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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7권
19. 강원도 철원도호부 (鐵原都護府) → 강원도 철원군
동쪽으로는 금화현(金化縣) 경계까지 32리, 남쪽으로는 경기(京畿) 영평현(永平縣) 경계까지 43리, 서쪽으로는 같은 도(道)의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43리, 같은 도의 삭녕군(朔寧郡)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32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 철원군(鐵圓郡)이다. :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철성군(鐵城郡)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弓裔)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松嶽郡)에서 여기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스럽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동주(東州)로 고쳤다. 성종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혁파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고쳤으며, 고종(高宗) 41년에는 현령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목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모든 목(牧)을 없앨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낮추었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세종(世宗) 16년에는 경기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부사(府使)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철원(鐵圓)철성(鐵城)동주(東州)육창(陸昌)창원(昌原).
성씨 본부(本府) 최(崔)송(宋)장(張)김(金)류(柳)정(鄭)형(邢)신(辛)고(高)한(韓)조(曹)노(盧)안(安)이(李)채(蔡)허(許)박(朴)방(芳), 방(邦) : 속(續).
산천 고암산(高岩山)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궁예 때에 진산(鎭山)으로 하였다. 백악산(白嶽山) : 부의 동북쪽 35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남산(南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효성산(曉星山) : 부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보개산(寶盖山) : 부의 남쪽 17리에 있다. 불견산(佛見山)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가을마현(加乙磨峴)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재송평(裁松坪)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대야잔평(大也盞坪)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옛날에는 고동주평(古東州坪)이라고 일컬었다. 누른 띠풀이 시야 끝까지 깔려 있다. 재송평(裁松坪)과 함께 강무장(講武場)이 된다. 우리 세종이 일찍이 여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체천(?川)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회양부(淮陽府) 철령에서 나온다. 또 남쪽으로 흘러가서 경기 양주(楊州) 북쪽으로 들어가 대탄(大灘)이 된다. 양쪽 언덕에 모두 섬돌 같은 석벽(石壁)이 있으므로 체천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토산 자석(磁石)칠(漆)오미자(五味子)인삼(人蔘)송이버섯[松?]벌꿀[蜂蜜]복령(茯?)지황(地黃)백화사(白花蛇)금린어(錦鱗魚)누치[訥魚].
봉수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 : 부의 서쪽으로 8리에 있다. 동쪽으로 평강현(平康縣)의 토빙산(吐氷山)과 진촌산(珍村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적골산(適骨山)에 응한다. 적골산봉수(適骨山烽燧) : 부의 서쪽으로 46리에 있다. 북쪽으로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경기 영평현(永平縣) 미로곡(彌老谷)에 응한다.
누정 고석정(孤石亭) : 부의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이 우뚝이 서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眞平王)과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 고려의 중 무외(無畏)의 기문에, "철원군의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고석정(孤石亭)이 있는데, 큰 바위가 우뚝 솟았으니 거의 3백 척이나 되고 둘레가 십여 길이나 된다. 바위를 타고서 올라가면 하나의 구멍이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방과 같다. 층대(層臺)에는 여남은 명이 앉을 만하다. 그 곁에 신라 진평왕이 남긴 비석이 있다. 다시 구멍에서 나와 꼭대기에 오르면 펀펀하여 둥근 단(壇)과 같다. 거친 이끼가 입혀져서 돗자리를 편 것 같고, 푸른 솔이 둘러서 일산을 펴 놓은 것 같다. 또 큰 내가 있는데 동남쪽으로부터 흘러온다. 벼랑에 부딪치고 돌을 굴리는 소리가 마치 여러 가지 악기(樂器)가 한꺼번에 연주되는 것 같다. 바위 아래에 이르러서는 움푹 패여서 못이 되었는데 굽어보면 두려워 다리가 떨려서 마치 그 속에 신물(神物)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물이 서쪽으로 30리쯤 가서는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는 다 바위산이 벽처럼 서 있고, 단풍나무와 남나무와 소나무와 싸리나무가 그 위에 섞여 나 있다. 맑고 서늘하고 기이하니 비록 문장을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라도 비슷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무자년 가을에 산인(山人) 만행(萬行) 등과 함께 가서 보고는 멍하니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 해가 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늦게서야 놀러 온 것을 한탄하였다. 이미 그 형상을 기술하고, 또 시로 기록하노라니, '푸른 바위가 물 옆에 높다랗게 솟았는데, 양쪽 언덕에는 가을 산이 비단 병풍을 펼쳤네. 저녁 때의 솔바람 소리 맑아서 신선이 《황정경(黃庭經 도교(道敎) 경문의 이름)》 읽는 소리를 듣는 듯하네." 하였다.
