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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들어가는 말
위대한 정복자로, 서구인에게 구세주가 오기 몇 백 년 전에, 오직 인간들만 있었던 시기에,1) 유럽인들
이 알았던 세계의 대부분을 제패했던 한 인물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고대 마케
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ros 3, B.C. 356~323).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정복한 장수이며 제국의
창시자인 그는 스무 살부터 시작된 원정에서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될 때까지, 겨우
12년간의 원정을 통해 두 개의 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제패하여 자신의 제국을 건설한 역사적인 인물이
다. 그러나 생성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소멸됐던 그의 제국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 자신의 젊은 이미지와
더불어 헬레니즘이라는 세계제국, 혹은 세계시민이라는 짧지 않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2천 삼백 년 전의
까마득한 고대, 전설이나 통했을 법한 시대의 사람이지만, 그가 칼로 세운 제국은 서구인들의 기억에 남
아 아직도 역사상에 짙은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대기가 최근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 개봉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을 소재로 한
작품은 헐리웃에서 근 40년 만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지난 98년의 타이타닉을 필두로 이어지고 있는 할리
우드 서사극의 부활의 연장선에 다름 아니다. 2억 4천만 달러라는(한화로 2천 539억 원) 천문학적인 제작
비가 쏟아진 이 영화는 그 제작 규모나 감독의 명성을 봐서라도 그에 걸맞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 전설적인 전쟁 영웅의 전기 영화를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이미 전작인 , <닉슨>같은 영화로,
‘기록되지 않은 인물의 내면을 통해 역사를 통찰하는 탁월한 감각’을 높이 평가 받은 인물이다. 그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에너지 넘치는 어떤 인물에게서 찾았고, 그 인물의 열정이나 일그러진 내면
에서 냉정한 시각으로 역사를 관찰해 왔다. 이 같은 시선은 <플래툰>, <7월 4일생> 같은 현대사를 다룬
작품에서는 예술이 역사를 관조하는 훌륭한 시선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본 작품 <알렉산더>는 제작 시기의 무성했던 기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내에서는 흥행에서나 평
단에서나 혹평을 받으며 침몰한 바 있다 - 뉴스위크의 평론은 ‘이 영화의 지루함을 극복하려면, 극장에
보급품을 싸들고 가라’는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최악의 영
화상으로 유명한 라즈베리 상의 목록에 오르는 등 수모를 당하고 있다2) - 이 영화를 수작이라고 생각하
는 필자의 견해로는 그런 편협한 미국 평단의 반응이 다소 이해하기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반면,
한국과 유럽에서는 상당한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서도 꽤 괜찮은 성과를 올리는, 다소 의외의 결과를 낳기
도 했다.3) 흥행을 영화예술의 절대 기준으로 평가 할 순 없지만, 이 현상은 뭔가 짚어 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이 영화의 웅장한 스케일에 후한 점수를
줬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 글은 이런 의문점들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이 영화에 대한 이런 기묘한 흥행 결과도
결과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역사극이고, 아시아와 유럽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흔히 유럽과 아시
아라는 세계가 만난 것은 제국주의가 발흥하던 18, 19세기부터로 여겨지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두 세계의
만남은 훨씬 이전부터 이뤄진 것이었고, 그 모습도 훗날의 제국주의 구조의 어떤 원형을 제시한 측면도
있다고 여겨진다.4)
이러한 정치적인 색채와 연결해서 이 영화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이러한 시각이 서구 세계가 아시아를 이해하는 어떤 불공정한 방식을 가리킨다고 볼 때 비서구권을 묘사
하는 이 서구 예술의 시선이 과연 온전한 것인가에 대해 짚어보는 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
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글은 이런 의문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해, 역사극이라면 필연적으로 떠안게 되는 사실과 창조
와의 긴장관계에서 감독의 시선을 읽어내 보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필자 나름대로 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는 것, 그것이 이 글의 목표다.
