는 그 장의 “공기를 읽지 못하는” 즉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KY’4)라는 은어로 경시하고 배제시키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어서, 그것이 어른사회에서도 어린이사회에서도 만연하고 있다. “공기를 읽을 수 있는”(=분위기 파악을 하는) 인간 이 ‘화’(和)하는 선인(善人)이고, “공기를 읽지 못하 는”(=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화’(和)를 어 지럽힌다. 즉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는 이질적인 타자라는 말이다. 스즈키 다이세츠가 탐구한 ‘선’(禪)은 전장에 임하는 무사(武士)들의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 중세에 널리 퍼 졌다. ‘선’과 ‘무사도’는 친화성이 있다. 좌선삼매경으로 ‘색즉시공’의 ‘공’과 ‘무’의 경지에 이른 무사는, 생사일 여(生死一如)의 심경으로 전장에 나간다. 그러나 이 ‘무’가 진정으로 생사를 초월한 경지일까? 아니다. 이것은 강력한 자기암시에 걸린 정신상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선불교가 하나같이 태평양전쟁에 전면 협력했던 반(反)윤리성은, 시대(=장)의 공기(=분 위기)를 읽을 수 있는 약삭빠름 말고 또 뭐가 있었을 까? 전후에 데시마루 타이센(第子丸泰仙. 1914~1982) 과 같은 일본의 선승이 유럽에 선불교를 전파했지만, 동양적 신비체험(禪)에는 윤리적 시점이 없고 현상을 ‘무’라고 하는 주문 속에서 전적으로 긍정하는 가치붕
괴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무’라는 장소의 철학과 무사도와 군국주의는 하나같이 ‘윤리’와 무관하다고 하는 점에서는 동료였다. 전후에 교토학파(京都學派) 중에서 전쟁협력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 언설이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은 ‘장소의 논리’의 한계를 말해주고 있다.
4) ‘KY’는 “空気が読めない”(공기를 읽지 못한다)라는 말에서, ‘空氣(쿠키=‘공기’의 일본어 발음)의 ‘쿠’에서 K를, ‘読めな い’(요메나이=읽지 못한다)의 ‘요’에서 ‘Y’를 각각 따서 만 든 약어이다.
장소의 논리에는 ‘찰나적’이라는 특징도 있다. 윤리적 감각이 결여된 ‘자기 내 침잠’의 순수경험은 대승불교 의 ‘이타’(利他)적 정신과는 방향이 다르다. 좋게 말하 면 소승과 대승의 혼합이다. 그것은 소승에서 대승으로 이동하는 “번뇌가 곧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기보다 는, 겉으로는 대승을 표방하면서 사실은 소승에 가깝다. 자기 내 침잠의 철학에는 장래세대적 관점이 희박하다. 자기구제에는 열심이지만 타자구제나 세상과 세계의 현실과제가 시야에 들어오기는 어렵다. 선불교에 ‘담판한’(擔板漢)5)이라는 말이 있는데, 선 사 중에는 시야가 좁은 ‘담판한’이 많다. 세상 사람들과의 ‘대화’가 지극히 어렵다. ‘선문답’은 재미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언어유희라고도 할 수 있다. ‘장래세대’라는 시간축과 ‘글로벌’이라고 하는 공간축 사이에 ‘무’라는 장벽이 놓여 있어 대화를 가로막고 있다.
