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모든 서신은 처음과 중간까지는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집중하고 후반에는 그 믿음의 대한 바른 생활에 집중합니다. 예를들어 갈라디아서 5장20.21절 말씀처럼 너희가 방탕하게 술취하고 다투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경고합니다이런 말씀이 성경에 많기 때문에 성화구원론자가 많다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정말 겁이 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는데 죄를 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못받는다는 말씀이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도 한 복음이 다른복음처럼 쓰여졌을까요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고 잘 듣기위해서 겁을주면서 너 다리밑에 갔다버린다 호적에서 지워버린다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옮은지요 ?아니면 엄히 경고했듯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보면 성화해야 구원받은 것이 맞기때문이죠 성령님께서 이런성경 오해가 있을지 미리 아셨을텐데요 믿음의 대한 열매가 성령께서 주시는거지만 내 마음의 성령의 열매가 없다는 걸 실감할때 한숨과 탄식이 나오면서 그 열매 맺기를 소망하지만 더딜때는 주님이 주신 그 믿음이 맞나 상고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속 시원한 답변을 부탁합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은 처음과 중간까지는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집중하고 후반에는 그 믿음의 대한 바른 생활에 집중합니다. 예를들어 갈라디아서 5장20.21절 말씀처럼 너희가 방탕하게 술취하고 다투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경고합니다이런 말씀이 성경에 많기 때문에 성화구원론자가 많다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정말 겁이 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는데 죄를 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못받는다는 말씀이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도 한 복음이 다른복음처럼 쓰여졌을까요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고 잘 듣기위해서 겁을주면서 너 다리밑에 갔다버린다 호적에서 지워버린다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옮은지요 ?아니면 엄히 경고했듯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보면 성화해야 구원받은 것이 맞기때문이죠 성령님께서 이런성경 오해가 있을지 미리 아셨을텐데요 믿음의 대한 열매가 성령께서 주시는거지만 내 마음의 성령의 열매가 없다는 걸 실감할때 한숨과 탄식이 나오면서 그 열매 맺기를 소망하지만 더딜때는 주님이 주신 그 믿음이 맞나 상고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속 시원한 답변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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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은 십자가로부터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은 새 언약적인 관전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새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은혜는 법을 통하여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은 성도의 삶은 이러한 것이다 라는 정답을 알려주는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최종 지점입니다. 이건 정답입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이 정답에 의하여 계속하여서 죄를 고발당하게 되어 있답니다. 정답이 우리 실존을 깨닫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서 우리의 시선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4장 12-16절입니다.
히 4: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항상 기억할 것은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구원이 나중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한 자들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하심으로 된 것입니다. 구원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지고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합니다. 이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난 이렇게 일을 할 것이다” 라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6장에서 하나님의 맹세라고 합니다.
히 6:13-2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맹세하심으로 주신 창세전 언약을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맹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맹세하심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맹세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구원도 하나님의 맹세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완성된 구원을 주셨지 중간에 성도들이 잘못을 하면 잘려나간다는 끊어질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형편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고 성령으로 위로부터 거듭난 성도라고 합니다. 성화주의자들은 구원관은 구약식 율법 아래서의 구원관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쌍무언약으로서 지키지 않으면 잘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멸망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을 시키신 것입니다. 이를 이사야 53장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통해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을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상징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구약 이스라엘의 죄를 몽땅 짊어지고 죽임 당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의 마지막인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사야 53장을 성취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구약 이스라엘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구약의 성도들이 일어나서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고 신약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야곱이 7년 종살이 하고 레아를 얻었듯이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은 야곱이 라헬을 먼저 얻고 나서 7년 종살이를 하는 것과 같이 성령 강림으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성령강림으로 출발을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역사 속에서 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되는지를 역순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밟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도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여서 지적 동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성령께서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율법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참소 하여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그 참소를 이겨 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동의하여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성령)이 우리 안에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물을 받은 성도는 그 믿음으로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늘 자기 행위로 인한 율법의 참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늘 자신의 행동을 뜯어고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새 언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아래서 자기 행실이 좋으면 안심이 되고 나쁜 일이라도 하면 자책하면서 울고불고 하면서 아침에는 천국인데 저녁에는 지옥으로 롤로코스트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기를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 거하는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참소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서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의에 종으로 산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4-19절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일 4:16-19절.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사랑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확증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착하게 살면 안심이 되고 나쁜 짓을 하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면 대박이지만, 안 믿어지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믿어지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는 믿어지게 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 택한 백성에게는 반드시 믿어지는 정한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정한 때가 되면 다메섹으로 사울을 찾아가서 눈을 뜨게 해 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찾아가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새 언약이 아직 믿어지지 않으면 그 날이 속히 임하길 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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