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왕비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왕 필리포스는 알렉산더에게 최고의 교육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왕자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문하에서 13∼16세까지 교육을 받으며 철학, 의학 및 과학적 탐구에 눈뜨게 되었으나, 스승의 그리스 우월주의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로서는 아시아인이 적당하다며 이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도록 교육했지만 알렉산더는 이후의 정복 전쟁에서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채 포용정책을 베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도 당대의 가장 명성 있는 스승들의 지도 하에 알렉산더는 검술은 물론 운동, 사냥의 무예에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문무를 겸비한 총명한 알렉산더 왕자는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왕이 될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대치하고 있었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480년에는 크세르크세스왕이 재차 그리스를 침략했으나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번번히 격퇴 당했다. 그 후 지루한 대치상태가 계속되다가 폴리스 사이의 분열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자 세력이 제법 강한 폴리스들조차도 점점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뚜렷한 구심점이 없이 그리스 전역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그때까지 일개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을 이미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기원전 338년, 그리스 세계를 통일한다. 그는 각 폴리스의 자유와 자치를 인정하며, 폴리스 사이의 평화 유지와 페르시아에 대한 보복 전쟁을 결의하는 ‘코린트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갑자기 암살되자 알렉산더는 군대의 지지를 받아 왕위를 이어 받는다. 알렉산더는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암살 혐의를 핑계로 정적들을 제거해 버렸다. 알렉산더는 코린트 동맹의 총사령관의 지위를 이었으나 테베를 중심으로 그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알렉산더는 즉각 테베를 포위 공격하여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살아남은 테베 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이 단호한 조치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은 공식적으로 알렉산더 앞에 사죄하고 굴복하였다.
그리스 내부의 문제가 정리되자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는 늘 꿈꾸어 왔던 페르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스물 두 살의 젊은 왕은 보병 약 3만과 기병 5천, 그리스 동맹 연합군 7천 가량을 대동하고 소아시아의 연안을 향해 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원정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가 죽을 때까지 11년간 계속된다.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지 한 달여 지난 5월에 알렉산더는 그라니쿠스 강에서 치른 페르시아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지배의 중심지인 사르데스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가 신속하게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장악해 나가는 사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자국의 군사력을 과신한 탓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원정 2년째,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대승을 거둔다.
기원전 332년 11월,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다다른다. 이집트를 다스리던 페르시아 지사는 순순히 항복했고,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더를 페르시아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 구원자로 여겨 환영했다. 그는 이집트의 종교를 존중하여 이집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고 일천 킬로미터가 넘는 사막을 지나 아몬 신전에 참배하기도 했다. 또한 알렉산더는 나일강 삼각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이집트에서의 유화정책으로 그는 파라오와 같은 예우를 받았으며 신격화되었다.
알렉산더는 3년간 다리우스 1세를 추격하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했다. 페르시아 왕의 왕궁이 있던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이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어서 메디아로 진군해 수도인 엑바타나를 점령했다. 기원후 330년 여름,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에서 신하인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왕위를 찬탈 당한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서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페르시아 왕의 원수를 갚은 은인으로 통하게 된다.
알렉산더대왕의 인도침입은 인도사중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인도의 고대문헌 중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침입을 자세히 묘사한 책은 한권도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렉산더의 인도침입에 대한 기록은 그리스 측의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알렉산더 이전까지 인도의 땅이 유럽의 정복자에 의해 정복되어진 일도 없었고 유럽의 여행자가 인도를 방문한 일도 없었다. 알렉산더는 B.C.327년 5월 힌두쿠쉬산맥을 횡단하였다. 그는 현재 파키스탄 중북부의 산간부족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하여 인도아대륙으로 침입하는 전진기지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더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포로가 된 뿌루의 왕을 왕으로서 대접을 했고 그를 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 이후 알렉산더는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지 오래된 병사들은 더 이상 미지의 땅으로 전진하기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알렉산더도 퇴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군의 길을 인더스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B.C.326년 10월 퇴군이 시작되어 약 2,000척의 배가 강으로 그리고 20,000명의 군사가 강의 연안을 걸어서 따라가는 형태를 취했다. 이 행군 중에도 알렉산더는 정복사업을 계속하는 동안 약 90,000명을 학살하였다. 인더스강과 아라비아해가 만나는 장소까지 진군한 알렉산더는 현재의 카라치 지점에서 전군을 재정비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 판도 내에서 일어난 중앙아시아 지역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의 융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의상을 즐겨 입었고, 페르시아의 제도를 대폭 수용했다. 왕을 배알하러 오는 신하들에게 페르시아 왕실의 전제적인 알현의식을 행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 출신 귀족들로부터 ‘페르시아식 전제 군주가 되려고 한다’는 불만을 유발하기도 했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알렉산더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박트리아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부관들과 그리스 병사들에게도 아시아계 여인들을 후실로 맞이하게 했다.
정복지 곳곳에 정치, 군사 도시들을 건설하고 정비한 다음 알렉산더는 인도 원정을 계획했다. 기원전 327년 여름, 알렉산더는 이제 그리스계 군병 외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인도로 떠났다. 그의 군대는 간다라 지방을 평정하고 히말라야 산맥 아래쪽에 사는 산악인들을 정벌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넜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는 히다스페스 강을 건너 인도 왕 포로스와 최후의 큰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알렉산더는 승리를 기념하여 새로이 두 개의 도시를 세웠다. 저항 끝에 항복한 포로스에게 알렉산더는 관용을 베풀어 그의 왕권을 인정해 주었고 그는 알렉산더의 새로운 동맹자가 되었다. 계속해서 진격한 알렉산더는 히파시스 강까지 나아갔다. 오랜 원정으로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회군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324년 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에 돌아온 알렉산더는 민족 융합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자신이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 풍습에 따라 아케메네스 왕조의 공주 두 명과 혼인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측근 수십 명에게도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귀족 여인들과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이민족과 혼인을 한 병사들에게는 후한 지참금을 주었다. 이런 정책에 대해 마케도니아군의 불만이 오피스에서 부각되었으나 알렉산더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오해를 종식시키고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더는 아라비아의 원정을 준비하며 분주하던 중에 고열로 쓰러졌다. 결국 33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알렉산더에게는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들은 왕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8년의 원정으로 통합한 알렉산더 제국은 부하 장수들의 다툼으로 곧 분열되기 시작했다. 속주들은 곧 독립 왕국이 되었고 셀레우코스나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부관들은 앞다투어 왕을 칭하며 제국을 분할 점령했다.
알렉산더의 세계는 결국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3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 중 마케도니아는 카산드로스가의 작은 가부장적 군주국가로 전략하였고,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의 지배하에 페니키아 및 팔레스타인을 장악하여, 상업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자연과학을 발전시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리아·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셀레우코스가는 안티오키아·셀레우키아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경제권을 확보하고 동서문화 융합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