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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유마경 공부(2020.10.22.PM7시)
유마경 보살품
지세 보살과 마왕 파순 /법의 즐거움2
‘지세 보살과 마왕 파순’이라는 제목하에 법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아직 덜 끝난 상태다.
어제 법의 즐거움 전반부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오늘은 법의 즐거움 후반부부터 할 차례다.
또 유마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낙항복중마(樂降伏衆魔)하며
“‘법의 즐거움은 온갖 마군을 항복 받는 일이다.’”
내 마음으로부터 게으른 마음, 신심이 해이해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 등등 공부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들을 내 강한 의지로써 다 이겨내고, 꿋꿋하게 공부하는 자세, 그런 자세를 아주 굳게 가졌을 때, 그런 방해요소들의 경계를 뛰어넘어서 공부가 잘된다고 하는 상태, 그것을 법의 즐거움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무슨 마구니가 따로 있어서 그 마구니를 항복받아야 되고 하는 사실이 뭐가 있겠는가?
간혹 가족들끼리라도 공부를 좀 방해한다면 ‘아이구 저 마구니’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일도 있긴 있지만, 그렇다고 꼭 마구니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겠는가? 다 어여뻐서 하는 소리다.
낙단제번뇌(樂斷諸煩惱)하며
“‘법의 즐거움은 모든 번뇌를 끊는 일이다.’”
번뇌가 싹 사라져서 이것저것 고민거리도 많고 번민거리 많고 기웃거려야 할 것이 많고 쓸데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은데 그런 것이 다 끊어졌다. 그것은 법의 즐거움이다. 정말 법락이다. 법희선열락이다.
낙정불국토(樂淨佛國土)하며
“‘법의 즐거움은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모두 정직하고 인과를 잘 믿고, 특히 공무원들이 정직하게 인과를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공무를 처리한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일이고, 그것이 청정한 불국토다, 라고 할 수 있다.
낙성취상호고(樂成就相好故)로 수제공덕(修諸功德)하며
“‘법의 즐거움은 32상과 80종호를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공덕을 닦는 일이다.’”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갖추신 분이라고 하는데, 32상과 80종호를 갖추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공덕을 닦아야 되겠는가? 그런 공덕을 닦는 일이 그대로 법의 즐거움이다. 목적을 가지고 32상 80종호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살행을 잘하면서 잘 살면 32상 80종호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낙장엄도량(樂莊嚴道場)하며
“‘법의 즐거움은 도량을 장엄하는 일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환경을 잘 정돈하고 사람도 정리 좀 하고 이것저것 지저분하게 놓여있는 물건도 정리를 하고 그런 것이 도량을 장엄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 법의 즐거움이다.
절을 두고 이야기 하기로 하면 절 환경을 공부하기 좋도록 하고, 번잡한 일을 다 정리를 하면 그것이 또한 도량을 장엄하는 일이고 법의 즐거움이 되겠다.
낙문심법불외(樂聞深法不畏)하며
“‘법의 즐거움은 깊은 법문을 들어도 두려움이 없는 일이다.’”
유마경이나 화엄경 같은 최상승 법문, 깊고 높은 법문을 들어도 아무 두려워 할 것이 없고 ‘그것은 아주 시원한 법문이다’‘아주 당연한 법문이다’‘당연히 최대승 법문은 그래야 마땅하다’ 이렇게 마음에 안정을 취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법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낙삼탈문(樂三脫門)하야 불락비시(不樂非時)하며
“‘법의 즐거움은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이라는] 3해탈을 얻어서 (수행의 결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직 때가 아닌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도 또한 법의 즐거움이 된다. 아직 때[時]가 아닌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이 법의 즐거움이다.
낙근동학(樂近同學)하며
“‘법의 즐거움은 함께 수행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같은 생각을 갖고 이 불법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해도 통하고,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할 것 같으면 법의 즐거움이다.
같이 오랫동안 잘 안다고 해도 깊이 있는 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면 겉돈다. 서로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 겉돈다.