1.정복왕
앞서도 언급한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흥행이 세계의 지역마다 다른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여겨진다. 왜 세계가 이 작품에 열광 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대단한 반응을 보여준 반면 이 작품의
모국인 미국에서는 반응이 이토록 싸늘하단 말인가. 이러한 반응에는 작품을 보는 관객의 시선, 혹은 그
들이 상황 현 시대적인 상황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시대극의 경우에는.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듯, 올리버 스톤은 자신의 이 ‘고대 서사시’는 현실의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
했고 그 어떤 정치적인 색채도 없다고 공헌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천 수백 년의 시간의 간격이
있지만, 그 페르시아가 무너진 자리에는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이 있다(우연의 일치겠지만, 한국의 자이툰
부대가 위치한 아르빌은 가우가멜라의 바로 아래 지역이다. 물론 페르시아의 후예는 이란이고, 이라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바빌론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제국주의 시대 이래로 중동에 대한 미국의 대대적인 전쟁이 시작된 이 마당에 중근동을 정복하는 유럽
제왕의 원정기가 지금과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예술 작품에는 당대의 시
대상이 드러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필자는 믿지 않지만 스톤감독이 정말로 이라크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영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평가하고 감상하는 관객과 평단의 시선에는 정치
적인 의도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은 은연중 자신의 감정과 인식을 담아 작품에 대한 인상을 만들어내고 그것
에 따라 평가한다. 그 평가는 시대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알렉산더에 대한 평가에는 과거를
보는 시점과 지금을 보는 시점 모두가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시점이 이 영화에서 보이는 어떤 방식들에, 대단한 혐오를 느꼈을 수도 있는 것이
다. 스톤 감독은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헐리웃 영화들에게 빠지지 않는 가족주의 묘
사를 통해 영화의 뼈대를 올렸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통해 과거의 그림자에 묻혀 알 수 없게 된, 지난
시대의 인물에게서 그를 충분히 설명 할 수 있는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는 꽤 괜찮아
보이지만, 어떤 측면으로서는 아주 논쟁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보는 이에
따라 꽤나 반가운 해석일 수도 있고, 아주 불쾌한 경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역사왜곡 얘기는 이 부
분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극의 매력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알렉산더는 서구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다 - 이 위대하다는
말에 선악의 개념이 없는 것이라면, 역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을 설명하는데 이 보다 괜찮은 수식어는
없을 것이다.
2천 3백년 전의 까마득한 고대에 그가 세운 단일 제국은 - 지중해의 지브롤터에서 인도의 펀잡까지 -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상의 전설과도 같은 것이다. 젊고 잘생긴 불패의 고대 전사, 동서양 융합이라는 새
로운 문명의 창시자. 알렉산더에게 갖는 현대인의 이미지는 대략 이런 식으로 고정화되어 있다. 스톤 감
독은 이런 기본 개념 위에 자신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알렉산더를 창조했다. 그런데, 그것은 꽤나 낯선
내면의 상처와 콤플렉스로 가득한 어떤 광기에 찬 젊은 영혼이다. 제국의 건설이 어디 그냥 되던가, 그건
인간의 피로 세워진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인간은 피 속에서 태어나고 피 속에서 죽어간다. 전쟁사극이기
도 한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전투장면들은 마치 지옥도를 보는 것 같다. 알렉산더의 실제 전장에서도 가
장 결정적이었던 가우가멜라 전투의 묘사에서, 영화는 초반부의 장엄한 군대의 사열 뒤에 치열한 전장을
그려낸 뒤 난장판의 폐허를 연출했다. - 무시무시한 긴 창을 들고 진군하는 마케도니아 - 그리스 창병
부대를 보고 그 장엄함에 한 순간이나마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지간히 강심장일 것
이다. -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진 장면은? 찢어진 깃발을 들고 울부짖는 알렉산더의 절규를 듣고 있노라면,
이게 이긴 전쟁인지 진 전쟁인지 헷갈릴 정도다.
