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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3:4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해 그 명수를 기록하라
(민 3: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민 3:42)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민 3:43)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민 3: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민 3:45)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 3:46)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명이 더 많은즉 속전으로
(민 3:47)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로 받으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민 3:48) 그 더한 자의 속전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민 3:49)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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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3:50) 곧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에게서 받은 돈이 성소의 세겔로 천삼백육십오 세겔이라
(민 3:51) 모세가 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줬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느니라
사계四季 <“이 비밀이 크도다!”>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5
사계四季 <이른바 “복음주의자”들 ‘만인 제사장설 왜곡’을 반박함>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23
사계四季 <더욱 귀한 직분>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25
마르틴 루터 <양무리의 영적 아버지인 목사(목자) :
양무리는 영적 아버지를 혈육의 부모보다 더 귀한 부모로 여겨 공경해야 한다.>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26
이인규 <목사는 성도들 영적 아버지인가?>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41
<‘이인규 <목사가 성도들 영적 아버지인가?>’에 달린 댓글들>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42
사계四季 <{무물 카페}에서 강퇴당한 일을 해명함 ② : 이인규 권사님 ‘오독誤讀’을 지적함>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35
사계四季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목회자가 ‘그릇된 성경해석’을 지적받았을 때]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39
웨슬리언 이인규 권사님 ‘논리 부족’을 생각하니, ‘그리스도 능동순종’을 부정한 Wolf이철에게 동조해 그러께 초 설 연휴 때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서 개혁 교회 목사님들과 교우들에게 ‘그리스도 능동순종을 증거하는 성경구절을 대라.’는 도발을 하셨던 웨슬리언 장기영 교수님이 떠오른다. 이때 내가 그 구절들을 제시했음에도, ‘그리스도께서 능동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의 전가를 설명하시는 글, 청교도 존 오웬 목사님 강설’1)을 다루는 비평을 하면서 존 오웬 목사님을 낮게 여기며 계속 ‘범주오류에 따른 논점일탈’을 하시는, 교만한 장기영 교수님에게 쓴 댓글이 있다. 이 댓글에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딸, 그 하나마저도 잘못 알고 있는 딸’은 ‘정이철 목사’를 뜻했다. 그리고 ‘둘만이 아니라 열까지 아는 아버지’는 ‘존 오웬 목사님’을 뜻했다. 또한 ‘둘을 알지만 동생 사고가 굳어지도록 동생에게 범주오류 독약을 먹인 아들’은 ‘장기영 교수님’을 뜻했다.
유치원생인 딸: 1 더하기 1은 1이야.
수학 교수인 아버지: 1 더하기 1은 2란다.
유치원생인 딸: 아냐. 1 더하기 1은 1이에요.
수학 교수인 아버지: 1 더하기 1은 2라니까.
중학생인 아들: 아빠, 수학에 덧셈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1 곱하기 1은 1이라는 곱셈도 있잖아요.
유치원생인 딸: 거 봐, 오빠가 1이라고 하잖아!
<목사가 성도들 영적 아버지인가?>에서 이인규 권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셨다. 이런 주장은 나에게 Wolf이철 식 듣보잡 논리인데, 이 인용문에서 “육신적 부모뿐 아니라”는 문맥상 ‘육신적 부모가 아니라’는 뜻이다. 즉, “뿐”은 ‘가’ 오타라 할 수 있다.
