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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自警 : 스스로 경계하는 글) - 상진(尙震 1493~1564)
輕當矯之以重(경당교지이중) : 경박함은 중후함으로 바로잡고 急當矯之以緩(급당교지이완) : 급한 성격은 느긋함으로 고치며 偏當矯之以寬(편당교지이관) : 치우침은 너그러움으로 바루고 躁當矯之以靜(조당교지이정) : 조급함은 고요함으로 다스린다. 暴當矯之以和(포당교지이화) : 사나움은 온화함으로 다잡고 麤當矯之以細(추당교지이세) : 거친 것은 섬세함으로 고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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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尙震 1493~1564) (성종 24~ 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범허재(泛虛齋)·향일당(嚮日堂). 아버지는 찰방(察訪) 보(甫)이다. 조실부모하여 큰 누이 밑에서 성장했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봉교·예조좌랑·지평을 거쳐 장령·교리 등을 지내면서 지방관리의 탐학을 비판하고 농업진흥책을 주장했다. 1533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부제학·좌부승지·형조참판·관찰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4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판서·우찬성·형조판서를 지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중종 때 세도를 부렸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했다고 하여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小尹) 일파가 득세하면서 그들의 천거로 병조판서에 복직했으며, 1549년 우의정이 되었다. 1551년 좌의정을 거쳐 155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소윤 일파와 어울린다 하여 사림에게 비난도 받은 반면 사림을 등용하려고 힘쓰기도 했다. 그뒤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
첫댓글 [경박함은 중후함으로 바로잡고
급한 성격은 느긋함으로 고치며
치우침은 너그러움으로 바루고
조급함은 고요함으로 다스린다.]
정말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좋은글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스로 경계하겠나이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