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동운동을 풍요롭게 하는 인문운동
협동조합은 ‘마음’의 경제
---소통과 의사결정 그리고 생산성
협동조합은 꿈의 경제다.
특히 요즘 불고 있는 협동조합 바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즉 협동조합운동이 지금의 경쟁위주의 이기적이고 물신(物神)지배의 천박한 경제질서와 생활양식으로부터 벗어나 뿌리로부터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세기의 짧은 기간에 최빈국으로부터 세계경제 10위권의 나라로, 독재국가로부터 평화적 정권교체가 정착하고 있는 민주화된 나라로 변모하였다.
사실 이런 성과들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행복도(幸福度)는 OECD 국가 가운데서는 최하위권, 전 세계적으로는 100위 권을 하회하고 있다.
그 원인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양극화의 심화와 상대적 빈곤감, 천민자본주의의 물신지배, 경쟁이 주는 스트레스, 개인중심의 민주주의가 나타내는 이기주의의 차가움 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우리 공동체에는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지표와 기술지표, 세계 최악 수준의 인간존엄과 인간지표가 병존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공동체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라고 까지 시니컬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세월호의 참극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잠시나마 하나로 되었던 ‘거룩한 마음’이 편가름의 블랙홀에 빠져 안갯 속으로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생기지 않으면 나라가 망(亡)할지도 모른다.
정부에게만 맡겨 둘 수 없어 이제 현대의 의병(義兵)이 출현해야 할 것 같다.
협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의 주체도 그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 의병(義兵)은 구식무기를 들고 신식 병기로 무장한 외래 침략자에 목숨으로 항거해야 했던 구한말과 달리 ‘돈이 지배하는 차가운 사회’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따뜻한 사회’로 바꾸기 위해, ‘사랑‘을 무기로 용기의 원천이 ’기쁨‘인 사람들의 대오(隊伍)다.
협동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큰 딜레마註1를 해결해야 한다.
경제적 동기와 경제외적 동기(사회적 인문적)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사회경제적 약자가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선택하지만, 협동조합은 대단히 높은 정신적 사회적 의식의 뒷받침이 있어야 건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사이좋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정신적 가치가 생산력으로 전화(轉化)’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註1;
공자가 말하기를,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논어 제14편)
협동조합 제7원칙;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동의를 얻은 정책을 통해 조합이 속한 지역사회의 지속가능 한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1. 사이좋게 의사결정하기
소통과 민주적 의사결정은 사회적 경제주체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정부경제나 시장의 사적(私的) 경제에 비해 경제주체들의 자발성註2과 주체성註3이 가장 잘 보장된다는 점에서 그 가장 큰 장점이 있지만, 제대로 소통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갈등 또한 커져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대단히 성숙한 의사결정 방식이 요청된다.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려한다.
‘소통’이나 ‘경청(傾聽)’을 아무리 강조해도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협동조합은 모두가 주인이다. 특히 소규모의 창업적인 협동조합은 평소 사이가 좋던 사람이나 어떤 가치지향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막상 이 주인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고 그것을 집행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진행하다보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던 사이마저 멀어져 버린다면, 끝장이다.
같이 하다보면 서로의 아집(我執)이 들어난다. 연애할 때 모르던 것이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파커파머라는 사람이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갈등은 있게 마련인데, 선택은 결국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부서져 흩어지느냐?’ ‘깨어 열리느냐?’라는 것이다.
이 깨어 열리는 길이 사이좋게 의사결정하는 길이다.
서로 비비고 부딪치면서 자신의 아집이 엷어져, 상대를 향해 마음이 열리는 상태로 가는 것, 그것이 중심의 문화로 자리잡는 것이야말로 협동조합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자신과 생각이나 이해(利害)가 다를 때 무조건 양보하고 참아야할까? 사이좋음과 일치를 위해서...
참고 양보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참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참는 것은 일종의 독(毒)이다. 이 독이 처음에는 약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절로 약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진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를 경청하고 상대를 배려하려고 해도 자신의 마음 속에 ‘내 생각이 틀림없다. 당연하다.’는 것이 깔려 있는 한 잘 될 수가 없다.
