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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와 윤회
‘나’ 라는 실체는 없다〔無我〕
우리가 대상을 인식을 할 때 ‘내가 인식을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인식의 주체인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 같이 느낀다. 이것은 물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수증기가 되었다가 해도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마치 물의 성질을 갖는 실체가 있다고 느끼는 것과 똑 같다.
그런데 이 ‘나’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단독자가 아니고. 형성된 것이다. 어릴 때와 어른이 된 지금을 비교했을 때 인식의 주체가 같다고 생각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결혼하기 전의 나와 결혼한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5%이든 10%이든 변했다. 그런데 연속적으로 작용해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바뀐 줄을 모르는 것이다.
여기 소나타 자동차 두 대가 있다. 이 차는 내 차이고, 저 차는 네 차이다. 내 차와 네 차는 서로 다른 차이다. 자동차의 부속품이 대략 2만 개가 넘는다. 그런데 내 차와 네 차를 하루에 부품 100개씩 교체를 하면 어떻게 될까? 100개 교체하는 정도로는 차가 달라진 걸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서 이 차의 부품이 다 저 차로 가고, 저 차의 부품이 다 이 차로 왔는데도, 여전히 이 차는 내 차이고, 저 차는 네 차라고 인식한다. 부품이 100퍼센트 다 달라졌는데도 인식 상에서는 그대로인 것이다.
이런 작용 때문에 우리는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인식의 주체는 형성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인식의 주체를 ‘자아’라고 하는데, 이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가 태어나서 만 3세까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 3세까지는 자아가 정상적으로 형성되도록 부모가 자녀를 잘 돌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그 근본을 ‘자아’라고 부르지만, 생물에서는 이 ‘자아’에 해당하는 것이 ‘종(種子)’이다. 생물의 근본 종자를 ‘종’이라고 부른다. 물질세계에서는 물질의 근본 알갱이를 ‘원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물질세계에서 근본 알갱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생물학적으로도 유전자가 발견되면서 종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유전자에 의해 생물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유전자를 바꿀 수가 있다. 감자 종자가 따로 있고, 토마토 종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 조작을 하면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고, 뿌리에는 감자가 열리도록 할 수가 있다. 그걸 ‘감토’ 라고 한다.
불교를 과학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부처님은 마음의 작용을 엄청나게 탐구해서 마음이 작용하는 법칙을 발견해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법칙에 따라 우리가 수행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는 불변하는 단독의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작용만 있다. 그 작용의 근본 실체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관계되어 있고, 그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런 관계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짧게 관찰하고, 좁게 관찰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무아’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작용의 실체가 없다’ 이런 뜻이다. 작용은 하는데 실체는 없다는 의미이다.
브라만교의 아트만과 무아의 다른 점
인도의 전통사상에서는 ‘범아일여설(梵我一如說)’ 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내용은, 우주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면 브라흐만이라는 ‘범’ 이 있고, 인간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데,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둘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 아트만이라는 것이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가고, 소도 되고, 말도 되고, 개도 된다고 한 것인데, 이 범아일여설을 부처님이 비판한 것이다.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렇게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부정하면서 거기서 나온 카스트제도도 부정했다. 인간에게는 양반과 쌍놈이라는 종자가 따로 있다는 카스트제도에 대해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이런 인도 전통사회의 믿음, 사회제도, 철학에서 나온 ‘아트만’을 부정하는 데서 ‘언아트만’, 즉 ‘아나뜨’, ‘무아(無我)’ 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한 ‘아니짜’, ‘무상(無常)’ 이 나온 것이다. 항상하다고 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무상’이라고 했고, ‘아(我)’ 가 있다고 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무아’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종교와 철학에서 아트만이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지구가 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관찰자가 자전하는 지구 위에 있다 보니까 그런 착각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 용어를 부정하다 보면 "‘아,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도는 구나." 이렇게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 가만히 있다." 라고 받아들이면 다음 차원에서는 또 안 맞는 말이 된다. 태양도 또 은하계를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한 것이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무아’ 는 범아일여설에서 주장하는 ‘아(我)’를 부정하기 위해서 나온 용어이다.
윤회라는 말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인도 전통사회에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용어이다..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 한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自我)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을 윤회라고 부른다.
주석서(註釋書)에서는 ‘ 5온· 12처· 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 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 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無我]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r,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再肉化)라기 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 모순이 없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의 전변(轉變)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윤회의 원인은 갈애와 무명
윤회는 <상응부> 여러 경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 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윤회의 최초 시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윤회과정 속에서 한 생이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기제는 업으로 설명할 때 이러하다. 즉 한 생이 다 한 후, 업은 의식과 갈애(渴愛)를 만나 다른 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업· 의식· 갈애가 만나게 될 때, 새로운 생(生)이 계속되는 ‘다시 태어남’ 이 있다고 한다. 이 세 가지의 만남은, 밭에 씨를 뿌리고 수분(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것에 비유된다. 업은 밭에 비유되고, 의식은 밭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며, 갈애는 밭에서 씨가 나게 하는 물에 비유된다.