기(氣)
김태창씨는 한국의 ‘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존재론적 자기’가 고체적 또는 액체적 자기라고 한다 면, ‘실존적 자기’의 위상은 기체적·기적(氣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는 일본의 지배억압적인 ‘공기’와는 정반대로, 자기와 타자 사이의 ‘기화적(氣化的)’ 해방 또는 개방을 촉진시킨다. 기가 작용하는 데에서 서로의
생각이 통하고, 그래서 상호간에 기탄없는 주장이 있고 격론이 있고 대립이 있고 화해가 있고 사랑이 있고 노래가 있고 춤이 있다. 그리고 생명적 자기의 개방과 해 방이 있다. 이 자기개방과 자기해방은 몰윤리(沒倫理) 의 그것과는 다르다. 조선왕조에서 배양된 동학사상이
나 한사상은 ‘기의 철학’이라는 측면이 있고, 동학을 체화한 선비는 유학(주자학)적 정의로 뒷받침된 문인이었다. 선비는 때로는 지배자나 침략자의 희생이 되어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는 민중과 연대하여 궐기한다. 성신여대의 최민자 교수에 의하면 ‘한’은 보편성임과
5) “널판지를 등에 짊어진 사내”라는 뜻으로, 옆과 주위를 둘 러보지 못하고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것을 말한다. 시야 가 좁은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동시에 특수성이고 전일성임과 동시에 다양성이다(「公 共的良識人」 2009년 10월호). 김태창씨에 의하면 “‘한’ 은 ‘일’(一)ㆍ‘다’(多)ㆍ‘중’(中)ㆍ‘대’(大)ㆍ‘범’(凡)이라고 하는 다양상관적인 한겨레(韓民)의 집단무의식”이고, “‘한마음’은 그러한 무의식이 의식화되어 현생(顯生)하 는 심기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서양의 철학적 활동의 특징인 이성중심주의적인 (독화나 그것의 단순한 왕래로서의) 대화의 철학과는 다르다”(이상 「公共的良識人」 2010년 8월호)고 한다. 또한 ‘한’은 ‘사변철학’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와 융합 한 “생명의 작용”으로, ‘신-인간’이나 ‘공-사’와 같은 이원론을 초월하고 있다.
최민자 교수에 의하면, 동학사상의 ‘후천개벽’은 지구적 질서의 재편성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우주적 질서의 재편으로 열린다고 한다. 그 방향은 ‘영원한 생명’의 차원으로 생각된다. ‘한’사상은 ‘장래세대’라는 시간축을 넣은 자기관이 가능해지고, 21세기의 오늘에도 통용된 다. 그 점에서 찰나적인 ‘선’(禪)사상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가 「17조 헌 법」에서, 민(民)을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관(官)의 윤 리로 ‘화’(和)를 제창했던 시기와 거의 동시에, 한국의 승려 원효(元曉. 617~686)도 ‘화’(和諍)를 제창했다. 당 시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의 싸움에 더해서, 서쪽의 당나라나 동쪽의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전란의 기운이 팽배해 있었다. 불교사상계도 구마라 즙 등의 구()불교에 대해서 원측(613~696)이 당나라 에서 신유식(新唯識)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신구불교가 대립하였다. 격렬한 대립 속에서 원효는 ‘상극’ㆍ‘상화’ ㆍ‘상생’ㆍ‘상통’을 제창하고, ‘무(無)의 입장’이 아닌 ‘무 입장의 입장’에 서서, 어떤 언설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
정했다. 쇼토쿠태자가 국가통합의 이념으로서의 ‘화’를 위로부터 (헌법으로서) 내세웠던 데 반해서, 원효의 ‘화 쟁회통’(和諍通)사상은 ‘민’(民)의 입장에서 주창되었 다. 원효는 ‘이질적인 타자’와의 대화(和諍)도 촉구했다. 그리고 신구불교의 최대 쟁점이 된 제9식(아라야식=전
일적인 청정한 식(識))을 인정하고, 그것을 ‘본각’(本覺) 과 ‘일심’(一心)이라는 말로 바꿔 말하면서 구마라즙의 구불교를 옹호했다.