이 뿌리를 검토해서 이 바탕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원체 오랜 동안 단정(斷定)의 문화 속에 살아와서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근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은 어떨까?
나는 여기, 즉 ‘사실은 어떤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아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각(自覺)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고전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훨씬 고전을 잘 읽을 수 있다.
공자의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吾有知乎哉? 無知也)라는 무지(無知)의 선언註4이나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참된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을 화두로 서구 사회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린 숭산 선사 등이 그 좋은 예(例)가 될 것이다.
현대과학으로 인식의 메카니즘을 이해하면 이 말들은 훨씬 잘 다가온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각자의 서로 다른 감각기관과 서로 다른 저장된 정보가 만나서 판단하는 것일 뿐, 사실이나 실제와는 다른(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이 무지의 자각(自覺)은 출발이다.
캄캄한 무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회의(懷疑)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탐구와 소통의 시작으로 되는 것이다.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 가치관이나 신념을 버리라는 말이 전혀 아니다.
그런 것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탐구하고 소통하겠는가?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제안을 한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사실이다’라는 것만 내려 놓으면 된다.
내려 놓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이 생각은 내 감각과 내 판단일 뿐’이라는 자각만 유지하면 된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 또는 이상(理想) 등을 그것이 틀림없다는 단정(斷定)을 기반으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제부터는 딱딱한 단정보다 유연함이 훨씬 자기를 잘 표현하고 상대를 잘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연습하고,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머리로 자각한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 잘 이해되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오랫 동안 “내 생각이 틀림없어” 하고 훈습된 상태가 빨리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의식하고, 특히 다른 생각을 만나 힘들 때 이 자각(自覺)을 연습하는 기회로 한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해 갈 것이다. 처음에는 참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점차 참는 것(忍이라는 毒)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恕라는 藥) 마음의 진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의 주체들이 개인적 집단적으로 연습해야할 가장 중요한 테마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어려운 과제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것은 사회적 경제의 성공적 뿌리내리기를 넘어서 전체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註2;
제1원칙: 협동조합은 자발적인 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조합원으로서 책임을 다할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性)적•사회적•인종적•정치적•종교적 차별 없이 열려 있다.
註3;
제2원칙: 협동조합은 조합원에 의해 관리되는 민주적인 조직으로서, 조합원들은 정책수립과 의사결정에 활발하게 참여한다. 선출된 임원들은 조합원에게 책임을 갖고 봉사해야 한다. 개별협동조합에서는 조합원마다 동등한 투표권(1인 1표)을 가지며, 협동조합연합회에서도 민주 적인 방식으로 조직하고 운영된다.
註4;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비어있는데서출발하여그양끝을들추어내어마침내밝혀보리라.”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非同 非異
원효(元曉)
비동비이이설(非同非異而說)
리(理)에 어긋나지 않고, 정(情)을 해치지 않는 말하는 법
2.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에 의한 적절한 생산력
마음은 생산력으로 전화(轉化)되어야 진실한 것이다.
협동조합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하더라도 망해버리면 그만이다.註5 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동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본령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시장 안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일반적으로 이윤과 경쟁을 동력으로 하는 다른 사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더 큰 비전을 그리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사실 지금의 높은 생산력과 소비수준의 근저에는 ‘경쟁’이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누군과와는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보니 이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렸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사실 나는 이런 동기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중견기업들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을 넘어서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15세기의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 부르건 이 두 상태가 만나는 것註6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강제적인 협동, 부자유한 협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협동이 아니면, 마치 주인 없는 공사처럼 생산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 마음을 연습하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생산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노동’이 ‘경쟁에 내몰려 쥐여 짜내지는 노동’보다 즐거운 것은 당연하지만 생산력이 나올 수 있을까?
이것은 지난 한 세기가 실험했지만,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과제다.
아무리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더라도 생산력이 나오지 못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 생산력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註7
註5;
제3원칙: 조합원은 협동조합에 필요한 자본을 조성하는데 공정하게 참여하며, 조성된 자본 을 민주적으로 통제한다. 일반적으로 자본금의 일부분은 조합의 공동재산이다. 출자배당이 있는 경우에 조합원은 출자액에 따라 제한된 배당금을 받는다.
