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초거사 오상순(1893~1963)
‘꽁초’문인이 불교 접한 후 ‘空超’문인으로
철저한 무소유…집도 가족도 없어
‘담배가 詩이자 부처님’인 ‘草禪’
사인북 모아 ‘청동문학’펴내기도
“나와 시와 담배는/
이음동곡(異音同曲)의 삼위일체/
나와 내 시혼은/
곤곤히 샘솟는 연기/
끝없는 곡선의 선율을 타고/
영원히 푸른 하늘 품속으로/
각각 물들어 스며든다
(나와 시와 담배).”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자신과 시와 담배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은 시인.
담배연기 속에서 無常과 無我를 체득한 거사.
하루 세끼 끼니를 거르면 걸렀지
1분이라도 담배를 물지 않으면 큰일 나는,
‘꽁초’라는 별호가 더 친숙한 시인 오상순.
그에게 있어 담배는 -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나 -
자신이고, 시며, 부처님이다.
어린 상순은 학교와 교회, YMCA를 다니며
집에선 책 읽는 것이 전부인 모범생이었다.
8세에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어의동 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기독교계통의 경신학교로 진학해 신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을 잇달아 겪는다.
일련의 시련은 상순이 가출하는 원인이 된다.
집을 떠나 외가에서 기거하던 그는
1912년에 일본 교토의 도오시샤(同志社) 대학으로 유학,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귀국해서도 상순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문단 활동도 이 무렵 시작됐다.
1920년 7월 동인지 〈폐허(廢墟)〉에
‘시대고와 희생’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 또한 이 즈음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식민지의 암울함을 술과 담배로 달래던 시기,
상순 역시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술과 담배와 친해진다.
처음엔 한두 개피 피우던 것이 차츰 늘어,
일어나면 먼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파이프를 무는 경지에 이르렀다.
담배에 얽힌 일화는 무수히 많다.
결혼식 주례를 서면서도 담뱃불을 끄지 않았으며,
이른 아침 파이프를 물고 선정(禪定)에 들었다.
‘나와 시와 담배’라는 시도, 역시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하루에 필요한 담배는 20갑(담배 1갑에 10개피가 들어있던 시절임).
자신이 피울 담배 140개와
다른 사람에게 권할 담배 60개가 마련이 돼야 안심을 했다.
차비 대신 그 돈으로 담배를 사달라고 할 정도.
지인들 역시 그를 볼 때마다 담배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의례 담배를 권하며 불을 붙여주고
자신 역시 담뱃불 꺼지기가 무섭게 새롭게 불을 붙인다.
결국 담배로는 동서고금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초선(草禪)’이 됐다.
기독교 신자로 잠시나마 전도사까지 한 그가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된 때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강단에 서게 되면서부터.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영문경전을 보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참선을 시작했고 금강산을 비롯해 명찰을 순례하며
스님들을 밑에서 정진했다.
3년 뒤인 1926년 상순은 부산 범어사에 입산한다.
차상명.김상호스님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배우고, 참선에 몰두했다.
2년간의 수행은 그의 사상체계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상순은 언제나 그를 괴롭히던 ‘허무’란 놈에 대해 밤낮으로 들여다봤다.
마침내 실체가 없음(空)을 깨달은 상순.
범어사를 나와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그 때부터 공초(空超)라 자처한다.
정휴스님은 ‘공초문학과 불교정신’에서
“공초의 문학관이나 종교적 사상은 입산한 뒤 심화되고
시적으로 형성화됐다”며
“범어사 수행 이후 공초의 삶은
우주만물과 몸을 섞는 법계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수행 이후 그의 창작세계도 변화를 겪는다.
고오노 에이지는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불교사상 -
특히 오상순시의 대비적 고찰을 중심으로’에서
“허무와의 오랜 싸움 끝에 오상순은 갑자기 생명의 율동 같은 것을
깨달은 듯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영원회전의 원리’나 ‘백일몽’ 같은 시는
한편의 게송을 떠올리게 한다.