김태창씨는 원효의 화쟁회통사상에 깊게 공감하고 있는데, 그가 공공철학에서 말하는 “대화ㆍ공동ㆍ개신”이라는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선설에 기초한 행동원리는 신라시대의 민중승려 ‘원효’에 그 사상적 원천의 일단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는 한국불교
사에서 원효를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일본불교사에서 원효와 함께 김태창씨가 높게 평가하고 있는 고승은, 원효보다 훨씬 시대가 내려온 카마쿠라(鎌倉) 시대의 신란(親鸞. 1173~1262)과 니치 렌(日蓮. 1222~1282)이다. 한반도가 원효를 낳고 일본 열도가 신란과 니치렌을 낳은 것은, 유라시아대륙의 동 단(東端)의 반도국과 동해의 소도(島)의 문화적 수준 의 높이와 불교적 식견의 넓이를 보여주고 있다.
대화
김태창씨는 공공철학의 세 요소로 ‘대화’ㆍ‘공동’ㆍ‘개신’을 들고 있다. ‘대화’는 문자 그대로 상대와 자기가 마주보고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럼 이 ‘말’이란 무엇 인가? 김태창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인 만엽집 (万葉集)에 나오는 “말의 영적 에너지가 꽃피는 나라” (霊の幸はふ国. 事霊のさきはふ国)라는 표현을 대단 히 좋아한다. 말 하나하나에 생명이 깃들어 있고, 말의 주고받음 자체가 수많은 서로 다른 꽃들의 생명으로 피어 어울리면 그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행복감을 낳게 하는 나라를 그리는 것이다. 앞에서 김태창씨는 “한국어나 일본어는 생성론적이다”라는 견해 를 갖고 있다고 했는데 나라(奈良)시대의 민중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던 말에는 참된 행복을 공진(共 振)시키는 울림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편 카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 대략 660~720)는 만엽집에서 “싱싱한 벼이삭의 나라는 신 의 나라이자 말꼬리를 잡지 않는 나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말꼬리를 잡지 않는다”(挙げせぬ)는 “오만한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라고도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근대의 학교교육현장은 교사의 절대적인 말만 있고 학생들은 고요한 「억압적인 ‘침묵’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최근의 일본의 학교교육현장의 일부가 카오스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은 ‘멸사봉공’이 ‘멸공봉사’로 뒤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일본은 용기 있는 ‘활사개공’의 말도 행동도 희미하다. 근대 이후에 생성론적인 일본어의 생명은 점점 사라지고, 무기 질의 과학용어(=지식)가 말의 영적 에너지(靈)의 세 계를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한편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전후(戰後)의 한국은 ‘과학’을 중시하고 일본을 뛰어넘을 기세로 발전을 이루고 있는데, 한국인의 대화공간에는 일본과 같은 폐쇄감
은 없다. 상대와 소통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교회에 가 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김태창씨는 말한다. 음악으로 말하면, 한국의 교회에는 폴리포닉한 (polyphonic=다음성적인) 자유와 생명의 차원으로부터 의 활음(活音=살아있는 인간들의 목소리)이 약동하고 있는데, 일본의 교회는 모노포닉한(monophonic=단성음 악적인) 정음(靜音=가라앉은 조용한 소리)이나 자기만 의 내향(內響=안으로 울려 퍼짐)이 지배하고, 침묵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 한국의 유명한 가톨릭교회는 군사정권이 문민정권으로 이동할 때에 민중이 연대하여 기세를 올리는 무대가 되었다. 교회는 민중과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추고 함께 희망을 얘기하는 전진하는 ‘공공공간’이 되었다. ‘공기’(=분위기)라고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공간’(公空間) 내지는 ‘사공간’(私空間) 속에 서 위축되는 일본과는 너무나 간극이 크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화’에는 격론이 있고 일대일의 진검승부가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행해지는 ‘대화’는 극히 예정조화적이고 정해진 틀로부터의 일탈은 인정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심포지엄은 참가자 각자의 의견이 옆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 대화와 토론에 의한 자
