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김낙준 교수님 연구실에서 중국 출장을 갔다가 상해 임시정부 기념관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뜻깊은 분을 사진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그분은 다름아닌 저희 지도교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한광반 지식청년 33인의 일원으로써, 충칭 지역을 중심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셨던 이영길(李永吉)선생님의 사진을 올리며, 더불어 읽어볼만한 글이 있어서 같이 올립니다.

사진 : 가운데 화환을 걸고 계신분이 김구선생님 이며, 그 바로 오른쪽분이 이영길선생님 이십니다.

사진 : 아래에서 두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 분이 이영길선생님 이십니다. 같이 찍힌 사람들은 김낙준교수님 연구실의 김경훈, Prasada 입니다. ^^

사진 : 교수님 가족사진입니다. ^^ 어느분이 교수님인지는 딱 보면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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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만한 글 - (펌) 한국 광복군의 OSS 특공작전
金 祐 銓
머리말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활동한 한국 광복군이(이하 광복군으로 약칭함) 미군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와의 공동작전을 전개한데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한국 광복군은 중국 중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한국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한 의병과 독립군의 전통을 이어받아1940년 9월 17일 창설되었으며 중국 내에서 일본에 대항하여 8.15 종전의 날까지 독립전쟁을 수행한 군대이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국대륙을 침략하여 강탈하려고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연합국을 상대로 싸웠던 것이다. 한국 광복군은 먼저 중일전쟁에서 중국군과 합세하여 용감하게 싸웠고, 뒤에 태평양전쟁에서도 미군 OSS부대와 합작하여 항일전에 공동작전을 폈던 것이다.
Ⅰ. 한국광복군 최전방 부대 제 3지대의 활동
1. 광복군의 편제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3 .1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8일 새벽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자 그 다음날 12월 9일 연합국과 합세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선언하였고, 한국광복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연합군에 합세하여 전쟁할 태세를 갖추었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사천성 충칭에 있었고 그 편제는 총사령부에 이청천(李靑天), 부사령에 감원봉(金元鳳), 참모장에 김홍일(金弘壹), 충칭 제1지대는 채원개(蔡元凱)지대장, 섬서성 서안 제2지대에는 이범석 지대장, 안후이성 푸양(阜陽), 제3지대는 김학규(金學奎)지대장, 제3전구 강서성 상요(上饒)의 광복군 징모 제 3분처 주임위원 김문호, 제 5전구 호북성 노하구의 제 1지대 제1구대장 김준(金俊), 제3전구 절강성 김화(金華)의 제 1지대 제 2구대장 이소민(李蘇民), 제9전구 호남성 장사(長沙)의 제 1지대 제 3구대장 이병곤(李炳坤)이었다. 위와 같이 중국대륙 전역에 걸친 각 전구에 광복군은 진을 치고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2. 광복군 초모 제 6분처의 최전방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로부터 징모 제 6분처(후에 초모 제6분처로 개칭) 주임으로 임명받은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 장군은 일찍이 만주 독립군 출신으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의 간부로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시작하여 양세봉(梁世奉) 장군이 지휘하던 조선혁명군에서 참모장직을 맡고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만주 벌판에서 항일 무장독립운동을 한 역전의 맹장이었다. 1931년 9.18만주사변 후 1933년에 조선혁명당 대표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40년 5월 민족주의정당 3당 합당시에는 주역의 일인으로 활약하였다. 그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 당시는 고급 참모로서 산모역할을 하고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한 때는 참모장 대리로 복무하다가 광복군 초모 제6분처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오광심(吳光心), 신송식(申松植), 신규섭(申奎燮), 지복영(池復榮), 서파(徐波), 김광산(金光山), 오희영(吳姬英) 등 동지를 대동하고 1942년 2월초에 서안을 출발하여 5천리 먼 길을 걸어서 중국 전선 최전방이 안후이성 푸양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맨 먼저 김광산과 서파가 적후방 지하공작에 투신하였으나 그 성과가 여의치 못하여서 계속해서 이평산(李平山), 조편주(趙扁舟) 동지가, 그리고 1943년에는 장조민(張朝民), 안경수(安慶洙), 이동진(李東鎭), 김국주(金國柱), 조병걸(趙炳杰) 동지가 초모공작에 가세하여 오랜 침체 속에서 벗어나서 사기가 진작되고 공작체제가 정비 강화되어 1943년 하반기에는 신송식, 전월성(全月星), 김국주 동지 등이 서주 지역에 대한 거점 확보와 동지 규합 및 초모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적후방 공작의 완벽한 태세와 조직이 강화되었다. 계속해서 1944년 초에는 조동린(趙東麟) 윤창호(尹昌浩) 동지 등의 적후방 공작이 맹활약을 한 결과 공작이 활기를 띠고 확산되어 그 성과가 더욱 커져갔다.
적지에서 또는 고국에서 탈출하여 푸양으로 입대하는 애국청년이 점점 늘어나고 또한 일본군에 강제로 입대하여 중국에 파송된 애국청년 학병들(1944.1.20에 조선인 전문, 대학생 전원 4천 3백여 명을 일제히 일본군에 강제 입대시킨 소위 학도 특별 지원병)이 줄을 이어 일본군을 탈출 광복군으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3.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설립
김학규 장군은 이들을 영접하여 우선 의식주를 해결하고 애국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광복군 군관으로 양성하기 위하여 중국 제 10전구 전방지휘소 탕은백(湯恩伯) 사령관에 교섭하여 푸양에서 약 60㎞ 서북방 임천에 위치한 제 10전구 전방지휘소에 부설된 중앙군관학교 제 10전구 분교에 한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이하 ‘한광반’)을 설치하고 새로 입대하는 한국 애국청년을 전원 입교시켜 교육을 받게 하였다. 교육 과목과 담당 교관은 먼저 김학규 장군이 훈련 주임교관으로 한국사와 독립운동사 및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관한 교육을 담당하였고, 군사훈련은 군관학교 중국인 교관과 항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신송식 교관, 비군사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부문은 조편주, 이평산 두 교관이 담당하였고, 교육 기간은 1944년 5월에 시작하여 10월 하순에 졸업하였다.
의식주의 상황을 살펴보면 의복은 중국군 군복이라서 별문제가 없었으나, 식사는 큰 만두 한 개와 소금국에 야채 한 그릇을 7, 8명이 둘러앉아 함께 먹었기 때문에 식사를 좀 늦게 하는 동지는 먼저 한 그릇에 담겨져 있는 야채를 다 먹고 나서 만두를 먹는 웃기는 풍경도 보여주었고, 육류는 구경도 못하여 항상 배가 고플 정도였기 때문에 어떤 동지는 영양부족을 막기 위해서 밤중에 부락에 나가 개를 잡아 보신탕으로 영양을 보충하다가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제일 곤란한 것은 침실에서 모기, 빈대, 벼룩의 공격으로 잠을 자지 못했던 일이 허다했고, 여러 동지들이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와 같이 학교의 생활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지만 한광반 학생들은 모두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광복군의 장교가 된다는 긍지와 명예를 가슴에 안고 있었으며, 이런 난관을 불타는 애국심과 투철한 독립정신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군관학교 생활 가운데에서도 오락과 취미와 기쁨의 생활도 있긴 있었다. 한광반 농구팀이 있어서 ‘韓國’이라고 가슴에 새긴 유니폼을 입고 중국 학생과 시합을 해서 이길 때는 너무나 기뻐서 조국을 되찾은 기분으로 환호에 휩싸였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광반 동지들은 여가를 이용해서 각자 소질대로 누런 마분지에다 붓으로 쓴 원고를 그대로 묶어서 한권의 책으로 제본된 ‘등불’이라는 잡지도 만들어 돌려보기도 하였다. 필자도 그 잡지에 ‘박명’이라는 제목의 꽁트를 써낸 기억이 난다. 그리고 김준엽(金俊燁) 동지는 희곡을 썼고, 장준하(場俊河) 동지는 기독교에 관한 것을 썼고, 내 머리에 지금도 기억이 새로운 것은 김춘정(金春鼎)동지가 써 낸 ‘한글맞춤법 초’였다. 그 까닭은 필자는 이때부터 한글 맞춤법에 관심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한광반을 졸업한 후에 지대본부인 푸양 산타지(三塔集)에서 대원들에게 한글 맞춤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와 같은 경험에서 얻었던 지식으로 나중에 쿤밍 OSS본부에서 한국 무전 암호표(W-K Korean Code Table A ? B)를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보람있고 재미있었던 일은 한광반 동지들이 ‘광명지로’(光明之路, 일명‘ 탈출기’)라는 연극을 하여 중국인에게 깊은 감명을 준 일이다. 필자는 키가 작은 일본인 병정의 배역을 맡았었다. 한광반에서 제일 기쁘고 신나고 즐거웠던 일은 새로운 동지가 들어와서 환영식을 하는 날이었다. 이날 저녁 식사는 고기국도 나오고 빼주(白酒)도 양껏 마실 수 있었고 안주도 땅콩이 나왔다. 그 식사가 좋아서 뿐만이 아니라 생사를 같이 할 광복 동지를 새로 맞이하여 한광반 전체가 환호가 기쁨과 희망의 열기에 가득찬 독립정신의 용광로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 감싸인 한광반의 값지고 보람찬 훈련과 교육을 마친 후 한광반 일부 동지들은 최후 결전이 박두했으니 최전방에 그대로 남아서 적후방 공작을 하겠다는 동지들과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후방 충칭(重慶)으로 가서 보다 더 화려하고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해 보겠다는 동지들의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되었다.