일그러진 인간의 내면을 통해 현대사를 날카롭게 해부하던 그는 이런 자신의 관점을 고대 서사극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미치광이 같은 인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복잡한 요
즘 세상에 고대 서사시의 영웅담을 그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겠지만. 스톤식의 이런 냉정한 시선은
관객의 고정 관념을 깨는 것 이상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할퀴는 무엇인가가 있다. 틀림없이 보수적이고
오만한 미국인들은 이런 묘사에 상처입고 불쾌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마치 괴물처럼 보이는 알렉산더
와 그의 군대는 중동에서 지루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자신들의 처지와도 같아 보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이것이 올곧은 ‘공정한 시선’인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는 동방의
한 유구한 문화를 파괴한 장본인이다. 유럽인에게는 영광의 정복이었던 행로는, 어떤 지방의 아시아인들
에게는 그들 세계를 끝장내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스톤이 그런 정복과 파괴의 일면
을 과감하게 반영하기도 했다. 전쟁이 승패와 관계없이 참혹하기만 하게도 보이는 이유를 거기에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톤은 종래의 ‘문명의 전달자’라는 알렉산더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선전에
불과하다고, 그는 단지 콤플렉스에 빠진 미치광이였다고 외치기만 할 뿐 인식의 전환은 거기서 멈춰버리
고 만다. 단지 그가 그렇게 정복열에 폭주하게 된 계기는 그 내면, 혹은 그것이 비롯된 그의 모친 올림피
아와 부친 필리포스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환원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에게도 페르시아라고 불
리는 동방의 한 문명의 죽음은 역시 관심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2.어머니
이 작품에서 알렉산더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의 부모다. 경로와 효친 사상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던 동양의 부모들과는 달리, 서구에서는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식하고는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작품에서 유달리 집착하는, 흔히 심리학에서 언
급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죽이려는 욕구에 시달린다는, 이 무슨 콩가루 집안에나 있을 법한 얘기인
가도 싶지만, 전근대사회의 전제적인 왕정에서는 왕실가족 내에서 이런 긴장관계가 흔히 성립되는 것이
동서양의 보편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왕에게는 그의 정실 아내 이외에도 거느리는 뭇 여성들이 있다. 그러나 그녀들
에게서 아무리 많은 자식들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의 자리를 얻는 후계자는 단지 하나일 뿐이고, 바로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아들들은 무자비한 싸움을 벌여왔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 제왕이 되길 바라는 아들
의 든든한 후원자는 그의 어머니이고 이런 연유로 고래로부터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한 것
일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Olympias, B.C. 375경~316),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아내인 이 열정적
이고 전제적인 인물도 역시 이런 관계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이 영화에서 뱀을 키우는 그녀는 어딘지 모
르게 위험하고 무서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뱀이 고대 유럽에서 ‘여신’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
면, 뱀을 휘감고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신의 혈통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느
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녀는 위태로워진 아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올림피아가
남편 필리포스의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이미 공식적으로 이혼까지 한 그들
부부가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건 당시 사람들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필리포스의 죽음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사람이 누구였던가. 그때 군대에서 확고부동한 지휘를 굳히고 있던 아들 알렉산더라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그러니, 그가 원정을 떠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마케도니아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전쟁만 하다가 죽은 사
실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자책이었다고. 라고 이 영화는 결론을 내
리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올림피아의 자리가 너무 작았다. 그녀는 어쨌든 아들을 위해 큰 모험을 했지
만, 그 결과로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아들의 존경도, 그렇다고 중국의 여태후나 측천무후 같은 권력
의 자리도 얻지 못했다. 아무리 전제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라 할지라도 아들 알렉산더는 여자의 말을 듣
는 남자가 아니었고 또 당시는 숱한 전쟁으로 군인들이 지배하는 무인들의 시대였다. 아무리 왕실의 여인
이라고 해도 여성이 감히 국가의 권력을 넘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올림피아의 모습은 부풀려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알렉산더의 원정이
어머니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유용한 해석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만일 이 영화에서 유난히 과대평가된 캐릭터를 들라면, 올림피
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3.동성애
이 영화에서 알렉산더의 캐릭터 설정만큼이나 많은 논란과 반향을 불러일으킨 부분이 있다면, 바로 알
렉산더의 친구, 전우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크라테로스, 카산드로스, 헤파에스티온, 프톨레마이오스….
