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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ensational Truth
XI
The Church
11. 교 회
우리는 다음 일곱가지의 내용들로 교회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I. 교회가 아닌 것
1. "유대인 경륜"을 이름만 바꾸어 지금까지 존속시켜 온 것이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유대인에 관한 장에서 보아온 것처럼 교회가 길 한복판을 통과하도록 유대인들은 길 옆으로 비켜났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서는 요한 때까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성경이 모세의 율법을 한 시대로 보고 예수님의 은혜를 한 시대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을 혼합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종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란 단지 "유대 교회"의 다른 일면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인 형식"을 고집하고 제단을 만들고 제사장직을 고수하며 목자를 성직자라 부르며,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의 각종 예배 의식을 "성사"라고 부른다. 또한 국교회를 교회의 머리로 생각하고 국교회를 옹호하고 구약에 유대인에게 약속된 복들과 영광이 교회로 옮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II. 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는 "신비(미스테리 Mistery)" 이다.
왕국은 신비가 아니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국을 강력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비"로써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인 것이다(벧전1:9-12).
즉 교회는 십자가와 면류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가 등장할 것을 조용히 말씀하셨으나 그것이 언제 나타날 것인지 또는 어떠한 것인지 말씀하지 않았다(마16:13-20).
"교회의 신비"는 바울에게 처음 계시되었다.
{이런 까닭에 나 바울은. .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진대 이것은 그 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
를 알게 하신 것이며 (내가 전에 간략하게 쓴 것과 같으니 너희가 읽을 때 거기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있는 나의 지식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것이 성령으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지금 계시된 것처럼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방인들"
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
이 되며 그의 약속에 동참자가 된다는 것이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계획하신
"영원한 목적"
에 따른 것이니라}(엡3:1-11).
("땅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도표를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구약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에게도 계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인들도 구원받는 것은 신비가 아니었다.롬9:24-30.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불리우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몸"을 형성하고자 하신 것은 "신비"였다.
2. 교회는 "불러낸(Call Out)" 한 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에서 온 말로 이것은 "불러낸 무리" 혹은 "모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교회에만 전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도 하나의 "에클레시아", 즉 여러 민족과 나라에서 불러낸 모임으로 사도행전7:38에서는 "광야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교회로 함께 모인 경배자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교회)"이다(마18:,고전14:19,35).
이 교회 시대의 목적은 사도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설교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행15:13-18).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한 '백성'을 취하시려 하신다"
"Take Out of Them A 'PEOPLE' for His Name."
는 것을 선포했다. 그런데 현 교회시대의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불러모으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불러낸 몸"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구성된 "민족의 몸"이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민족의 몸"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으로부터 개개인을 불러 모아 이루어진 "몸"이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서로 별개이고 연합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을 택하신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창조된 후 아브라함 때에 와서 선택되었지만(마255:34), 교회는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하셨기 때문이다(엡1:4-6).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에베소서 1:22-23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어 볼 수 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분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 1:20절을 읽어보면 이 "머리되심"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때 비로소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가 있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머리없는 상태로 만드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몸이다.
고리도전서 12:12-13절에서 우리는 "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합시키는 것이
"성령 침례"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오순절 날"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다(행1:4-5; 2:1-4).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주로 교회에 관해 언급했는데 특히, 이 성령 침례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교회)과 한 분 성령이 계시니 한 분 주(예수)요, 한 믿음이며, 한 (성령)침례이고 모든 것의 한 분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시니 그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통하여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4-6).
바울은 고린도전서12:13에서 "한 몸" 27절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12:5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다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가 "살아 있는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직"이란 한 건물의 문이나 창문, 지붕, 마루등과 같이 여러 가지 객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고서도 새것으로 바꾸어 교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유기체이다. 우리의 눈이나, 귀, 팔, 발, 아니면 손가락이나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자른다면 불구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의 지체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그분의 몸(교회)을 자르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결코 죽을 수 없다. 살아있는 머리에 죽은 몸이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다시 죽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시록1:1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이런 까닭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라."(골3:4).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교회를 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가? 무엇 때문에 몸이 필요한가?