○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태초에 누가 이 정자를 지었던가? 산등성 일만 길이 허공에 걸쳐있네. 몸이 가벼워지니 홀연히 바람이 옷에서 나는 것을 깨닫고, 걸음이 편안하니 바야흐로 이끼가 신을 받쳐 주는 것을 알겠구나. 학 곁의 소나무는 늙어서 용의 수염같이 푸르고, 따오기 밖에 노을이 날리니 물고기 꼬리가 붉게 보인다. 철원(鐵原)은 기름지고 아름다운 좋은 땅인데, 옥루(玉樓)와 금전(金殿)이 다 가시밭이 되었구나. 고기 잡고 풀 베는 것을 가리키면서 옛과 지금에 느낌이 있어, 글귀를 찾아 읊조릴 제 오사모(烏紗帽)가 비스듬하네." 하였다.
○ 이곡이 충숙왕의 시 뒤에 차운(次韻)한 시에, "누가 능히 전인의 잘못을 보고 후일을 경계하겠는가. 이곳은 태봉(泰封)의 유적인 옛 산천이라네. 임금께 권하여 멀리 거둥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건만, 다만 간신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네." 하였다.
북관정(北寬亭) : 부의 북쪽에 있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그때 도탄에 빠져서 몇 고을이 곤란하였던고. 올라서 바라보노라니 옛일이 생각나 새로운 수심이 갑절이나 되네. 아로새긴 담장과 높은 집들의 번화함이 다 사라지니, 깨어진 주춧돌과 무너진 담에 가을이 쓸쓸하구나.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매 감개가 무량하고, 산과 물을 돌아보노라니 맑고 그윽하여라. 흑금원(黑金原 철원(鐵原))의 천년 땅에 벼와 기장 이삭이 늘어져, 멀리 노니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본래 고려 태조가 궁예에게 벼슬하고 있을 때에 살던 옛집이다. 담장의 남은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역원 용담역(龍潭驛) : 부의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 안축의 시에, "초가집에 유숙하노라니, 서리가 짙게 내려 기온이 차갑구나. 힘들게 왔기에 아픈 다리를 펴고, 단정히 앉아서 성근 수염을 비빈다. 집이 오래되어 먼지가 벽에 깃들었고, 창 밖의 밝은 달은 처마에 걸렸네. 마음이 바쁘니 잠이 편치 않아, 홀연히 밤이 너무 긺을 깨닫노라." 하였다. 풍전역(?田驛) : 부의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통화원(通化院) : 부의 동쪽으로 39리에 있다. 권화원(權化院) : 부의 서쪽으로 35리에 있다.
불우 석대사(石臺寺) : 보개산(寶盖山)에 있다. 당 나라 정원(貞元) 8년에 사냥꾼 이순석(李順石)이라는 자가 여기에서 돌부처를 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記)가 있다. 지장사(地藏寺) : 보개산에 있다. 이색(李穡)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이색의 시에, "산에 노니는 맛이 사탕수수를 씹는 것 같아서, 점점 가경(佳境)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함께 무심해지고, 냇가를 거닐면서 홀로 그림자만을 짝한다. 종과 목어 소리에 숲과 골짜기는 비었는데, 전각(殿閣)에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차가워라. 매우 청전(靑纏)을 변별(辨別)하려고 바람 앞에 서서 다시 많이 반성하노라." 하였다. 심원사(深原寺)성주암(聖住菴)지족암(知足菴)용화사(龍華寺)운은사(雲隱寺) : 모두 보개산에 있다. 적석암(積石菴) : 고암산(高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부의 서쪽으로 2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풍천원(楓川原) : 궁예의 도읍지로 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外城)의 둘레는 1만 4천 4백 21척이고, 내성(內城)의 둘레는 1천 9백 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석정(孤石城) : 고석정(孤石亭) 옆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8백 92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신제처(新堤處) : 부의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최준옹(崔俊邕) : 태조(太祖)를 도와 공신(功臣)이 되었다. 최석(崔奭) : 준옹의 5대손으로, 처음 이름은 석(錫)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영광스럽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고, 태보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상서이례부사(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監修國史上柱國判尙書吏禮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최유청(崔惟淸) : 최석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예종조(睿宗朝)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기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을 때에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나갔으며, 지주사(知奏事)를 지내고 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뒤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서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서 치사하였자.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문신(文臣)들은 모두 해를 입었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유청(惟淸)의 덕망에 감복하였으므로 군사들을 경계시켜 그의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복(期服)대공(大功)소공(小功)의 복제(服制)가 있는 친척까지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아들이 여덟 명이었는데, 네명이 급제하여 해마다 관청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양곡을 주었다. 