사계 님은 웨스트민스터 교리를 인용했는데, 그것은 십계명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구절에서 부모만이 육신적 부모뿐 아니라, 나이가 많은 연장자, 선생, 상관, 정치 관리자, 교회 지도자 등 넓은 의미를 갖는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목사에게만 국한해 적용해 목사가 영적 부모라고 주장한다면, 나이가 많은 연장자와 직장 상관과 정치인 관리와 학교 선생도 영적인 부모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도 목사가 영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영적 부모라고 주장한” 분은 내가 아닌 루터 선생님이시다. 위에 링크한 루터 선생님 가르침에서 보는 대로 {대요리문답}에서 제5계명을 해설하시면서 고린도전서 4장 15절을 인용해 하신 루터 선생님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은 루터 선생님을 “내 아버지”로 호칭하며 존경하셨던 칼빈 선생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글 <이인규 권사님 ‘오독誤讀’을 지적함>에서 밝혔다시피 ‘하나님 말씀이라는 꼴, 영혼의 양식을 양에게 먹이는 목동’과 ‘이 꼴을 먹고 자라는 양’의 관계는 “‘중생(믿음)의 주인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맺은 영적 관계”다. 성령 하나님으로 맺은 영적 관계이기 때문에, 목동(목사)은 양무리(평신도) 영적 아버지인 것이다.
교회 최소 단위인 가정……. 가정이라는 교회에서 ‘그리스도 삼중직’을 드러내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앉은 목동인 나는 ‘생명의 창조주 주님께서 나에게 위탁하신 내 양, ㅡ위탁이기에 “내가 낳은(개척한) 자녀(교회)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따위로 내(정삼지 목사)가 내 딸내미(서울 목동 제자교회) 소유권을 결코 주장할 수 없는ㅡ 내 딸내미’를 육의 양식으로 먹이는 육적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으로 먹이는 영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이 아닌 경우, 불신자 아버지인 경우 이 영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육적 아버지일 뿐이다. ㅡ나는 가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앉아 계셨던 내 아버지께 “차별” 의식을 느낀 적이 없다.ㅡ
그러함에도 “나이가 많은 연장자와 직장 상관과 정치인 관리와 학교 선생도 영적 부모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도 목사가 영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학교 선생”이 ‘영의 양식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학생에게 먹이는가(가르치는가)? 웨슬리언 이인규 권사님 ‘짧은(좁은) 사고’에서 나온 ‘논리 부족’이다. ‘우물 안 교만한 개구리’로서 ‘논리 없음’이다. 이런 것을 ‘(우물 안 개구리로서 교만한 Wolf이철 주특기인) 허수아비 오류,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이라고 하고, ‘(웨슬리언 장기영 교수님) 범주의 오류, 논점 일탈’이라고 하고, ‘논리 비약’이라고 한다.
목사(목동)의 직분은 양무리를 치고 먹이는 직분이다. 그런데 뒤집어 놓고 하는 사고가 없는 이인규 권사님은 <목사가 성도들 영적 아버지인가>에서 “목사가 영적 아버지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분들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과연 목사인가에 대해서 답변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면 목자장 주님께 제자들을 대표해 양무리를 치고 먹이는 직분을 위임받으셨던 베드로 사도(요 21:15~17)는 목동이 아니셨는가? ㅠㅠ ‘성경(신학)공부 부족’에 따른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그 하나마저도 그릇되게 알고 있는 유치원생 딸(정이철 목사)’과 같은 ‘유치한 사고’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해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에게 본이 되라.(벧전 5:1~3)
오늘날도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나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목동 선교사님들은 ‘선교를 돕는 디모데 같은 조력자들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낳으셨던 바울 사도’처럼 ‘돕는 배필인 아내 같은 조력자들과 함께 “주님 안에서 복음(영의 양식)으로”(고전 4:15) 교회(양무리)’를 낳으신다. “해산의 수고”(갈 4:19)를 하신다. 생명의 창조주 주님께 위탁받은 육의 자녀를 낳는 것처….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교회 영적 아버지이셨던 목동 바울 사도와 같으신 목동 선교사님’만이 아니라 그분을 돕는 분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한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스데바나의 가족은 아가야의 첫 열매이며, 또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자들이다. 이런 이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이에게 복종하기를 바란다.(고전 16:15)
다음은 내 글 <이른바 “복음주의자”들 ‘만인 제사장설 왜곡’을 반박함>에서 옮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하나님 부르심을 받은 신약 교회의 모든 사람 너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 5, 6절 말씀은 하나님 부르심을 받은 구약 교회의 모든 사람 너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두 말씀을 생각하면서, ‘구약 교회의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아닌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ㅡ국가이기도 했지만 구약 교회이기도 했던ㅡ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제사장직으로 부르셨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장자는 내 것이다.”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출 13:2. 출 34:20),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장자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남녀노소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듯이,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장자’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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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지파에게는 분깃을 주지 않으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외 다른 지파들 장자들에게 명령하신 제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민수기 3장 40절부터 51절에 적힌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해 봅니다.
