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C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요. 자주 들었던 생각인데, 여성 목사는 안 되고 여 전도사는 되는 까닭은 무엇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성경 말씀 가지고 알려주시길….
OPC
제가 드린 질문과는 관련이 어떻게 있는지 쉽게 풀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질문은 해당 교단들이 여성 목사는 반대하면서 왜 여성 전도사는 허용하냐는 질문입니다. 둘 다 성경 가르치고 설교하고 다 하던데요?
朴埰同
양떼 가운데서 한 사람의 양으로서 저는 ‘목자장이신 주님의 목자직을 위임받으신 교회 목사님’을 제 ‘영적 아버지 ’ 로 여깁니다. 또한 ‘목사님의 목자직을 돕는 배필로 부르심을 받으신 사모님’을 제 ‘영적 어머니’로 여깁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인 가장입니다. 그런데 구약 사사시대 때 남자 구실을 할 만한 남자들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성 드보라를 사사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한 가정의 머리인 아버지가 죽었을 때나 아버지가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가장 구실을 할 수 없을 때 그 가정의 가장은 어머니가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부부에게는 아들과 딸들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아내(어머니)는 사도입니다. 아들과 딸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하는 사도입니다. 물론, 아들과 딸 가운데도 서열이 있습니다. 큰 형이나 큰 누나는 신앙으로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다스리고 가르쳐야 하는 넓은 의미의 사도입니다.
여 전도사 직분을 이 넓은 의미의 사도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
그렇다면,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李埰燦(가명)
성경에 이방인 선교를 금하는 구절이 있으니 순종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래 구절들 내세워 논지를 전개한 JPG 글 생략)…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해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5~6)
예수께서 대답해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노라.” 하시니, (마 15:24)
댓글
朴埰同 <주님의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나이다.” (요 2: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겠는지라. (요 4:3~4)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메시아 시편 2장 8절)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 11:10)
내가 그들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내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내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내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내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내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해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6:18~2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8~20)
‘계시의 점진성, 하나님 구속사 관점’에서 성경을 보시지 않는군요.
KIS
단편만을 보고 단정하는 그럴 위험이 있다는 저자 논지입니다.
李埰燦(가명)
그러게요. 단편으로만 글을 읽으니 전체 논지를 종종 놓칩니다.
朴埰同
KIS 목사님, 李埰燦 목사님께서 성경을 ‘계시의 점진성, 구속사 관점’에서 해석하시지 않고, 또한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해 성경을 전체를 보는 해석을 하시지 않고 계속 단편으로 보는 해석을 하시기에 쓴 댓글입니다.
KIS
위 글은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이 없습니다. 사안별로 초점을 제한하여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방식의 글은 당사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李 목사님은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도 ‘계시의 점진성, 구속사 관점’으로 개혁주의적인 포괄적 견해를 가진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朴埰同
1쪽만 읽으셨나 봅니다. 2쪽을 보십시오.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해 쓰신 글입니다.
판단은 각자 해야 할 몫, KIS 목사님께서 하셔야 할 몫이지만, 아래에 있는 李埰燦 목사님 담벼락 글, “여성도 강도사가 될 수 있을 길을 열었다가”로 시작하는 글에서 李埰燦 목사님과 제 토론이 있었습니다. 누가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해서 ‘계시의 점진성, 구속사 관점’으로, ‘성경을 단편이 아닌 전체를 보는 관점’으로 개혁주의적 포괄적 견해를 제시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제 논리나 성경해석에서 그릇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KIS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 李埰燦 목사님은 개혁주의 포괄적 관점에서 진보적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朴埰同
미국 OPC(정통 장로 교회)가 여성 목사 안수 허용으로 진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칭 “진보 신학”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해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는 일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셨던 우리 개혁 신앙의 선조 고故 그레샴 메이천 목사님께서는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하셨습니다.
“개혁주의 포괄적 관점에서 진보적 제안”이라는 말장난보다는 “개혁주의 포괄적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제안”이 더 바른 말장난이 아닐까요?
KIS
말씀하신, 말장난하지 마시고요. 같은 이야기를 자기 언어와 논리 구성을 고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지만 하시게요.
朴埰同
저는 청년 시절 탕자처럼 방황할 때 서울 강북구 삼양동 달동네에서 사는 목포 제일교회 한 해 후배를 따라 서창원 목사님께서 주님과 양무리를 섬기시는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곳은 서울 중랑구라서 몇 번 안 됩니다.
