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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론
로마제국의 멸망은 역사가 뿐 아니라 신학, 문학, 경제학, 철학, 지리학, 생리학 등 여러 분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으며, 다양한 측면에서 그 원인이 제기된다. 그런데 제국의 쇠퇴가 이미 1세기 이래 로마인
들 스스로가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예컨대, 호라티우스는 로마인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사악해져 간다고 한탄했고, 세네카는 이제 로마제국은 병들어 남은 것은 사멸밖에 없다고하였던 것이다.
특히 군인 황제기의 혼란 속에서, 황제들의 '영원한 로마(Roma Aeterna)'와 '황금시대로의 복귀(saeculum
aureum novum)'라는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로마의 쇠망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쇠퇴의 원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크리스트교의 흥기과 연이은 만족들의 로마 제국
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상황속에서였다. 로마 전통의 종교를 옹호하는 측(이교도)에서는 로마제국이 이민
족의 침략에 노출된 된 이유가 로마의 전통적 제신들을 버리고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데 대해 신들이 분
노한 결과라고 믿었는데 비해, 기독교도들이 이에 반박하면서그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
다. 그 후 오늘날까지 로마제국 쇠망의 원인을 두고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를 시대별로, 주제
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시기인 5세기 경, 전통 로마의 종교를 받드는 사람들, 예컨대 이교사가 조시무스
등은 로마 제국의 쇠퇴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오던 신들을 버리고 크리스트교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
각하였다. 이에 대해 기독교의 교부들이 반대논리를 폈다. 성 어거스틴은 410년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로
마가 함락, 약탈되는 것을 보고. {신국론, De Civitate Dei}을 서술하여, 기독교가 로마 쇠퇴의 원인이
아님을 논하였다. 로마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의 이교 시대에도 로마에는 여러번 가공할만한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리아 인의 침입이나 네로 황제의 로마 방화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쇠퇴는 오히려 기독교를 진실하게 믿지 않는 이교도들 때문이라고 한다. 살비아누스는 {신정론}에서 로마
쇠망의 원인이 죄악과 부정 부패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하였다.
오직 신만이 관심을 끌던 중세를 거쳐 다시 인간적인 것으로 눈을 돌리던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다시 고
전 고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로마제국의 멸망론도 다시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시
대 유명한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는 로마가 당한 모든 해악의 근원을 원천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파괴한
카에사르에게로 돌렸다. 페트라르카는 또한 고대 문화의 몰락을 이민족에 의한 야만화에서 찾고, 최초로
암흑시대(Dark Age)란 용어 사용한 사람이다. 또 비온도와 시도니우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을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의 전환 때문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편적인 사료와 연대기 등에
의존하였으므로, 그 이론에는 확실하지 못한 추측의 여지가 많다.
17세기에 이르러 439년 제정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발견되었다. J. Godefray가 1665년에 세밀한 주석과
논평을 달아 이를 출판함으로써 그 당시 사회상을 깊이있게 연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로마제국 말기의
경제적 취약성, 과중한 과세 부담, 중간계층의 몰락, 산업의 파탄, 경작지의 황폐 등의 요인들에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를 이어 계몽주의시대의 몽테스키외는 지리나 기후, 민족적 요인과 역사적 사건간의 관계
를 중시하였는데, 로마제국의 멸망에 관해서도 크리스트교나 야만족의 침입, 기후변화, 인종 혼합, 한발
과 토양 고갈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 기번은 로마 제국의 도덕적 타락, 군사력의 무기력화, 재정 곤궁,
동서 로마의 분열과 상호간의 질시, 기독교와 게르만 족의 침입 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번
은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2가지로 압축한다. 그것은 무기력한 기독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한 점, 그리
고 로마제국이 당시 기술수준으로 보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해진 점등이다. 19세기에도 르낭은
흡혈귀와 같았던 기독교 때문으로 로마멸망의 원인을 규정하였다. 다른 한편 기조는 전제 군주정의 폐해
때문에 로마제국은 쇠퇴하게 되었으나, 게르만의 침입은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고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
이라 하였다. 몸젠은 속주 통치가 인도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못한 점, 변방 방어의 허술했고 제국의 변경
이 너무 길어 지리적으로 방어의 난점이 있었던 점을 든다.
