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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0년 이 형용 선생이 쓴 <전환기 사회운동 패러다임의 재구성>의 발문으로 쓴 글입니다.
발문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과 모든 전망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과 사회제도의 엄청난 발전이 인류의 미래에 밝은 전망을 갖게 한다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현대에 들어와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아마도 이형용 선생이나 나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이형용선생은 말한다.
우리는 류(流)로서의 인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그 자체로 존귀한 의미를 가진 모든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만 수수만년 무수한 실존들이 일구어온 ‘의미’로 지상에서 영원까지 가득 차고 또 넘쳐날 것을 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유의 나라, 평화의 땅으로 향하는 영원한 행렬을 한사코 보는 것입니다. p184 종교성:사회운동의 철학적.정신적 지평의 확장, 어떻게 사회운동에서 종교성인가?
그런데 이 인류에 대한‘믿음’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류가 걸어온 길을 돌아봄으로서 미래를 예견케 하는 것이다. 이 지구 위에 인류라는 종(種)이 출현 한 것은 우주 진화의 도정에서 하나의 사건임이 분명했다. 동물계와 다른 새로운 종(種)이 출현한 것이다. 의식(意識)이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자유욕구(自由慾求)와 지적능력(知的能力)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때로는 완만하게 양(量)적으로, 때로는 급격하게 질(質)적으로 진화해 왔다.
나는‘대긍정’의 관점에 서서 인간을, 문명을, 세상을 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절실한 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대긍정’이란 수많은 모순과 부정적인 요소에서 눈을 돌리자는 말이 아니다. 그 모순과 부정적 요소까지도 싸안는 관점을 말한다.
전(前) 세기(世紀)로부터 물려받은 모순과 숙제들을 해결하는 노력은 여전히 우리가 앞으로 나가기 위한 중요한 과제로 된다. 그러나 그 과제 해결에 발목이 잡혀 인간의 고귀한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러한 과제를 보다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인류라는 동선이 긴 생명체의 뒷부분(과거)의 테마가 착취나 억압,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낡은 질서를 반대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앞부분은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뒤섞임을 이형용 선생은‘정체성의 혼란’으로 표현하면서도, 그 혼돈 속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극복할 수 있고, 극복될 과도적 현상으로 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시대 흐름으로 과학기술혁명, 세계화-지역화 혁명, 뉴에이지 혁명을 주목하고 그 인문사회적 함축을 깊고 진지하게 들여다 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시대의 도전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미시적 거시적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p102 시대상황과 정체성 위기 2.시대가 던지는 도전과 물음
정체성 위기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역사를 전망하는 사회운동의 관심 지향을 유념하여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사회경제 혁명, 정치 혁명에서 존재의 혁명까지!”p115 존재의 혁명
낡은 것을 무너뜨리는데 사용되었던 에너지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사용될 에너지는 그 질이 다르다. 물론 새롭다고 해도 돌연히 출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연속선 위의 비약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착취와 억압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는 분노와 증오가 때로는 투쟁의 자양분으로 되었지만,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지난 세기까지는 소수의 선구자들이 이 앞 부분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제 물질적, 사회적 진보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진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과 집단 때로는 나라들이 이 선두 대열에 설 수 가 있다.
앞에서 인간의 특성을 그의‘자유욕구’와 ‘지적능력’이라고 했는데, 이 둘의 조화와 결합에 의해 인류 역사는 대긍정의 관점에서 보면‘자유확대’의 도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물질적 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분야에서야말로 아마도 인간은 그의 지능을 가장 높게 발휘하여 왔다. 불과 도구의 사용, 채취 수렵경제로부터 농경 축산의 시작은 ‘자연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대하는 첫걸음이었으며, 이 분야는 현대의 놀라운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가져 왔다.
이제 총생산이 인류의 총수요를 넘어서게 된지 이미 30여년이 지나고 있다. 물론 많은 모순과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양극화와 지구환경파괴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이러한 과학기술능력이나 생산력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테마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능력과 조화되지 않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의식과 그에 바탕한 사회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능력을 뒤로 돌린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의식과 시스템을 그 능력에 맞게 우주 자연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에 맞도록 변혁해 가는 것이 보편적인 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제도와 시스템도 과학기술능력 다음으로 인류가 그 지능을 높게 발휘해 온 분야이다.‘억압과 착취와 같은 사회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지난 몇 세기 동안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다. 적어도 인류의 선두 부분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로 되고 있다.
이것은 물질적 조건과 함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어쩌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성으로부터 발하는 ‘관념적 부자유로부터의 해방’이 이제 보통 사람들의 욕구로 되는 시대를 맞게 하는 환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이 분야가 다른 두 분야에 비해 가장 뒤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 관념계의 자유는 결국 ‘자기중심성 · 아집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나아가지 못하면 지속 가능하고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미래 문명의 창조는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종래의 진보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가 바로 물질적, 사회적 환경을 바꾸려는 의지·능력과 자신의 관념을 바꾸려는 의지· 능력 사이의 부조화를 어떻게 넘어서는 것인가에 있다고 보이는데, 이 점에 대해서 이형용 선생은 많은 고심을 해왔다고 보인다.
이처럼 종교성 지평이 일상적으로 개입한다면 진보운동이나 운동가의 현실과 양태, 접근방식, 행동양식에서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불러 올 것입니다. p149 ‘종교성’의 차원-영역이 아닌 지평,‘선악과 선택’문제의 명시화
특히 요즘 복지에 대한 논쟁이 보혁 간의 핵심테마로 보이는데, 이 선생의 신복지사회운동에 대한 제안은 그 동안 변화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대단히 본질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시점에서 존재 변혁의 근거를 북돋는 사회 변혁의 현실노선, 현실 사회변혁 노선의 하나로 이를테면 존재 변혁을 향한 ‘신복지사회운동’을 제안합니다.