4. 한광반 지식청년 중견 간부의 충칭 파송
김학규 장군은 한광반 동지들의 뜻을 존중하여 각자 희망에 따라 졸업생 48명중 36명과 노선배와 신입동지 10여명 합계 50명을 충칭으로 파송하고 나머지 12명은 3지대 본부로 동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10월 말에 한광반 졸업기념 사진과 한광반 동지 전,후방 송별 기념사진을 찍고, 충칭으로 파송되는 동지들은 임천 군관학교 기숙사에서 11월 21일 출발하여 도보로 6천리 험한 길을 73일간 걸어서 다음해 1월 31일 충칭에 도착하였다.
김학규 장군은 한광반 졸업생들을 충칭으로 떠나보낸 직후 임천 중국 제 10전구 전방지휘소에 연락장교로 김우전을 남겨놓고 잔류한 동지 11명과 교관 등과 함께 지대본부인 푸양 산타지로 귀대하였던 것이다.
전,후방 동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전방에 남은 동지(12명, 가나다순)
김국주, 윤창호, 이동진, 조동린(이상 일반 출신)
김규열, 김용민, 김우전, 변영근, 윤영무, 전이호, 차약도, 한성수(일명 이상일)(이상 학병 출신)
▶ 충칭으로 파송된 동지(36명)
김성근, 김성환, 김영록, 김영호, 김유길, 김준엽, 김춘정, 노능서, 박승 헌, 박영록, 백정갑, 석근영, 서상열, 승영호, 신현창, 안광언, 윤경빈,윤 재현, 이계현, 이문화, 이영길, 장준하, 정 명, 홍기화, 홍석훈(이상 학 병출신)
고성부, 김상걸, 김정하, 김중섭, 김중호, 배경진, 선우진, 송병철, 오명덕, 이성봉, 최기옥(이상 일반 출신)
1944년 11월 21일 김학규 장군은 충칭으로 떠나는 인솔 단장과 파송대원 전원을 앞에 세워놓고 다음과 같이 송별사를 하였다.
“여러 동지들은 앞으로 수륙만리 험로를 헤치며 충칭까지 걸어가야 하오. 굶주림과 추위 등 많은 위험이 닥칠 것이나 항상 태산 같은 마음을 가지시오. 우리들 곁에는 선열들의 혼이 항상 따라 다니며 부축해 준다는 것을 잊지마시오. 사실 나는 오늘날까지 선열들의 혼이 내가 사명을 완수하도록 바로 내 옆에서 재촉하고 있다는 소명감으로 용기를 내었소. 여러분 곁에도 선열들이 꼭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민족의 독립은 여러분이 옮겨 놓는 한 발자국마다 그 만큼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육천리 장도를 격려해 주고 잔류하는 한광반 동지를 인솔하여 오광심 여사, 장조민 동지와 함께 푸양 산타지 지대본부로 내려갔다.
이때 잊혀지지 않고 기억이 생생한 것은 충칭으로 떠나는 50여명에 가까운 대열이 서쪽으로 뻗쳐 길게 장사진을 이루어 천천히 임천을 벗어나고 있을 때 잔류 동지들은 그 동안의 정을 잊지 못하고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 안타까워 100m, 300m 또는 500m 길게는 1~2km 전송하고 돌아오는 동지들도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맨 마지막까지 전송을 하면서 길가에서 무를 한 개 사서 나눠 먹으면서 일본군에서 탈출한 후 유격대에서 임천까지 함께 200km를 걸어서 한광반에 입교했던 박승헌 동지 내외(현재는 두 동지 모두 작고)와 정담을 그치지 못하고 약 3km 지점까지 가서야 헤어졌던 당시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5. 제 3지대 편성을 위한 지대본부 편제강화
김학규 장군은 한광반 정예 청년동지 대부분의 알찬 병력을 충칭으로 파송한다는 것이 제 6초모 분처로서는 확보된 병력에 큰 손실이며 제 3지대 편성에도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민주적 통솔방법을 택한다는 의도와 독립운동 총 본부인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에 조국광복의 혁명 역량을 보강하고 한국청년의 반일사상과 독립정신을 중국의 국내 뿐 만아니라 국제적으로 선양한다는 보다 더 큰 뜻을 감안하여 어려운 결심을 내렸던 것이라고 사료된다.
김학규 장군은 푸양 산타지 지대본부에 도착하자 곧 바로 전열을 가다듬고, 각 대원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적후방 공작을 개시하였다. 김국주, 조동린, 윤창호 세 동지가 맡았던 적후방 공작반 거점 확보와 동지 규합 초모공작에 한성수, 윤영무, 김규열, 김광언, 네 동지를 보강하여 적후방 지하공작을 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다수의 신참동지들이 계속 입대하였다. 그 중 한성수(韓聖洙 )동지는 12월 말에 김영진(金永鎭), 홍순명(洪淳明) 두 동지를 대동하고 상해(上海)에서 지하조직을 구축하며 군자금 조달 공작을 맹렬히 전개하던 중, 1945년 3월 13일 왜경에 체포되어 일본군법 재판을 받고 두달 후인 5월 13일 남경형무소에서 25세의 청춘을 조국의 광복 제단에 바치고 순국하였다.
그 밖의 잔류 동지들 중 김용민(金容旻)은 지대본부에서 한국 역사와 독립운동사 등의 교육을 담당했고, 변영근(邊榮根)은 정훈교육과 정보 분석을 담당했으며, 이동진(李東鎭)은 내무에 관한 일을 담당했고, 전이호(全履鎬)와 차약도(車若島)는 광복군 제식교련과 유격훈련 교육을 맡아 지대편제의 기틀을 구축해 나가면서 정열을 기울여 각자의 소임을 충실히 다하였기 때문에 성과가 지대하였고, 신입대원도 날로 증가되어 지대본부는 독립운동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한편 중국 제 10전구 전방지휘소의 한국광복군 연락장교에 임명되어 임천에 남아있던 김우전(金祐銓)은 적후방 공작을 하면서 동지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외에도, 중간 지점에서 연락하는 일과 제 10전구 전방 지휘소와 광복군 제 3지대 본부와의 연락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새로 독립운동에 참가하려는 자와 또는 타의(중앙군에 잡혀서 온)에 의하여 그곳에 온 한국인에 대한 신병을 인수하여 지대본부에 인도하는 일, 중국군내에서 일본 문서 번역과 일본어 통역 임무, 광복군의 주부식을 중국군에게 수령하여 지대본부에 가져다주는 일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 매달 한번은 푸양 산타지 지대본부에 내려가 주부식 인환증을 전달하는 기회에 날로 늘어나는 대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김우전은 임천에서 산타지까지 180리 먼 길을 하루에 걸어 다녔다.