부르크하르트는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상류 계층에서 혼혈에 의한 인종적 퇴화 현상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인종적 특성의 순수성 상실. 잡종화 현상이 그 몰락 원인이라고 규정하였다. 20세
기에 들어와 종교, 정치 뿐 아니라 사회경제사 등 인간생활의 제반 측면에 대한 관심이 더 폭넓게 확산되
었다. 예를 들면 핀리는 제국의 멸망을 문화적 토양에서 찾았고, 퓌스뗄 드 꿀랑쥐는 대지주의 세력이 지
나치게 비대했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호드킨은 노예제의 폐단, 로마 무산자들의 극빈화, 자치 도시의 붕
괴, 페르시아와 게르만의 침입 등을 들었다. 또한 헌팅턴은 기후 변화와 농토의고갈을 원인으로 든다. 로
마제국 멸망의 원인에 관해 20세기에 나타난 견해를 크게 분류해보면,
첫째,마르크스적 유물사관이다.
프랑크는 로마의 경제가 농업과 노예제에 의존함으로써 공업이 후진성을 면치 못했음다는 점을 든다. 생
산 증대와 생활 향상을 위한 기술의 발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칠드는 시장의 제한, 일반 대중의 구매력
하락. 노예 노동으로 자유 노동자의 임금은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이라 한다. 또 월뱅크는 칠드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저급한 기술과 일반 대중의 구매력 하락, 노예제도의 폐단. 부의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한 전체주의적 체제 등을 꼽는다.
둘째, 문명 사관이 있다.
슈펭글러는 사회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청년, 장년, 노년기의 과정을 겪는다고 보면서, 로마의 멸망을
유기체적숙명론적으로 해석하였다. 토인비는 역시 일종의 숙명론에 입각하여, 그리스 로마 문화를 헬레니
즘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이 문화권의 자살 시기를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시기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
자면 로마제국은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몰락하도록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로마 멸망에 따른 이상의 여러 견해들을 주제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도미나투스 체제의 폐
단이다. 전제적인 제권으로 인해 로마 사회가 탄력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세금징수를
위해 직업과 신분을 고정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경제의 흐름이 차단되었다. 또한 대규모 관료체제와 군사
력의 증강은 막대한 재정의 지출을 초래하였는데, 이는 과중한 수세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과중한 수세와
국가 재정 타개의 방안으로 주조된 악화의 강제유통은 바로 화폐 경제 혼란을 초래하여 제국의 경제를 돌
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 몰아갔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들은 제국에 대한 지방민의 애착을 약화시켰다. 군
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군단과 정치의 중심이 상당부분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방의 원
심적 경향을 조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다음은 군대의 질 저하와 게르만 족의 유입 문제이다. 로마 시민보다 속주 이민족 출신의 군인이 많아
짐으로써 군대가 로마시민이 아닌 속주출신의 이민족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또 노예제의 폐단이
있다. 강제 노동으로 인한 생산의 비능률성, 노예 반란 혹은 태업 등이 장기적으로 제국의 생산력을 저하
시켰다는 점이다. 동시에 노예노동은 기술 개발을 촉진시키지 못하였고, 사회전체에 노동을 천시하는 풍
조가 만연하였다. 이어서 제국의 정복전이 한계에 다다라 노예의 공급원도 끊기자, 라티푼디움 체제는 위
기를 맞이하고 마침내 콜로나투스제로 전환해간다.