타의 상호변용은 예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화’의 원래 의미는 서로의 주장의 차이점이 대화에 의해 발견되고, 서로가 보다 고차원의 자기로 전환하고 비약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기개벽이고 사회적으로는 사회개벽이자 지구차원에서의 세계개벽이기도 하다. 즉
‘대화’는 서로 ‘같은’ 것을 의례적으로 확인하는 장이 아니라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상극갈등하고, 자기와 타자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양ㆍ변용ㆍ탈자 (脫自)하는 시공간적인 것이다. 김태창씨가 코디네이터가 되고 온갖 분야의 제일인자를 초대하여 펼쳐진 대화(「공공철학교토포럼」)는, 일본에 서는 획기적인 공공적 대화공간을 공창(共創)하는 시도 가 되었다. 시리즈 공공철학이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과 서양의 권위자들로부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이 대화의 기록의 곳곳에 “말의 영적 에너지가 꽃피는” 공공공간이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에서 대화(다이얼로그)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원인 중의 하나로, ‘말’을 중시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을 들 수 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고 말을 바꾸며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 는 말이 다르다. 중국의 경구에 “윤언여한”(綸如汗. 땀이 다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한번 내린 임금의 말은 취소하기 어렵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국의 총리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원래 나라를 짊어지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가장 인기를 누린 총리는, 과거의 후생연금부정가입을 국회에서 추
궁받자 “인생도 가지가지, 회사도 가지가지…”라며 사람들을 바보취급하는 식의 ‘얼버무리기 답변’으로 빠져나 갔다. 국회의 질의가 ‘대화’가 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장차 총리로 촉망받고 있는 정치가나 전(前) 총리의 ‘신 념의 말’이 이리저리 뒤바뀐다. 민주주의 국가의 ‘선량’ (選良=국회의원)의 얄팍함은 차마 볼수 없을 정도이다. ‘성’(誠)이라는 글자는 “말()이 이루어진다(成)”는 의 미인데, 그 ‘성’이 없는 것이다. 말을 중시하지 않는 일본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나 ‘두 사람의 호흡’(阿吽の呼吸)이나 “말은 뜻을 다 전 달하지 못한다”(不盡意)와 같이 “말을 하게 하는 ‘마 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의 유일한 도구는 ‘말’이다. 우리는 자기 생각이 대화 상대자나 제삼자에게 보다 정확하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속을 ‘말’로 재구축한다. 인간이 ‘이질적인 타자’와 맺고ㆍ잇고ㆍ살릴 수 있기 위한 유일한 공유문화자원으로서의 말에 대한 신뢰는, 그 말을 하는 인간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 심’(誠)이 아니라 ‘말’을 경시하는 사람들끼리는 말의 영 적 에너지(靈)가 공명하는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말은 어차피 방편이지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 람의 마음에는 ‘실’(實=실심)이 없다. 말을 경시하는 풍 조가 일본에 있다고 한다면, 그 토양에서 생겨나는 것 은 실심실학(實心實學)이 아닌 허심허학(虛心虛學)에 다름 아니다. 1899년에 28년 만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기독교인 아라이 오스이(新井奥𨗉)는 ‘유신무 아’(有神無我)를 주장하고, 아시오광독(足尾鉱毒)사건 을 둘러싸고 투쟁한 다나카 쇼조(田中正造)와 친분을 맺었다. 일본은 전국시대에서 시작해서 도쿠가와시대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유신(有神)도 유불(有佛)도 철 저하게 탄압되어 ‘무신무불’(無神無佛)이 되었다. ‘무신무불’이기 때문에 ‘무아’(無我)가 아니라 ‘허아’ (虛我)이다. ‘아’(我) 없는 인간의 말은 실어(實語)가 아니라 허어(虛語)가 된다. ‘허어’의 문화 속에 ‘대화’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 김태창씨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일본인이 말을 되찾기 위해 서는 먼저 자신을, 인간을, 그 선성(善性)을 믿어야하 지 않을까? 권력 앞에 위축되는 겁 많은 자신을 극복하고, 용기있는 사랑의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로 거듭 태어나야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실현된다.
