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심씨(沈氏)는?
심씨는 문헌에 63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4본을 제외한 나머지 59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라, 심씨는 조선 500년동안 정계를 주름 잡은 10대 문벌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심씨 중에서도 청송 심씨는 상신이 13명이나 되는데 그중 영의정이 9명이나 되어 전주이씨의 영의정 11명에 비해 버금 가는 것이다.
그리고 심은과 심회는 부자 영상인데 심은의 부 심덕부를 넣으면 삼대가 상신을 지낸 셈이다.
역사상 3대가 상신이 된 집안은 대구서씨 청풍김씨와 함께 단 세 집뿐이다.
★ 16개의 본관과 219,737명이 있다.(1985년)
청송심씨(靑松沈氏)
시 조 휘(諱): 심홍부(沈洪孚), 위위시승(衛尉寺丞)
자(字): 홍일(洪一)
묘 소: 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동 보광산
청송은 경상북도 중부 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청기현인데 신라때 적선으로 고쳐서 야성군(野城郡:현 영덕군)에 속했다가 고려 초에 부이현이 되고 운봉으로 개칭하여 예주(禮州:영해)에 속했다.
조선 태조 때 진보현에 합하였고 1419년(세조 원년)에 청보군으로 승격, 후에 진보와 분리되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으로 개칭하였으며, 부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군이 되었다.
청송 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룰 시조로 받들고, 그의 증손 심덕부(德符)가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심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정종 즉위년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심원부(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사(典理判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일찍이 조선 개국을 시작으로 명문벌족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 심씨는 심덕부의 아들 7형제 대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루었다.
세종의 장인이면서도 상왕인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으로 죽음을 당했던 심온(溫)은 청성군 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심온의 막내 아우인 심청이 군국의 대사를 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부당하다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 습(朴 習)에게 불평한 것이 상왕의 위에 들어가 옥사가 일어났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박 은(朴 : 당시 좌의정)이 "심 온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피체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에서 사사되었다.
죽음에 임하여 심온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의 현손 심의(부사맹 의창의 아들)와 심융(경력 의겸의 아들)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심온의 아우 종(淙)이 태조의 부마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고, 온의 둘 째 아들 심회는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부자 영상의 영예를 누렸다.
심회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심원의 아들 심순문(順門)은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참형을 당했다.
「정암연주」에 의하면 그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죄목으로 화를 입었다고 하며, 그의 죄업은 죽음을 두고 대간들이 무척 논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설에는 심술문이 무척 사랑했던 기생을 연산군이 강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이같은 관계를 둔 연적에 의한 대립감정이라고 한다.
또 그의 할아버지 심회(澮)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연유로 관작이 추탈되고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고도 한다.
심순문의 아들로 명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던 연원(連源)은 아버지 순문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형을 당했으므로 일생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항상 왕실의 외척됨을 경계하여 그의 손자 이름들을 모두 겸(謙)자 돌림으로 지었다고 한다.
심영원의 아우 심봉원(逢源)은 명종 때 사예(司藝)를 지내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零府事)에 이르렀으며, 그림·글씨·음률·의술에 능통하여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심기안정법(心氣安定法)을 터득하여 대화산 기슭에서 집을 짓고 살며 자호를 효창노인(曉窓老人)으로 하여 하얀 수염을 날리며 산수 틈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도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하며 동작도 휴식도 조절하였고 마음 쓰는 것도 그 심도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는 듯 하였다.
막내 아우인 심통원(通源)은 명종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심연원의 아들 강(鋼)이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아버지로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거쳐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돈령부사(領敦零府使)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권귀 속에서도 가풍을 지켜 신진사류로서 화를 당하려던 박 순(朴 淳) 등을 아들 의겸(義謙)과 함께 구하고 권신 이 양(李 樑)을 제거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아들 심의겸은 서인의 거두로서 선조 때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내는 동안 사림의 명망이 높았으며, 아우 충겸(忠謙)은 임진왜란 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림군(靑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심중겸의 아들 심열(悅)은 인조 때 경제에 능한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좌·우의정과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동지돈령부사 심봉원의 손자 심희수(喜壽)는 선조 말에 이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광해군이 즉위한 후 권신 이이첨의 전횡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되어,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鄭 )을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둔지산에 들어가 시로써 여생을 보냈다.
부사(府使) 심종심(宗沈)의 손자이자 심설의 아들로 효종조의 영상이던 심지원(之源)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들 심익현(益顯)과 함께 필명을 떨쳤으며, 떨쳤으며, 심지원의 중손 심사정(師正)이 산수화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저명했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심수현(壽賢: 응교 유의 아들)의 아들 심육( : 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심달원(達源)의 손자 심우승(友勝)은 호조 참판에 올라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행패를 다스리다가 무고를 당했고, 그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심흥원(興遠)의 손자 심우신(友信)은 임진왜란 때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 되었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던 심기원(器遠)이 좌의정을 역임하여,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심환지(煥之: 교리 태현의 손자. 진의 아들)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 참판 심염조(念祖)의 아들 심상규(象奎)는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당시의 제1인자로 손꼽혔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쳤던 심우정(友正)의 아들 심현이 인조 때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내고 돈령부 도정(敦零府都正)에 이르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사를 따라 강화에 피난 가서 청병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묘의 위패(位牌)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를 쓰고 부부가 함께 자결했다.
역사상 이들 부부처럼 태연하고 절도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 부부의 나이가 70세였다.
조카 심동구(沈東龜)가 배를 대놓고 피난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현은 애써 돌려보내고 조복을 입은 다음 동향사배(東向四拜)을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유소를 지었다.
<신(臣) 현은 동향사배하고 남한산성에 계신 주상전하에게 올리옵나이다>로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은 임금에 대한 보은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유소를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다음 부인 송씨를 돌아보며 "정은 백년을 같이하고 의는 한번 죽음을 같이하니 내가 충신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 하며 함께 죽을 것을 권유하자, 송씨는 "종용당고사(從容堂故事:죽음이 주는 생리적 고통이나 정신적 갈등을 무화시킨다는 뜻)을 본받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갑시다" 하고는 목을 매었는데, 서로의 어깨를 짚고 편안히 운명에 종용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 때 한성부 판윤과 대사헌(大司憲)·예조 판서 등을 지낸 심경택(敬澤), 형조 판서 심의면(宜冕), 공조 판서를 거쳐 기로서에 들어간 심의원(宜元), 고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갖가지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겪었던 심순택(舜澤), 예조 판서 심이택(履澤),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심상학(相學)이 유명했으며, 심상훈(相熏)은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와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을 역임하여,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심훈(薰: 본명 대섭, 상록수 저자)과 함께 명문 청송 심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송 심씨는 남한에 총 44,446가구, 186,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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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금하는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
반면 서로에 대한 원한 때문에 혼인을 거부하던 성씨들도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가 한때 그랬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부친 심온(沈溫)은 세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종 즉위년(1418)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던 것이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한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총제(摠制)로 있으면서 ‘금위(禁衛) 군사로 상왕(태종)과 주상(세종) 두 분을 호위하려니 숫자가 적다’며 불평한 것을 역모로 몰아 고문 끝에 심온을 끌어들인다.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형 당한 심온은 이를 좌상 박은(朴誾)의 무고 탓으로 돌려 ‘이후로는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두 집안이 혼인하는 예가 드물었는데, 사실상 심온을 죽인 인물은 박은이 아니라 태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