Ⅱ.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군사 합작 경위
1. 임시정부의 한미 군사합작 정책 수립
첫째, 1943년 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기구로 미국에 있던 구미위원부에서 장기영, 장석윤, 조종익, 피터 김 들을 워싱턴 미 국방성 전략지원사령부(OSS)에 추천하여 정보 통신 등 특수훈련을 받게 한 것이 한미합작 OSS 특수훈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목표는 극동전선이고 미안마보다 한국 본토에 가까운 중국 전선이었지만, 장개석이 미군 육전대의 중국 본토 내 진주를 원치 않을 뿐 만 아니라 반대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전선에 들어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둘째, 1943년 10월 19일 제 35차 임시의정원에서 이청천, 김원봉, 이복원 세 의원이 제안하여 통과된 ‘군사정책에 관한 건의안’이다. 그 건의안 8개항 가운데 한미군사합작 계획에 관한 조항을 살펴보면, 제 4항 중,영,미,소 등 동맹국에 군사대표를 파견하여 군비 및 군화의 조차 등을 주제로 교섭할 것, 제 5항 재미 대표단을 확대 조직하되 각파의 유력한 활동인물을 망라하여 통일적 외교를 전개하고 군자금 및 군화의 조차와 각종 군사특별기술 등의 교섭에 전력하게 할 것이라고 한 대미국 군사합작 계획이 있었다.
셋째, 1945년 봄 충칭 한국광복군 사령부에서 미군과 군사합작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한국 본토에 진격하기 위하여 한국 광복군이 항공대를 창설하고 한,미군이 공동작전을 수행하여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박멸하고 국권을 회복 할 수 있는 한미 공동작전 계획안을 수립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2. 광복군과 OSS의 군사합작 계기
앞에 제 1절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 총 사령부에서는 연합국 특히 미국과의 군사합작 계획을 수립하고 여러 가지 방략으로 추진하였으나 ‘한국 광복군 9개항 활동 준승’으로 인한 중국군의 협력이 충분치 못한데가 미군의 육전대가 중국전선에서 그 활동이 또한 시원치 못하여 1944년 말에 이르기까지는 한미군사합작이 구체화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1944년 10월 18일 스틸웰 장군이 해임될 때까지는 중국 내륙 안에서의 OSS 부대활동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며, 1945년에 들어서서도 다만 미공군의 통신정보원인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극소수의 미국인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정보 수집활동을 하였을 뿐이다.
이런 때에 한국광복군 제 3지대 연락장교 김우전이 중국 제 10전구 전방휘소에 파견되어 있던 임천에서 동남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세완(謝灣)이라는 곳에 미군 OSS 통신내 버치(John M. Birch)대위가 중국부대에 주둔하여 공군통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1945년 정월 어느날 겨울날 치고는 날씨가 유달리 화창한 오후 김우전 대위는 군무에 피곤한 몸을 풀기 위하여 남쪽 교외 길로 산책을 나갔다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 길에서 말을 타고 오는 카빈총을 둘러맨 백인의 파란 눈과 마주치게 되었고 이 낯선 황인종의 한국 광복군과 백인종인 미국 OSS 장교 버치 대위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찰나에 미소를 띠며 목례를 하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중국의 최전방 장소에서 약속도 없고 예기치 못했던 하늘의 뜻이라고나 할까, 이작은 만남의 대화가 훗날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역사적 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두 사람은 중국말과 영어와 글씨를 써가면서 서로 통성명하고, 거주하고 있는 곳을 말하고 헤어졌다. 초면이지만 일본을 적으로 하는 같은 전우라는 인식이 서로 느껴졌고 다같이 자기 임무에 유익한 사람이라는 공통된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그날부터 친해졌고 계속하여 몇 번 만났다. 이 두 사람이 일본군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데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고 임천에서 한광반 군사교육을 받은 많은 장교가 적진에 들어가 정보 수집과 게릴라 작전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지대본부의 위치와 김학규 지대장이 위대한 독립군 장군임을 알려주었다, 물론 영어와 중국말이 미숙하여 손짓 몸짓으로 자기의 뜻을 표현하였고 버치는 한국말을 하나도 몰랐지만 중국말은 아주 유창하게 잘 하였다.버치 대위는 태평양전쟁의 상황을 말하면서 “미군이 필리핀 상륙작전을 수월하게 성공한 것은 필리핀 현지 독립군의 정보제공과 작전 협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미얀마 전선에서도 지금 미얀마 북부 부족인 카친족들이 첩보작전과 게릴라 특공작전 등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우전은 이 말을 듣자마자 “연합군이 언젠가는 우리나라 한반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때를 대비하여 우리 광복군에게 첩보활동을 할 수 있는 무전기술을 가르쳐 줄 수 없는가?” 라고 제의하였다. 버치 대위는 미군 OSS 부대의 일원으로 중국 전선 최전방에서 무선통신 첩보 공작을 하면서 중국군에 주둔하고 있는 비밀 독립통신 부대장이었기 때문에 즉각 이를 환영하고 “무전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광복군이 몇 명이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능력이 있고 심신이 건정한 군인이 많지만 우선 4, 5명을 교육시켜 줄 수 있겠는가?”라는 김우전의 제안에 버치 대위는 쾌히 응락하였다. 김우전은 예기치 못한 큰 소득을 얻어 당일로 180리를 달려가서 김학규 지대장에게 그 동안의 경위를 상세히 보고 하면서 OSS무전훈련에 대한 건의를 하였던 것이다.
3. 광복군 제 3지대 OSS 무전훈련의 초기 계획
김학규 장군은 김우전 대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 바로 간부들과 협의하여 OSS무전 훈련을 받을 대원을 선발할 기준을 정하였다.
첫째, 항일투쟁정신이 투철하고 게릴라 작전에 필수적인 건장한 체력과 인내력이 강인한 동지
둘째,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영어를 조금이라도 해득할 수 잇는 동지(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
이렇게 간단히 2개 항의 선발기준을 세우고 한광반 이후에 입대한 당시 산타지 지대본부에 있던 김광언, 박상기, 송병하, 이정수, 문수열, 김영일, 김문택, 김은석, 김진동, 김경윤, 선우석, 김군남, 백운용, 김지옥, 이신성 동지 중에서 김학규 지대장은 무전훈련 반장으로 김우전 대위를 임명하고 박상기(朴相基), 문수열(文洙烈) 김경윤(金景潤), 선우석(鮮于碩)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살신성인의 독립정신을 발휘하여 한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친다는 각오와 맹세를 하고 OSS 무전 특공대에 지원한다는 본인의 굳은 의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최종 결정을 보았다.
그리하여 1945년 2월 13일 김학규 지대장이 직접 인솔하고 산타지 지대본부를 출발하여 임천 세완(謝灣)으로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희망찬 행군의 발길을 옮겼다. 만주 독립군 시절부터 단련된 김학규 지대장의 행군은 그 강도가 대단하였다. 네 동지는 힘이 겨운 듯 했으며 일행 중 선우석은 도중에 주저앉아 새끼끈으로 허리를 동여매서 끌고 가기도 하였다. 그때 김학규 지대장이 “우리들의 한 발자국이 늦어지면 우리 조국의 독립도 그만큼 늦어진다.” 라고 하면서 선우석을 격려하는 한편, 식사를 할때에는 김 장군이 즐겨하던 열량 중 빼주(두양중 백주, 소주잔 석잔 분량)를 OSS 훈련반 일행에게 권하면서 격려하기도 하였다.
임천 제 10전구 전방 지휘소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2월 15일 아침 지대장의 간곡한 격려의 말을 듣고 김우전, 박상기, 문수열, 김경윤, 선우석은 혼신을 다하여 무전교육을 받고 하루 속히 적진에 들어가 연합군의 작전에 큰 역할을 하여 조국의 광복을 앞당기는데 온몸을 바친다는 선서를 하고 결사보국의 신념을 품고 광복군가, 용진가를 우렁차게 합창하면서 임천 강뚝을 걸어 버치 대위가 주둔하고 있는 세완 중국군 무전통신대에 도착하였다. 미군 OSS 버치 대위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을 잘 해주었지만 중국군의 책임자 왕주임이 없다는 이유로 일단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무전 훈련을 받으러 간 광복군 일행은 모두 불쾌한 마음으로 임천 숙소로 다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김학규 지대장은 버치 대위의 전갈을 받고 훈련반 일행에게 다시 세완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려 훈련반원들은 다시 기쁨과 희망을 안고 세완 통신부대로 달려가 하루 종일 대기하였으나 왕주임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행은 되돌아가지 않고 그 부대 부관실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밤잠을 이루었다.