‘신복지사회운동’은 사회구성원 누구라도 참 나를 찾아 자신에게 고유한 생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하자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와 같은 참 나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근원적 연대와 상호 의존성에 주목하고, 열린 연대를 북돋는 데 관심을 갖습니다. 사회 구성과 제도를 바꾸거나 새로운 것을 검토하고 고안하고 고민하는 일차적인 착지점은 바로 그 관심입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위치, 저마다의 관심, 저마다의 색깔로 원융한 인격을 향해가는 것을 북돋는 사회 에너지, 원숙한 사회로의 진화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지라고 하면 그 대상과 내용이 주로 자본주의시장에서 불리한 사람들 특히 양극화에 의해 기본적인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국가와 사회가 그 최저생활을 보장해주고 자활을 도모하는 일련의 활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형용 선생이 말하는 신복지는 그 대상과 내용이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이른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舊)복지를 껴안으면서 복지라는 개념을 전면적으로 업그레이드해 보자는 제안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제안이다.
이런 신복지운동의 빛 속에서 과거로부터 이월된 복지의 과제들이 변화된 사회적 조건과 사람들의 의식에 맞게 더 잘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발목을 잡히지도 않고, 과거로부터 이월된 어두운 그늘로부터 눈을 돌리지도 않으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차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함께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는 그런 운동을 그려본다.
이러한 신복지에 대한 제안과 함께 사회운영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체제혁명 이상의 혁명으로 거버넌스 운동을 제안하고, 본인 스스로 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고 불리어질만큼 과거의 체제논쟁이 별 의미가 없어져버린 현실을 잘 반영하면서도 결코 ‘무엇무엇의 종언’에 주저 앉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전진해 가는 세계인류의 변함없는 자유와 행복을 위한 행진에 대한 염원을 잘 담고 있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사회운영론’에 주목하자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궁극적인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운영론’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사회체제를 의미하는 그런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운영의 문제는 그 자체로 총체적인 문제이고 사회 진보의 문제이며 나아가 사람의, 사람 관계의 진화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체제론에 부속되는 문제가 아니라 깊게 연동되면서 때로는 사회체제론보다 더 큰 의의를 갖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p158 '종교성‘의 차원-영역이 아닌 지평, 사회체제론과 사회운영론의 접합
그의 거버넌스 운동에 대한 열정은 이직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들리지만, 그의 일관된 꿈을잘 보여주고 있다.
이 거버넌스를 확장확대하여 ‘다원영역체제’까지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길이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보편적 의식의 성숙과 문화(삶의 방식)의 혁명적 변화가 지금 세계의 근본 모순으로 보이는 ‘인간의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진정한 혁명으로 될 것이다.
거버넌스는 일차적으로 민관의 파트너십 모델이고, 나아가 국가사회 운영 패러다임으로서 국가, 시장, 시민사회 혹은 정부, 기업, 시민단체 정립 모델로 이해합니다. 이 같은 거버넌스를 확장, 확대하고 전 사회적으로 전면화하면 ‘다원영역체제’에 이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를 우리는 적극 제안하고 싶습니다.
다원영역체제란 행정, 경제, 산업, 문화예술, 교육, 복지, 과학기술, 봉사, 종교 등의 사회 제영역이 동등한 위상에서 전체 사회 운영, 의사 결정, 자원 배분에 참여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위와 같은 다원영역제체론은 ‘사회체제론’ 수준의 논의이자 ‘운동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체제니 사회주의체제니, 자유민주주의니 인민민주주의니 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체제 중심, 제도 중심 사고, 혹은 정치경제 권력 중심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사회경제혁명, 정치 혁명을 넘어서 ‘존재의 혁명’을 아우르는 보다 확장된 차원의 혁명, 혁명 이상의 혁명, 그러나 차분한 혁명을 전망케 합니다.
거버넌스는 그 자체가 이미 상대적으로 과정지향적입니다. 그리고 참여와 합의, 조정과 통합, 실천과 협력 등을 그 성립의 원리로서 중시합니다. 거버넌스는 따라서 이미 덜 요란하고 덜 파괴적입니다. 그러기에 거버넌스는 흔히 갈등 문제 논의에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버넌스는 무엇보다 사회의 질적 발전 내지는 개인의 성숙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타자와의 관계 지향적이고, 따라서 늘 신실한 자기 성찰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아마도 높은 수준의 거버넌스는 궁극적으로는 이른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지향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버넌스는 혁명 이상의 혁명이면서 내재적으로 차분한 운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제들을 무수히 안고 있다. 그러나 바뀐 조건과 환경 속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 또한 현재의 빛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진보’라는 목표를 자기 안에서 체현하려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낡은 시대를 청산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낡은 관념과 인습에 발목을 잡혀 오히려 역사의 뒤안길을 노닐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대안은 ‘사람’이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체득(體得)하고,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실무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대야말로 인류라고 하는 긴 동선의 앞 부분이 될 것이다.
이 앞 부분을 더 해방하라!
이 앞 부분을 더 나아가게 하라!
그리하여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제들을 현대의 빛 속에서 해결하게 하라!
그리하여 동선이 긴 인류공동체 안에서 모든 개체들이 빛나게 자신을 실현하게 하라!
차별이 아니라 차이로 빛나게 하라!
첫댓글 사람사회의 문제는 결국 출제자가 풀어야겠지요
자기숙제니까요
숙제너머에 뭐가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