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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전 한살림 인문강좌용으로 쓴 것이다.
군자(君子), 진보적 인간.
---새로운 리더십
공자는 인간이 진화할 목표를 군자(君子)라는 인간상(人間像)으로 표현하였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물신’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운동의 리더는 어떤 모습일까?
1. 시대정신을 담지하는 가치관과 철학이 올바르게 서 있다.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2. 유연한 일관성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제1편 학이)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이 구절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과 관련해 많은 영감을 던져 준다.
과연 진정한 리더십이란 어떤 걸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이제는 사회를 새로운 단계로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리더십의 업그레이드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부드러운 권위’, ‘유연한 권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유연한 권위’는 뛰어난 왕이나 지도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위정자 한 사람만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 이르러서는 제도와 부합하는 보편적 덕목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생산력의 확대를 통해 현대 사회는 공자와 같은 성현만이 펼쳐 보인 이상(理想)을 일반 시민의 수준에까지 보편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민주화와 탈권위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 국민에게 더 이상 고집스러운 일관성, 불도저식 추진력 같은 리더십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대정신에 충직한 일관성과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소통하는 유연함의 조화, 즉 유연한 일관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현대적 리더십의 요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 기업, 진보 운동 어느 하나도 성공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 변화는 일반 시민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것보다 뒤질 수가 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테니 변화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주체라 할 수 있다.
또한 진보라는 말도 사회적 실천 못지않게 사람들의 의식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체제나 정책 면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이는 분야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점점 더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의 진보가 사회 전체의 핵심적 주제로 대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완고한 사고방식은 그 내용을 떠나 진보와는 아주 거리가 먼 태도다. 어느 쪽이든 변화를 거부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는 자각이 절실히 필요하다.>
3. 지시(指示)형이나 권력형이 아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삼군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필부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子曰 三軍 可奪帥也 匹夫 不可奪志也)
사람의 관념을 변화사키는 것은 지시나 권력에 의해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 벗을 사귐에 대한 물음에 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은 지시형이나 권력형 리더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충고하여 잘 이끌어주되, 듣지 않거든 그만두어 스스로 욕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을 잔학하다 하고, 미리 경계하지 않고서 일의 완성을 재촉하는 것은 난폭하다고 하고, 소홀하게 명령해 놓고 시기를 재촉하고 기대하는 것은 해친다고 하고,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내주기에 인색하게 구는 것을 유사(有司)라고 하느니라."
子曰 不敎而殺 謂之虐 不戒視成 謂之暴 慢令致期 謂之賊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
<정공이 공자께 여쭈었다. “한마디의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 한마디로 그 뜻을 나타낼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일러오기를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였으니, 만일 임금 되기가 어려운 줄을 안다면 이것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말했다. “그러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 하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 한마디로 그 뜻을 나타낼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일러오기를 ‘나는 임금이 된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내가 말을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못하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임금의 말이 옳기 때문에 아무도 어기지 못한다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 말이 옳지 않은데도 어기지 못한다면 이것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제13편 자로)
定公 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 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 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
<계강자의 정치에 관한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지금도 유효할 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리더십의 요체다.
“정치(政)란 바름(正)이니, 그대가 만일 바름으로써 통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顔淵 第十二)>
<계강자가 도둑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공자께 묻자 공자는 대답한다. “진실로 그대가 탐욕하지 않는다면, 상을 준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오.”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 不竊>
4. 적재적소(適材適所)를 잘 살린다.
<안연 편 22장을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 묻는다. 그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대답한다.
번지가 이어서 “지(知)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知人)”이라고 말한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인(仁)과 지(知)를 결부하여 답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실현된다고 말한 것이다. 번지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인은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굽은 사람도 능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말한다.