한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혼은 육신이 없어도 존재하는 것처럼 인격도 육신없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인격을 눈으로는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이다.
세상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즉,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다시므로 세상은 바울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Perfect Man)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교회가 몸이라면 그 둘은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머리에 불완전한 몸이 붙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게 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PERFECT MAN,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엡4:11-13).
고린도전서 3:9-17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Chief Corner Stone)이 되신 건물 혹은 성전으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며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엡2:21-22).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영광 가운데 임재하심"과 같이 비록 우리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예루살렘 성전에는 임재하시지 않지만 교회는 오순절 이후 지금까지 지상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고 계신다.
사도 요한은 "말씀"(요1:14)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고(요2:19-21) 말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영광 중에 임재"하셨고 현재는 교회 안의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예수라는 "인격"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인격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였다(요1:14).
4.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현재 교회는 약혼한 처녀에 해당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키나니, 이는 한 순결한 처녀로 너희를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이라}(고후11:2).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당시 약혼은 결혼만큼 신성했다.
처음 아담은 그의 아내를 맞이했듯이 마지막 아담도 그의 신부를 맞아야만 한다. 창세기2:18; 21-24절을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를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드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거기를 채우시더라.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했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셔서 그녀를 그 남자에게로 데려 오시니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 나와 취해졌음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그들이 한 몸이 될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은 홀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은 깊은 잠, 즉 죽음의 잠에 들어 그분의 찔린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했으며, 오순절 날 성령은 그 교회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아담이 이브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창2:23)라고 말한 것처럼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그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들"(엡5:29-33)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담에게 여자를 주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교회에게 주셨다(엡5:31). 이브와 아담의 결혼은 창세기2:24절에 묘사되어 있다. 또 마태복음19:4-5절과 비교하라.
우리는 이삭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불러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이고
사라는 이스라엘의 예표이며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이며
엘리에셀(아브라함의 종)은 성령의 예표이며
리브카는 교회의 예표이며
크투라는 회복된 이스라엘의 예표이다.
이삭이 혼기가 차 아내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가 카나안 여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종 엘리에셀을 밧단아람에 보내 아브라함의 친족 가운데서 그를 위해 한 사람을 데려오도록 했다. 엘리에셀이 밧단아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조카 아들인 라반의 집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누이동생 리브카를 이삭의 아내로 선정하셨다(창24:12-14). 리브가는 엘리에셀의 설명만 듣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녀는 친척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엘리에셀과 함께 출발했다. 이삭은 "저녁 무렵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그의 일행들과 아버지의 낙타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엘리에셀은 리브카를 이삭에게 소개하였고 그 후 리브카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시대에서 그의 아들 예수를 위하여 한 신부를 얻도록 이 세상 안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의 수가 완전히 찰 때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자신과 함께 그녀를 데리고 가실 것이다. 예수님과 그녀의 신부는 이 시대의 저녁 무녑에 공중에서 만날 것이다(살전4:15-17).
어떤 이들은 이삭이 아내를 그의 친족 가운데 구했기 때문에 그 모형의 참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신부도 이방인을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 그의 친족인 이스라엘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첫 번째 유대인이었던 반면 그의 친족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즉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브카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였으며 집안이 좋은 이방인이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는 "두 신부"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구약에, 다른 하나는 신약에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 말하는 신부는 여호와의 신부인 이스라엘이요, 신약의 신부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말한다.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니"(사54:5-8). 그녀의 창녀짓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이스라엘)를 버렸만 그녀가 죄악들이 그칠 때 다시 데려오시기로 약속하고 있다.(렘3:1-18; 겔16:1-63; 호2:1-23,3:1-5), 사라는 타락하기 전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인 크투라는 처녀로서가 아니라 아내로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린양(그리스도)의 결혼 상태는 순결한 처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소개되고 있는 "아내"(이스라엘)는 신약의 "신부"(교회)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내"(이스라엘)는 천년 왕국 기간동안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이나 반면에 "신부"(교회)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라는 점에서는 이브가 아담의 "신부"가 되기 전에 아담의 "몸"이었던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2. 교회는 "왕국(KIngdom)"이 아니다.