“세존이시여, 얼마나 멀리까지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까?”
“아난다야, 욕계와 익을 업이 없어져 버린다면, 감각적 존재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난다야, 업은 밭이고 식은 씨앗이며 갈애는 수분이다. 무지에 덮여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열등한 세계의 중생들에 대해서는 열등한 세계에 의식이 자리한다(색계와 무색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그러므로 미래에 존재의 다시 태어남이 있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이상의 비유는 업· 의식· 갈애 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윤회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세 가지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게 다음의 생(태어남)에 기여한다.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다른 둘은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밭(업)이 없으면 씨(의식)은 무의미하고, 밭(업)에서 씨(의식)을 살아나게 하는 수분(갈애)가 없으면 다시 태어남의 윤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이 셋의 결합은 현재 이순간의 삶의 윤회 속에서도 전제되지만,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거듭날 때도 전제된다. 따라서 우리가 ‘업(행위)에 의해서 윤회한다’고 말할 때, 이 때의 ‘업’이라는 말 속에는 의식과 갈애가 수반되어 있다.
초기 경전인 『법구경』 에서는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내 이 집(몸) 지은이 보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오고 가고 나고 죽으며,
얼마나 많은 고통 두루 겪으며 몇 번이나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
이제 이 집(몸) 지은이 보이었나니 너는 다시 이집을 짓지 말라.
너의 모든 석가래는 부수어졌고 기둥도 부러져 쓰러졌다
이제 내 마음은 짓는 일이 없거니 사랑도 욕망도 다해 마쳤다. (법구경 153-154-154)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a vikaa)’ 이라고 정의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된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한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고(不還果, 아나함)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다.
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다.
무아와 윤회에 대한 논쟁
윤회란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서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계속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인간이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일종의 영생불멸에 대한 희원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비해 무아란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는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오온(五蘊 :色 受 想 行 識)이라는 정신과 육체가 인연에 의해 결합돼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말뿐이므로 영속하는 자아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생각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마치 창과 방패처럼 모순된다. 즉 윤회를 인정한다면 실체적 자아를 인정해야 하고, 무아를 인정한다면 윤회를 인정할 수 없다. 자아가 없으면 윤회할 존재도 없을 것이고, 윤회를 한다면 무아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 가지만 인정할 수도 없다. 윤회를 부정하고 무아만을 인정한다면 인간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본래 실체적 자아가 없다면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윤회를 인정한다면 실체적 자아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인연가합(因緣假合)이란 이론이 성립하지 않는다.
윤회와 무아는 이처럼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시비와 논쟁이 많았다. 불교가 어느 종교보다 철학적으로 발전한 것에는 두 생각의 논리적 모순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적 노력과 고민 때문이었다. 그 결과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이다. 중관사상은 무아의 입장을 천명하는 이론이라고 한다면, 유식사상은 윤회의 입장을 천명하는 철학이다. 이 문제는 지금도 불교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는 아직도 이 문제가 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윤회와 무아에 대한 의문은 <밀란다 팡하>에도 나온다. 그리스 철학을 닦아서 논리적 이해에 익숙한 메난드로스 왕은 윤회의 주체도 없이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를 질문에, 나가세나는 촛불 비유를 구사한다.
“대왕이여, 여기에 어떤 사람이 촛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러면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한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한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각각 다르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모든 윤회의 연속은 마치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든 존재는 같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면서 마지막 의식(현재의 존재)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밀린다 팡하)
촛불은 존재가 아니지만[無我], 앞 선 촛불 행위[業]로 말미암아 새 촛불이 나타나는 것처럼,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고 나가세나 존자는 설명하고 있다. 촛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는 것은 ‘초’라는 왁스[밀랍]라는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왁스는 사람의 5온[색 수 상 행 식]에 해당된다 .
이 경(미란다 팡하)은 바로 이런 문제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매우 주목된다. 여기서 부처님의 설명을 들어보면, 모든 존재는 본성이 없는 것이지만 업력(業力)에 의한 윤회는 계속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남긴 업력은 마치 불길과 같은 것인데, 이 불길은 연료(육체적 자아)가 다 타더라도 다른 데로 옮겨 붙는다. 마찬가지로 불변의 자아가 없어도 불길은 옮겨가는 것이므로, 윤회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각묵 아비달마 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