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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공격수’ 이기근② | |
한국프로축구연맹 |
인연이 없던 국가대표팀
유독 국가대표팀과는 인연이 없는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국내용’이라는 못미더운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소속팀에서는 최고인데, 유독 국가대표팀만 가면 기량을 펼치지 못 하더라”라는 편견과 함께. 이기근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쉽다”고 했다. 아무래도 국가대표팀에 모든 시선이 쏠리는 한국축구의 특성상, 최순호나 이태호, 김주성 등 당대의 골잡이들보다 자신의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듯했다.
“당시엔 굉장한 골잡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득점왕을 한 선수였습니다. 저와 플레이스타일이 비슷했던 이태호 선수도 무척 뛰어났지만, 그의 후보로라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 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렇다. ‘88년 프로축구 득점왕’ 이기근은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못 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치 유세라도 하듯, 91년 득점왕까지 거머쥐었다. 그는 당시 “매우 서운했다”고 밝혔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려운 인터뷰를 감내하고서라도 재차 캐물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그는 조심스레 이회택 감독에게 무례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지나와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는 전제와 함께.
“88년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MVP는 박경훈 선수가 받았습니다. 당시 박경훈 선수는 MVP는 이기근이 받아야 하는 상이라며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죠. 박경훈 선수는 대표팀 차출로 게임을 많이 뛰지도 못 했던거죠.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이회택 감독님께 무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일 때문에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성격도 강했고, 너무 어렸습니다. 제가 너무 잘못 했던 것이죠. 물론 은퇴 후에 바로 이회택 감독님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고, 바로 풀었습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그때 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83년 세계청소년대회 전까지만 해도 간판골잡이였다가 정작 본선에서는 후보로 밀려난 것이나, 프로축구 득점왕을 거머쥐고 나서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것이나, 그는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 역시 이 부분을 인정했다.
부산대우와 수원삼성 시절
당대 최고의 골잡이였던 이기근은 93년 시즌을 대우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너무도 우연히 부상의 악몽이 찾아오고 말았다.
“감독님이 훈련 끝나고 갑자기 김판근 선수와 저를 불러 달리기시합을 시키시는 거예요. 그냥 장난삼아요. 그래도 저는 승부욕이 워낙 강해서 지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뛰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고질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 당시에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사타구니 인대가 늘어나 버린 겁니다. 그 해 후반기리그에는 절뚝거리면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불운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훈련 끝나면 무리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라고 강조합니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서른을 넘기고 있었다. 우연찮게 고질병에 시달리게 된 이기근은 1996년, 신생팀 수원삼성의 창단 멤버로 시즌을 맞이했다. 당시 수원삼성은 신세대팀이었다. ‘앙팡테리블’ 고종수를 비롯해 이기형, 박충균 등 젊은 피가 중심이 된 팀이었다. 그런 탓에 당시 수원 삼성은 자유분방한 팀으로 유명했다. 이기근은 이미 팀 내 고참이 되어 있었다.
“저는 당시 팀의 고참으로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워낙 젊은 팀인 탓에 선후배 간의 엄격함이 점점 사그라들긴 했지만, 첫 해 우승도 거머쥐고 팀분위기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당시 고종수 선수와 한 방을 썼는데요. 굉장히 당돌했습니다. 어떻게 선배한테 저럴 수 있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니까요. 하하”
프로선수로서 이기근은 화려한 축구인생을 보냈다. 전성기였던 포철 시절 득점왕을 두 번이나 차지했고, 우승도 경험했다. 또한 수원삼성 시절에도 팀의 노장으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 신생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수원삼성의 성적은 5위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이기근은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지도자로서의 힘찬 첫걸음
은퇴 후, 그는 한동안 축구를 떠나있었다. 그는 “당시 다른 일을 좀 하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축구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조건을 따지기 전에 이기근은 이미 ‘축구인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던 까닭이었다. 그 역시 “결국 축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더라”며 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나타냈다. 그리고 2004년 12월, 양평의 개군중학교 축구부감독으로 옮기게 됐다.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명의 스타를 위해 많은 학생을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모두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감독의 진짜 역할이죠.”라며 “새로운 축구교육을 실험하겠다”라고 밝혔었다. 굳이 시골학교로 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의 의도대로 개군중학교 축구부 학생들은 한 반에 편성되어 오전에는 영어와 한자, 컴퓨터 수업을 받았고, 훈련은 오후에만 했다. 좀 더 선진화된 축구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해미중학교로 옮기게 됐다. 안양공고 1학년생들과의 연습경기가 있던 그날, 이기근의 옆 자리에는 많은 학부형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미 많이 친해보였다. 이기근과 학부형들 사이에 오가는 인사에는 ‘신뢰’라는 단어가 숨어있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으레 떠올리기 쉬운 ‘무서운 감독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행복해보였다.
“아마 저를 무서워하는 학생들은 없을 겁니다. 저도 워낙 당돌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된 지금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얘기를 들으려고 노력하죠. 예컨대 한 학생이 선호하는 포지션이 있다면 일단 뛰게 한 뒤, 저와 의견을 조율합니다. 민주적인 셈이죠.”
“말을 안 듣는 것 아니냐”고 농을 건네자, 그는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이해를 하더라고요”라고 받았다. 으레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법한 감독과 학생 간, 선후배 간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천재공격수 이기근
말 그대로 그는 천재였다. 남보다 작았지만, 빨랐다. “10~20m 달리기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기술도 좋았다. 예의 투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요즘은 하드웨어가 좋은 선수만을 선호하다보니 기술적인 면에서 각자의 특기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작은 선수들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 기술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와야죠.”
젊은 골잡이들 중에 누구를 눈여겨보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봤다. 망설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바로 “박주영”을 말했다. 곧바로 그는 “박주영은 감각이 타고난 선수입니다”라며 “요즘 조금 위축된 것 같지만, 이겨내야 합니다. 빨리 해외에 진출해야죠.”라고 밝혔다.
그는 축구를 ‘운명’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축구는 그를 떠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당연히 앞으로 평생 축구와 함께 할 것 같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천상 축구인이었다.
인터뷰 내내 이기근은 안양공고 1학년 학생들과의 연습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터뷰 중 이따금 아쉬운 탄식을 질렀을 때, 운동장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결정적인 장면이 있은 후였다.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냈지만, 개군중학교에서나 지금의 해미중학교에서나 그는 뛰어난 선수들 보다 쳐지는 선수를 챙겼다. 그들이 장차 축구로 성공하지 못 하더라도,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천재적인 선수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쳐지는 선수를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생각이고요.”
프로축구 득점왕 2회 수상 등 화려한 축구인생을 보낸 이기근은 이제 제2의 축구인생을 꿈꾸고 있다. 축구가 그에게 어찌한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축구는 그의 인생인 까닭이다.
K리그 명예기자 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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