마케도니아의 최고 귀족들의 자제들로 이뤄진 이들 그룹은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더와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고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신하이며 전우라는, 전근대 국가의 통치 시스템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런 그룹을 이뤄왔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구조는 동양과 같은 강력한 전제군주정이 없는 유럽에서는 자연스러운 군신관계였
을 지도 모른다. 그리스는 자신들이 민주정 국가이며 전 백성이 황제의 노예인 아시아 - 페르시아와는 근
본적으로 다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국가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더구나 그것을 빌미삼
아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노예가 사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침략하는 한 구실로 삼기도 했던 것이
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전혀 사리에도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논리이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한 설득
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사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과 다른 왕정국가였지만, 아직 왕의
전제권은 행사되지 않았고 역대 군주들은 군대의 추천을 받아 선출되는 상황이었다(알렉산더의 등극도 군
부의 추대를 받아 이뤄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과 신하들의 관계도 이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특히 알렉산더는 이러한 친구들 속에서 연인을 두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헤페스티온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의 동성애 얘기는 워낙 유명한 것이라, 이 글에서는 그냥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넘
어가겠다. 고대 유럽 - 그리스 연안의 사회구조는 사실, 세부적인 정치구조만 제외한다면, 일상생활과 남
녀관계는 아시아 국가와 별반 차이는 없었다. 동양의 여성들이 일생을 규방에 갇혀 남편과 가족 이외의
남성을 만나지 못하는 폐쇄적인 사회 시스템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
들의 동성애에 관대한 것은 비단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를 비롯한 인근의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흔
히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는 여성들이 격리된 자리에 대체물로 같은 남성들이 그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일까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톤 감독은 파격적으로 알렉산더와 헤페스티온, 바고스의 관계를 영화에서 묘사했다. 이것 때문에 제
작사와 다툰 얘기는 유명한 일화가 될 정도다. (결국 감독이 고집을 꺾고 남자들 간의 정사정면은 모두
삭제했다.)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문제의 장면들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에서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
을까 고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다(미국 관객들이 이 장면들에 민감한 반응
을 보인 반면,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진짜 동성애자였을까? 그가 가장 아끼던 친구 헤페스티온에게 쏟은 정성이나, 그가 죽은 다
음에 보여준 지나친 상실감, 시종 바고스와의 관계 등은 이런 정황들을 충분히 보여준다. 알렉산더가 동
성애자였다는 것은, 르네상스 이후로 서구의 지식인들 에게는 공공연히 거론되는 이야깃거리기도 했다.
알렉산더를 동경해서 그를 흉내 낸 이집트 원정 - 학자들을 무더기로 끌고 가는 - 을 단행했던 나폴레옹
도 이런 알렉산더의 애정행각을 비웃은 적이 있을 정도다.5)
이를 두고 일단의 그리스 변호사들이 소송을 시작한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6) 여타 문헌에서 보이는 아
킬레스에 대한 알렉산더의 숭배는 대외적으로는, 최초로 그리스 너머의 세계를 정복한 전사에게 바치는
송가였던 점을 고려해 볼 필요도 있다. 어쨌든 그 숱한 전쟁을 치르고도 포로로 잡힌 여성들에게 알렉산
더가 유달리 관대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의 인성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는 측면도 될 것이다.7)
“19세기 중엽 이래 프랑스의 중등부 학생들은 알렉산더가 오리엔트에서 쌓은 업적을 배우게 되었다.
모든 개론서는 산업 혁명 이후의 유럽 문명의 혜택을 피정복 국가들에게 나눠 준다는 식의 식민지 개척을
합리화하는 긍정적인 측면들, 이를테면 평화, 민족들 간의 화해, 도시화와 무역의 발달, 정복자들의 선진
문화의 확산 등을 강조했다. 우리는 거기서 플루타르크를 비롯하여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서술했던 판에 박힌 듯한 설명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 경제, 문화적으로 선진국인 프랑스는 정복과 식
민지 개척이라는 방법으로 해외에 자기의 뜻을 전해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알렉산더는 식민지
개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5) 같은 책에서 인용, 141~142쪽. 나폴레옹의 알렉산더에 대한 평가를 가뇰이 그의 저서「고대사」에서
재인용, 가뇰은 나폴레옹의 마지막 평가는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소년기를 지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을 이끌고 지구상의 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
에게는 그런 행위가 단순한 침략, 돌발적인 결단에 불과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매사를 치밀하게 계산
하였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으며 현명하게 처리하였다. 알렉산더는 위대한 전사인 동시에, 위대한 정치
가, 위대한 입법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영광의 절정에 올랐을 때 머리가 돌아버렸거나 타락해
버렸다. 처음에는 트라야누스의 영혼을 가졌으나 끝에 가서는 네로 같은 심성에 헬리오가발루스 같은 행
동을 서슴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알렉산더를 비유한 헬리오가발루스는 로마제국의 제정 말기에 집권한 황제로, 자신의 남성
성을 부정하고 여성이 되고자했던 이상 성격자였다. 만년에는 군부의 반란으로 폐위된 뒤 암살되어 불행
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것이 알렉산더의 동성애 성향에 대한 비판이라면, 앞서 인용한 트라야누스는
그리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다. 트라야누스는 군인출신으로, 황제가 되어 로마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걸출한 무장이지만 그도 자신의 젊은 부장들 중 마음에 드는 장교들을 연인으로 거느린 바 있기 때
문이다.