훈련반 동지들은 각자 훈련이 끝나면 “잠수함으로 제일 상륙하기가 쉬운 한반도 서해안으로 상륙하겠다”고 역설하는 동지, “내 고향이 전라남도이니까 목포로 잠입하여 활동하겠다”는 동지, 또 “경상도이니까 부산으로 잠입하겠다”는 동지를 나름대로 외치면서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OSS무전 훈련반 동지의 고향을 살펴보면 한반도 서부와 남부해안을 접한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김우전은 평북 정주, 박상기는 전남 광주, 문수열은 경남 진주, 김경윤은 평북 의주, 선우석은 평남 진남포가 고향이었다.
다음날 2월 17일 아침 중국군 책임자 왕주임과 미군 OSS 통신대 버치 대위는 유감스럽지만 광복군 일행에게 무전훈련을 실시 할 수 없다는 것과 광복군 일행이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복군 일행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적인 비보로써 실망과 허탈을 안겨주고 한국광복군과 미군 OSS와의 항일 공동작전의 제 1차격인 무전훈련계획은 좌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요인은 미군 버치 대위의 중국전선 내에서의 활동 한계성과 한국 광복군에 대한 이른바 ‘한국 광복군 9개항 행동 준승’에 기인한 결과였다.
4. 김학규 장군의 대규모 한미 공동작전 계획과 일만리 장정
김학규 장군은 이와같은 상황을 예리하게 통찰 판단하여 ‘광복군과 OSS의 무전 훈련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버치 대위와 숙의한 끝에 보다 대규모의 한미군사합작을 목표한 새로운 방략을 세웠다. 김 장군은 중국의 전시 수도인 사천성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이청천 총사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통하여 중국 군사위원회와 국민당 장개석 총통의 승인을 받도록 건의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버치 대위도 장개석 총통의 총애와 신임이 두터웠던 쿤밍의 미군 제 14항공대 사령관 센놀트 준장에게 건의하여 중국의 승인을 얻어내도록 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곧바로 실천에 옮기도록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다음날 2월 18일 김학규 장군은 지대본부에 들르지도 못하고 제 1차 OSS무전 훈련반원인 박상기, 문수열, 김경윤, 선우석 네 동지를 위로해 귀대시키고 그 편에 쿤밍으로 떠났다는 것을 전갈하고 지대본부에 있던 이동진(李東鎭)을 연락장교로 임명하여 놓고 김우전을 부관으로 대동하고 버치대위와 함께 쿤밍을 향하여 임천을 떠났다. 김장군의 여장은 그야말로 간단하였고, 김우전 부관은 제 10전구 전방지휘소 광복군 연락장교로 복무하면서 써왔던 일기책과 한글맞춤법을 연구하던 조선문학전집과 여러 작가들의 통일하지 못한 어미처리들을 낱낱이 먹물 붓으로 옮겨 적어가면서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던 기록문서, 대원에게 가르칠 강의 노트 등 도보 여행에 무거운 짐들은 모두 남겨놓고 일기를 쓸 작은 수첩한권, 일본에서 학생시대부터 쓰던 작은 수첩 한권, 일군에 입대하기 전에 평양에서 민족운동 동지 남창령과 찍은 사진, 서주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친구집에서 받은 연민의 편지 세통, 김 장군과 함께 쓸 이불 보따리만을 휴대하고 떠났다. 한편 버치 대위의 짐은 대단하였다. 무전통신 발,수진기와 밧데리 등 기타물건이 많아서 중국인 지게꾼이 세명이나 뒤따랐다.
첫날에는 남쪽으로 막막한 평원에 파헤친 60리 길을 걸어서 로지(老集)라는 곳에 여장을 풀고 첫 밤을 쉬었다. 임천을 떠나던 첫날은 갑작스러운 출발에다가 남겨둔 무전훈련반 네 동지와의 작별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밤이었다. 다음날 2월 19일은 어제와는 달리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무한한 중국대륙의 평야를 마음의 여유를 갖고 80리나 걸어서 리지(李集)의 정씨 댁에 머물렀다. 버치 대위가 무전 수신기로 뉴스보도와 음악도 들으면서 문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미국 군인의 전쟁생활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2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일기가 좋지 못하여 60리를 걸어서 하용강(河龍江)에 투숙하였다. 아침 리지를 떠날 때 정씨 댁 딸(丁嘉桑)이 후방으로 간다고 일행에 합류하였다.
임천을 떠나 4일째인 2월 21일은 30리를 걸어서 고시(固始)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현정부가 자리잡고 있는 최전방 전선에서 후방이라고 볼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큰 거리였고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둘러있는 중국식 성곽 도시의 표본이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버치 대위는 재빨리 무전기를 조작하여 긴 시간 동안 쿤밍 OSS 본부에 무전통신을 보냈는데, 그 주된 내용은 한국광복군과 제휴하여 무전훈련을 실시하여 한국인을 통한 첩보작전을 전개할 계획과 이를 수행하는 데에는 제14항공대 센놀트 장군의 협력이 필요함을 전달해주기 바란다는 요지이었다. OSS 본부와의 교신이 끝난 후 이곳 고시현장의 마찬 초대가 있어서 일행이 환대를 받았으나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22일은 날씨가 더워서 땀을 흘리면서 90리 길을 주파하여 예지(葉集)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미국인 M(MaCaulay)씨를 만났는데 이 사람도 미국 정보원으로 추측된다.
다음날 상황은 김우전의 일기를 그대로 적어본다.
2.23 청후 우
오늘은 산길이다. 더구나 산기슭을 더듬어 올라가는 길이 되어서 힘이 들었으나 마음은 상쾌하였다. 나는 노래도 부르며 소리도 외쳐보면서 발을 옮기었다. 이런 길을 걸어본지도 인제는 옛날 같이 생각되었다. 산악지대에서 투숙하게 되었다. 미국인 두 사람과 중국인 미스 정과 동반하여 산꼭대기에 올라가 쌍안경으로 내려다보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분을 맛본 적도 몇 해만에 처음이다. 버치 씨와 농담도 나누며 숙소로 돌아왔다. 잠을 이루기 전에 독방에서 조용한 시간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다. 오늘은 55리 걸어서 양탕(陽湯)에서…….
다음날 24일에는 봄비가 끊임없이 내려 비를 맞아가면서 유명한 중국서화에서 본 것과 같은 아름다운 산풍경이 계속되는 산악지대를 55리 걸어서 저녁 늦게 리황(立煌)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중국 제10전구 사령부와 사령관 이품선(李品仙) 대장이 있는 곳이고, 아주 큰 도시이며 전등시설이 되어 있고, 현대식 건물도 많았으며, 길도 넓고 자동차도 보이는 아름답고 따듯한 산속의 전원도시였다. 거리에 통행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옷차림을 잘한 신사 숙녀가 많이 보였다. 일행은 제10전구 장관부 초대처에 머물며 국빈의 환대를 받으면서 이틀 동안 푹 쉬며 산책도 하고 군복도 맞추고, 짧은 시간이나마 오래간만에 맛보는 한적한 시간을 가졌다.
