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유배자 인물탐구⑦]
신유박해 유배자 홍순희(洪順喜) 루시아 (1801. 童女)
(본성당) (순교자 기념관 본관)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살려주고 나를 죽여달라!"고 애원하다.
-1801년 형조(한양) 취조시에
*어머니는 강완숙 골룸바를 말하며, 오라버니는 홍필주 필립보(1801.27세.순교)를 말한다.
.강완숙(골롬바,
1761-1801,복자)의
딸, 童女, 靈光(사학징의1. 261쪽)
.서울 강완숙 골룸바 집에 있을 당시 윤점혜 아가다와 함께
여성들에게 교리교사 역할을 하였음
강완숙 처형 후 서울에서 영광으로 유배당함. 충청 덕산 출생.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떠나는 홍순희 루시아]
↑홍순희 루시아가 어머니와 오빠 홍필주와 함께 한양으로 상경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강완숙은 성장하여 덕산(德山)에 살던 홍지영(洪芝榮)의 후실(後室)이 되었다. 홍지영이 상처(喪妻)하여 재혼한 것이다. 결혼한 강완숙은 홀시어머니와 전실(前室) 아들 홍필주(洪必周, 필립보, 1774-1801)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를 신앙으로 이끈) 이 승리를 거둔 뒤 골롬바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도 입교시켜, 이들은 둘 다 모범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1791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롬바는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갖다줌으로써 신앙 증거자들을 도왔다. 그러다가 강 골롬바는 붙잡혀 홍주 목사 (洪州牧使) 앞에 끌려나갔다. 그의 신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무 형벌도 당하지 않고 배교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석방된 모양이다.
얼마 안
있어 강 골롬바는 남편에게 전답을 보살피도록 맡긴 다음, 그와 헤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딸(즉 홍순희 루시아)과 남편의 전처 아들 홍필주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살았다.
1801년 체포된 강완숙은 문초를 받으면서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서적을 (예산에 사는) 공씨라는 과부에게서 배웠습니다. 신해년(1791년)에 윤지충이 전주 감영에 갇혔을 때 제 이름이 죄수의 진술에서 나오자
포졸들이 천주교 서적을 수색하여 가지고 갔으며. 남편에게는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죄를 적용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저를 내쫓았으며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 한 남편은 강완숙에게 배교를 하던지 집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제 겨우 결손가정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강완숙 순교자에게 또다른 어려움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러나 강완숙 순교자는 결단을 내렸다. 집을 떠나더라도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결별하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
[외침, 2014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관비라면
그 무렵 관가에 배속되어 관가를 찾는 손님이나 관리들에게 수청을 들며 하룻밤 서비스를 해야 하는 일종의 위안부였다. 관비 노릇을 한다는 것은 차라리 교살이나 참수 못지 않게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全州市史’에서
★[홍순희의 교리교사 활동 기록]
『강완숙은 교리강습겸 강학회도 주관하였고 특히 첨례 때 교리를 강학하였는데, 주문모 신부, 교리에 밝은 남교우, 혹은 강완숙 자신이 교리강좌를 베풀었다.
강완숙은 자신의 딸인 홍순희와 윤점혜,문영인(궁녀.문서작성일도와), 정순매 등을 모아 교리를 가르쳐 교사로 양성하여 외부에서 전교하게 하였다.