침례인 요한은 "천국"(kingdom of heven)이 가까왔다고 전파했으며 예수님도 12제자와 70명의 보내시며 똑같은 내용을 전하게 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영접하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건설은 연기되었으며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에 간 귀인이 돌아올 때까지 왕국은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눅19:11-27).
성경은 교회와 천국을 결코 혼합하지 않고 있다. 교회는 "집"으로 비유되기도 하며(딤전3:15), "성전"으로 비유되기도 하며(고전3:16,17), "몸"으로 비유되지만(고전12:27-31), 천국으로 비유된 적은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엡1:22,4:15,골1:18). 그러나 그분이 교회의 왕으로 언급된 적은 없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다(엡5:23-32.계21:2,9,10)
III. 교회의 시작(기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3년째 되던 해 여름, 이스라엘이 실제로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날이 가까와짐에 따라 예수님은 왕국의 건설 요청이 곧 바로 철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을 아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하라고 부탁하시면서 그들과 같이 카이사랴 빌리보 지방으로 오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들은 인자인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고 물으셨다(마16:13-20). 제자들이 예수님께 따른 사람들이 말하는 바를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고 다시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THE ROCK)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베드로라는 단어의 어원은 "페트로스(petros)"라는 헬라어에서 나온것인데, "페트로스(pertros)"는 작은 조약돌을 뜻하는 반면에, "반석"이라는 헬라어 단어인 "페트라(petra)"는 큰 돌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페트로스(petraos)"는 남성명사이며 "페트라[베드로(petra)]는 여성 명사이다. 이 성의 차이와 크기는 의미 없이 된 것이 아니다. 즉 여기서 "인간 베드로"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 즉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그 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반석"이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은 주님을 "반석"으로 표현하는 다른 성경구절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반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사도행전4:5-12절의 설교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쓸 데 없다고 제쳐 놓은 "돌"(STONE)이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즉, 건물의 머릿돌이시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그의 첫 서신(벧전2:3-8)에서 다시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자신을 "반석"으로 지칭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반석"은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닦아 놓은 기초 외에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3:11)
에베소서2:20-22절에서 바울은 교회에 대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귀중한 모퉁잇돌(Chief Coner Stone)이 되셨고,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HOLY TEMPLE
자라가며,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
Habitation of God
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 하늘로 올라가시기까지 교회의 기초는 마련될 수가 없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셨으며, 그 위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신약의 선지자들)이 기초를 놓았고, 오순절날 3000개의 "살아있는 돌"로 첫층이 쌓여졌으며(행2:41), 며칠 뒤에는 5000개의 돌로 두 번째 층이 쌓아졌다(행4:4). 그리고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한 "성전"으로 계속 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이 교회는 오순절 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반석"이 되어 그 위에 교회가 되었다면 "교회의 신비"는 당연히 바울이 아닌 베드로에게 계시되어야 했을 것이다(엡3:5).
"지옥의 문들"이란 헬라어로 "하데스(hades)의 문들"이다. "지하세계(음부)"는 건너갈 수 없는 "끝없는 구렁"을 사이에 두고 "지하 낙원"과 "지옥"으로 나누어져 있다(눅16:19-3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회개한 강도를 "낙원"에서 만났으며 죽어서 지하 낙원에 있던 사람들을 "사로잡아" 부활하여 세째하늘로 옳기셨다. 그리고 지하 세계의 문들을 닫았다. 따라서 그분은 지금 "사망과 지옥(hades)"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시며, 이때 문에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드로가 바로 교회의 "반석"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약속한 "천국의 열쇠"는 교황과 그 계승자들에게 이어졌으므로 그들이 "연옥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지옥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가질 수도 없다. "지옥의 열쇠들"은 베드로의 주님(Master)의 손에 있는데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밧모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계1:17-18).
