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고위관료·실업가·친일반민족행위자 홍승균(洪承均, 1885년~1948년)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형국(衡國), 호는 석연(石然), 출생지는 충남 천안군 환성면이다.
고조부는 홍희관(洪羲觀), 증조부는 홍길모(洪吉謨), 조부는 홍경주(洪畊周), 부는 통덕랑 홍우진(洪祐鎭), 모는 한긍원(韓肯源)의 따님이다.
1906년 7월 경성부 필교의숙(筆橋義塾)을 졸업했다.
1907년 7월 탁지부 세무주사에 임용되면서 관직에 입문했다. 1908년 1월 재무서 주사로 탁지부 원산재무감독국 명천재무서 주사, 11월 경상남도 관찰도 주사가 되었다.
1910년 5월 경남 고성군수(固城郡守)에 임명되었고,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경남 고성군수에 유임되었으며, 1912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 3월 함안군수, 1915년 4월 산청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1월 10일 다이쇼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3월 15일부터 1917년 7월 10일까지 경상남도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역임했으며
1919년 3·1운동 경상남도 산청군수로 재직 중이던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당시 산청 지역 만세 운동 관련자를 밀고했고 사회교화정책을 선전하는 등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당시 도쿄 유학생 오명진 등이 독립선언서를 먼저 군수에게 전달하자, 이를 일본헌병대에 밀고해 전원을 체포시켰고, 1921년 2월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무관, 민정시찰관으로 활동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1922년 1월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1926년 1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2년 총독부 사무관이 되었으며, 1925년 7월부터 192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을 겸했다.
1928년 3월 학무국 종교과장이 되었으며, 1928년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1월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승진하고, 3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 11월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30년 10월 조선소방협회 충청북도연합지부장으로 선임되었고, 12월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9월부터 1932년 9월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했으며, 11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2년 4월 1일 종4위에 서위되었고, 1932년 7월 만몽박람회(滿蒙博覽會) 고문을 맡고,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쇼와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정미업 등에 종사하면서 만주를 무대로 경제활동을 했으며, 전시체제기로 들어서면서 여러 국책회사나 군수회사의 임원을 맡았다.
1938년 7월 동아산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인, 1939년 3월 흥아광업주식회사 이사, 5월 흥아산업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1939년 7월 전시체제하에서 일제가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총망라하여 조직한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지냈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40년 2월 조선흥산무역주식회사 이사, 1944년 10월 금강전구주식회사 대표이사, 11월 조선경금공업주식회사 이사, 12월 조선전화공업주식회사· 조선소형전구주식회사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1940년 11월부터 1944년 6월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역임했고 1945년 2월에는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의 심의원을 맡았으며, 7월에는 전시동원단체인 조선국민의용대 경기도사령부 차장을 역임했다. 1948년 1월 12일 사망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도지사 부문, 기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단체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홍승균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40∼56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첫댓글 우리 후손들이 조상님을 올바르게 알어야 하는데
현재 알수 있는것이 친일명단에 수록된 경력뿐이라
이분의 내면성은 알길이 없어 아쉬운 점도 있을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그래도 고양선산 유지에는 거금을 기탁하신 숭조정신은 높이 평가하여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지식인이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을 하신분들이 많었다고 알고 있읍니다
고양선산 보전에는 6,500원 이상 부담했다는 이야기가 도정공 후손들에게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익공 영정 이모본 제작시에도 많은 기여가 있었습니다. 천안시 구성동 선산 보전에도 많은 기여가 있었음을 부인할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