‘좁은(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민 3:40~51 참고)는 주님 공생애 때 ‘주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와 다메섹 도상에 현현顯現하신 ‘주님께 직접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행 26:9~23)을 뜻한다.2) 그리고 바울 사도 조력자(동역자)였던 바나바 같은 목동들에게 “사도”라는 단어가 쓰였다(행 13:43. 14:4,14. 고전 4:1~13)는 점에서, 또한 빌립 집사만이 아니라 핍박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성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화목)의 말씀을 전”(행 8:1~5)하는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사도’(출 13:2, 19:5~6, 34:20 참고)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의 “자칭 사도”들을 에베소교회는 분별해야만 했던 것(계 2:2 하)이다.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43)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행 8:4~5)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해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 하)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돼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돼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 15: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이 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해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8~20)
로마서 15장 16절 “나”는 ‘바울 사도’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8절~20절 “우리”는 바울 사도 영적 아들로서 바울 사도를 도우셨던 ‘목동 디모데 같은 동역자(조력자)들’(행 18:5)과 ‘바울 사도’다. 물론, 이것은 ‘좁은(엄밀한) 의미’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나”와 “우리”를 확장하는, ‘넓은 의미’로는 중생 시 ‘선지자, 제사장, 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해 이 세상에 ‘그리스도 삼중직’을 드러내는 직무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다. 그런데 중생하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 젖을 먹어야 하는 ‘갓난아기’와 같은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목동의 양육을 받아야 할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목동의 양육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주님의 청년’으로 자라야 할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해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1~14)
승냥이에게 짖어대는 양치기 개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청년으로 자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리스도 삼중직’을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다. 내 글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목회자가 ‘그릇된 성경해석’을 지적받았을 때]4)에 적힌 오광만 선생님, 1986년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에서 목동 최낙재 목사님 성경해석 오류를 지적하셨던 양, 오광만 선생님(현재: 목사님)이 좋은 예다.
급한 성정으로 앞뒤 생각 없는 글쓰기를 하시는 이인규 권사님은 <목사는 성도들 영적 아버지인가?>를 다음과 같이 끝맺으셨다.
사계 님이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그가 목사이기 때문에 성도와 차별되고, 공경을 받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목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진정으로 성도를 아끼고 사랑해야만, 성도가 그 목사를 존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목사이기 때문에 성도와 차별되고, 공경을 받아야 한다.’는 문장이 ‘인용부호 쌍 따옴표’가 있어, 내가 쓴 문장으로 읽힌다. 물론, 나는 이번 논란 때 ‘차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이인규 권사님 독해력 부족에 따른 오독에서 나온 “군림”을 떠올리게 해 부정의 이미지만 떠올리게 하는 “차별”은 이인규 권사님이 쓰신 단어일 뿐이다.
그런데 ‘남자(아담)-여자(하와)’라는 창조 질서(순서)는 하나님의 차별을 뜻하는가? 아니다. ㅡ내 엄마 아버지께 차별 의식이 없었던 나는 차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인규 권사님도 이렇게 생각하시리라.’ 생각한다.ㅡ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준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재창조 명령을 받은 아담(창 1:28)을 온전히 채우는 존재로서 하와’는 아담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목숨을 내어놓아도 좋을 지극히 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하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목사이기 때문에 …… 공경을 받아야 한다.”는 이인규 권사님 주장을 살펴보자. 이 주장이 “결정적으로 잘못”된 주장, 완전히 잘못된 주장인지를 내 경우를 들어 살펴보자. 물론, 이 주장 역시 나를 모함하는 거짓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인규 권사님 ‘오독誤讀’을 지적함>에 적은 대로 이번 논란 때 다음과 같이 밝혔기 때문이다.