그리고 ‘공동’과 ‘개신’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김태창씨가 중시하는 ‘대화’에는 여러 형태(相)가 있다. 일대일대화, 공공철학교토포럼과 같은 복수의 인간들의 대화, 혹은 토인비가 말하는 자연환경이나 인간적 환경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response), 문
명 간 대화 등등. 일본에는 “침묵은 금”이라고 하는 격언이 있다. 나는 일본인은 무사도적인 냄새를 띤 이 격언을 버리고 “대화는 인간의 행복사회를 공창(共創)하는 시작”이라는 인식전환을 감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매스컴은 내부경제합리성을 최우선시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감추고서 스폰서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대화형 매스컴이 필요하다. 매스컴이 본래 지향해야 하는 것은 민중이 함께 행복해지는 세계의 공창(共創)으로, 장래세대와 함께 영속적이고 발전적인 세계를 공동구축하는 것이다. 매스컴은 그것을 위한 공공토론의 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매스컴은 그것이 활자매체이든 영상매체이든, 사람들의 예지를 끌어내는 대화를 촉진시켜 공공시 공간을 공창(共創)하는 매체가 되는 것이 본래의 역할 일 것이다. 오늘날 텔레비전의 이념과 방향은 공공하는 철학의 첫 번째 계기인 ‘대화’를 소외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한국이나 중국에도 생길
것이다. ‘대화부재’로 향하는 세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뜻있는 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일어나서, 민중과 장래세대의 행복(=공복) 실현을 향해서 ‘새로운 매스컴’을 만들 수밖에 없다. 김태창씨 자신이 새로운 매스컴의 출현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
공동(共働)
여기저기서 대화적 공공공간이 자율적으로 성립되게 되면 다음 단계인 ‘공동’으로 나아간다. ‘공동’(共働)이란 뜻을 같이하는 자들끼리 경제적 기반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공유한 상태에서 공공세계를 개신하기 위해 동지적인 연대를 구축하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삶(生)에의 의지”를 갖고 태어났다. 살기 위해서는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주를 얻기 위해서 사람은 일하고 상업활동을 한다. 그런 생활활동이 다른 집단에 위협받는 일 없이 자기완결적으로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우고 합의에 의
해 지도자(왕)를 정했다. 중국에는 “백성들은 먹거리를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 한서(漢書))는 생민관 (生民觀)이 있다. 이것은 “(백성이) 먹을 수 있는가 없 는가를 원점에 놓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전 동경대학 교수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의 말)는 발상이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삶에의 의지’는 동시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갖고 있는 본능적 의지이기도 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이 ‘노동’은 원죄를 범한 인간에 부여된 ‘고역’(苦役)이 아니다. 삶을 유지 하기 위한 조건이자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인간의 권리이다. 근대화를 받아들인 선진국에서 ‘노동’은 기업경영자의 관리 하에 행해지고,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임금으로 의식주가 성립하고 ‘살아’갈 수 있다. 지금 세계에는 맑스가 꿈꾼 이상적인 공산주의국가는 하나도 없다. ‘산업주의’를 기치로 하는 나라도 포함해서, 경제합리성이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규정하고 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지금 세계 사람들은 군수사업과 자본주의 속에서 성공을 거둔 거대기업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김태창씨가 주창하는 ‘공동’은, 그것이 ‘내부경제’인지 ‘외부경제’인지를 불문하고, ‘경제합리성’이라는 원리와 는 다른 ‘공공원리’에 의거한 작용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 이래로 서양에서 생겨난 자본주의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는 그 ‘신’을 상대화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포이엘바하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통찰했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경제합리성 지상주의’의 전제가 되는 ‘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근대이다. 실
제로 전 인류가 안고 있는 지구환경문제는 경제합리성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을 철학하는 과학철학의 확립이 필요하다.