제국의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제국 후반기 전염병 등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도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에 더하여 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퇴폐적이고 향락적 생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임
신, 출산, 육아 등을 포기하는 현상과도 연관된다. 제정기 로마 인구는 백만 정도로 감소하였는데 이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같은 퇴폐적 풍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인구의 감소는 바로 경제력의
약화, 혹은 지배권력의 약회로 연결된다. 로마의 멸망과 관련하여 한마디 덧붙이자면, 서로마가 망하고
난뒤에도 서구에서는 항상 영원한 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면서, 그 멸망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
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 옛날 로마제국이 태동하던 기원전 1세기 이미 베르길리우스는 아
에네이드 1장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약속[I have fixed them(로마인들을 의미) no limit, not in
place, not in time. I have given them rule without end]을 통해 '영원한 로마(Roma Aeterna)'의 꿈을
그렸다.
영원한 로마에 대한 이같은 꿈은 실제로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듯 하다. 카알대제
의 800년 서로마 황제 대관과 962년 시작된 오토 대제의 신성로마제국이 19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던 사실
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가지 유념할 것은 그런대로 로마의 전통을 이은 동로마제국이
15세기까지 존재하였으며 서구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런 제국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희랍의 웅변가
Aelius Aristides의 "로마라는 명칭은 한 도시의 명칭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명칭"이라는 찬사는
20세기의 손더스의 논문에서도 그 맥락이 찾아볼 수 있다. 손더스에 의하면, 로마는 영원성을 결코 상실
한 것이 아니다. 언어와 법률, 업적 등을 통해 로마는 후세에 모범으로서의 고귀한 기억을 물려 주었고
모국으로서의 위치를 점함으로써, 국가 몰락 여부를 떠나, '영원한 로마'적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최근 유럽 국가들간의 EC공동체나 유로화에 의한 화폐의 통일 등은 일종의 '영원한 로마'의 이
념을 재구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미로도 새롭게 조명된다.
참고 문헌)
이원주, [로마 제국 쇠망의 원인], 고대 석사 논문, 1976.
{로마제국은 왜 멸망했는가?}, 지동식 편역, 대학 문화사,1982.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8권 김영진역, 대광서림, 1990.
M.I. Rostovtsev, History of the Ancient World, vol II, Rome, Connecticut, 1971.
자료제공: 로마사 전공, 최혜영 박사, 경북대 강사
<로마 제국의 멸망>
I. 북쪽의 야만족
1. 게르만족(or 튜톤족)
1) 발달
덴마크의 엘베와 오더 두 강 사이에 위치(B.C.2천년) → 라인강, 북해까지 진출(B.C. 1천년) → 동쪽으
로 흑해연안(B.C. 2세기) → 라인강과 다뉴브 강 이북에서 로마와 대치(350년 경)
2) 민족의 특징
- 문자가 없다.
- 강한 도덕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다.
- 로마의 발달한 문명에 대한 부러움
3) 로마와의 관계
- 로마에 게르만족의 남하를 막기 위한 약 20만의 군대 존재, 수백 년간 대치
- 370년경부터 로마로 진입(게르만족의 이동) - 약해진 로마는 막기 어려움
- 서고트족 : 콘스탄티노플의 침략에 실패. 희랍으로
- 동고트족 :
- 반달족 : 스페인, 북아프리카
- 프랑크족과 앵글로 색슨족 : 북유럽
2. 흉노족
- 중국의 서방에 살다 이동
- 말 기술과 전투에 능함
- 게르만족의 이동에 영향을 줌
- 로마로 들어와 타락
- 샤롱 전투에서 로마와 게르만족의 연합군에게 패함
II 로마의 멸망 원인
1. 여러 원인들
게르만족의 공격 : 오랜 세월동안 여러 지역에 걸쳐 기후의 변화, 흉년의 연속, 인종 혼합, 인구의 감소,
과보호 속의 나약한 로마 자녀들, 다수의 놀고 먹는 사람들, 무능력한 황제, 무위도식하는 시민들(사회보
장제도) → 도덕과 질서의 타락이 그 원인
2. 성경의 지적
하나님께서 세상 왕국을 망하게 하는 이유는 언제나 도덕의 타락
A. 개관
로마제국이 내부적으로 쇠약해질 무렵 알프스이북의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로마제
국은 3세기(Dicletianus)와 4세기(Theodosius) 그들의 침입을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에는
그들에 의해 마지막 생명을 다 했다.(476) 로마의 舊土에는 일시 여러 개의 게르만왕국이 흥망을 거듭하
면서, 바야흐로 흔히 말하는 "암흑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로마제국의 유산은 게르만족에게 직·간접적으로 계승되었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기독
교 교회는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B. 주제에 관한 기본질문
1. 게르만족은 어떤 존재였는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 알려지게 되었는가?