제4원칙;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에 의해 관리되는 자율적인 자조 조직이다.
제6원칙: 협동조합은 지방, 전국, 국제적으로 함께 협력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협동조합 운동의 힘을 강화시키고 조합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봉사한다
註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시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니라.”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요즘 여행도 많이 하고, 남자들끼리만 살다 보니 식당을 많이 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처음 가보는 식당이라도 잘될지 어떨지가 대강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어제 설렁탕집에서도 처음 신경 쓰인 것이 그 젊은 청년의 태도였다. 아들인 것 같은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그 일에 붙고 있는가였다. 처음에는 좀 걱정스러웠는데, 나중에 마음이 놓였었다. 받아들이는 것이 '서(恕)'이고, 붙는 것이 '충(忠)'이다.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꿰뚫음)하였다는 서와 충이 어려운 관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그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서'이고, 자기 역할에 즐겁게 전념하는 것이 '충'이다.
음식에 정성이 묻어난다. 밑반찬이 좋다. 맛이 있다. 이런 것들은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식당은 성공한다. ㅎㅎ
아침의 단상...“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할 때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기업에서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비난 받거나 왕따당하거나 해고된다.
그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라면, 그 일이 그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그가 힘들어하는데 마음이 간다.
어떻게 하면 그가 적성에 맞고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알맞는 일도 알아보고, 노동조직이나 분업도 바꿔보는 방향으로 마음이 나간다.
이런 마음이 서로 작용하는 곳이라야 자본주의의 결함을 넘어설 수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는 책임이 약하고 느슨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이런 마음이 사회적 공기로 작용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이남곡의 페이스북에서)
註7;
제5원칙 협동조합은 조합원, 선출된 임원, 경영자, 직원들이 협동조합의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교육과 훈련을 제공한다.
협동조합은 일반대중 특히 젊은 세대와 여론 지도층에게 협동의 본질과 장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3. 정신과 물질의 조화--마음도 물질도 풍요로운 삶
함께 하다보면, 특히 경제적 사업의 경우 ‘저 사람은 너무 물욕이 강해!’ 또는 ‘저 사람은 지나치게 마음만 강조해!’하는 생각들이 서로를 불편하게 할 경우가 있다. 특히 물질생활이나 소비 욕구 같은 것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 구성원 사이에, 또는 협동조합 간에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사업체로서의 기능과 결사체로서의 기능을 둘러싼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로 전개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무엇일까를 함께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은 물질의 확보다.註8 물질생활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면 협동조합 역시 존립기반이 없어진. 그런데 이것이 역전되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자본주의의 최대 기여는 인간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하게 하는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만 최대의 문제는 인간소외인 것이다. 즉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돌려 놓지 못하면 개개인의 행복은 물론 인류의 생존이 아니 존속 그 자체가 위험해진다.
이런 측면에서도 협동조합의 역할이 기대되는 것이다.
요즘 ‘단순소박한 삶’이 하나의 화두처럼 떠오른다.
공생공빈(共生共貧;같이 살고 함께 가난하기)이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이런 취지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극단적이 되거나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지 않게 되면 보편화하기 힘든 주장으로 비춰지기 쉽다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안빈락도(安貧樂道)註9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을 현대적으로 음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즐기는 것이다.
오늘날 이 도(道)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정신적, 예술적, 영적 욕구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인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이란 동물계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욕구들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욕구는 감소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욕구의 질이 변해서 이루어지는 ‘단순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적 풍요’인 것이다.
아마 자발적 가난이란 표현도 그 뜻이 같겠지만, 자칫하면 참아내야 하는 부자유가 섞일 수 있어서 현대인들의 높은 자유도(自由度)를 생각하면 ‘자발적 풍요’라는 표현이 어떨지...
이렇게 어떤 극단이나 강제도 없이 새로운 ‘(소비)생활문화’가 협동체 안에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비단 구성원들의 삶의 풍요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전환을 위한 인류의 노력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註8;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註9;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여쭈었다.
“《시경》에서 말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란 바로 이를 말하는 건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구나. 하나를 말하면 그 다음을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學而 第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