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물에 대하여] 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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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보르가르툰 거리, 소위 ‘부서진 꿈의 거리’를 따라 드라이브를 시켜준다. 나는 회프디 건물을 가리킨다. 1986년에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회동한 흰색 목조주택, 많은 이들에게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철의 장막이 걷힌 사건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회프디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은 온통 유리와 대리석으로 덮인 검은색 상자 모양 건축물로, 한때 쾨이싱그 은행 본사가 있었다. 2008년 쾨이싱그 은행의 파산은 그 규모가 자본주의 역사상 네 번째로 컸다. 인구 1인당 액수가 아니라 전체 액수로 따져서 그랬다. 무려 200억 달러였으니까. 20,000,000,000 달러.
남의 불운을 고소해 할 생각은 없다만, 내가 지긋한 중년도 되기 전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두 신념체계의 몰락을 목격했다는 것이 놀라 따름이다. 두 체계를 지탱한 것은 기성체제의, 정부와 문화의 정점에 있던 사람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다는 이유로 존경받던 사람들이었다. 이 체계 안쪽 깊숙한 곳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날까지도 허세를 부렸다. 1989년 1월 19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이 말했다. “장벽은 앞으로도 50년간은 서 있을 것이며 100년이 지나도 끄덕없을 것입니다.” 장벽은 그해 11월에 무너졌다. 쾨이싱그 은행이 아이슬란드 중앙은행으로부터 긴급융자를 받은 2008년 10월 6일, 은행장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우 훌륭히 대처하고 있으며, 중앙은행에서도 대부금 상환을 확신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은행은 사흘 뒤에 파산했다.
체계가 무너질 때는 단단히 묶여 있던 사슬에서 언어가 풀려 나온다. 현실을 담아야 할 단어들이 허공을 떠돌며 더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못한다. 교과서는 하룻밤 새 구판이 되며, 정교하기 그지없던 체계가 허물어진다. 문득 올바른 문구를 떠올리기가, 현실에 부합하는 관념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어진다.
회프디와 쾨이싱그 옛 본사 사이에는 잔디밭이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 자잘한 잡목림이 서 있고, 가문비나무 여섯 그루와 부들부들한 버드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나무 사이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다음에는 어떤 체계가 무너질지, 어떤 거창한 사상이 몰락할지 궁금해졌다.
과학자들은 생명의, 지구 자체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의 주요 이념들은 땅과 자연과 값싸고 무한한 원자재로 간주했다. 인류는 대기가 배출가스를 끊임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대양이 쉬지 않고 폐기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대지가 비료만 주면 끊임없이 재생할 수 있고, 인간이 점점 많은 공간을 점유하면 동물은 계속해서 딴 데로 이동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양과 대기에 대한, 기후에 대한, 빙하와 연안 생태계의 미래에 대한 과학자들의 예측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면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이면이 여기에 대처할 수 있을까? 무엇을 읽어야 할까? 밀턴 프리드먼, 공자, 카를 마르크스, 요한 계시록, 꾸란, 베다를 읽어야 하나? 우리의 이 욕망을, 어떤 측정치에 따르더라도 지구의 기본적 생명 체계를 압도하고 말 이 소비량과 물질만능주의를 어떻게 가라앉혀야 하나?
이 책은 시간과 물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100년에 걸려 지구상에 있는 물의 성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빙하가 녹아 사라질 것이다.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가뭄과 홍수가 일어날 것이다. 해수가 5000만 년을 통틀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준으로 산성화될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오늘 태어난 아이가 우리 할머니 나이인 아흔 다섯까지 살아가는 동안 일어날 것이다.
지구 최강의 힘들이 지질학적 시간을 벗어나 이제 인간의 척도로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수십만 년이 걸리던 변화가 이젠 100년 사이에 일어난다. 이 속도는 가히 신화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생산하고 믿는 모든 것의 기반이 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변화는 우리의 정신이 평소에 다루는 대부분의 현상보다 복잡하다. 이 변화들은 우리의 모든 과거 경험을 뛰어넘고 우리가 현실의 나침반으로 삼는 대부분의 언어와 은유를 초과한다.
비교를 위해 화산 폭발음을 녹음한다고 생각해보자. 대다수 기기에서는 소리가 뭉개져 백색잡음밖에 들리지 않는다. ‘기후변화’라는 단어가 대다수 사람에게는 그런 백색잡음에 불과하다. 그보다 사소한 문제에 견해를 표명하는 건 쉽다. 우리는 귀중한 물건이 사라지면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동물이 총에 맞거나 사업이 합의된 예산을 초과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무한히 큰 것, 성스러운 것,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것이 결부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다. 그런 척도는 뇌가 감당하지 못하는 거다.
이 백색잡음은 우리를 속인다. 우리는 신문에서 ‘빙하 해빙’,’기록적 고온’,’해수 산성화’,’배출가스 증가’같은 머리기사 제목을 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여긴다. 과학자들이 옳다면 이 단어들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 심각하다. 우리가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이 단어들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 의미들의 99퍼센트는 백색잡음으로 흩어져 버린다.
‘백색잡음’은 틀린 비유인지 모르겠다. 이 현상은 블랙홀에 더 가깝다. 블랙홀을 본 과학자 는 아무도 없다. 질량이 태양의 수백만 배나 되기에 빛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블랙홀을 감지하려면 그 너머를, 블랙홀 근처의 성운과 항성을 관측하는 수 밖에 없다. 지구상의 모든 물, 모든 지표면, 전체 대기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도 너무 거대해서 모든 의미를 흡수해버린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유일한 방법은 그 너머로, 옆으로, 아래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것, 개인적이면서도 과학적인 태도로 신화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쓰지 ‘않음’으로써 써야 한다. 뒤로 돌아감으로써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생각과 언어가 이념의 굴레에서 해방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옛 중국의 저주가 실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옛 중국의 저주가 실현된 시대를. 아래 번역은 분명 오역이겠지만 뜻은 통하리라.
“흥미진진한 시대를 살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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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축복의 말인 듯하지만 저주로 쓰이는 이 말의 정확한 원어는 알려져있지 않은데,’평화로운 시기에 개로 사는 것이 난세에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를 뜻하는 중국의 속담 ‘영위태평견 모주난리인(寧爲太平犬 莫做亂離人)’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첫댓글 한 번 읽어볼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