6)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0831061§
ion_id=106&menu_id=106
7) 알렉산더에 대한 여러 찬사 중 돋보이는 것은, 단연 정복지의 여성포로에 대한 그의 젊잖은 예우에 대
한 일화들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의 가족들에 대한 예우부터, 혹독한 전투 끝에 점령한 소그디니
아에서 역시 포로로 잡은 공주 로크사네와 결혼한 것 까지 여러 사례를 들어 서구의 사가들은 여성에 대
한 알렉산더의 자비에 찬사를 보내왔다. 물론 이것은 중세서구 사회에서부터 내려오는 ‘기사도 - 귀부인
에 대한 기사의 봉사’ 문화에 입각한 해석에 다름 아닌 것이지만, 그 밖의 다른 제왕들이 정복지에서 보
인 난행들에 비교한다면,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몇 가지 일화를 든다면, 1402년에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 티무르는 앙카라의 대격전에서 승리한 뒤 당시
술탄이었던 바자제트 1세와 그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그 뒤 열린 승전 축하연에서 티무르는
술탄을 동물 우리에 가두어 파티장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만이 아니라 역시 포로로 잡은 바자
제트의 황후(세르비아의 공주)를 그 자리에 끌어내어 우리에 갇힌 남편이 보는 앞에서 장군들의 술시중을
강요하기도 했다. 바자제트는 이런 끔찍한 수모 끝에 마침내 화병으로 죽게 된다.
1453년에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동로마제국을 정복한 오스만의 술탄 메메트 2세도 예
외는 아니었다. 정복된 도시의 약탈과 파괴를 막는 등 전후처리에 있어 자비를 베풀었지만(그 결과로 성
소피아 성당이 파괴를 면함), 그도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는 꽤나 잔인한 측면이 있었다. 동성애 성
향이 있었던 메메트2세는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젊은이들을 직접 골라서 자신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는데, 만일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다음은 플루타르크가 「영웅전」에서 전하는 일화다.
“마케도니아가 반란을 일으킨 테베시를 평정하고 테베시 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리는 등 잔혹한
조치를 취하던 때였다. … 자신의 집에 침입한 트라키아의 용병을 살해한 한 귀부인이 알렉산더 앞에 끌
려왔다. 그녀는 자신을 끌고 가는 험악한 병사들 사이에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는
데, 알렉산더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한 눈에 그녀가 용감하고 뛰어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죽을 지도 모
르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신분을 묻자 그 귀부인
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필리포스(알렉산더의 아버지)에 맞서 싸우다가 케로네아
에서 전사한 테아게네스의 누이 티모클레이아입니다.”
알렉산더는 부인의 분명한 대답과 당당한 태도에 탄복하여 병사들에게 자녀들과 함께 티모클레이아의
석방을 명했다.”
4. 페르시아
알렉산더는 유럽인으로는 아시아를 최초로 정복한 사람이다. 전설 속에서는 아킬레스가 아시아의 트로
이를 정복했으나,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그것도 가장 큰 제국의 창설자는 그를 단연 선두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로도 확장되어 서구인들의 제국주의에도 큰 정신적인 토대를 이룩한다. 고대에
남겨진 선례가 후세에게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한 방편이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정당한 인식이 아니지만,
그 당시나 그 후에도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유럽인들의 행보에 어떤 정당성과 그로 인한 어떤 추진
력을 부여했던 것은 확실하다.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 트라야누스 같은 로마의 제왕들이 알렉산더를 동경했던 것도 널리 알려진 사
실이고 후대로 내려오면 동로마를 정복하는 오스만의 메메트 2세나 나폴레옹까지도 알렉산더에 대한 동경
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인 행보를 일치시키고는 하는데, 이렇듯 위대하게 아로새겨진 그의 정복사업은
모든 승자의 역사가 그렇듯이, 서구인들의 시각 내에서 과장된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영웅전』의 작가 플루타르크는 알렉산더에게 ‘동방의 야만인들에게 문화적인 큰 은혜를 내렸다’라
는 평을 내렸다. 이는 아리아누스, 디오도로스 같은 고대 작가들로부터 빅토르 뒤뤼 같은 제국주의 이론
가들까지도 공통적으로 주장해온 바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8)
그들이 역설하는 바는 ‘위대한 그리스 문명’이 야만적인 ‘페르시아’를 대체하고 전제주의에 신음하
던 아시아인들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2천 년 뒤에 같은 장소에서 또 다시 반복될 이 이야기의 근거는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서구인의 오만한 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알렉산더 사후 몇 백 년 존속했던