속세로 내려온 공초의 삶 또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있는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
재물, 입신출세니 지위, 일정한 주소, 아내와 자녀,
또 문인의 마지막 집착인 저서욕까지 모두 내려놓았다.
늘그막에는 무(無),
그것만을 마지막 짝처럼 더불어 산 사람”이라는 시인 서정주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으면서 욕심도 내지 않았다.
집이 없지만 잘 곳을 걱정하지 않았고,
돈이 없어도 끼니걱정을 하지 않았다.
잘 곳이 없으면 다방의자에서 밤을 새우고,
밥은 누가 사주면 먹고 아니면 굶는 것뿐이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고 난 이후에도 그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친구와 후배의 사랑방을 오가며 신세를 졌다.
종로 안국동 근처 역경원과 선학원, 조계사는 그의 주된 숙소였는데
특히 조계사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잠자리를 마련해준 곳이다.
조계사 유마실에서 기거할 때의 생활은 이렇다.
새벽 4시, 눈뜨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인다. 파이프를 쥔 채 참선에 든다.
오전10시 즈음이면 공초는
‘육체의 꽃이 넘쳐흐르는 명동거리’로 나섰다. 다방은 그의 교정이자 수행처.
젊은 문학도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명동의 ‘청동다방’을 찾았고,
공초는 언제나 그들을 환대했다.
늘 그렇듯 “고맙고 기쁘고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무엇이든 쓰라”며 사인북을 한권 내민다.
손님이 펜을 내려놓으면 다시 악수를 청하고 담배를 권한다.
찾아오는 이마다 담배를 권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밥을 사준다면 밥을 먹고, 술을 사준다면 술을 마신다.
해가 기울면 조계사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다.
사찰에서 담배를 피우는 재가자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럼에도 공초는 담배를 내려놓지 않았으며
조계사 역시 골초이긴 하지만 ‘선객도인’을 쫓아내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시를 쓰기보다, 삶을 시로 대신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인생을 논하는 그 순간이 그에겐 시였다.
자신의 시집 대신 공초는 1955년을 전후로 작고할 때까지
청동다방을 오가며 내밀었던 사인북으로 〈청동문학〉을 탄생시켰다.
초등학생부터 사회 저명인사까지 동인으로 참여한
<청동문학〉에는 인생과 철학, 종교 등 흘러나온 모든 얘기가 담겨있다.
이 책은 통권 195호까지 나왔는데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것에는 관심 없던 공초였지만
유독 〈청동문학〉에는 많은 애정을 쏟았다.
“나는 밤마다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깐다.
다음 날 다시 눈을 뜨면
나의 생은 온통 기쁨과 감사, 감격으로 가득하다”고 술회하던 공초.
만날 때마다 “고맙고 기쁘고 반갑다”며 웃던 그가
1963년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그를 따르던 문인들이 문단장(文壇葬)으로 그의 마지막을 지켜줬다.
시인 이원섭은 ‘공초 선생과 무소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출가하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출가해 있었으며,
무소유의 규율에 매이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무소유에 철(徹)해,
시인이면서도 시에 매이지 않았으며, 불교인이면서 불교마저도 초월했다.
차를 마시고 담소하는 일상사가
곧 신통묘용일 수 있던 분이 바로 선생이다.”
공초는 말 그대로 ‘무소유’주의자였다.
방 한 칸 없고 그 흔한 예금통장 하나 없었다.
시집 한 권 출판한 적도 없다.
있다면 파이프 한 개와 늘 내미는 사인북이 전부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공초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시도 몇 편 쓰지 않는 시인 아닌 시인이다.
하지만 공초는 삶을 통해 무소유를 보여줬다.
칠십 평생 그가 누린 것은 ‘부족’아닌 ‘만족’이었고
‘소유’아닌 ‘무소유’였던 것이다.
오늘 하루도 무언가를 갖기 위해 숨 가쁘게 뛰어다닌 이가 있다면,
공초를 생각하며 잠깐 숨을 돌리자.