또한 시간축을 가미한 장래세대관점이 필요하게 되었다. 공공철학이 지향하는 것이 현재세대와 장래세대가 함께 행복하게 되는 세계의 실현으로 - 이것을 ‘공공세계’라고 부른다고 한다면 - 공공세계는 유토피아적 미래관이나 ‘현재세대 지상주의’와 같은 근ㆍ현대의 가치관을 초탈한 세계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92년에 「장래세대국제재단」과 「장래세대총합연구소」가 창설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태창씨는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1992년부터 6년 동안, 세계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학식자들 사이에서 여러 차례의 장래세대국제포럼을 활발하게 개최해 왔다. 그 문제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할거견(割據見=좁은 시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였다. 바꿔 말하면, 근대의 특징인 ‘단절’을 어떻게 초극하는가에 대해서 공공토론해 왔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시대는 과학에 해박한 ‘전체인간’이 가능했다. 그러나 근대과학문명의 진보는 ‘인간성’이나 ‘인격’ 혹은 ‘인덕’과 무관한 ‘부분인간’을 낳았고, 부분인간의 대명사인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지엽적인 것들을 확장해 갔다. 전문가는 문명전체의 행방을 보는 전체관(全体觀)과 는 무관하게, 전문영역을 깊고 넓게 탐구하면서 시대의 최첨단을 달려왔다. 그러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않는 전문가가 길을 잃었을 때에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
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숲을 보는 전체인간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전체인간’이란 과연 어떤 인간일까? 장래세대국제재단과 장래세대총합연구소의 문제의식에 즉해서 말하면, ‘전체인간’이란 유구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과학적 가설과 자아로 나누어 편리를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고 불러온 근대의 협소한 시야를 깨닫고, 그 깨달음을 기점으로 하는 인간사회의 미래의 가능성을 타자와의 진지한 ‘대화’와 ‘공동’에 의해 공창(共創)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만년, 수십만년 이후까지 지구상의 생물의 생존환경을 위협하고 있는 원자력(발전ㆍ핵무기)의 공포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원자력을 지구상에서 폐기시키는 것은 전체인간이 ‘대화’와 ‘공동’해야 할 긴급한 테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후쿠시마원전사고(3기가 전부 녹았을 가능성이 높다)를 당한 지금도, 단호한 탈(脫)원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민중으로 하여금 진실에서 눈을 피하도록 하는 매스컴의 죄는 심히 무겁다. 매스컴의 책무에 대해서 공공철학교토포럼은 수년전에 「매스컴과 공공성」을 테마로 대화하였다. 우리는 그 대화기록 으로부터 새로운 매스컴을 공창(共創)하기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와 시청자 그리고 편집자와의 대화형 매스컴으로의 탈구축이 긴급과제임이 분명해졌다. 다만 경제합리성 속에 용해되어버린 기존의 매스컴에서 자기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새롭게 매스컴을 만들 수밖에 없다. 새로운 매스컴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기점으로 원자력 폐기를 바라는 민(民)의 소리를 결집하고, 민과 민의 연대를 세계의 연대와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장래세대를 포함한 인류와 지구에 비참한 화근을 남기는 원자력을 폐기하는 것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인류의 선택이다. 과학기술문명이라는 허약체질문명에서 심 신이 모두 건강한 새로운 문명을 공창(共創)하는 오피 니언 리더가 필요해졌다. 새로운 매스컴은 그 오피니언