10 년이 넘은 일입니다만,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해 김세윤 교수와 서창원 목사님 토론(논쟁) 글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셨건만, 서창원 목사님 반론에 김세윤 교수가 ‘일개 목사 주제에’ 식 반응을 한 일이었습니다.
이 토론 글들을 읽고 김세윤 교수 저서 두 권을 샀습니다. 책꽂이에서 그 책들을 못 찾겠는데, 하나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 세계}였던 것 같고, 또 하나는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한 책이었습니다. 이미 답을 내려놓은 채, 개혁주의 신학 관점에서가 아닌 자유주의 신학 관점에서 엉터리 성경해석을 하는 게 한두 곳이 아니더군요.
김세윤 교수가 여성 목사 안수 근거 하나로 내세우는 게 사본학인데, ‘후대 첨가설’입니다. 저 역시 위 李埰燦 목사님 글을 반론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과 마태복음 15장 후대 첨가설’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ㅠㅠ
“같은 이야기를 자기 언어와 논리 구성을 고집”이라 하셨는데, “고집”이 아닙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대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입니다. KIS 목사님도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저를 잘 아시는 분들은 저를 두고 “일단 물면 놓지 않는 불도그”라고 하는데, “여기까지만 하시게요.” 하셔서 이만 물러갑니다.
KIS
네. 귀한 충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과도한 논리 경쟁은 자칫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논리가 온전한 진리를 담보하지 못하는데도 오히려 관계를 깨뜨리고 결국 무엇을 위해 논쟁했던가 하는 회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연약함을 알기에 자기 논리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자 앞에서 멈춰 서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멈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안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朴埰同
목사님도 주님의 평안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KIS
감사합니다. ^^
UCH
계시의 점진성 속에 여성 목사 안수가 들어가는지? 천국에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데,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문제인지?
李埰燦(가명)
예수 그리스도 대속 사역으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죠.^^ 이제는 누구든지 남종과 여종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어 예언하게 하신다고 했던 그 예언 말입니다.^^ 계시의 점진성 속에서 보고,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면 이제 우리는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시대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야겠지요.^^
朴埰同
UCH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신약 교회만이 아닌 구약 교회에도 만인제사장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인제사장설의 평등권을 내세워 ‘하나님께서 내신 구약 교회의 권위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형제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인제사장설을 내세워 하나님께서 내신 구약 교회의 권위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고라 일당’을 구약 교회에서 제거하셨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신약 교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사건으로, 민수기 16장에 적힌 고라 일당 사건에서 보는 것은 ‘이스라엘 회중 지도자로서 나선 고라, 그 한 사람 잘못이 그 얼마나 두렵고도 큰 파국을 몰고 왔는가?’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해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민 16:3)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시여, 모든 육체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한 사람이 범죄했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 16:22)
고라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민 16:49)
제가 “주님의 교회를 허무는 트로이 목마”로 말하는 {뉴스앤조이}에서 종교개혁 만인제사장설을 오해한 나머지 종교개혁 만인제사장설을 왜곡해 펼쳤던 운동 하나가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모두 평등하다.”며 “교회 목사를 목사님이 아닌 형제로 부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또한 김세윤 교수가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면서 내세운 것도 이 평등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로 우리 맏형님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형제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를 교회(우리)의 머리로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내의 형제인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말씀하십니다.
여성 목사 안수 문제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말씀과 얽힌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 시 내신 권위의 질서로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이 ‘권위의 질서’는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서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권과 배치되는 그 얼마나 차별의 질서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바울 사도 말씀들을 두고도 김세윤 교수처럼 후대 첨가설을 주장해 배척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은 사라의 딸들이라는, 이런 남녀차별을 말하는 말씀들은 후대 첨가설을 주장해 성경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장 합동은 후손들에게 오직 남녀평등을 증거하는 구절들만이 있는 바른 성경을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바른 성경을 근거로 이른바 “한국 교회 장자 교단” 예장 합동, 이른바 “장로교”라는 예장 합동은 교회 정치체제 그 근본부터 바꿔야 합니다. 장로교 정치체제를 뒤엎어야 합니다. 그 누구나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고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형제주의 교회 정치체제로 바꾸는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약한 그릇”??? 다음은 후대에 남녀차별주의자가 첨가한 구절들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구절들이 있습니다.
아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벧전 3:1 하)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님”으로 부르며 순종한 것 같이 여러분도 선을 행하며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으면, 사라의 딸이 된 것입니다. (벧전 3:6)
남편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성으로서 아내가 여러분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아내를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벧전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