“(3) 사계 님은 목사는 성도의 영적 아버지로 공경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루터 선생님 가르침과 칼빈 선생님 가르침을 제시해 이를 밝혔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목사”는 “내가 개척한 교회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라는 말로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소유로 여긴 예장 합동 모 목사나 이단 교주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사 직분을 받은 분이라면, 이단이거나 자유주의 사신死神신학에 물든 목사가 아닌 이상, 그분이 나보다 어린 분이시더라도 그분께 예의를 다한다. “목사이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공경”을 하는 것이다. 존경심으로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믿음} 정이철 목사 신학 오류를 밝히는 여러 비평문’에서 드러나는 대로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하나님 말씀을 훼손하는 Wolf이철 같은 목사’는 공경(존경)하지 않는다. 내 글 <“이 비밀이 크도다.”>에 적혔듯이 “하나님의 일꾼(종)으로서 목사(목자: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의 권위는 양무리를 목자장님께서 계시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목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진정으로 성도를 아끼고 사랑해야만, 성도가 그 목사를 존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는 이인규 권사님 말씀은 목사님들께서 가슴 깊이 새기셔야만 할 말씀이다.
ㅡ불자佛者이셨던 선친先親 밥상머리 교육 하나가 “채동아, 존경받지 못할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이 네 할머니나 네 엄마나 네 형 같은 윗사람이라면, 예의를 다해라. 그래야 어디 가서 지 부모한테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개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단다.”였다. 그런데 정이철 목사가 이단 판정을 받기 전 혹시라도 정이철 목사를 만나게 된다면, “목사이기 때문에” 나는 정이철 목사에게 “목사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예의를 갖출 것이다. 물론, 정이철 목사 신학 이단성을 알기 때문에 이 예의는 정이철 목사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예의는 아니다. 존경심 없이 “(아직 이단 판정을 받지 않은) 목사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는 것일 뿐이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예의를 갖추셨던 바울 사도(행 23:1~5)처럼….ㅡ
나는 내 명예를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내 이웃(형제) 명예가 내 명예와 얽혀 있을 때는 내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명예를 회복함으로써 내 이웃 명예를 회복하려고 애를 쓴다. 다음은 {페북} 내 담벼락에 <이인규 권사님 ‘거짓증거’를 지적함>을 링크하면서 쓴 글이다.
제9계명
朴埰同 (2020.05.01.17:29) ·
자기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다른 명예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양무리를 섬기는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 모범} <목사> 조항이 가르치는 대로 목사(목동)는 ‘양치기 개’가 아니다. 링크하는 글은 내 명예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무물 카페}에서 명예훼손을 당하신, 얼굴도 모르는 젊은 형제, JML 님 명예회복을 위해 쓴 글이기도 하다.
<목사는 성도들 영적 아버지인가?>에 달린 댓글들 가운데 ㅡ선친 말씀에 따르면 “너는 음력 7월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양력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새벽 통금해제를 알리는 목포 오포대 사이렌 소리가 애애앵~ 울림과 동同시에 태어났다.”는ㅡ 범띠생 나를 자극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네.’라는 생각으로 웃음 짓게 만든 댓글은 thaiis 님 댓글이었다. JML 님을 언급하며 “비상식적 인격모독을 무기로 무차별적 카페흔들기”라는 말이 적힌 thaiis 님 댓글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이인규 권사님과 똑같이 분별력이 뒤떨어진 나머지 JML 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댓글이었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니라 JML 님을 언급한 suntcha 님 댓글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으로는 이른바 “신상털기” 댓글을 쓴 아리에티 님 댓글이었다. 아리에티 님 댓글에 적힌 내 페친 “김모 씨”는 ‘김성태’ 님이다. {무물 카페}에서 김성태 님을 알게 됐다. {페북} 김성태 님 담벼락을 보니, 김성태 님이 정이철 목사 제자였다. 그런데 {무물 카페}에 쓴 김성태 님 분노에 찬 글들을 읽으며 김성태 님이 정이철 목사 제자라는 점에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가 페친을 신청해 페친을 맺게 됐다. 그런데 사정도 모르는 신상털기 댓글을 쓰면서 “똑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지 않습니까. 결국은 초록동색이네요. ㅋㅋ”???