그렇지 않고 같이 수행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그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법의 즐거움이다.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그것도 아무 벗이 아니라 공부하는 벗이다. 공부하는 벗이 있어서 먼 곳에서부터 찾아와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나누고 서로 궁금한 것을 나누고, 서로 토론도 한다면 재미가 있어서 밤이 다 가는지 해가 뜨는지도 모른다. 공부하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 보니 재미있어서, 밤이 이슥하도록 그리고 새벽이 오는 지도 모르고 서로 도담을 주고 받는 것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도 그런 말을 하셨다.
‘공부하는 벗이 있어서 먼 데서부터 찾아와 줘서 같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군자로서 제일 기쁜 일이다.
낙어비동학중(樂於非同學中)에 심무에애(心無恚碍)하며
“‘법의 즐거움은 함께 수행하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있어도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차원 더 높은 이야기다. 같이 공부하고 뜻이 같고 생각이 같고 그런 사람들하고 밤새도록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함께 수행하지 않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어도 마음에 크게 걸림이 없는 것, 걸릴 것이 없고 다 용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은 으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감싸주고 수용을 하는 마음 자세, 그것이야말로 진정 차원 높은 법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차원 높은 법의 즐거움이다.
낙장호악지식(樂將護惡知識)하며
“‘법의 즐거움은 악지식을 거느려 보호하는 일이다.’”
나쁜 지식 악지식(惡知識)을 거느려서 보호하는 일이 또 법의 즐거움이다 라고 하였다.
악지식이 있고, 선지식이 있다.
선지식만 가까이 하고, 뜻이 맞는 사람만 가까이 하고 똑같이 공부하는 사람만 가까이 하는 것, 그거야 누가 못하는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공부하고 거리가 먼 사람, 내 관심사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 그런 사람을 오히려 가까이해서 보호하는 것, 이것은 차원 높은 법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낙친근선지식(樂親近善知識)하며
“‘법의 즐거움은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하는 일이다.’”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은 당연히 법의 즐거움이다. 자기하고 조금 수준이 낮더라도 관심사가 같다면 서로 탁마하고, 서로 깨우쳐 주고, 공부에 대한 수준이 비슷해서 비슷한 사람끼리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재미가 있다. 나보다 수준이 좀 더 높은 사람, 선배가 됐든지 공부를 좀 더 많이 한 사람이 됐든 그런 사람하고 가까이 해서 궁금했던 것도 묻고 몰랐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도 참 좋은 즐거움이다.
낙심희청정(樂心喜淸淨)하며
“‘법의 즐거움은 마음에 청정을 기뻐하는 일이다.’”
마음이 깨끗하고 마음이 텅 비었으면 그것이야말로 기뻐할 일이다.
낙수무량도품지법(樂修無量道品之法)이
“‘법의 즐거움은 한량없는 도품(道品)의 법들을 닦는 것이다.’”
도를 닦는 품류들은 너무 많다. 흔히 37조도품이라든지 6바라밀이라든지 4섭법이라든지 4무량심이라든지 등등 얼마나 많은가?
팔만사천문(八萬四千門)이 문문가입(門門可入)이라. 문마다 다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라고 불교에서는 이야기 한다. 한량없는 도품의 법들을 닦는 일이다.
시위보살법락(是爲菩薩法樂)이니라하니라
“‘이와 같은 것들이 보살의 법의 즐거움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유마거사가 그렇게 설법했다는 것이다.
어시(於是)에 파순(波旬)이 고제녀언(告諸女言)하되 아욕여여(我欲與汝)로 구환천궁(俱還天宮)하노라
“이에 파순이 여러 천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대들과 천궁으로 돌아가려 하노라.’”
파순은 일만이천 천녀를 데리고, 그야말로 마구니 인데도 불구하고 처음에 수호신인냥 나타났었다.
제녀언(諸女言)하되 이아등(以我等)으로 여차거사(與此居士)일세 유법락(有法樂)하야 아등(我等)이 심락(甚樂)하니 불부락오욕락야(不復樂五欲樂也)로다
“여러 천녀들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들을 거사님에게 주었으므로 법의 즐거움이 있어서 우리들은 매우 즐겁습니다. 다시는 세속의 5욕락으로 즐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왕 파순의 만이천 천녀가 됐다가 유마거사에게 빼앗겼지 않은가? 그리고 나서 유마거사의 법문을 듣고 이 일만이천 천녀들은 ‘이제 법의 즐거움이 있어서 우리들은 매우 즐겁습니다. 다시는 세속의 오욕락을 즐기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마거사의 근사한 법문을 듣고는 그만 교화를 받아서 완전히 제도가 된 상태다.