갖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고통스럽기 만한 삶도 돌이켜보면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순간이 된다는 사실을
공초는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공초의 시와 수필세계
시력 40년에 작품 적어…삶 자체가 詩
초기의 허무주의 떠나 空사상 짙게 깔려
1920년 〈폐허(廢墟)〉를 통해 등단한 공초는
40여 년간 시인으로 살아왔다.
40여 년의 시작경력과는 달리 그가 쓴 시는 많지 않다.
생전에 출판된 적도 없고, 사후에 공초의 제자들이 펴낸 시집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에도
40여편의 시와 23편의 수필이 실려 있을 뿐이다.
생전에 시집을 출판하겠다는 의욕이나 관심이 없었던 공초.
자신의 시를 문자화하기보다 실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고한 전 동국대 이형기 교수가 ‘오상순의 시와 공사상’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향연삼매에 빠져드는 일이 곧 시의 체현인데
달리 무슨 시를 써야 한단 말인가”라고 되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등단한 1920년대는
근대문학 사조인 낭만주의.자연주의 등이 들어와
문예사조를 형성했던 시기.
3.1운동 이후 식민지의 한계를 절감한 문인들 사이에서는
허무주의 또한 흐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초 또한 김억.나혜석.염상섭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통해 허무주의에 동참했다.
그는 이 즈음 사회와 대중의 의식을 폐허로 인식하고,
절망과 희망의 글을 쏟아냈다.
공초는 3.1운동 실패 후
식민지 시대에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을 보며
‘시대고와 그 희생’을 쓴다.
<폐허〉 창간호에 실린 이 글에서
그는 황량한 폐허의 한국 식민지 현실을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움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생사를 걸만한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허무에서 해바라기’를 통해
“시대 상황에 대한 진단은 민감했으나
공초의 이런 주장은 지극히 추상적이라 허무함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시인 이장희의 생애를 그린 수필
‘고월과 고양이’에서도 허무에 몸부림치는 공초를 만날 수 있다.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는
공초의 불교적 세계관을 함께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필.
집에 기르던 거위 한 쌍 가운데 한 마리가 죽은 다음
남은 한 마리가 제짝을 찾으며
먹지도 않고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쓴 글이다.
여기서 공초는 한낱 미물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임을 내세우는 한편,
생에 대한 집착이 허무한 일임을 말해준다.
그의 대표작으로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을 꼽을 수 있는데,
공초는 이 시를 발표함으로써
당시의 범람하던 허무적인 사조를
서사시적인 형식과 사상성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시의 비유가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기 보다 관념적이어서
시적 감동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다.
‘허무혼(虛無魂)의 선언’은
공초의 허무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
그는 여기서
‘물.구름.흙.바다.별.사람.신불(神佛).불꽃.바람.허무’를 거론하면서
하나하나를 찬양하고 각각 부정하는 식의 형태를 취했다.
동원대 고명수 교수는 ‘허무의 혼으로 살다간 자연인’에서
“공초는 역설적 논법을 사용해
모든 존재와 사물의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방랑의 마음’은 그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다.
작품을 쓸 무렵, 전국 사찰을 다니며 운수납자로 살았던 공초.
그는 방랑과 불안을 넘어선 세계를
동경하며 떠돌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바다’로 떠난 마음에 빗댄다.
한 생각 돌이켜 보면 멀리 있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듯이,
깨달음에 대한 향한 길이 마음에 달렸음을 이 시에서 얘기한다.
공초가 남긴 60여 편의 글을 들여다보면
내면에 내재돼 있는 ‘허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허무주의.퇴폐주의 시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의 실체를 빗겨보는 것이다.
시인 구상은 “선생은 철저한 구도자로
자신의 사상을 작품화하기보다 생활에 속에서 실현했다”며
“그의 생과 시에는 공사상이 깔려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초는 실로 ‘범어사 수행’ 이후 허무를 넘어
무상과 무아를 체득한 시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