리더를 기르는 모체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은 하나같이 ‘과학교’(科学敎), ‘과학지상주 의’가 되어가고 있다고 김태창씨는 지적하고 있다(시리 즈 공공철학 제8권 「과학기술과 공공성」 290쪽). 그 는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07~1981)와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 1920~2010)의 대담 인간에게 과학 이란 무엇인가(人間にとって科学とはなにか. 中公新書, 1967)에 나오는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는 ‘고도과학전문가 시대ㆍ과학절대주의 시대’가 되고 있다, 과연 이대로 좋은가? 라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 학문, 사회, 세대간, 가치관, 철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현대인은 과학시대의 화근인 ‘단절’과 ‘할거견’(=좁은
시야)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
‘할거견’이라는 병을 자각하고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천지공공의 도리’를 주창하고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 침 역할을 한 요코이 쇼난(横井楠)은, 일본사에서 찬 란하게 빛났다가 암살로 장렬하게 사라졌다. 김태창씨 가 시리즈 공공하는 인간(公共する人間)에서 요코이 쇼난을 선택한 것은 탁견이다. 요코이 쇼난의 발견은 메이지유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공공세계의 개신을 향해서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함께(共) 일하는(働) 것이 김태창씨가 주창하는 ‘공동’(共 働)의 본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세대는 ‘이익지상 주의’에 입각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일용할 식량을 얻기 위해서 직장을 떠날 수는 없다. 치열한 경영환경 속에서 많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회사의 서바이벌을 위해 필사적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해서는 현실은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 지 구의 환경오염을 초래하게 된다. 공자는 “먼 생각(遠慮) 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논어)라고 했 는데, 공자가 말하는 ‘원려’(遠慮), 김태창씨 등이 말하는 ‘장래세대관점’을 가진 매스컴의 창설과 그것을 응원하는 ‘양심의 네트워크’는 긴급한 시대적 요청이다.
장래세대관점에 선 매스컴의 공창과 공동은 전례가 없다. 과학교(科學敎)시대에 과학교의 탈구축을 지향하는 ‘반시대적’ 소수파의 결집은, 군함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회 전은 항상 ‘담설매정’(擔雪埋井. 눈을 날라다 우물을 메우다)하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북경의 한 마리의 나비가 뉴욕의 허리케인이 되듯이, 사명감에 불탄 한 팀 의 공동(共働)이 점차 공감을 불러일으켜 인류의 운명 을 바꾼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인류사를 풍부하게 하고, 한 사람의 붓다의 깨달음이 동방에 빛을 비췄다.
인류의 장래를 생각하는 소수자가 사명감에 불타서 공동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세계사가 바뀐다. 김태창씨는 최근에 ‘한사상’을 말하면서 자기개벽, 타자개벽, 인간사회개벽, 세계개벽과 같이 개벽의 차원이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세계개벽으로의 중요한 단계로서
‘대화’와 ‘공동’이 있다.
개신(開新)
‘공’을 열어서 공공세계를 새롭게 연다. 이것을 ‘개신’(開新)이라고 한다. ‘공’이란 구조화된 가부장주의 (paternalism)이자 고정관념이자 주의(=이데올로기)이자 할거견이자 ‘사’(인간)없는 체제이자 ‘사’(인간)없는 국가의지이자, 민(民)을 사물화(私物化)하는 지배자 이 기주의이다. 이러한 ‘공’이라는 이름의 이기주의 구조에 금을 내어(開公) 공사공매(公私共媒)와 활사개공(活私 開公)의 길을 여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한 사람으로 는 존재할 수 없다. 타자 없이 자기는 없다. 자타가 서로 영향을 주고 함께 배우고 좋은 것을 함께 만들며 (共創), 인류의 의지와 우주의 근원적 작용과 일치되어 공동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인간이다.