이때 김 장군은 우리가 먼저 미군 제14항공대가 있는 쿤밍으로 가서, 장개석 총통의 신임을 받고 있는 센놀트 사령관을 만나서 한미군사합작을 제의하고 항일 공동작전을 전개하는데 소요되는 광복군의 무전훈련과 무기 및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하기로 버치 대위와 합의를 보았다. 또 김 장군은 센놀트 사령관과 통신이 되었으니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비행장이 있는데,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쿤밍으로 가서 센놀트 장군과 협의를 끝내면 곧바로 충칭으로 다시 가서 광복군 총사령부 이청천 총사령과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보고하고 중국정부로부터 한미군사합작을 승인받도록 한다는 요지의 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 계획이 꼭 성취될 것이라고 믿은 것은 센놀트 장군이 1934년부터 중국 공군의 고문으로 일하다가 1941년 12월 8일 미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의 추천으로 센놀트 장군은 미군 제14항공대의 사령관에 임명되고 중국군을 지원하는데 큰 공을 세워서 ‘날으는 호랑이 장군(Gen, Flying Tiger Chennalt)'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센놀트의 요청을 장개석이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과 또 김구 주석이 장 총통에게 간청하면 더욱 확실해질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 예측은 나중에 적중하여 두 달 후 입황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 OSS 무전훈련반 22명이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2월 26일 김학규 장군과 버치 대위, 김우전은 제10전구 장관부 초대처에서 배려해 준 말을 타고 리황에서 90리 서쪽 지점 비행장이 있는 우자덴(吳家店)에 도착하였으나, 시발점에서 꼬박 9일이 걸린 셈이다. 말을 타고 산골짜기 험한 길을 헤쳐와서 무척 피로했으나 약 2km 떨어진 비행장 활주로까지 갔다 왔다. 활주로 공사가 아직 덜 되어 약 일주일간은 작업을 더 해야 완성된다는 이야기였다. 26일 우자덴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탄 날이 3월 9일이었는데 매일 말을 타고 비행장 활주로에 가 보았으나 간이 비행장이라서 포장도 안된 활주로를 인력으로 닦아 놓았을 뿐이니 미처 땅이 굳지 못하여 9일간이나 더 기다리게 되었다.
활주로 보강공사로 9일간을 대기하던 일들을 김우전 일기에서 간추려 보면 3?1절을 여로에서 보내면서 야릇한 향수에 빠졌고, 미국에서 보내는 3?1절의 축사와 한국 노래방송을 3월 2일에 (일차 관계로) 듣고서 얼마나 기쁘고 고맙고 감격적이었는지 형언할 수 없었던 일, 비행장 공사를 담당한 중국군 공병대 대장인 조선사람 김지(金池) 씨를 만나 무척 반가웠던 일, 강물에 세탁을 하다가 강물이 너무나 차가워 열 손가락이 동상에 걸릴 뻔 한 일, 리황에서 주문했던 군복이 도착하여 기뻤던 일, 비행기를 타기 이틀 전날 밤 장개석 총통의 조카딸과 그 부군인 위(韋)민정청장이 향공소에서 베푼 만찬회에 참석하여 불에 데우던 술이 폭발하여 화재가 일어나 일대 소동이 났던 일, 다음날 다시 초청을 받아 술을 맘껏 들고 출발 전야제를 지냈던 일 등이 적혀 있다.
3월 9일 드디어 비행기가 오는 날이 왔다. 아침 8시 30분까지 비행장에 도착하라는 버치 대위의 안내로 김학규 장군과 김우전은 짐을 꾸려 들고 천천히 걸으면서 9일간의 지루했던 조바심을 훨훨 털어 버리고 기쁨에 가득찬 발길로 우자덴의 처녀 비행장으로 나갔다. 아침 날씨는 그리 좋지 못한데다가 바람이 몹시 불었지만 비행장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 있었고, 비행기를 타고 후방으로 갈 중국 요인들도 꽤 많았다. 버치 대위는 먼저 비행장에 도착하여 무전기를 작동하여 무전교신을 하면서 분주히 지상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너무나 진지하고 엄격하여 무어라 말을 건낼 수가 없었다. 9시가 조금 넘어서 동남쪽 상공에 수송기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연달아서 전투기 세 대가 요란한 쇳소리를 울리면서 옆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수송기는 천천히 비행장 상공을 한바퀴 돌고 보기 좋게 착륙하였다.
그러나 김 지대장 일행은 그 비행기에 타지 못하고 오수 3시 반에 온 비행기(‘The Great Snake Fleet 316173'이라고 동체에 크게 써 있었다)에 탑승하였다. “우자덴이여 안녕! 그간 고마웠다.” 앞날의 한미 군사합작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일행은 이륙하였다. 비행기가 높이 떠서 경한선(北京-漢口) 철도를 넘을 때까지 전투기가 엄호하였고 경한선을 무사히 넘어서니까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신호를 하고는 가 버렸다. 저녁 6시에 로허커우(호북성 북부 老河口)비행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혹시 일본군 전투기와 부딪히지나 않나 하고 걱정이 되어 긴장한 얼굴로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인데,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여 천천히 굴러가고 있을 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환호의 박수를 쳤다.
노하구는 광복군 제1지대 김창만(金昌滿) 구대장이 주둔하고 있던 곳인데, 지난 11월에 임천에서 충칭으로 파송된 한광반 동지 가운데 안광언, 김영록 두 동지가 신병을 이유로 이곳에 남아 있었다. 오래간만에 한광반 동지를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뻤다.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 편이 마땅치 않아서 3일간을 더 기다려 3월 12일(월요일) 아침 로허커우 비행장에 나갔는데, 오후 한시에야 겨우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륙할 때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비행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니 태양빛이 환하게 비치고 흰 솜과 같은 구름이 비행기 아래에 쫙 깔려 있어서 무척 아름다웠다.
한시간 반쯤 걸려 제2지대가 있는 섬서성 시안(西安) 비행장에 내려서 급유도 하고 식사도 한 뒤 다시 이륙하였다. 기내의 구조가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사람이 탈 수 있는 좌석이 양옆으로 한 줄만 있어 마치 군대 트럭 적재함에 설치된 의자와 같이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소음이 굉장한 데다 해가 지자 기내가 점점 추워져 몸이 굳어지고 몹시 괴로웠다.
밤 9시가 지나 잠시 어떤 비행장에 머물렀다가 다시 떠나 쿤밍 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반경이었다. 버치 대위의 안내를 받고 미군 제17초대소로 가서 김우전의 서투른 통역으로 간신히 새벽 2시경에야 잠자리를 얻어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김학규 장군 일행이 2월 18일 임천을 출발하여 3월 12일에 쿤밍에 무사히 도착을 했으니, 23일간의 한미군사합작 계획의 만여 리 장정은 일단 성공을 한 셈이었다.
5. 쿤밍 OSS 본부에서의 한미 군사합작회담 경위와 합의사항
김학규 장군은 3월 13일 화요일 아침 9시에 버치 대위의 안내를 받아 미군 제14항공대 사령관 집무실을 방문하여 즉석에서 센놀트 공군 준장과 한미 군사합작과 OSS 무전훈련에 관한 회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인사 소개가 있었고 악수를 나눈 뒤 버치 대위가 높은 목소리로 그 동안의 경위 보고와 미리 김 장군과 협의된 계획을 간략하게 브리핑하였다. 광복군의 대규모 무전훈련을 실시하여 첩보작전과 게릴라작전에 투입하여 항일 공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것과 이에 필요한 교통, 통신시설과 무력장비를 미군이 지원한다는 설명에 센놀트 장군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고 설명하는 구절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그리고 김 장군에게 긴 여행의 노고를 치하하고 다시 버치 대위의 브리핑에 반문도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김 장군은 중국말로 답변과 설명을 하고 버치는 통역을 하였는데 센놀트 장군은 중국말도 잘하는 것 같았다.센놀트 장군은 아주 훌륭한 계획이나 한국인과 미국인의 협력이 잘 되어 큰 전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OSS 본부의 스미스 중령(施先知 Willfred james Smith)을 만나라고 버치 대위에게 지시하였다. 약 한 시간 동안의 면담이었지만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느낌이었고 회담 중에 애견을 계속 쓰다듬는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건장한 체구에 절도와 권위를 갖춰 별명 그대로 ‘날으는 호랑이’에 부합되는 백전백승의 맹장다운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버치 대위는 말할 때마다 큰 소리로 말했는데, 그 이유는 센놀트 장군이 전투기를 많이 탄 관계로 귀가 어둡기 때문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신 장군과 같이 귀가 상했던 것이다. 이 회담을 원만하게 끝내고 곧바로 OSS 본부로 가서 제일 먼저 소개받은 스미스 중령을 만나 다시 버치 대위가 상세하게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건의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김학규 장군도 이에 부연하였는데, 스미스 중령도 유창한 중국말로 오랫동안 회담이 진행되어 모든 제안이 거의 합의되었다. 이 회의에 배석하였던 김우전 대위는 이곳 OSS 본부에 한국관계부서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는가? 라고 문의한 바,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듣고 매우 서운해 하였다.