헬레니즘이나 인도의 간다라 미술이 이런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는 어떤 근거가 될 수 있을까?9) 유
동적인 문화의 흐름과 융합이 전쟁이 낳은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서구의 사가들은 당연
히 그렇다고 주장해 왔다. 알렉산더의 전쟁이 사실은 진짜 침략 전쟁이고, 그의 업적들이란 ‘도시를 약
탈한 산적떼들’에 불과하다는 평은 최근에서야 설득력을 얻고 있다.10) 생각해보라, 페르세폴리스나, 수
사. 바빌론 같은 장엄한 도시 문명이 대관절 마케도니아, 그리스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도시도 만
들 줄 몰랐던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제도도 우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노예와 여성이 제외된, 엄연
히 신분제와 폐쇄적인 굴레에 갇혀있는 그 제도를 민주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건 단지 전제왕권
의 통합이 이뤄지기 전의 유약하고 유동적인 과도 정체 체제를 민주주의라 과장되어 부르는 것은 아닌지
비판할 여지는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평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알렉산더 본인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은 상
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알렉산더가 ‘야만적인 아시아인은 사람이 아니니 그들을 동물이나 식물들
대하듯 하라’고 권유했던 스승(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르지 않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확실
히 알렉산더는 ‘산적떼들’이나 다름없었던 그의 부장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제장들이
페르시아의 재물을 약탈해서 돌아갈 생각만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아시아에 정복왕조를 차리려고 구상했
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페르시아의 복식과 궁정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영화에서는 바빌
론 정복 이후의 알렉산더의 모습은 언제나 페르시아 황제의 옷차림을 한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이 훗날에는 무슨 큰 문화 사업이라도 한 것같이 과장되지만, 아시아를 유럽화하려고 했던 것은 알
렉산더의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봐야한다. 그는 적극적으로 아시아인이 되려고 했다.
그가 페르시아의 복식을 입고 페르시아식 관제를 따르며 새로 세운 제국에서 페르시아 황실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것도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그는 페르시아의 패잔병들을 처리하면서 이는 자신에
게 쫒기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된 다리우스 3세의 복수를 한 것이며, 따라서 자기는 그를 승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알렉산더는 후대의 페르시아와 중근동의 역사에서 현명한 군주
‘이시칸다르’로 표현된다. 물론 아시아인의 얼굴에 이슬람 복장을 한 전사이다(영화에서도 이를 암시하
는 대목이 살짝 증장한다. 알렉산더와 소그디니아의 공주 록산느와의 고약한 신혼 첫날 밤 장면에서, 록
산느는 알렉산더를 그들 식으로 ‘이시칸다르’라고 부른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종종 신으로, 혹은 전설상의 영웅으로 신격화 하는 것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숭배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명백히 아시아적인 관념이고 이것 역시 아시아식의 전제
적인 권력 재편의 한 측면으로 봐야하는 것이다. 이런 알렉산더의 움직임에 그의 부장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리우스 3세의 죽음 이후로 빚어지는 필로타스의 반역사건이나 클레이토스의 살해는 이
런 권력관계의 재편에서 빚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당연히, 아시아의 전체가 아니다. 이 고대 제국은 중근동의 여러 민족들 위에서, 정복
왕조로서 느슨한 지배체계를 구축해 왔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이런 지배구조에 편승해서 최고 자리를 차
지한 상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군림한 것이다. 알렉산더 제국의 성립이란, 중동의 여러 민족들에게는
지배자가 페르시아인들에서 마케도니아인들로 바뀐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실 알렉산더가 아시아의 전
장에서 거둔 불패의 승리는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의 느슨한 지배구조가 일조한 면이 크다. 만일 이 아케
메네스 왕조가 중국의 여러 왕조들 같은 단일민족 체계의 더 단단한 구조였다면 알렉산더의 승리가 그토
록 영광스럽게만 장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알렉산더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세운 제국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제장들이 아시아 지배에 관심이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업적을 단순
한 도둑질에서 한 단계 격상하고자 했다.