2. 게르만족은 로마제국과 어떤 형태로 접촉했는가?
3.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하게된 이유와 그 이동경로는?
4.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게르만족에 의해 수립된 국가체제의 성격은?
5. 구 로마제국의 주민과 게르만정복자의 관계는?
1) 게르만족의 등장
A. 게르만족의 사회
게르만족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로마인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들의 根據地는 스칸디나비아 및 북
독일지방으로서 기원 1000년경부터의 흔적이 고고학적 발굴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기원 전후 무렵에
로마인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우리가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최초의 文獻的 傳承은 극소수의 그리스
인 作家의 언급과, 로마인 Caesar와 Tacitus의 언급이다.
일찍이 Caesar는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라인강 以東의 게르만인과 접촉하였다. Caesar는 이들의 낙후한
의, 식, 주생활에 대한 근소한 報告를 그의 "갈리아戰記(De Bello Gallico)"에 전했다. 로마제국은 최초
의 황제 Augustus 시대(9년)에 게르만정복을 시도하였으나, 라인강 넘어 베저(Weser)江 유역에서 3 개 군
단(legion: 1 개 군단은 重武裝병사 3000, 輕武裝병사 1200, 騎兵 300 으로 편성)이 전멸하는 대패를 당
한 후, 더 이상의 정복을 포기하고,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 Limes를 구축하였다. -> 중국
의 만리장성을 연상하라!
리메스長城이 구축되던 기원 100 년경 로마의 역사가 Tacitus는 게르만족에 대한 보고를 작성했다. 그
는 지중해연안지방의 인간과 구별되는 그들의 외관과 관습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푸른
눈, 날카로운 눈매, 금발과 강건한 신체 등등..."] Tacitus는 게르만족의 습속을 묘사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한 뒤, 사치와 향락에 젖어 나약해진 로마인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이 기록을 작성하였기에, 그의
묘사는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서술이 섞여 있었으나, 어쨌든 초기 게르만의 상태에 대해 거의 유일한 상
세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Caesar와 Tacitus가 전한 게르만족은 아직도 통합된 정치조직을 이루지 못하여, 여러 개의 씨족 및 부족
단위(clan, Stamm, G.)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수장은 기록상에 王(rex), 公(dux, 이 라틴어에서 영
어의 duke가 유래, 公이라는 말 보다 首長, 즉 우두머리라는 말이 더 타당하다. 대개의 경우 군사적 지휘
관을 의미한다.) 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사실상 귀족들이 선출하는 아직 강력한 정치적 지도권을
발휘하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게르만의 사회는 한 때, 자유로운 농민들의 결합체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결국 귀족이 지
배하고 있던 사회로 파악하게 되었다. 부족이나 씨족의 首長을 비롯하여 이들 귀족들은 게르만의 民會
(Thing) - 여기에서 王의 선출이나 和·戰과 같은 주요 사안이 의결된다 - 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었으며,
주변에 힘깨나 쓰는 下手人(Gefolge, G.)을 결집하여, 하나의 전사공동체를 결성하여 전쟁과 약탈을 지
휘하고 이들에게 戰利品을 분배하였다. 물론 이들 귀족은 이와 같은 무력수단을 배경으로 토지와 예속농
민을 지배하였다. 이 수장과 하수인의 관계를 흔히들 從士制度(comitatus, Gefolgschaft)라고 하는데, 중
세유럽 봉건제도의 한 기원을 이루는 사회관계로 여겨진다.