이 말씀은 로마 캐톨릭 교회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교회가 왕국(kingdom)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천국(kingdom of heaven)의 열쇠"가 교회의 열쇠가 될 수가 없다. "천국"은 왕이 없는 동안 "신비의 모습의 왕국"으로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베드로에게 약속된 천국의 열쇠는 그가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었던 열쇠였고(행2:14-40), 그 후에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열쇠"였던 것이다(행10:24-48).
누가 교회에 속하는가?
만일 교회가 오순절에서 시작되어 "휴거"때에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으로 끝이 난다면 누가 교회에 속한 신부가 될 것인가? 반드시 이 두 사건 사이에 구원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교회의 일원이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혼인식에는 언제나 여러 축하객들이 신랑, 신부 옆에 있기 마련이다. 신부들러리, 안내하는 꽃나르는 소녀, 친척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들 등등. . . .
요한 계시록19:9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그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그런데 "신부"는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니고 당연히 참석되어야 할 사람이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손님들이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마22:1-4)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손님들"이지 "신부"가 아니다. 오직 구약의 유대인 시대를 대표하는 침례인 요한만이 "신랑의 친구"임을 밝혔다(요3:29).
휴거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구약시대의 모든 성도들"과 "대환란" 때 구원받은 "피로 씻은 무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모두 복 받은 자들이지만 신부는 되지 못한다. 천사들도 이 장면을 구경할 것이나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며, 어린양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그 영광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IV. 교회의 사명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어떤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회원들의 권익을 위하는 사회단체도 아니며 인간의 육신을 만족시키는 "사교장"도 아니다. 교회는 불신자들의 돈을 모아 가난한 회원들의 희생을 다소 덜기 위해 "면죄부"나, 어떤 상품을 파는 "상점"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들의 타락한 육신을 구원하기 위한 "사회 복지원"도 아니다. 온갖 "사회 사업"으로 사람을 돕는 것도 갸륵한 일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임무나 사명이 아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서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찼었다. 그렇다고 주님이나 사도들이 "사회 복지원" 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았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의 근원을 죄이며, 바로 이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영을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복음을 주셨고 교회의 사명이란 바로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막16:12). 복음이란 "윤리"나 "도덕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선포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이방인)에게로다.
로마서1:16
우리 시대에 있어서 복음이 의도하는 목적은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기 위해 각각의 개인을 구령하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큰 실수는 천년왕국시대의 이스라엘에 관한 지상 정복과 영광에 대한 약속을 현 시대의 교회에게 적용하는 점에 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을 시작하고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닌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 의회, 정부, 사회 개선 단체등의 요구에 동조하게 되면서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고 구원의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V. 교회의 미래
교회는 하늘로 끌려 올라가게 된다. 여기에 두 가지 대상이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2. 살아있는 성도를
그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끌려올라 갈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미카엘)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노아 홍수 이전에 에녹이 "들림을 받은 것"(창5:24)과 이스라엘 왕들이 있던 시대에 엘리야가 "들림을 받은 것"(왕하2:11)은 성도들의 변화의 모습을 나타낸다.
변화산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눅9:28-31)
"교회의 휴거"의 모형이다.
그것은 또한 공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만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세는 부활하는 성도들을 상징하며, 엘리야는 죽지않고 변화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일으키시기 전에 마르다에게 첫번 부활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알려주셨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첫 부활) 또 살아서(예수님이 다시 올때 살아있는 성도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5-26).
이 말씀과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4:16-17절에서 설명한 말씀과 얼마나 조화를 잘 이루는지 살펴보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분은 "주 안에서 죽은자들"에게는 "부활"이 되실 것이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실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1-58절에서 부활의 "차례"를 설명한 후(22-24) "살아있는 성도"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살아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grave)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15:51-55)
마지막 말씀은 "죽임을 당히지 않고 변화된"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위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4:16-17절의 말씀과도 일치하며, 성도들의 "변화"와 "부활"은 동시에 그리고 눈깜짝할 순간에 일어날 것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도 일치한다. "마치 번개가 동편에서 치면 서편에까지 비치는 것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마24:27)
고린도후서5:1-4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바램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영적인 몸)이 있다는 것이라.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 만일 우리가 옷입고 있다면 벗은 채로 발견되지 아니하리라.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죽을려는 것) 옷입혀 지고자(변화되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소망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표적을 향해 좇아갈 뿐이라.}
즉, 바울은 첫 부활인 "죽은 자들로 부터의 일으켜지는 것"은 위대한 일로 평가했지만 우리가 만일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오실때까지 살아 있는다면 변화되어 휴거되는 것은 상급으로 여겼다.