마언거사(魔言居士)여 가사차녀(可捨此女)하소서 일체소유(一切所有)를 시어피자(施於彼者)가 시위보살(是爲菩薩)이니다
“마군이 거사에게 말하였습니다. ‘거사시여, 이 천녀들을 놓아주소서. 일체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보살입니다.’”
마왕 파순이 어디서 보살이라는 말은 주워들어서 ‘보살은 일체 소유를 다 다른 사람에 준다면서요? 보살은 뭐든지 다 준다면서요? 본래 내 소유니까 이 처녀들을 돌려주십시오’ 이런 이야기다.
유마힐(維摩詰)이 언아이사의(言我已捨矣)니 여변장거(汝便將去)하야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득법원구족(得法願具足)케하라하니라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버렸으니 그대는 곧 데리고 가서 일체중생들에게 법의 소원이 구족하게 하여라.’”
‘나는 이미 버렸으니 그대는 곧 데리고 가서 일체중생에게 법의 소원이 구족하게 하여라’
이 말에 깊은 의미가 있다.
데리고 가서 그대로 가만히 있지말고, ‘여기서 훌륭한 법을 배웠으니 그 법을 가지고 일체중생들에게 법에 대한 소원을 구족하게 해주어라’ 그런 이야기다.
그 말 때문에 뒤에 유명한 유마경의 명언이 뒤따르게 된다.
어시(於是)에 제녀(諸女)가 문유마힐(問維摩詰)하사대 아등(我等)이 운하지어마궁(云何止於魔宮)이니까
“이에 여러 천녀가 유마거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왕의 궁전에 머물러야 합니까?’”
이제 상황을 보니 마왕에게는 안 따라갈 수는 없고, 유마거사는 필요치도 않고, 이미 버렸고, 이미 포기를 했고,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다. 천녀들을 데리고 유마거사가 뭐하겠는가?
그래서 마왕을 따라가기는 따라가겠는데 ‘어떻게 마왕의 궁전에 가서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까?’‘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삶이 전혀 바뀌었습니다. 삶이 이렇게까지 180도 바뀌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런 말이다.
유마힐(維摩詰)이 언(言)하되 제제(諸娣)여 유법문(有法門)하니 명무진등(名無盡燈)이라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여러 동생들이여, 법문이 있으니 다함이 없는 등불[無盡燈]이니라.’”
무진등(無盡燈) 좋은 말이다. 없을 무(無)자 다할 진(盡)자 등불 등(燈)자 다함이 없는 등불이니라.
여등(汝等)은 당학(當學)이니라 무진등자(無盡燈者)는 비여일등(譬如一燈)이 연백천등(燃百千燈)하야 명자개명(冥者皆明)하되 명종부진(明終不盡)이니 여시(如是)하야 제제(諸娣)여 부일보살(夫一菩薩)이 개도백천중생(開導百千衆生)하야 영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令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되 어기도(於其道)는 역불멸진(亦不滅盡)하며 수소설법(隨所說法)하야 이자증익일체선법(而自增益一切善法)이 시명무진등야(是名無盡燈也)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배울지니라. 다함이 없는 등불이란 비유하자면 하나의 등불이 백천의 등불을 밝혀서 어두움을 다 밝게 하되 그 밝음이 마침내 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동생들이여, 한 보살이 백천 중생을 가르쳐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게 하되 그 도는 또한 소멸해 버리지 아니하며 설하는 바의 법을 따라서 저절로 일체법을 더욱 불어나게 하는 것이 이것이 이름이 다함이 없는 등불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참 좋은 법문이다. 다함 없는 불법이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불법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한 사람을 앉혀놓고 하든지 두 사람을 앉혀놓고 하든지 그들에게 법문을 하면 그 사람들이 깨닫고 또 나눠가는 것이다. 또 그 사람들이 두 사람이면 두 사람, 세 사람이면 세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그래서 자꾸 법을 전하게 되면 끝없이 끝없이 불법은 펼쳐나간다.
그것이 다함 없는 등불의 비유다.