스미스 중령과 숙소로 와서 여장을 풀고 오래간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진수성찬의 환대를 받았다. 이 숙소는 큰 부호의 저책으로 보였는데 영관급 단독숙사로 스미스 중령이 거처하는 집이었다. 충칭으로 떠날 때까지 줄곧 이곳에 머물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첫날 저녁 만찬 석상에서 메리트라는 미국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 사람도 중국말이 유창하여 명함을 보니 ‘기술대표 미리특(技術代表 美利特, 뒷면에는 Laurence N. Merritt)'이라고 적혀 있었다. OSS 요원으로 기술 분야를 책임진 영관급 대우의 전형적인 신사였다.
이와 같이 첫날의 회담은 매우 원만하고 기대 이상의 성공이어서 김학규 장군은 긴 여로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 비로소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 다음날 3월 14일 날씨는 맑고 쿤밍의 기후가 완연한 봄 날씨라서 상쾌한 아침의 공기를 헤치며 스미스 중령과 함께 차를 타고 OSS 본부로 나가 각 분야의 영관급 책임자와 개별회담을 하루 종일 가졌다.회담내용은 대개 일본군 점령지역의 군사시설 및 병력과 일본군의 사기에 대한 상황설명과 무전훈련 계획과 첩보작전, 심리작전 및 적후방 게릴라작전과 한반도 상륙작전에 대한 한국광복군과 OSS와의 공동작전에 관한 전반적인 협의사항이었다. 이날 스미스 중령의 안내와 통역으로 면담한 OSS 각 부서의 책임자를 살펴보면, 메리트(Laurence N. Merritt, 美利特) 기술담당 책임자, 헤픈나 대령(Chief of CT Colonel Richard P. Heppner) 통신책임자, 두린 박사(MO. Chief Dr. Roland E. Dulin) 정신작전 책임자, 팩숀 대령(Maj. Harold C. Faxon) 정보책임자, 호워드 박사(Dr. Arthur Howard), 카라한 소령(Maj. Callahan)등이었다.
회담 결과는 모든 계획과 건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더욱이 무전기술 훈련에 대한 계획을 극구 찬성하면서 “원더풀!”을 되풀이하였다. 군수물자와 장비 등 모든 지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에 김 장군과 버치 대위는 회담결과에 쾌재를 부르고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제3일째인 3월 15일에는 전날의 회담 결과를 토대로 스미스 중령과 메리트 기술대표 사이에 최종적으로 합의되어 한국광복군과 미군 OSS와의 군사합작에 관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한미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한미양군은 상호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2) 한국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기술과 기타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의 공습과 한반도 상륙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
(3)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광복군에게 공급한다.
(4) 미군은 한국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 편의를 제공한다.
(5)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6) 합의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이상과 같이 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앞에 열거한 인사 전원이참석하여 회의의 성과를 자축하는 한편, 내일 그곳을 떠나 충칭으로 가는 김학규 장군을 환송하는 뜻에서 성대한 만찬회를 베풀었는데, 이 연회에는 중국 안후이성군관구 부사령관 진감(陳敢) 중장도 참석하였다. 이상 열거한 한미 군사합작의 경위를 다시 한번 간추려 보면, 1945년 정월 광복군 김우전 대위와 미군 OSS 버치 대위의 면남에서부터 추진된 2월 15일부터 3일간의 제1차 OSS 무전훈련 계획이 좌절된 후, 김학규 장군은 2월 18일부터 3월 12일까지 23일간의 1만여 리의 대장정을 거쳐서 쿤밍 OSS 본부에서 3일간 회담하였다. 그 결과 전기 6개항의 합작 원칙에 합의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Ⅲ. 重慶 上部에 대한 建議와 그 結實
1. 광복군 총사령부 및 임시정부의 재가와 중국 당국의 승인
김학규 장군은 쿤밍을 방문할 때와는 달리 일반 미공군 수송기를 타지 않고 센놀트 장군의 전용기를 탈 수 있는 국빈 예우를 받으면서 김우전 부관을 대동하고 3월 16일 오후 2시에 쿤밍을 떠나 저녁 5시경 충칭 비행장에 내렸다. 김장군은 1942년초에 충칭을 떠나 만 3년 만에 돌아왔으니 그 감개야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중국 전선 최전방에서 초창기의 험란한 상황 속의 실패로 인한 악전고투, 초모공작의 성과가 점증할 때의 환희, 한광반의 개교와 졸업과 충칭 파송, 한미 군사합작 교섭과 회담의 성공 등을 생각하면서 개선장군의 환희와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임시정부의 문을 들어섰던 것이다.
다음날 김학규 장군은 광복군 총사령부에 들러 이청천 총사령에게 광복군 초모 제6분처의 그간 3년간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한광반의 교육 실시 과정과 졸업 후 충칭 파송과 전방 잔류를 구분하여 임무를 부여한데 대한 상황 보고와 한미 군사합작의 교섭경위와 합의 사항을 보고하고 이에 대한 총사령부의 재가와 중국 당국에 대한 협의와 승인을 요청하고, 끝으로 제3지대 편제에 대한 재가를 상신하였다. 또 한편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도 똑같은 보고와 재가 및 협조요청을 상세히 상신하였다. 이와 같은 김장군의 보고와 재가요청 건의에 대하여 전방으로 출발하는 4월 11일까지 충칭 체류 26일 동안 광복군 총사령부와 임시정부의 재가와 중국당국의 한미 군사합작에 대한 승인 절차를 모두 끝냈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뿐만 아니라 충칭의 독립운동자가 총망라하여 만 3년 만에 많은 성과와 공적을 쌓고 돌아온 김학규 동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개선장군에 대한 예우를 베풀어 주었다. 줄곧 김학규 장군을 수행하였던 김우전 부관의 일기에서 그 실증을 찾아보면, 3월 22일 임시정부의 공식환영회에서 신익희 내무부장은 “김학규 장군이 최전방에서 3년간 천신만고 속에 악전고투한 것에 대해 임시정부와 충칭에 있는 후방동지 전체를 대표하여 깊은 위로의 말을 드리고, 전선에서 광복군 초모공작을 불요불굴의 투지로써 맹렬히 전개한데 대하여 진심으로 찬사와 경의를 다 함께 박수로 표합시다.”라고 진지하고도 열렬하게 긴 환영사를 하였다. 실로 “한광반 동지 50여 명의 많은 동지들을 충칭으로 파송해 준 업적과 쿤밍에서의 한미 군사합작을 성취시킨 위대한 공적에 대하여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라는 말처럼 개선장군의 영접행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환영회에 이어서 별도로 광복군 총사령부의 보다 성대한 환영회가 있었고, 개별적으로 이청천 총사령댁, 조소앙 외무부장댁, 조성환 국무위원댁, 최동오 법무부장댁, 엄항섭 선전부장댁 등에서 연일 환영연이 계속되었다.
2. OSS 버치 대위와 윔스 대위 重慶 來訪
전장 제5절에 기술한 한미 군사합작에 대한 합의사항 제6항에 따라서 광복군 측 김 장군은 상부의 재가를 필하였고, 미군 OSS측 버치 대위도 이와 같은 절차를 끝내고, 3월 26일 인도로부터 쿤밍 OSS에 전속되어 온 윔스대위(한국말에 능통한 미국 공군 장교, 나중에 OSS Korean Desk 책임자)와 합류하여 4일 후인 3월 30일 충칭 임시정부로 김 장군을 찾아왔다. 김학규 장군과 버치 대위는 3월 15일의 합의사항 제6항에 관한 각기 상부의 재가를 확인하고 중국 당국에 대한 승인요청에 대한 양측의 진행상황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3월 31일 김학규 장군은 윔스 대위를 만나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곧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이 김우전 일기에 기재되어있다.