번지라는 제자가 그다지 총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공자가 말한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다른 제자인 자하에게 공자의 말씀을 되물었다. 그러자 자하는 “뜻이 넓고 큰 말씀이오. 옛날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고요(皐陶)를 등용하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으며, 또 탕 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골라 등용하시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소.”(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擧伊尹 不仁者遠矣)라고 부연 설명한다. 자하는 인을 정치의 요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技術)이다’라는 공자의 이상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안연 편 11장에서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5. 편가름이 안 생기도록 스스로 편벽하지 않고 보편적인 사람이 된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두루하여 편파되지 않고, 소인은 편파되어 두루하지 못한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子曰,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
공자는 “군자는 두루 화합하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무리를 짓지 않고
소인(小人)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무리를 짓고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주(周)는 두루 미치는 것이고 비(比)는 ‘비교한다. 견준다.’는 뜻이 있으나
이 구절에서는 편을 지어 모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주(周)는 두루 친한 것이고, 비(比)는 끼리끼리 친하다는 뜻이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두루 친하면 천하에 퍼져 미치고, 끼리끼리 친하면
편애하는 데 빠져 사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군자가 두루 친한 것은 공적(公的)인 의미이고, 소인이 끼리끼리 친한 것은
사적(私的)인 이익을 위한 것이다.
6. 덕성은 참는 것(忍)이 아니라 서(恕)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몰라주거나 오해하거나 하면
'화'는 물론이지만, 마음에 여러가지 일렁임 즉 부자유가 발생한다.
그런데 그런 현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면,
진짜 '자유인'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으니까 진짜 '자주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도 오해가 있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내 갈 길을 간다'는
것과는 바탕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저항이 있다.
기질이 드센 사람이 있지만, 내면에는 역시 부자유가 있고, 다른 사람과의 불화가 있다.
군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남이 나를 몰라주거나 오해를 해도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다.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다.
이른바 도덕규범으로 하면 아무래도 참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것은 자유인이 아니다.
기쁘거나 즐거운 상태가 아니다.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규범이 아니라 '자각'에서 출발할 일이다.
'무지'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과학적이다.>
< “주공(周公)과 같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지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
7. 무실역행(務實力行)한다.
< 자장이 공자께 인(仁)에 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섯 가지를 천하에 행할 수 있는 것이 인이니라."
자장이 그 다섯 가지에 대하여 듣기를 청하자 말씀하시기를, "공손·관대·신의·민첩·은혜이니라.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여러 사람의 지지를 받고, 신의가 있으면 남이 일을 맡기고, 민첩하면 공적을 올리게 되고, 은혜로우면 사람을 부릴 수 있게 되느니라."
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 請問之 曰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인(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인을 추상적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무르기 쉬운 우리들에게는 그 실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인은 다섯 가지 덕목이 조화된 인격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 덕목 가운데 한 두 가지는 가질 수 있으나 이 다섯 가지를 모두 한 인격 안에서 조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손하고 관대하기는 하지만 민첩하지는 못하는 경우도 많고, 신의가 있고 민첩하지만 공손하거나 관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공손하면 무시당하거나 모욕당하기 쉽다고 해서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로부터의 반응을 의식하는 공손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절대의 공손은 결코 모욕당할 수 없는 것이다.
관대함도 사람을 얻는 수단으로서 하는 경우는 얼마 안 가서 그 밑천이 들어 나고 만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길러져야 하는데, 이 힘은 무아집의 힘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림 없다.'라는 생각이 강한 사람은 결코 관대할 수 없는 것이다.
신용이 있으면 남이 일을 맡기고, 민첩하면 공적을 올린다는 말은 인(仁)의 실천이 결코 어진 성품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인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그 실제적 능력이라는 것은 논어의 여러 장들에서 이야기 되고 있다.
이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손하고 관대하며 베푸는(惠) 태도와 실무적 능력을 함께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것도 이런 바탕에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민첩하고 약속을 잘 지키나 관대하지 못하거나, 공손하고 관대하긴 하지만 실무적 능력이 없거나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은 공자가 말씀하시는 인(仁)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