불교의 전법과 포교란 곧 다함없는 등불운동이다. 한 사람이 불법을 바르게 배워서 두 사람에게 가르치고, 두 사람은 다시 네 사람에게 가르치고, 네 사람은 다시 여덟 사람에게 가르치는 형식이다. 부처님오신날 기념행사로 등불을 밝히면서 맨 처음 성냥 하나로 하나의 촛불을 밝히면 하나의 촛불이 둘로, 셋으로, 넷으로, 열로, 스물로 백으로, 천으로 이렇게 번져서 온 도량을 순식간에 환하게 밝히는 것도 바로 유마경의 이 이야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절에서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등불을 켜는데, 요즘에는 전기로 켜니까 한 번에 다 켠다. 옛날에는 전기도 없었을뿐더러 촛불을 꼭 켰다.
맨처음에 가장 어른되는 방장스님이나 조실스님이 성냥을 딱 그어서 촛불 하나에게 딱 붙인다. 그 한사람이 촛불을 들고 있으면 거기에 두 사람도 오고 세 사람도 오고 네 사람도 오고 다섯 사람까지 와서 쭉 둘러선다. 다섯 사람이 둘러섰으면 촛불 하나로 다섯 사람에게 붙일 수가 있다.
그러면 다섯 사람은 바로 돌아서서 또 다섯 사람씩 모아놓고 불을 붙여준다. 불을 붙인 그 사람들은 한 사람이 다섯 사람씩 모아놓고 또 촛불을 붙이면 금방 캄캄하던 온 도량에 촛불이 붙여지는 기간이 불과 얼마 안된다. 그런 순간에 촛불이 환하게 하나씩 하나씩 밝혀져 나가는 그 광경, 캄캄할 때 번져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 환희심이 난다. 그러니까 촛불이 ‘번져나간다’ 이렇게 말한다.
촛불이 번져나가듯이 불법이 세상에 번져나가서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된다고 해서 부처님 법을 등불이라는 등(燈)자로 많이 표현한다. 그렇게 번져나가는 것, 여기 무진등(無盡燈)이라는 것이 그런 뜻이다.
유마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서 초파일날 등불 밝히는 하나의 격식이 되었다.
근래에는 전깃불로 사전에 다 켜놓기도 하고, 당일에 켜도 한꺼번에 스위치를 올려서 켜기도 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법도가 있는 것이다. 그 법도를 잘 살리면 좋은 문화가 될 것 같다. 참 근사한 이야기다. 다시 한 번 보겠다.
여러 동생들이여, 법문이 있으니 다함이 없는 등불[無盡燈]이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배울지니라. 다함이 없는 등불이란 비유하자면 하나의 등불이 백 천의 등불을 밝혀서 어두움을 다 밝게 하되 그 밝음이 마침내 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동생들이여, 한 보살이 백천 중생을 가르쳐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게 하되 그 도는 또한 소멸해 버리지 아니하며 설하는 바의 법을 따라서 저절로 일체법을 더욱 불어나게 하는 것이 이것이 이름이 다함이 없는 등불이니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초기에 제자들에게 포교를 나가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같이 가지 말라’ 고 하였다.
한 사람이 가서 두 사람을 앉혀놓고 하든지 열 사람을 모아놓고 하든지 간에 각자 가서 그렇게 하지 않고, 두사람이 같이 가면 그 불어나는 숫자가 한정이 있다.
각자 가면 두 사람이 흩어져서 열 사람을 교화했다 하면 한 번에 스무 사람이 된다. 다섯 사람이 가서 했다면 같은 시간에 스물 다섯명이 된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같이 가서 다섯 사람에게 전했다면 기껏해야 한 번에 다섯 사람 밖에 더 하겠는가?
부처님은 그래서 포교하러 갈 때 ‘절대 두 사람이 같이 가지 마라. 각각 흩어져서 빠른 시일내에 많은 사람에게 이 진리의 가르침을 전해야 된다’ 하고 당부한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은 당신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진리를 깨달으셨는데, 그 깨달은 진리가 많은 사람에게 빨리 전파되어서 모두가 제대로 살고, 인생의 본래 가진 그 가치를 한껏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마음을 많이 쓰셨다. 80이 될 때까지 노구를 이끌고 진리의 가르침을 전파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 요즘 젊은 스님들이 명상한다고 한 곳에 오랫동안 앉아서 어떻게 보면 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그런 것은 너무 소모가 크고 시간을 헛되게 많이 보내는 것 같고 안타깝다.