휴거의 시기
어떤 사람들은 "모든" 교회가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환란 이전에 들림을 받게 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깨어있는" 성도들만 환란 전에 올라가고, 남은 자들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의 주장은 "두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히9:28)는 말씀을 근거로 한다. 이 두번째 나타나시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죽은 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들어본적도 없고 그 뜻도 모르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자고 있는 자들이 수천만이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보거나", "기다리거나", "찾아본적"이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휴거 때에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4:16-17절에서 "들림을 받게" 될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보려고 살아서 "깨어 있었거나". "기다렸거나", "찾았던"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 남아 있는 우리"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의 순서는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바울은 말하기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고전15:51)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연합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고전12:12,13).
"거듭난"(요3:3-7)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져서 한 부분은 무덤속에서 '잠자는' 상태로 남아 있고 다른 한 지체는 '영광' 중에 들려 올라가고 또 다른 지체는 이 세상에서 환란을 겪고, 나머지 한 지체만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들려 돌라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환란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야곱의 환란" 때이고(렘30:7) "이스라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환란에서 교회를 구출하시는 것이다.(계2:10). 계시록은 연대 순으로 쓰여져 있다 교회가 신랑과 함께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4장부터 19장까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4장과 19장 사이에 있는 기간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위에 내려질 끔찍한 재앙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교회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있게 된다.(엡2:6). 즉 이때 교회는 이 땅에 "거주하는 이들"과 같이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휴거와 재림
(Rapture And Revelation)
예언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성도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있다. 전자는 "휴거"라 부르며 후자는 "재림"이라 부른다. 그 둘 사이에는 적어도 7년이란 간격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심판"을 받고 이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하늘 나라에서 거행될 것이며, 지구상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예언된 대환란이 진행될 것이다.
성경의 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꽺14:5골3:4살전3:13;4:14). 그러나 만일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먼저 들림을 받지 않는다면 성도들이 주님과 같이 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치이다. 이들 모든 구절들은 재림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지 휴거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교회가 환란 "전에" 들려 올라간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의 배척"을 받은 "후에" 이집트에 있는 동안 환란을 상징하는 기근이 닥치기 "전에" 이방인 신부인 아스낫과 결혼하였다. 왜냐하면 기근은 "그의 형제들"이 심판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형제들인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대환란 이전에 신부인 교회를 데려가셔야만 한다.
모세 역시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은 "후에" 그리고 그들이 파라오 왕의 통치하에서 환난을 겪기 "전에" 신부를 맞이했으며 그 신부도 이방인이었다(출2:23-25)
에녹은 변화된 성도들의 예표인데 노아 홍수 "전에" 들려 올라갔다. 또한 홍수는 환란의 예표이며 노아와 그의 가족은 "유대의 남은 자들" 즉 계시록7:1-8절의 인침을 받은 환란 기간동안 남아있을 144,000명의 유대인을 예표한다.
휴 거(Rapture)
"휴거"는 현시대에 있어서 가장 놀랄만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 사건은 "눈 깜짝할 순간"에 온 세상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이며 깨어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호령",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살아있는 성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음성을 듣고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한 음성으로 그리스도께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알아 들었으나 주님 옆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 처럼 들렸다(요12:28,29).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다소 사람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을때 그와 같이 가던 사람들은 음성을 들었으나 모습은 볼수가 없었고, 들리는 음성도 이해하지 못해 조용히 서 있었다.(행99:3-7).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 음성을 알아들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성도들의 마음을 관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음성이 닿지 못할 만큼 깊거나 두터운 무덤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들은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일어나라. 너희 잠자는 성도들아 깨어서 죽운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아침이다. 첫부활의 아침이다."