그가 추진했던 결혼 정책이나, 페르시아 인들로 구성된 관료 집단, 아시아의 제민족들로 구성된 군대
등은 잘 알려진 알렉산더의 융화 정책들이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인도 원정은 페르시아 제국의 계
승자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진행했던 측면이 강하다. 마가다 왕국이 세워져 있던 북인도 지역은 전
시대의 다리우스 1세 때에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제국이 알렉산더에게 무너지기 훨씬 이전부터
독립된 지역으로 페르시아의 관할 하에서 벗어나 있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들에게 잃어버린 정복지
를 되찾자고 선동했고 실제로 앞서서 전투를 관장했던 것도 페르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독립적이고 용맹한 그의 부장들과 필연적인 마찰을 빚게 되었을 것이
고,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 역시 이와 관계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제기되고는 한다. 그의 부장
들은, 앞서 말했듯이 주군의 변모에 몹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그의 거듭된 숙청에도 큰 불만을 갖고 있
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아무리 신뢰하던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서 가차 없이 없애버리곤 했는데, 그의
이러한 인성에는 동서고금의 전제군주들이 갖는 악마적인 면모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어 끝을 맺는다. 그는 알렉산더의 암살을 증언한다. 그와
부장들은,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토끼사냥이 끝나자 삶겨지는 개’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의 공신들이 관례처럼 당하던 운명을 그들은 벗어나서 자신들끼리 제국을 나누는데 골몰
했다. 그들 중 최종 승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의 부장으로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후계자임을 자
청하며 이리저리 분열된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집트를 차지하고 정복 왕조를 차린 사람이다. 훗날 클레오
파트라의 조상이 된 이 야심 많고 노련한 사나이는 만년에 알렉산더의 전기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
는데,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11) 영화는 그 알려지지 않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전기를 재구성한 것
이고(실제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로빈 레인 팍스의 알렉산더의 전기) 감독의 생각이 분명한 알렉산더에 대
한 평가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입을 빌어 말한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얘기들을.
이러한 장면들의 묘사에서, 영화 속의 알렉산더는 극도로 불안한 신경에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캐릭
터로 묘사된다. 뼛속부터 유럽인인 그가 단지 머릿속으로만 구상했던 것을 실제로 구현하자니, 그것이 확
실히 보통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독수리가 자주 등장한다.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를 괴롭
히는 신의 사자이다. 영화 속에서는 알렉산더의 강박 관념을 상징하는 매개물이며, 죽어가는 그에게 찾아
오는 저승의 안내자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프로메테우스에 비견하고 있다. 그러나 그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가져다주는 신이 아니다. 산채로 간이 찢어지는 천형에 처해진 가련한 신이다.
맺음말
사실, 영화에서 내리는 결론은 우리에게 언제나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역사의 모태가 된 신화나 전설 속
에서는 범인들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들은 그 안에
서 신이나 영웅의 모습으로 구현된다. 알렉산더는 살아서 신이 되길 원했고 또 그런 존재가 되어서 역사
에 각인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극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결론적으로는 지나간 시대의 영웅에 대한 찬가로 이뤄져있다.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논쟁이나 사설들은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 이전의 작품들과 달라서 빚어진 일면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역사극은 - 다른 모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 만들어진 허구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역사와의 긴장 관계에서 작가만의 고유한 상상의 영역을 쌓는 것이 그 근간이라고 생
각한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알렉산더를 해석한 이 영화의 방식은 나름대로 독특한 것이고 의미 있는 것
이었다고 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알렉산더에 대한 종래의 모든 평가가 그렇듯, 이 영화도 그의 이상이나 정복 사업이
나 모두 일방적인 서구인의 시점이라는 것이다(스톤 감독은 알렉산더가 서구인의 시선으로 재구성되는 것
은 당연한 것이라며, 이런 지적들이나 비판들에 상당히 불쾌감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방식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권리가 있다. 역사를 의도
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대극에서 인물이나 사건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은 작가의 권리
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서구인들의 이야기에서 언제나 조연으로, 대상으로만 그려지는 아시아인들에 대
한 인상이다. 이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고 이 영화 <알렉산더>에서
도 예외는 아니다. 11)
알렉산더를 위대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아시아를 정복한 최초의 유럽인. 아시아의 문명 하나를 무너뜨린
유럽인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유럽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고
아시아인의 일원인 우리들에게도 낯선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지 승자의 편에 선, 종래의 역사관들 때문이라고 단순 치부해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필자
를 비롯한 평범한 범인들에게는 정치적인 공정성보다도 앞서는 것이 영웅 숭배 심리이기 때문이다. 이 영
화 <알렉산더>는 이러한 영웅 숭배 심리를 거부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 위해 종래의 헐리웃 서사극의 법칙은 모조리 무시하는 과감함도 보
여주었다(물론 그 대가를 상당히 치렀지만). 이러한 점이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로마 시대 플루타르크가 저술한 작은 책자를 보면 알렉산더의 공적이 로마군의 정복 활동에 맞게 재편
되어 인기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더는 야만인들과 미개인들에게 진보와 문명을 가져다 준 위대한
정복자의 전형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야만족의 군주들에게 문명을 전해주고 미개인들의 나라에 그리스식 도시를 세
우려고 하지 않았다. … 그는 야만인들의 나라에 70개가 넘는 도시를 세웠으며 아시아에 그리스의 법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거의 야생 동물에 가까운 그들이 미개한 생활 양식을 타파해 나갔다. … 알렉산더에
게 정복당한 민족들이 그의 지배를 받지 않은 민족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전자가 정복자의 손에
의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린 반면 후자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기 때문이다. … 원정의 목표는
철학자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 그는 강도떼처럼 아시아를 휩쓸고 다니지 않았다. … 알렉산더
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정부 밑에 있기를 바랐으며 모두가 한 나라의 국민임을 일깨워
주려했다….”