오래 앉아있는다고 큰 소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깨어나야 되고 또 뭔가 새로운 불교 운동이 일어나야 되는데, 좌선을 우선으로 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곁들어서 드리는 것이다.
무진등(無盡燈) 얼마나 좋은가?
촛불을 밝히듯이 만이천 천녀들이 가서 한사람 한사람이 전부 많은 사람들에게 교화를 하라 하는 내용이다.
여등(汝等)이 수주마궁(雖住魔宮)이나 이시무진등(以是無盡燈)하야 영무수천자천녀(令無數天子天女)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면 위보불은(爲報佛恩)이며 역대요익일체중생(亦大饒益一切衆生)이니라
“그대들은 비록 마의 궁전에 머물더라도 이 다함이 없는 등불을 활용하여 무수한 천자와 천녀들에게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발하게 한다면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일체중생들을 크게 요익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세보살이 마왕 파순을 만났고 그 마왕 파순은 만이천 천녀들을 데리고 와서, 그 천녀들을 유마거사에게 주었다가 다시 데려가는 그러한 과정이다. 스토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숨어있는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참 훌륭한 법문들이 ‘정말 어떻게 이런 좋은 법문이 있을까’ 탄복을 할 일이다.
유마거사가 마지막으로 당부하면서 말한다.
‘그대들은 비록 마의 궁전에 머물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세속에 사는 것과 똑같다.
세속에 살더라도
이 다함이 없는 등불을 활용하여 무수한 천자와 천녀들에게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발하게 한다면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일체중생들을 크게 요익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시(爾時)에 천녀(天女)가 두면례유마힐족(頭面禮維摩詰足)하고 수마환궁(隨魔還宮)하야 홀연불현(忽然不現)이러이다 세존(世尊)하 유마힐(維摩詰)이 유여시자재신력(有如是自在神力)과 지혜변재(智慧辯才)일세 고아불임예피문질(故我不任詣彼問疾)하나이다
“그 때에 천녀들이 머리로써 유마거사의 발에 예배하고 마왕을 따라 궁전으로 돌아가서 홀연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처럼 자재한 신력과 지혜와 변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분에게 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마왕이라고 하는 사람, 만이천 천녀들 등장하는 이런 것들은 다 방편이다. 이러한 대목을 보고 저는 그 방편 속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가 꽉꽉 박혀 있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큰 산을 어떻게 하다가 약간 허물게 됐는데 그것이 흙덩이인 줄 알고 또는 돌더미인가 했는데 그 안에 다이아몬드가 꽉꽉 박혀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다.
등장인물도 재미가 있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유마거사의 뛰어나고 빛나는 가르침이 너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세보살도 ‘나는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는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는 내용을 여기서 피력하고 있다.
법의 즐거움, 그리고 무진등, 등불을 켜는 일, 법의 즐거움과 등불을 밝히는 것이 불법을 전파하는 형식과 같은 것이다.
눈에 선하다. 눈에 아주 환하게 보이는 듯한 내용이다.
오늘 유마경 공부는 여기까지 한다.
*
목요일까지 월화수 공부하고 그다음 금토일을 쉰다.
내일 금요일은 화엄경 공부가 문수선원에서 있을 예정이다.
법회 오시는 분들은 코로나 크게 걱정할 것 없고 지켜야 할 규칙들 지키고 열심히 일상으로 돌아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오늘 이 시간에 동참하신 분들 반갑다.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다.
모두 건강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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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더 밝아지고
부처님의 진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가서
만 중생들의 미몽을 하루빨리 환하게 거둬가서
지혜로운 삶이 영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戒香ㆍ定香ㆍ慧香ㆍ解脫香ㆍ解脫知見香!
@釋대원성 고맙습니다^^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법의 즐거움 ^^ 참 편안한 밤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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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魔王의 天女들이 維摩居士로 부터 얻은 無盡燈..
法樂의 즐거움을 누리고 佛法을 널리 弘布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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