천사장의 소리
미카엘(위대한 통치자)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다니엘의 백성(유대인)을 도와 일어날 것이고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다니엘12:1-2절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서 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천사장인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논쟁했다는 사실은 천사장 미가엘이 휴거때에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련하여 한 몫을 담당할 것이 분명하다. 천사장의 "음성"은 미카엘의 "음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일한 천사장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모세의 몸이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고 또한 첫째 부활 "이후"에야 둘째 하늘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사탄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방해할 것이다. "하늘의 군대들"의 대장인 미가엘이 그와 싸울 것이며 "천사장의 소리"는 천사장이 천상의 군대에 대한 명령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팔
"하나님의 나팔"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첫째" 부활에 울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15:52절에서 바울이 부활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나팔을 언급했고 그것을 "마지막 나팔"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언급한 나팔이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나팔" 가운데 마지막 나팔을 지칭하고 있으며(계8:1-2;6;10:7), 그 나팔 소리가 이 주(Week)의 가운데에 들리므로 교회도 "주(Week)의 중간"에 들려 올라 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주(Week)의 "시작"에 들려 올라가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사실일 수 없다. 그러면 "마지막 나팔"는 무엇을 뜻하는가?
나팔은 군대의 악기이다. 그 악기는 이스라엘 진영에서 총회를 소집할 때 사용되었다. 첫 번째 나팔은 일어나서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며, 두 번째(마지막) 나팔은 행군의 시작을 뜻하는 신호였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강림하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듣고 모여 들었다.(출19:11,16: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려고 할 때 두 번째 나팔소리가 들린다(19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은 주님이 공중에서 그의 교회를 맞이하는 것을 상징한다. 첫 번째 나팔소리가 들릴 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두 번째(마지막) 나팔소리가 들릴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어 그들과 함께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전15:51-52).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은 "큰 나팔소리"와 함께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마24:30-31). 이 일은 환란의 마지막 때인 나팔절은 매년 가을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예수님은 장막절(천년왕국에서의 이스라엘의 안식을 나타냄)에 형제들인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선민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기 7년 전에 나팔절의 나팔소리와 함께 그의 교회를 불러내실 것이다.
만일 죽은 성도들이, 마치 예수님께서 무덤의 문이 깨뜨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무덤을 헤치지 앉은 체로 그곳을 빠져 나온다면 첫째 부활은 은밀한 것이 될 것이다. (천사가 무덤 입구들 막은 돌을 굴린 것은 단순히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 준 것뿐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는 결코 비밀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반대쪽이 밤일때 휴거가 일어난다면 그곳 지역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밤중에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 사실이며,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불러모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영적이거나 황당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 밤에는 두 사람(한남자는 남는다)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두 여인(한여인은 남는다)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하시니라.} (눅17:34-36)
여기서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콜럼부스에 의해 입증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증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침상에서 자는 두 사람은 시간이 밤이며,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사람은 해 뜨는 때와 해지는 때는 식사 준비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들에 있는 두 사람은 한 낮을 의미한다.
만일 휴거가 일어날 때가 낮이라면 그것은 노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마24:36-39)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팔고, 사고, 심고 집을 지을 것이다. 만일 그때가 즐거운 공휴일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유람선이나 자동차나 공원들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고 상점이나 가게나 백화점에도 직원이나 물건을 사려온 손님들로 가득할 것이다. 거리는 휴일을 즐기는 남녀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음성"
으로 들릴 것이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없어진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에서 가장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 동안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신실했던 종업원들이 사라져 버림으로 인해 상가, 은행, 공장, 그리고 그 밖의 직장에서 산업활동이 마비될 것이다. 사람들이 부족해서 전철이나 다른 교통 수단도 마비될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지만 "휴거"에 관한 교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놀라운 일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던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고, 그들 가운데 특히 복음을 설교하던 목사들도 많이 남아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도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기도 할 것이다.