알렉산더의 생전 기록은 코린트 동맹의 가입을 기록한 비문 같은 몇몇의 금석문을 제외하면 거의 소실
되거나 사라졌다. 알렉산더에 대한 세부 기록은 훗날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재구성된 것이다. 위에서 인
용한 플루타르코스의 글을 보면 오늘날 익히 알려진 알렉산더의 이미지가 어느 때부터 구성된 것인지 추
측할 수 있다.
사령관 레이노는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자신이 위대한 프랑스의 모범으로 삼은 알렉산더의 행적에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자고 국민들에게 당부했다.
“알렉산더는 아시아와 유럽을 화해시키고 끊임없이 재개되는 오리엔트 문제를 해결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파괴한 도시보다 건설한 도시가 더 많았다. … 우리는 알렉산더의 원정이 지닌 이런
특성을 좀 더 자세히 살피면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식민지 개척의 교훈을
이 마케도니아인 영웅에게 물어보자. 그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인들을 화해시켜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고
자 했다. … 여성들에게 3백 년 동안이나 기독교가 설교해 온 기사도다운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식민지의 주민들을 협력자로 끌어들여 그들 자신의 영토를 개척하는데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시행해 왔고 숱한 시행착오 끝에 가장 현명하고 항구적인 식민지
해결책이다. … 알렉산더가 구상한 보호령 제도는 이처럼 지도층을 가능한 존속시키면서 피정복민의 사회
조직과 행정기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 이민족에게 관대한 전통과 기독교의 유산인 교화 정책을 이어
받은 우리는 수많은 단계와 모색을 거쳐 가장 공정한 식민지 경영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민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우리가 그 방식을 모로코에서 시행하게 될 것이다.”
사령관 레이노, 「위대한 식민지 경영자 알렉산더」주간지 23권, 제 3호, 1914년 4월 11일.
9) 알렉산더의 원정은 유럽의 끝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에서 시작하여 인도의 북부 펀잡에서 끝났다.
그런데, 모든 여정이 여기서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후 새로운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미술 양식이 페르시아의 양식과 결합되어 인도에 정착했다.
이 미술양식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그리고 한반도를 지나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불상의
탄생인 ‘간다라 미술’이다. 서구인들로부터 ‘미술사의 기적’으로 까지 평가받는 이 대단한 미술양식
이 있기 전까지 인도에서는 ‘불상’이 없었다. 그 이전의 부처에 대한 표현방법은 발자국이나 물결, 바
람결 등등 이었는데, 그리스의 신상양식이 들어오면서 아폴론의 얼굴을 한 부처의 모습부터 그리스 신상
과 페르시아의 복식이 가미된 서구인의 신상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10) 반대의 견해도 있다. 1949년의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는 오늘날 제 3세계에서 반식민지 운동이 일어나
는 것을 주목하면서 알렉산더의 원정이 주는 교훈을 찾았다.
“…중앙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리스화가 진행되었다는 과장된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
페르세폴리스에 방화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지만, 유목민들이 지나가면서 문명에 저지르는 숱한 범죄 가운
데 하나에 불과하다.”
르네 그루세, 「뱃머리에 선 인물들」.
11) 고대 지중해 세계의 마지막 남은 지성의 보고로 찬사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대 도서관은 B.C. 48년 10
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내전 속에서 불타고 만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
오스 3세, 아르시노에는 왕위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데, 클레오파트라 편을 들을 카이사르는 궁성
을 방위하기 위해 근처 항구에 정박 중이던 배들에 불을 질렀다. 이 화재가 크게 번져 알렉산드리아 시를
불태웠고, 도서관도 전소되고 만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저술한 전기 『알렉산더』도 이때 소실된 것으
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