김학규 장군은 이와 같이 광복군과 미군 OSS와의 군사합작에 관하여 충칭에서 해야 할 일을 잘 마무리하고 미군측 동반자도 충칭에서 만나 모든일을 확인하였으므로 가벼운 심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광복군 초모 제6분처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로 정식 편제 승인을 받아 김학규 장군은 제3지대장 직함을 받게되어 명실공히 개선장군으로서 예우를 충칭의 선배와 동지들로부터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짧은 27일간의 충칭체재 기간이었지만 좌 우 각 정당의 지도자를 찾아다니며 전체 독립운동자들의 화합과 상호협력을 호소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전민족적 항일 연합전선을 강력하게 구축하자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 예를 들면 당시 충칭 정계에는 신한민주당의 창당설이 있었고, 1940년 한국독립당 3당 합당전에 김장군의 연고가 있던 조선혁명당 간부들의 분당활동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최전선의 개선장군의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3. 重慶 韓光班 동지 OSS 훈련요원으로 西安 제2지대 파송
제10전구 전방지휘소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한광반)’을 졸업하고 1944년 11월 21일 출발하여 73일간의 긴 행군을 강행하여 1945년 1월 31일에 충칭에 도착한 50여명 대원은 숙소를 충칭 시내에서 약 30리 떨어진 양자강 상류의 토교라는 곳에 있는 한국기독교청년회관으로 정하고 광복군 충사령부는 ‘토교대(土橋隊)’ 대장으로 최용덕(催用德) 장군을 임명하였다. 50여명의 항일 독립운동자 및 애국지사. 지식청년이 충칭에 도착한 것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준 광복 독립운동사상 일대 쾌사이며 중대 사건이었고, 임시정부와 광복군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 민족의 독립정신을 내외에 크게 선양했고 국제적으로도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들은 환영행사와 신문, 방송과의 회담 및 중국 각 기관 예방 등으로 약 20여 일간을 보냈으나, 젊은 혈기를 쏟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토교에서 하다보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사기가 떨어져서 의기소침한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한광반 동지들이 충칭에 도착한지 한달 반 후인 3월 16일 김학규 장군이 도착했을 때는 대원들의 사기가 극도로 침체된 상태이었다. 몇 동지만이 임시정부에 나와서 일을 보고 있는 정황이고, 그 이외 많은 동지들은 할 일이 없어 불만에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같이 사기가 침체된 상황을 탈피하여 윤경빈(尹慶彬) 외 8명 동지는 3월 하순 경에 임시정부 내무부 경위대에 파견되었으나, 토교대의 대다수 대원들은 무위도식의 나날로 전도가 불투명한 실정이었다.
김학규 장군이 충칭에서 20일 동안 머문 뒤 지대본부인 푸양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무렵인 4월 5일 돌연 서안에서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장군이 충칭에 비래하여 서안에서도 OSS 무전훈련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 훈련요원으로서 토교대의 한광반 동지들을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의하여 4월 29일에 노능서(魯能瑞) 외 19명이 서안으로 파송되었고, 이들이 제2지대의 OSS 무전훈련반의 주축이 되어 훈련을 받게 되었다.
4. 김학규 지대장의 귀대와 OSS 본부에 광복군 연락장교 파견
4월 11일 김 장군은 부관 김우전 대위를 잔류시키고 무선전신에 경험이 있는 엄도해(嚴道海 후에 입황 OSS 무전훈련반 총책임자) 동지를 대동하고 충칭을 떠나 쿤밍으로 갔다. 그리고 OSS 본부에서 버치 대위, 윔스 대위와 한미 군사합작과 무전훈련에 대한 세부사항을 구체적으로 합의하였다. 제3지대의 OSS 무전훈련 장소를 후방으로부터 물자를 수송하기에 편리한 오가점 비행장 근처 미군 막사로 정하고 훈련반 규모는 간부 2명, 요원2명, 훈련대원 20명으로 책정하고 훈련에 필요한 기자재와 훈련반원은 모두 한달이내에 오가점에 도착하게 한다는 것과 광복군 책임자는 엄도해 대장, 미군 책임자는 버치 대위가 맡고 윔스 대위는 OSS 본부의 책임자로, 김우전 대위는 광복군 연락장교로서 쿤밍에 주재하기로 합의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은 열흘 후에 쿤밍에 도착한 김우전 부관에게 예상치 못했던 쿤밍 주재 광복군 연락장교 임명에 대한 작전명령을 다정한 서신으로 남겨놓고 버치 대위와 함께 전방 지대본부로 떠나갔던 것이다. 김학규 지대장이 남긴 작전명령의 서신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입황에서 OSS 무전훈련이 곧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OSS 본부와 제3지대와 연락할 일이 많을 것이며, 또한 제3지대본부와 충칭 상부 기관과의 통신연락도 미군 OSS 통신망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광복군 연락장교가 반드시 쿤밍에 한사람 주재해야 한다. 그리고 OSS 무전훈련에 필요한 한글 책자와 교재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윔스 대위의 간청도 있으니 김 동지는 귀대하지 말고 쿤밍 OSS 본부에 남아서 광복군 연락장교로 일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한국 광복군의 체통과 자주성을 지키는데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이와 함께 김학규 지대장은 충칭에서도 김동지를 남겨놓고 왔는데, 또 다시 쿤밍에 남겨놓고 혼자서 지대본부로 귀대하게 되니 마음이 아픈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정말로 미안하다는 사연을 써 놓았다. 김학규 장군은 이 서신을 쓰면서 가슴이 메어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다고 후일 술회하였다.
Ⅳ. 한미 공동작전의 전개
1. 김우전 대위의 대망의 출정
김학규 지대장이 충칭을 떠난 지 두 주일 지나서야 겨우 김우전 대위는 미군 비행기편을 얻게 되어 4월 25일 푸양 지대본부로 떠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임시정부 경위대 한광관 동지들과 서로 격려하는 이별 인사를 나누고, 며칠 후 서안으로 떠날 한광반 동지들과도 OSS 훈련을 빨리 끝내고 국내로 들어가서 용감히 싸워 보자고 굳은 악수도 하고 힘주어 껴안기도 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청사의 정부요인들을 찾아뵙고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물론 김구 주석이 계시는 주석 판공실에 찾아가서 정중한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주석 선생님께서 주신 사명을 꼭 완수하겠습니다. 제 한 몸이 죽더라도 소임을 다 하겠습니다. 주석 선생님 몸조심하시어 만수무강 하십시오”라고 말씀 드렸더니, 김구 선생은 가까이 오셔서 그 크신 손으로 김우전의 손을 꽉 잡으시고 어개를 두드리면서“김우전 동지도 몸조심하고 분투 노력하여 임무를 완수하기를 바라오. 꼭 성공할 것으로 믿소”라고 말씀하시며 4월 6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 기요비서(機要秘書) 임명장과 함께, “국내에 침투하여 국내 애국지사들께 연락하라”고 중요한 사명을 주신 것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다지시면서 장도를 축복하고 격려해 주셨다. 이와 같이 김구 주석의 융숭한 환송을 받고 출정 장군과 같은 감격적인 포부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쿤밍에 도착하였다. 이때 김학규 장군이 남겨놓고 간 중국돈 1만원을 받고 김장군의 애정에 다시 한번 감격하게 되었다.
2. OSS 본부 KOREAN DESK에서 광복군 연락장교의 활약
김우전 대위는 4월 25일 쿤밍에 도착하여 윔스 대위의 안내로 OSS 본부에 투숙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의 작전명령은 4월 27일 윔스 대위로부터 전달받았다. 그리고 광복군 연락장교로서 OSS 본부 한국 분야 사무실(OSS KOREAN DESK)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1) 정신작전, 선무공작, 비라작성
4월 28일 오전부터 윔스의 요청에 의하여 적진 일본군내 한국인에게 뿌릴 삐라전단 원고를 만드는 작업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미군 OSS의 MO, 정신작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5월 2일까지 몇 가지 원고를 쓰고 사진 원판을 제작하여 트럭의 콘테이너에 장치된 야전용 인쇄기로 인쇄하였다.
