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경 중심의 신앙적 전통, 피에몽 골짜기에서
지역의 대다수 주민들이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던 개혁 공동체의 압도적인 모습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수세기에 걸쳐 형성되었고, 그 올바른 정통성이 계속 그리고 동일하게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먼저 로마 주교(교황) 실베스터의 타락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한 복음 증거자가
리옹(과거 이름은 레옹)에 머물면서 ‘레옹인들’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이 고대 발도인들이었다.
리옹에서 발생한 박해로 피에몽의 계곡 지역으로 피신하게 됨으로 두 지역은 형제 관계가 되었다.
비길란티우스(364-408)는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피에몽 개혁 교회의 전통을 조직한 첫 유명 지도자로,
수년 동안 밤낮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저서를 남긴 발도인들 교회의 첫 대감독직을 맡은 인물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로마 교회가 이교도의 관습을 수용하면서 이것들에 ‘항거’하며 사도적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배경에는 시리아 지역에 세워진 사도적 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이 있다.
그리하여 동방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자연스럽게 동서방의 참 교회들이 아무 조건 없이 하나의 교회로 통합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비길란티우스 이후 등장하는 유명 지도자는 조비니아누스로
그는 복음의 단순성을 강조하며 사제들의 혼인을 지지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알프스 계곡을 피난처로 삼았고,
12세기에 이르러 대규모 개혁 운동으로 활기를 되찾기까지 복음주의적 가르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어어져서 8세기에는 튀랭의 주교 클로드가 활동하였는데,
로마 교회는 그를 비난하며 ‘비길란티우스의 독에 감염된 이단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클로드가 고대 발도인들의 사상을 계속적으로 잘 보존하여 정통성을 유지하여 왔다는 것이다.
5) 박해 앞에 주저앉지 않고 피에몽 계곡으로 들어가는 알비인들
개혁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높은 지대로 피신해야만 했고,
그들이 피신했던 피에몽 계곡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매우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일찍 찾아오는 추위와 어둠, 늦은 계절에도 눈과 빙하로 덮인 계곡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작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곳을 거주지로 선택한 것은 수 세기 동안 복음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았던
믿음의 선조들이 거주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는 신실한 사역자들이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고,
박해를 피하여 들어온 형제들, 서로 격려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일부는 스페인의 피레네 산맥 지역에 있는 알비인들의 공동체로 들어갔는데,
이들 공동체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까지 파괴되지 않았고 계속 존속하였다.
파리의 사제 프리종은 파미에의 주교 스폰다누스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그 주교는 피레네 산맥 지역에서 알비인들의 한 교회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박해로부터 완벽하게 숨겨질 수 있는 그런 장소였다’고 언급한다.
스페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참여하였는데,
알폰소의 통치 아래에서 일어난 잔인한 박해 때에 알비인들과 발도인들은 그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1) 첫 번째 대규모 이주
잉글랜드의 신학자 파버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카타르인들과 발도인들이 종국적으로 하나의 교회로 연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지역에서 형제로서 서로 섞여 존재하였던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
알비 지역에서 동일한 삶의 목적을 갖고 개혁 교회를 위해 활동하다가 박해 때문에
피에몽에서 또 다시 생사고락을 함꼐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동이한 신앙고백을 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1165년에 일어난 종교적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직선거리로 700km가 넘는 험악한 산길을 통해
피에몽 계곡으로 이주한 대규모 이민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프랑스의 발도이들이 아니라면
카타르인들 또는 알비인들로 불리는 이주민들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 사건은 피에몽의 보두아들과 프랑스 알비인들이 합류한 뚜렷한 첫 사례가 된다.
이때 프랑스 이민자들은 주로 피뉴롤 계곡에 정착하였는데, 기존의 계곡민들은 이 피난 이주민들을
형제로 여겨 친절하게 받아들였고, 그들은 어떤 충돌이나 갈등이 없이 기존 정착민들인
보두아들 사이에 자리 잡으면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까지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사무엘 모랜드는 이 이민자들이 피에르 발도 이전의 발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의 발도인들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논의하는 중요한 문제의 한 시점이 된다.
피에르 발도에 의해 시작된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은 1170년 이후에 조직되었고,
1165년에 피에몽으로 이주한 대규모의 프랑스 이주자들은 카타르인들 혹은 알비인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페트로브뤼인들과 앙리인들로서 이들에 대한 그 시기의 박해 때문에
이들은 유혈 사태를 피하여 그곳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획기적인 이주와 합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피에몽의 보두아들과 프랑스의 알비인들 간에 이미 오랫동안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인 뱅상 페리에(1359-1419)는 1405년에 전도할 목적으로 피에몽 계곡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 발도인들과 알비인들 교회가 우호적으로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알비-카타르인들도 목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한 “1405년이 지나면서 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발도인들‘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이후 대립으로 인한 상호 분리나 어떤 파벌도 그것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하였다.
(2) 두 번째 대규모 이주
20년에 걸친 알비 십자군(1209-1229)의 잔혹한 학살과 그 이후 종교 재판 관련자들의 추격으로
많은 알비인들이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로 이주하였다.
이탈리아의 알비인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의 보호 아래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신앙적 망명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고, 그들의 본향인 랑그독의 알비인들 교회를 지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교황권이 강화되어 이 지역에 대한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 지역의 개혁운동은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핍박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의 마지막 알비인들은 피에몽의 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거의 미미한 존재로 발도인들 속에 공존하였다.
1332년에는 종교재판소의 사제를 살해한 혐의로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이 함께 탄압을 받게 되면서,
이제 박해는 당시 참된 교회를 증명하는 특별한 표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피에몽의 보두아들은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보헤미아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개혁 신앙을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531-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