이인규 권사님은 내 글들을 비평하면서 신천지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를 들이대셨다. 내 관점에서는 ‘분별없는 까닭으로 겁 없이 허위사실을 적시한 명예훼손을 저지른 댓글을 쓰신 thaiis 님과 suntcha 님과 아리에티 님’에게 이인규 권사님은 전광훈 급이다.
‘신상털기 댓글로 내 명예를 훼손한 아리에티 님’과 ‘이웃을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할 기독교 카페 카페지기로서 직무를 다하지 않고 이 명예훼손 댓글을 방치하신 이인규 권사님’을 그만두지 않을 예정이다. 이번 논란과 얽힌 {무물 카페} 글들은 ‘허위사실을 적시한 명예훼손 증거물’로 삼으려고 모두 스마트폰으로 찍어 놨다. 4 년 전 {페북}에서 지 부모를 욕 먹이는 줄 모르는 개 후레자식들에게 이른바 “사이버 테러”를 당했을 때처럼…. 범 무서운 줄 모른 이 하이에나(들개) 떼들은 ‘호남비하 영남우월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이른바 “문빠”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때 이 증거물을 경찰서로 가지고 가기 전, {페북} 자기들 페친ㅡ20대 총선에서 국민의 당을 지지한 호남 사람들을 두고 자기 담벼락에 호남비하 글을 쓴 젊은이ㅡ 담벼락에서 웃어른인 내 인격을 모독하는 댓글들을 서슴지 않은 이 개 후레자식들에게 반성할 기회는 먼저 줬다. 왜 허위사실을 적시한 심각한 명예훼손인지를 지적하는 내용을 담은 {페북} 메시지를 이 젊은 들개떼들 모두에게 보낸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나보다 한참 나이 어린 젊은 목사님도 계셨다. 나를 두고 “뭐 하는 종자냐?”는 말을 쓴 목사님이셨다. 물론, 이 목사님에게도 {페북}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은 나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심으로써 하이에나가 아닌 목동임을 드러내셨다. 물론, {페북} 메시지로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목사님 한 분 때문에 경찰서로 가지 않고 다른 개 후레자식들까지 용서했다. 이때처럼, ‘직무유기를 하신 이인규 권사님’과 ‘아리에티 님’에게 반성 기회는 베풀려고 한다. {무물 카페}에 다른 아이디로 가입해 이곳에 쓴 글들을 링크해 그야말로 “카페흔들기”를 하려고 한다. 이 “카페흔들기”마저 이인규 권사님이 차단하신다면, 증거물을 들고 경찰서로 가는 수밖에 없다.
<{무물 카페}에서 강퇴당한 일을 해명함>이라는 제목 아래 쓰는 다음 글 부제목으로는 <이인규 권사님 ‘교만’을 지적함>과 <에필로그>로 정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쓰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내 생각은 갈대와 같아 “카페흔들기”를 안할 수도 있다. {무물 카페}에 있는 어린 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위사실을 적시한 거짓증거로 이단몰이 마녀사냥을 한, 심각한 명예훼손임에도 교회 법원이 아닌 사회 법원(경찰서)으로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전 6:1~6)다.
혹시 이 글을 존경하는 stay foolish 님께서 보실지 모르겠다. {무물 카페}에서 stay foolish 님 글을 읽는 것은 은혜였고 기쁨이었다. 항상 주님 안에서 영육이 강건하시기를 주님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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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장 합신 전종득 목사님께서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 올리신 글이었다.
2)~3)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4권}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394쪽을 참고함.
4)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목회자가 ‘그릇된 성경해석’을 지적받았을 때
http://cafe.daum.net/reformedcafe/Hxh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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