B. 게르만족의 이동
2세기부터 5세기 사이에 게르만족의 정치, 사회조직이 변동하여 여러 씨족 및 부족단위의 구성이 부족연
맹체tribal confederation로 발전하였다. 게르만의 부족장들은 종교적인 행위와 전사공동체 - comitatus
- 를 통해서 집단적 연대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comitatus는 가끔 새로운 부족연맹체를 구성하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로마제국과 접촉하면서 - 리메스長城을 경계로 오랫동안 交易이나 군단병사들과의 通婚등 평화적인 관
계가 오랫동안 이루어 졌었다. - 여러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세력균형이 깨져 이들은 보다 큰 정치, 사회
조직으로 재편되어갔다. 일부의 부족장들을 필두로 게르만인들은 로마제국의 용병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와 같이 교역, 통혼, 용병근무를 통해 게르만족은 로마의 선진문명의 혜택을 입기 시작하였
다.
게르만족 일부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들은 제국의 약세를 틈타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도 발생하
였다 - ex) 2 세기말 Marcomanni 족이 일으킨 전쟁, 고트족의 反로마동맹. 4 세기말 동방의 훈족Huns이
고트족을 압박하자, 고트족의 이동을 필두로 허다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영토로 보호를 구하여 대이동
을 개시하였다. 로마제국은 게르만인의 이동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 이동의 물결은 로
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78년 흑해연안 Adrianople에서 서고트족Visigoths의 침입을 막으려다 로마군이 대패했는데, 이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로마황제 Valens가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10년 서고트족은 마침내 이탈리아반도로 진주, 로마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사건은 당시의 로마제국
과 지중해 세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Augustinus의 저작 "civitas dei"가 출현했다.
즉 "인류의 구세주 Christ를 모든 로마제국의 주민에 믿게 되었는데 왜 이런 재앙이 닥쳐오는가"라는 회
의와 의심에 대한 기독교측의 반론.
2) 로마제국의 멸망과 서방의 야만화(?)
A. 로마제국의 멸망
로마제국의 군대는 서고트족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게르만족의 용병으로 충원되어, 그 방비력은 이
미 현저히 약화되었었다. 서고트족은 보다 완성된 정치, 사회조직을 갖춘 새로운 형태의 침입으로 이전
에 있었던 게르만족의 산발적인 침입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결국
로마제국의 영토(종국에는 스페인)에 정착, 나름의 왕국을 건설.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Romulus Augustulus (작은 Augustus라는 戱畵的인 의미를 내포)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용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Odoacer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러나
Odoacer는 스스로를 로마황제라고 칭하지 않고, 로마王이라는 애매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즉 정복자 게르
만족으로서도 "영원한 로마(Roma aeterna)"라는 개념은 대단한 권위를 행사했었고, 로마제국의 멸망이라
는 사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참고 지도에서 보듯이 수많은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舊土 일부를
점령하여,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옛 로마제국의 틀을 복구할 능력은 없었다.
B. 서방의 야만화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서방에는 로마제국의 유산이 부분적으로 잔존하지만 - 지역에 따라 그 정도는 다
양하였다. - 대개의 경우 현저한 문명의 퇴화를 겪게 되었다. -> 고대의 종말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이태리반도는 한동안 Odoacer를 제거한 동고트왕 Theodoric의 지배하였고, 옛 로마제국의 영토에는 허
다한 群小의 게르만 왕국이 수립되었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라인강 하류지방에 가장 강대한 게르만족의 왕국으로 프랑크왕국이 등장했다. 로마제
국의 체질이 강력히 남아있던 갈리아Gallia에서는 로마제국의 변방사령관이었던 Flavius Aetius와
Syagrius가 세느(Seine)강과 르와르(Loire) 강 사이에 독립적인 왕국을 건설하여 로마적인 정치체제와 문
화체질이 일시 존속했다.
동고트왕 Theodoric은 首都를 Ravenna에 두었는데 약 15만의 고트족 인구로 이태리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약 600만의 로마인을 지배, 로마王의 지위로서 이태리반도를 다스렸다.