최당(崔?) : 유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명종(明宗) 초에 정언(正言)이 되어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살면서 그의 집에 현판을 걸기를, '쌍명(雙明)'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우 최선(崔詵)과 태복경(太僕卿) 장자목(張自牧),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 고영중(高塋中), 비서성(秘書省) 백광신(白光臣), 사공(司空) 이준창(李俊昌), 상서(尙書) 현덕수(玄德秀), 수사공(守司空) 이세장(李世長), 대사성(大司成) 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이리저리 놀러 다니면서 스스로 즐기니, 당시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 하고, 그의 모습을 그려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였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최선(崔詵) : 최당의 아우이다. 문장과 학술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마음이 담박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가문이 좋다고 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았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참지정사(?知政事)에 이르렀다. 신종조(神宗朝)에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고 하여 태부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 판이부사(太傅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判吏部事)에 임용되었다가, 얼마 뒤에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희종(熙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최린(崔璘) : 최당의 손자이고, 유청(惟淸)의 증손이다. 국량이 크고 깊어서 젊어서부터 작은 행실에는 구애받지 않고서 호협(豪俠)한 사람들과 술자리에 모여 놀더니, 나이 거의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분발하여 글을 읽었다. 강종조(康宗朝)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최종준(崔宗峻) : 최선의 아들이다. 신종조(神宗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고종조(高宗朝)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최시중(崔侍中)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조로 청렴하게 나라에 봉사하였는데, 어찌 상례(常例)에 따라 갑자기 벼슬을 그만두게 하겠는가." 하고, 궤장(?杖)을 하사하였다. 최온(崔?) : 최선의 손자이다. 고종조(高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부중서시랑평장사(太傅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치사하고 졸하였다. 최문본(崔文本) : 최온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초기에 승선(承宣)에 임명되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졸하였다. 모습이 거대하며, 침착하고 무게가 있어서 대신(大臣)의 면목이 있었다. 일찍이 중국의 사신이 사람들에게 묻기를, "너희 나라에 이 사람 같은 자가 몇 사람이냐?" 하A?다. 최평(崔坪) : 최선의 손자이다. 고종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나, 백부 종준(宗峻)의 친혐(親嫌)으로 인하여 입성(入省)하지 못하였다. 최옹(崔雍) : 유청의 증손이다. 고종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다. 충렬왕이 태손(太孫)으로 있을 때부터 맞아다가 스승을 삼더니, 즉위하게 되어서는 부지밀직사사 한림학사(副知密直司事翰林學士)에 승진시켰는데 치사하고 졸하였다.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그 문인으로서 공경(公卿)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崔瑩) : 최옹의 손자이다. 풍모가 걸출하며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 예속되어 여러 번 왜적을 사로잡았으므로 무용(武勇)으로써 알려졌다. 홍건적의 난리 때에는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여 공훈이 일등에 책록(冊錄)되었다. 김용(金鏞)을 죽이고, 덕흥군(德興君)을 내쳤으며, 하치(哈赤)를 토벌하고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죽인 것이 모두 최영의 힘이었다. 최영은 천성이 깨끗하여 상으로 내리는 전지와 노비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大體)에는 어두워서 여러 사람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고 계책을 결단하여 요(遼)를 치다가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으니, 문하부 낭사(門下部郞舍) 허응(許應) 등이 소를 올려 논죄를 청하여 드디어 최영을 참형하였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논하기를, "최영의 공은 온 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니, 세상에서는 명언이라고 하였다. 본조에 이르러서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효자 고려 태성길(太成吉) :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에, 성길은 74세의 어머니를 업고 가서 그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효도로 봉양하였다.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정려하였다.