*강완숙이 처녀들을 모아 가르칠 때 그를 주로 도운 사람은 윤점혜와 홍순희였다.』
-'순교자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가톨릭출판사.180쪽)
[강완숙 골룸바와 홍필주 필립보의 최후]
박해자들은 골룸바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골롬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1801년 1월 10일(음력)에 조선 왕조의 정부 당국이 천주교를 사교로 정죄하여 엄금하고 신자들을 체포할 때에 그도 어머니와 함께 같은 해 2월 24일(음력)에 연행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는 취조 중에 특히 주문모 신부의 행방에 대해 갖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머니처럼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홍필주는 처음에는 모든 어려운 고통을 잘 견디어 냈으나 점차로 마음이 나약하여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이러한 마음의 동요를 전해 들은 강완숙은 어느 날 문초 받으러 가는 도중에, 그의 아들을 멀리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예수께서 네 머리 위에서 너를 보고 계시다. 네가 그와 같이 눈이 어두워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느냐.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복을 생각하여라.그의 어머니의 격려를 받은 홍필주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신앙의 증거자가 되었다. 그는 8월 27일(음력)에 참수형을 선고 받고, 한양의 서소문 밖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출처] column,criticism 교회사 자료실
http://missa.or.kr/missabbs/board.php?board=qqqcolumn&page=37&command=body&no=80
이때 홍순희 루시아도 체포되어 함께 신문 받을 때 강완숙(모)이 주문모 신부를 은신시킨 사실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홍순희 (루시아)
1867.4.7.순교(병인박해때)
동녀. 그녀는 강완숙 공동체 일원이었다가 1801년에 체포, 배교한 후 4월12일(5.24)에 영광으로 유배갔다.
.강완숙이 만든 여성공동체 10여 명 중 친딸 홍순희를 비롯하여 7명이 배교하고 유배를 갔다.
('윤유일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3집, 41쪽)
*홍순희는 1801년 박해때 형조에서 신문을 당했다. 그때 홍순희는 "어머니 강완숙과 오라버니 홍필주를 살려주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나 그는 전라도 영광 땅에 유배되었다. 아마도 그 동정녀는 당시 여늬 여성 유배죄인처럼 관리들의 노리개로 전락되었을 것이다.
-'들숨 날숨'2002.9월호에서 발췌
-홍순희의 삶
.모친 강완숙의 서울 이사로 아버지와의 결별(강완숙이 남편 홍지영에게 쫒겨남)
.영광으로 유배(두번째 결별)
-관노비의 수모의 삶
.모친과 오라버니의 죽음
-1867 순교까지 질곡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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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칼럼 기사]
조선후기
잊혀진 여성 홍순희(루시아) 생애 소개
한국(韓國) 천주교(天主敎) 5대 박해중의 하나인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년여에 걸쳐서 남인 신서파(信西派) 학자들을 포함하여 3백명이
순교하고 더불어 수백명이 유배간 대규모 박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유배간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본 칼럼에 소개하는 洪順禧(루시아)이다.
사실
홍순희라는 이름만 언급하면 생소하게 느낄 수 있으나 그녀는 한국천주교회(韓國天主敎會) 최초의 여성회장(女性會長)이었던 姜完淑(골롬바)의 딸이었다.
이제
홍순희가 어떻게 유배까지 가기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홍순희는
풍산홍씨(豊山洪氏) 문중(門中)의 후손(後孫)으로서 충남 덕산에서 홍지영(洪芝榮)과 강완숙(姜完淑) 사이에 출생하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특별히 알려진 바 없으며, 강완숙이 덕산에서 서울로 상경할 때 할머니,이복오빠 洪弼周(필립보)와 함께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강완숙이 서울에 상경할 때 처음에 정착한 곳은 倉洞(현:南倉洞)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시 이주하여 체포될 당시의 거주지는
계동(桂洞)이었다.
홍순희의
행적과 관련하여 확실히 알려진 대목은 신유박해 때인 1801년(순조 1) 2월 24일 계동의 집에서 강완숙,홍필주와 함께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이후 강완숙과 홍필주는 서소문밖 형장에서 순교의 길을 걷게 되는 반면에 홍순희는 전남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는 것인데
안타까운 점은 그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홍순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강완숙의 딸이라는 혈통적인 측면도 있지만 또 다른 요인은 홍순희가 강완숙,홍필주와 함께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은신시킨 사실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모든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강완숙과 홍필주의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희생하겠다는
발언을 하였다고 하니 그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1795년(정조 19) 강완숙의 집에는 여러명의 동정녀(童貞女)들이 모여 오늘날의 수녀원 같이 동정녀 신앙공동체(信仰共同體)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인데 그 구성원중의 한명이 바로 홍순희였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잊혀진 여성 강완숙의 딸 홍순희를 애절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그 생애가 우리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충심으로 기원한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 칼럼니스트.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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