그는 청소년기에 인질로서 동로마에 머물면서 동로마의 고도문명을 체득한 경험이 있어 로마제국의 통치
술, 행정기법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 know-how를 채용하여 그의 왕국을 비교적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
었다. 행정과 司法에서는 로마인 관리가 계속 활동하고 있었으며, 수공업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영업활
동, 상업도 로마인이 관장하고 있었다.
(고트족은 이런 경험이 부족한 전사부족임을 상기하라!)
동고트족은 로마인으로부터 토지의 약 1/3을 비롯하여 住居와 노예, 가축을 획득했다. 그 반대급부로
로마인들은 軍備를 위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테오도릭의 지배은 이탈리아 반도에 일정한 기간
평화와 보호,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그는 현명하고 용감하였으며, 이와 같은 질서와 평화의 수호자로
서 로마인에게서도 환영을 받았었다. 로마의 名望家들은 테오도릭의 지배하에서 高官으로 출세하기도 하
였으며, 여전히 로마적인 생활양식을 지속했다. 문화와 지식활동도 활발했다. (例: Cassiodorus,
Boethius의 저작활동, 물론 Boethius는 미묘한 정치적 음모사태로 死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러나 동고트왕국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대개의 게르만족은 異敎徒에서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
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독교는 로마인과 같은 Athanasius派의 정통 카톨릭이 아니라, 異端으로 선고
된 Arius파의 종지를 따르고 있었다. Arius파는 삼위일체설을 부인하여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차이는 결국 주민들 간에 갈등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로마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처하
는 동로마(비잔틴)의 황제들은 끊임없이 고트왕국, 즉 테오도릭의 세력을 약화하려고 노력했다. 테오도릭
의 사후 결국 동고트왕국은 장기간의 전쟁 끝에 동로마에 의해 멸망했다. -> Justinianus 황제의 로마제
국 수복정책
여러 게르만족의 왕국들은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요인은 피정복민을 體制內化하는데 실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앞에 말한 종교적인 차이 - Roman Catholic과 Arius의 異端 - 외에 현저한 문화적 차
이를 들 수 있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정복자를 로마인은 심중에서 무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같은 내
면적 갈등이 양자간의 화합에는 큰 장애로 작용.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게르만왕국의 법제는 이원적인 屬人主義의 원리를 취하고 있었다. 즉 게르만
인의 事案(casus, L; case, E.)은 게르만法으로 로마인의 事案은 로마法으로 재판하는 식으로... 이와 같
은 법적 불일치 역시 허다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한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나왔다. 전통적으로 이 과정을
문명의 큰 단절로 보아왔음에 대해 20세기 초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느(Henri Pirenne)는 5,6세기에
도 지중해의 경제적 통일은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오히려 7세기 이슬람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석권하면서
비로소 고대에서 중세로의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 졌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Pirenne Thesis)
부정부패와 국가흥망
영국인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보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기 395년에 죽자 로마는 분열되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리되었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은 야만인으로 구성된 군대에 의해 통치되는 군사국가가
되면서 경제활동의 정체로 국민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진 서로마제국에
서는 지배계급의 호화스러운 사치가 기승을 부렸고, 또 이들의 도덕적 퇴폐와 부패가 극에 달하여 마침내
서기 455년 멸망하고 말았다. 이와 달리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력·문화력·도덕력이 훨
씬 앞서 있었고, 또 통치체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계속 번영하여 1453년
오스만 튀르크족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결국 서로마제국이 동로마제국보다 먼저 멸망한 것은 정치력·경제력·문화력·군사력의 열세와 도덕적
퇴폐 및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희랍이 도시국가시대일 때 아테네가 경제력·군사력이 우세했음에도 불구
하고 스파르타에 의해서 멸망된 이유는 바로 국론분열과 도덕적 타락 및 퇴폐 때문이었다.