2) OSS 한글 암호표(W-K KOREAN CODE TABLE) 제작
이러한 일을 하는 가운데 미공군 정운수 소위가 도착하고 미군 이순용 하사관도 합류하여 무전훈련반 교재를 제작하게 되었다. 비로소 OSS HQ. KOREAN DESK 부서가 조직된 셈인데, 그 책임자는 윔스 대위였다. 하지만 무선통신에 대한 지식은 모두 제로에 가까웠고, 정운수 소위가 제일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무선통신의 원리와 기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우선 세 사람은 무전암호에 대한 원리와 문자를 숫자로 표시하는 암호의 사용방법과 송신방법 등의 원리에 대해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광복군 무전훈련반에 필요한 교재에도 위와 같은 항목의 교과서가 필요하였다. 통신원리와 교과목에 대한 것은 분야가 많고 영문을 한글로 번역할일도 많아서 윔스 대위와 정운수 소위가 담당하기로 하고, 한글 암호 제작은 김우전 대위가 맡기로 하였는데, 김우전은 한글 맞춤법을 세 사람 가운데서 제일 잘 알고 한글 맞춤법 강의까지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무전암호에 대한 개념을 미국인 기술자로부터 교육받았는데, 이는 미얀마에서 카친족에게 가르친 예를 따라. 단기간에 무선통신 기술을 완전히 배우려면 숫자로 암호를 만들어 0에서 9까지 10개의 송신부호만 습득하면 되므로 게릴라 특공대의 무전송신 교육은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샘플로 글자 하나에 다섯 단위 즉 만단위(45739)로 제작된 암호표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한글의 자음과 모음 수와 글자 구성을 세밀히 파악해보니, 자음이 14자, 모음이 10자, 한글의 구성은 자음, 모음 받침으로 되어있고, 또 자음에는 쌍자음이 5자, 모음에는 복모음이 10자 그리고 받침에 사용하는 자음14자에다 쌍자음이 11자 있다는 것을 도출해 내었다. 그 다음에 과연 만단위 숫자가 한글 암호를 제작하는데 부합되는 것인가를 검토한 끝에 자음, 모음, 받침은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착안하여 자음 암호 숫자를 그대로 사용하면 되겠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자음, 모음을 두 단위 숫자로 표시하여 한조를 네 단위 숫자로 만들고 받침은 자음 숫자 앞에 00을 붙여 네 단위 숫자로 표시하는 한글 무전 암호표를 도출해 냈다. 그리고 남은 0051 부터의 숫자를 사용하여 아라비아 숫자 1...9, 0과 한자 拾, 百...億과 각종 부호와 영자 알파벳 26자 즉 A는 0111 Z은 0136으로 정하여 김우전 대위는 ‘한글암호표’(W-K KOREAN CODE TABLE)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별지’와 같이 김우전이 직접 제도용 펜으로 원고를 작성하여 사진 알미늄판을 만들어 1945년 6월 1일에 인쇄를 하였다.)‘W-K KOREAN CODE TABLE'라고 명명한 것은 윔스 대위가 김우전 대위의 양해를 구하여 각자의 이름을 따서 W-K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한글 암호표는 광복군 OSS 무전훈련의 기본교재가 되긴 하였으나 무전훈련 교재의 일부에 불과하였다.
미국 국가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것을 보면 그 당시 교재로 인쇄된 ‘OSS한글 암호표 안내(OSS Korean Code Guide)'는 윔스 대위와 정운수 소위가 분담한 무전기술의 원론에 속하는 암호 사용방법, 송신방법, 통신문 작성방법, 난수표 가감방법, 교환통신 신호방법 등에 관한 한?영문으로 기술된 책자가 56쪽으로 나와 있다. 영문으로 된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에는 정운수 소위가 주력을 했지만 한글로 쓰는 작업은 모두 김우전이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원고를 작성하여 사진 알미늄판을 만들어 한글 암호표 보다 12일 늦게 6월 12일에 인쇄를 끝냄으로써 1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매일같이 야간에도 늦게까지 작업을 하느라 대단히 힘이 들어 코피를 흘린 때도 있었으나, 전방에서 동지들이 훈련하는 데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어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3) 폭격 목표 선정에 대한 지원
일본군 군사시설 사진 두 장을 포개놓고 두 개의 렌즈 안경을 통해서 보면 입체로 보이는데 일본군 군사시설에 대한 판단과 물체에 대한 종류 등에 자문을 해주고 미공군의 폭격대상물에 관한 정보제공에도 기여하였다.
4) 일본군 포로에 대한 심문과 한국인 영접
미얀마 전선에서 잡힌 일본군 포로와 한국인 정신대 여성들이 쿤밍으로 이송되어 쿤밍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OSS Korean Desk에서는 OSS 특공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하여 일본군 포로들에 대한 심문을 담당하였다. 김우전 대위는 이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포로수용소에 20명에 가까운 한국인 젊은 여성들을 자유의 몸이 되도록 미군과 교섭하여 충칭으로 호송케 한 일도 있었다.
6월에 접어들어 'OSS 한글 암호표 안내‘라는 56쪽의 무전훈련 교재가 인쇄됨으로써 OSS Korean Desk의 첫 작업이 끝나자, 윔스는 제3지대 OSS 무전훈련장으로, 정운수는 제2지대로 훈련 상황을 시찰하러 갔고, 김우전은 일주일 간 충칭에 가서 그 동안의 경위와 OSS 본부에서 연락장교로 해온 일들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3. 광복군 무전훈련과 OSS 특공대 국내 정진 계획
1) 제3지대의 OSS 특공대 무전훈련
김학규 지대장은 두 달에 걸친 2만리 장전을 끝내고 광복군 초모 제6분처 주임으로서 최대의 소망이었던 제3지대 편제승인과 대대적인 한,중, 미 공동작전을 위한 OSS 무전훈련 계획도 성공적으로 타결하고, 4월 하순 지대본부 산타지에 귀대하여 즉시 OSS 무전훈련반의 조직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총책임자 엄도해, 훈련내장 윤영무, 훈련본부 요원 김군남, 조병팔, 훈련대원 김영일, 김용관, 한이윤, 이창배, 차성훈, 이영순, 이신성, 이창도, 조대균, 김하진, 오성규, 조승희, 정길주, 전형운, 변수정, 김용문, 김성환, 이철민, 이아청, 김성관.
이상 24명은 5월초 푸양을 떠나 강행군하여 5월 상순 입황 오가점 비행장 근처 미군 막사에 여장을 풀고 3개월 교육과정 훈련에 들어갔다. 교육과정은 크게 나누면 첫째, 정보에 관한 교육, 둘째, 무전통신에 관한 교육, 셋째, 게릴라 유격전술에 관한 교육 등이었다. 교육내용으로는 정보학, 독도법, 첩보수집방법, 무전기 조작법, 송수신방법, 암호문 해독법, 무기조작법, 폭약사용법 등의 교육과목이 있었고, 게릴라작전에 필수적인 파괴, 폭파, 납치, 민중선동, 암살에 관한 특수훈련과 공중낙하훈련이 있었다.
이 훈련이 끝나면 미군과 협력하여 잠수함 또는 공수투하로 국내에 침투하여 애국적 민중을 포섭 조직하여 활동거점을 구축하고 전략정보, 일본군 병력상황, 군사시설 폭파 목표와 연합군 상륙지점 등을 연합군에게 무전으로 정보를 제보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독자적으로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게릴라작전을 수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과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의 호응과 우리의 힘으로 외적을 박멸하고 독립을 쟁취할 계획이었다.
3개월의 훈련과정이 거의 마무리되어서 훈련대원들의 본적지 별로 조를 짜서 광복군 제3지대의 국내 정진특공대를 편성하고 만반의 출정준비가 갖추어져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출동할 태세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미공군이 일본 본토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예상외로 빨리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한국 광복군이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여 OSS ‘특공훈련을 다져놓은 일들이 허사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광복군은 한국 본토의 상륙작전을 해 보지도 못한 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2) 제2지대의 OSS 특공대 무전훈련
제2지대의 OSS 무전훈련과 국내 정진계획에 대한 기술은 다음으로 미루고 본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맺는말
한국 광복군의 통수권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광복군 OSS 특공대의 한국 본토 출정을 격려하기 위하여 서안 제2지대에 갔을 때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써 참석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푸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드려 보내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 미 육군성과 약속이 다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고 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해지리라는 것이다. 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한 바와 같이 비록 광복군이 직접 한국 본토에 진공하여 일본군을 박멸하고 무장을 해제하지는 못하였지만 한국 광복군이 미군 OSS 부대와 공동작전을 펴서 한국 본토로 정진할 태세를 갖추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항일 무장독립운동 50년사 최종의 장을 빛나게 하였던 것이다.
한국 광복군과 중국 군사위원회와 주중 미군 사령관, 즉 한, 중, 미 3자가 공식적으로 합의되어 한국 임시정부의 정규군과 미합중국 정규군이 제2차 세계대전시 중국전선에서 공동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역사적 사실에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국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전쟁에 참가하였다고 한민족사에 찬연하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韓國光復軍의 OSS特攻作戰|작성자 1930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