며칠동안 흥분이 고조될 것이며, 그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흥분이 가라앉게 될 것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몇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더욱 완악해지고 사악해질 것이다. 성령은 "휴거된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고 세상의 "소금"이었던 성도들도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도덕적 타락과 부패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죄와 불법과 온갖 범죄와 더러운 마음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속화 시킬것이며, 그의 통치 아래서 온 세상은 심판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VI. 교회에 대한 "심판"
교회가 세상에서 들림을 받은 후 그리스도인들은 죄 때문이 아니라 행한 일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심판"에 관한 장과 "부활과 심판"에 관한 장을 참고하라.
VII. 교회의 "혼인식"
교회의 "혼인식"은 주님께서 "왕의 아들의 혼인식"의 비유(마22:1-5)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계시록19:7-9절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
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하더라. 그때 그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그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하고 또 내게 말하기를 "이것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들이라."고 하더라}.
주목할 것은 "신부의 혼인"이라 하지 않고 "어린 양의 혼인"이라고 한 것을 유의하라.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신부의 소망이 달성되었다기 보다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계획이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엡1:4). 사람(Man)로서의 그리스도의 기쁨이 이 "어린 양의 혼인식"에서 극에 달할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 태어나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부"는 "인간의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으며, 지금도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에 계신다(딤전2:5).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부"가 선택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인간 그리스도 예수로 승천하실 때까지 "약혼식"은 거행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약혼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약혼 만큼 긴 것은 없었다. 주님께서는 1900여년이나 자신의 신부를 기다리고 계신다. 곧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외쳐질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계19:7).
지금까지 수많은 왕족들의 결혼식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결혼식에 초대된 손님들과 구경꾼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예식 광경을 보며 찬사를 보내고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양과 그의 신부인 교회의 혼인 잔치는 그 모든 결혼식을 능가할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며, 또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아버지)께서 결합시켜 놓으셨으므로 어느 누구도 결코 떼어놓지 못하며 이혼이라도 이 결합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신부는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계19:7-8) "성도들의 의"이라는 단어는 복수이며 따라서 "의들"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행위에 대한 심판"인 "불의 시험"을 통과한 후, 성도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일"을 말한다(고전3:11-15).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하고 손에 금잔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음녀"(계17:3-4)와 점이나 주름진 것이 없는 깨끗한 흰 세마포를 입은 어린 양의 신부와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혼인식이 끝난 후에, 하늘의 신랑은 그의 왕국를 받아, 자신이 피흘려 죽으셨던 곳이며, 자신의 신부를 얻었던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좌"를 그분에게 주시고 "천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신혼 여행"은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옴으로 신랑과 신부를 위해서가 아닌 이 땅을 위해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지구가 "불침례"를 받은 후 거룩한 도성이 내려올 때 그들도 함께 내려와 새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교회"에 관한 도표를 보라.
곧 오시리
곧 오시리 우리를 위해
잠시 후면 그분의 빛을 보리라.
어두운 수평선 저 너머로 솟아 오르는
밝게 밫나는 샛별처럼,
아침의 동이 트기전
부드러운 빛살이 비취일 때,
파수꾼은 아침이 가까웠다 소리치네
얼마나 기쁜가 우리를 감쌋던 어두움은 물러가고
아침 햇살이 찬여히 비취누나.
우리를 위해 그분의 오심을 아는 자여 얼마나 기쁜가 소리치네,
곧 오시리 우리를 위해
높은 곳에서 부르는 음성이 들리네.
죽은자들이 일어고, 산자들이 변화되리라.
눈 깜짝할 순간에
오! 어느덧 공중에 와 있네.
주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네
공중에서 만나는 황홀한 기쁨이여.
우리를 데리러 그분이 오시리
신랑처럼 오시나니
마침내 나타나셨도다.
그분의 목적은 큰 신비요,
세세의 신비였도다.
그분의 빛이 비추는 가운데
신부는 예비되었도다.
우리는 외치리라
“나는 그 분의 것이요, 그분은 나의 것이라”
신성한 사랑의 신비여,
충만한 기쁨 가운데 노래하리.
“나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은 나의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