1961년 5월 16일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일어났던 군사혁명도 따지고 보면, “공산주의라는 외부의 침
략세력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기강의 해이와 사상적 혼란 그리고 부정부패라는 ‘안으로부터의
적’을 막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내부의 적으로 인해 안에서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대통령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를 실현하는 국가건설을
비전으로 내걸었다. 집권한 지 3년을 보내면서 김모 전 법무부장관 부인의 옷로비사건, 박모 전 문화관광
부장관 연루설로 떠들썩했던 한빛은행과 신용보증기금의 거액 불법대출사건, 그리고 최근의 동방금고·열
린금고의 거액 부정대출 사건과 관련된 정관계 로비 의혹 등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커다란 사회문
제이자 정치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물가고, 실업위기,
수입감소 등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럴 때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 부정부패 행위에 연루되어
수십 수백억원의 금품이 기업인과 정치인·관리들 사이에 오고간다면 국민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
다.
경기규칙을 어겨서 당하는 불이익보다 경기규칙을 지켜서 당하는 불이익이 더 큰 사회는 분명히 정의로
운 사회가 아니고 올바른 사회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규범과 법의 질서를 어기
는 사람들이 더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처벌받는 사회’로 만들어야 하며, 반대로 ‘규범과 법의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안 당하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가정·학교·직장·사회에서 품성교육이나 도덕교육을 강화해야 한
다. 일본 사람들은 자식을 낳은 뒤 4∼5세 때부터
①남에게 거짓말 하지 말 것
②남을 속이지 말 것
③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불편을 주지 말 것
④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말 것
⑤정직할 것 등 다섯가지를 가르친다고 한다.
로버트 폴검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 품성교육
또는 도덕교육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덕목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 무엇이든지 나누어 가져라
2)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라
3) 남을 때리지 말아라
4)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갖다 놓아라
5)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깨끗이 치워라
6)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아라
7)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때에는 미안하다고 말하라
8) 밥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라
9) 화장실을 쓴 다음에는꼭 물을 내려라
10) 균형잡힌 생활을 하라. 날마다 배우고 생각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는 법을 배워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인 관자는 한 나라가 존립하는 도덕적 기반은 4유(維)”라고 했다. 네가지
밧줄이라는 뜻인데 첫째는 예의, 둘째는 의리, 셋째는 염치, 넷째는 수치(부끄러움)를 가리킨다. 첫째 밧
줄(예의)이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둘째 밧줄(의리)이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셋째 밧줄(염치)
이 끊어지면 나라가 전복되고, 넷째 밧줄(수치심)이 끊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관자는 경고하였다.
예의와 염치는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윤리로서 이것이 바로 서야 사회의 기강이 선다.
국민들 사이에 예의가 땅에 떨어지고 정의가 무너지고 청렴한 기풍이 사라지고 악과 부정을 행하고도 부
끄러워 할 줄 모른다면 그러한 나라는 곧 멸망하게 된다. 예의·의리·염치·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바
로 한 나라를 만드는 도덕적 지주요, 정신적 기둥이며, 윤리적 기반이다. 이 네가지가 바로잡히면 나라가
바로 선다. 이 네가지 위에서 비로소 준법정신과 준법행동, 사회정의, 양심, 도덕규범적 질서가 바로 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 40년간(1961∼2000) 우리는 놀라운 고도 경제성장으로 세계 제11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물
질적 풍요로움은 달성되었으나 정신적 황폐화가 심화되어 마침내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①허세문화(외화내
빈의 문화) ②조급문화(빨리빨리 문화) ③ 기분문화(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문화) ④이기문화(남에
대한 배려없이 자기중심적, 자기본위적 사고와 행동이 지배하는 문화) ⑤투쟁문화(타협이나 양보보다는
투쟁일변도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드는 문화) ⑥비방문화(모든 잘못된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문화)
를 낳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런 잘못된 문화를 뜯어고치는 일대 문화개조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이런 문화개조운동, 의식개혁운동의 하나가 바로 ‘아부도바운동’이다.
글 김동기 고려대 명예교수·명지대 석좌교수·학술원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