‘개신’을 마음의 차원에 즉해서 말하면 ‘깨달음의 체 험’이다. 선(禪)의 깨달음에는 돈오와 점수가 있다. 붓 다는 새벽별을 보고 갑자기 대오(大悟)했다고 한다. 이 것이 ‘돈오’(悟)라고 한다면, 예수의 산상수훈에 공감 하여 완전히 새로운 경지가 열린 민중들의 희열은 ‘점 수’(漸修)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숨 쉬는 진실의 자기(양심)에 눈을 뜨는 체험을 해본 자는, 그 후에 방황하는 일은 있어도 결코 깨달음의 체험을 잊는 일은 없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미묘하여 변하기 쉽다. 그러나 한방울의 물이 모여서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들어간 물이 강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세상의 평화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화하고 고결한 뜻으로 모여서 공동하는 자는, 처음에는 단 두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다른 공감자를 만나고 맺어져 새로운 활력이 생겨, 공감의 폭이 확대되어 전 세계를 바꾼다. 바위의 물이 계곡으로 흘러들어가고 계곡물이 마침내 대하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풍요로운 토양을 만들어 가듯이, 뜻있는 사람끼리의 대화와 공동은 인간의 저력에 눈뜨게 하여 혼미하는 세계를 상적광토(常寂光 土. 법신불이 살고 있는 정토세계)로 바꾼다. 고해는 마침 내 정토가 된다. 그런 희망에 찬 세계를 공창(共創)해 나 가는 것이 김태창씨가 말하는 ‘개신’이라고 생각한다. ‘색’(色=환경)과 ‘심’(사람의 마음)이 다르지 않는(色心不 二) 이상, 사람 마음의 개신은 환경도 개신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만의 개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중일 동아시아삼국의 민중이 함께 손을 잡고, 활사개공의 공공철학을 실천하는 데에서 개신의 실상이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공공한다’는 사상적ㆍ철학적ㆍ실천적 배움이 전파되어 왔다. 그 실천은 무엇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모두와 ‘함께’이지 않으면 안된다.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서양근대를 수용한 일본은 ‘일본을 위해서’, ‘천황을 위하여’의 ‘위하여’론으로 군비 를 증강하고 이웃나라를 침략했다. 전후(戰後)에는 ‘회사를 위하여’ 일해서 기적적인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앞으로도 ‘일본을 위하여’만 존속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동아시아삼국은 물론이고 인도,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러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등, 세계 각국과 ‘함께’ 공영하는 길을 찾는 것 말
고 일본이 살아남을 길은 없다. 그 ‘함께’의 철학인 공공철학은 ‘위하여’에서 막혀있는 세계를 ‘함께’ 개신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불교에서는 “중생과 함께 불도(佛道)를 이루자!”고 외친다. 동아시아가 ‘모두 함께’ 서양문명을 누려서 행복해집시다, 라고 하는 열린 마음에 눈을 뜨고 대화하고 공동하고 개신한다면, 동아시아는 21세기에 세계의 서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일본인은 20년간에 걸쳐 그 해박한 지식과 예지로 ‘공공하는 철학’을 일관되게 주창해 온 김태창씨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기회를 지금도 얻고 있다. 김태창씨와 함께 동아시아의 개신을 향해서 대화ㆍ공동ㆍ개신해 나가는 것이 지금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다.
에도시대의 일본 민중은 조선통신사를 존경했다. 무 위(武)의 나라인 일본이 문덕(文德)의 나라인 조선으 로부터 배우고 싶다고 하는 겸허한 심정이 서민 사이에서 넘치고 있었다. 에도시대의 민중은 문화의 대은인 (大恩人)인 중국이나 한반도 사람들을 경모하는 마음 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에 들어와 ‘탈아 입구’(脫我入歐)라는 계몽주의와, 서양문명의 편향도입 에 의해서 큰 은혜를 입은 한국과 중국 사람들을 모욕하고 무력으로 짓밟았다. 오만한 일본의 해독은 나라 안에 퍼져서, 지금은 세계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본이라는 문명은 멸망한다. 그러나 역사는 숙명도 섭리도 아니다. 절대절명의 현실을 타개하고, 일본과 세계에 희망을 가져오는 것 또한 우리 인간 이다. “뜻은 기를 이끌고 기는 몸에 충만해있다”(夫志 氣之帥也. 氣體之充也. 맹자). 이제 우리는 김태창 씨로부터 뜻을 확실하게 이어 받아서 먼저 동아시아로
부터 공공세계를 열어 나가야지 않겠는가!
첫댓글 탁견이시고 깊은 공감이 절절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나부터서 대화 공공 개신의 활동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