제영 산은 옛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 강회백의 시에, "산은 옛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구름은 긴 공중 만리의 마음을 안았네. 옛부터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으니, 원컨대 전인의 잘못을 보고 미래와 현재를 경계할지어다." 하였다.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된 뒤에 : 조준(趙浚)의 시에,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한 뒤에, 반천년의 문물(文物)이 발흥하는 때로구나." 하였다.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 이맹균(李孟畇)의 시에,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푸른 나무는 바람을 머금어 가을을 웁직이네." 하였다. 매미가 교목(喬木)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 이원(李原)의 시에, "풀에 묻힌 옛 수도(首都)에 석양이 밝은데, 매미가 교목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하였다. 예와 같이 어룡(魚龍)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나라가 무너져 산하가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泰封)의 남은 자취,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하게 하네. 지금은 사슴들이 와서 노니는 곳, 예와같이 어룡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지는 해 엷은 연기는 하늘과 함께 멀고, 떨어진 꽃 나는 버들개지는 물과 같이 유유하네. 당시의 거울의 참언(讖言)은 참 임금께 돌아갔는데, 가소롭다 궁예왕은 제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 하였다. 신증 관심각(觀心閣) 위에는 풀만 속절없이 우거지고 : 종실(宗室) 심원(深遠)의 시에, "한 마리 용이 철원에서 날아 나오더니, 해하(垓下)의 미인(美人)이 가만히 시름이 맺혔네. 흥하고 망함은 몇 번이나 은 나라의 갑자(甲子)를 지났던가, 옳고 그른 것은 모두 진(晉) 나라의 춘추(春秋)에 붙이노라. 관심각 위에는 풀만 공연히 우거지고, 붓을 떨어뜨린 뜰 앞에는 구름이 절로 유유하구나. 사슴들은 궁예의 한을 모른 채 석양의 강가에서 한가로이 노니는구나." 하였다. 가을이 깊으니 낙엽이 우물을 메우고 : 권건(權建)의 시에, "동주(東州) 성 아래에 풀이 우거졌구나, 한번 바라보니 쓸쓸한 광경 흥망성쇠를 느끼게 하네. 끝내 신광(神光)은 찾을 곳이 없는데, 당시의 기이한 참언을 누가 알았겠는가. 가을이 깊으니 낙엽은 우물을 메우고, 달빛이 검으니 놀란 고라니가 옛 옥지(玉?)에 올라오네. 끝없이 이어지는 흥망에 하늘도 늙었으리. 강산이 이러하니 새 시나 읊으리라." 하였다. 천년의 성루(城壘)에 잡초만 우거졌구나 : 성현(成俔)의 시에, "웅번(雄藩) 철원은 옛날 도읍이라, 나그넥 와서 말없이 수심만 머금네. 패상(沛上)에 풍운(風雲)이 드날리던 날, 함양(函陽)에는 연기와 불꽃이 참담하던 때였다. 두 나라의 흥망이 이제 모두 적막한데, 천년의 성루에 잡초만 우거졌구나. 궁예왕이 전인의 잘못을 거울삼지 않고, 왕도(王都)의 땅을 미록(?鹿)에게 주어 노닐게 하였네." 하였다.
[비고]
연역 정종(正宗) 조에 회양진(淮陽鎭)을 이곳으로 옮겼다.
방면 동변면(東邊面) : 처음은 5리, 끝은 10리다. 서변(西邊) : 끝이 10리다. 송내(松內)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다. 관인(寬仁)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다. 오은동(於隱洞)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북면(北面) : 처음은 15리, 끝은 45리다. 묘장(畝長)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갈미(乫未) : 처음은 20리, 끝은 50리다. 골파(●坡) : 서쪽으로 처음과 끝이 20리다. 만종(萬宗) : 동쪽에 있다. 외서(外西) : 서쪽에 있다. 백산(白山) : 서쪽에 있다. 이상 세 면(面)은 지도에 실려 있다.
성지 태봉시도성(泰封時都城) : 풍천(楓川)에 있는데 원래 내성(內城)의 둘레는 1천 9백 5척이고, 외성(外城)의 둘레는 2만 4천 4백 21척이며 가운데에 궁전의 옛터가 있다. 고석성(孤石城)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92척이다. 옆에는 고석정(孤石亭)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과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에서 놀았으며 바위가 거의 3백 척이나 우뚝 솟았다. 둘레는 10여 장(丈)으로 위에는 한 개의 구멍[穴]이 있는데, 기어서 들어가면 마치 집과 같아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옆에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비가 있고, 전후에는 바윗돌이 벽처럼 서 있고, 정자에 못의 물은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는데 가까이 가 보면 무섭다.
창고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서창(西倉) :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진도 체천진(?川津) :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영평(永平)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고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누정 북관정(北寬亭)진동루(鎭東樓)가학루(駕鶴樓) : 모두 읍내에 있다.
첫댓글 어려워요~~~ㅎ 이젠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잘 보고 갑니다
^(^ 걍 그러려니 하심 되죠 뭐... 저도 어제 인천 갔다 왔는데.... 인천가서 암살 영화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