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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 12연기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사띠(sati)라고 말합니다.
알아차림을 크게 두 가지 뜻으로 나누어서 말하는데, 하나는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알아차림, 주시, 의식, 한문으로는 념(念)이라고도 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이해하다, 안다, 느낀다 하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어쨌거나 싸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뜻은
첫째는 기억이고 둘째는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알아차림이 첫째 기억이라는 의미가 주는 뜻은 매우 심오합니다.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하라는 그런 뜻의 기억을 말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기억의 기본 바탕위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과거의 기억을 전부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전하는 기억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의식상태에서
깨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그런 기억을 말합니다.
이때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의 모든 조건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상태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억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기억은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연속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음의 요소인 알아차림을 할 때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면 그것을 올바로 알아차린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의 의미는 위빠사나 수행의 전 과정을 거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이며,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말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이란 말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에서 제일 처음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알아차림은 8정도에서 정념이라고 하는 바른 알아차림에도 적용됩니다.
8정도에서는 정견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또한 알아차림은 수행자가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덕목을 말하는 오근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력, 오근 이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를 말할 때,
오근의 하나로 여기에도 알아차림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의 균형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 다섯 가지의 요소 중에서
어느 것도 다 지나치면 문제가 있지만, 오직 알아차림 하나만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균형이 깨지면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데, 이 알아차림 하나가 오근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다익선이라고 말합니다.
자! 저희 쉐우민 사야도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을 하면 악업을 짓지 않게 되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악업을 짓게 되는데,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1찰나간에 커테떼떼인이 일어난다.
커테떼떼인은 천만 곱하기 10만인데,
한 찰나 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래서 알아차림도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가 있다.
만약 한 찰나 간에 내가 나쁜 생각을 한다면 커테떼떼인의 많은 악업을 짓게 된다.
만약 알아차림이 있어서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그만큼 많은 선업을 짓게 된다.
그러니 한 순간이라도 알아차림을 놓쳐서는 되겠는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한다면 아마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할 때 자비라고 말했다면
그 수행자는 사마타 선정수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수행자가 아닌 다른 경우에도 다르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 알아차림이란 이토록 절대 절명의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 스승들이나 경전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내용들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행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전이 바로 ‘사띠빠타나 수타’입니다.
그 뜻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중요히 여기시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수행 중에 스승이 말하는 모든 면담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거의 알아차림이란 한 마디로 귀결됩니다.
어떤 질문을 해도 어떤 인터뷰를 해도 스승들은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항상 같은 말인데도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와 듣지 않았을 때가 또 다릅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라서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여야합니다.
우리는 많은 세월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감각적 욕망과 게으름, 혼침,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지와 갈애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지와 갈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알아차리는 그 순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습관을 우리는 길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수행에서는 오직 집중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알아차림을 통해서 모든 대상을 맞이합니다.
알아차림은 오온 중에서 마음의 작용인 행온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고요한 마음의 집중에 이르게 하고, 그래서 지혜가 나도록합니다.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탐진치라는 번뇌가 붙지 않게 때문에
그 순간에 온전하게 계율을 지키는 셈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특별히 계율을 지키려는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바른 견해를 갖고, 독선에 빠지지 않고,
모든 위험과 사고를 예방합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갖는 특성의 하나로,
계율의 측면과 사고의 측면에서 모든 위험을 막아서 보호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육문의 문지기가 되어 도적을 막아줍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합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무엇이나 받아들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에서는 못 받아들일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에는 사물의 성품을 꿰뚫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는 다툼과 불목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에서는 탐진치가 없으며, 알아차릴 때만이 관용 자애 지혜가 생깁니다.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이 있는데,
아는 마음은 선업이고 알아차림이며,
모르는 마음은 악업이고 알아차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은 알아차리는 마음이라서 깨어서 알지만,
모르는 마음은 무지의 마음이므로 혼돈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대상을 이성적으로 투명하게 보게 하며
객관적으로 알게 해서 항상 모든 것에 대해서 공평무사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에 머물게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에 머무는 것은 행복의 제일 조건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번뇌가 없고 행복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비현실적인 꿈으로부터 언제나 현실로 돌아오게 하여
항상 건강하고 밝고 온전한 정신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땅이 닿는 점은 언제나 하나이듯이
알아차려야할 대상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현재만큼 가장 실질적이고 진실한 대상은 없습니다.
인생이나 세월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에 의해서 생긴 결과이며, 현재는 미래를 만드는 원인입니다.
이것이 모두 알아차림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수행은 원대한 목표가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어야하는데,
실제 수행에서 목표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이상은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바라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냥 바보처럼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릴 뿐이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병이 났을 때도 병을 나으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병을 나으려고 알아차릴 것이 아니라,
병이 났을 때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그냥 알아차려야합니다.
물론 병이 나면 병원에 가야합니다.
알아차림은 몸의 병을 나으려는 이런 물질적 현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병을 통해서 몸과 마음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알아차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아차리면 몸이 좋아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바라는 것이 없이 제대로 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육신의 아픔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병든 우리의 마음입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만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할 줄 모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이때도 우리는 아픈 몸만을 지켜볼 것이 아니고,
몸으로 인해서 아파하는 마음을 지켜보아야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불필요한 고생을 하고 스스로 병을 더 키우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바라는 것 없이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그 마음이 자유로운 마음이 됩니다.
몸이 있는 한 병을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죽음이 우리를 비켜갈 수가 없듯이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살 듯이, 몸은 병의 먹이이고 괴로움의 먹이입니다.
몸이 있는 한은 병이 있을 수밖에 없고 괴로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병과 늙음 괴로움은 몸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병은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병이 나고 사리불 목련존자 또는 많은 아라한들도
병으로 고생을 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 분들은 병이 나면 약을 드시고 다만 알아차렸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설사병으로 반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과 병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 줄 알게 하는 극명한 사건입니다.
몸이 아플 때 몸만 아파야지, 마음까지 아프지 말아야합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몸이 아픈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바로 마음까지 아픕니다.
그래서 즉시 몸이 아픈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마음까지 아팠을 때는 늦게라도 마음까지 아픈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몸이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다면 그 아픔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커집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은 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병이 나면 업의 결과로 그냥 받아들여야합니다.
성자들이나 범부나 똑같이 병이 나는데,
성자는 업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나 원망이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구타나 모함 비난 박해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병으로 그치고, 또 업의 결과로 그치고,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부는 병이 나면 괴로워하고,
비난을 받으면 화를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서 새로운 업을 만듭니다.
이것이 범부와 성자의 차이입니다.
알아차림은 비정상적인 환청과 환시를 바로 알아차리게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많은 헛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처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바로 헛것을 헛것으로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조작하거나 꾸미지 않고 적나라하게 알아차리게 합니다.
수행 중에 집중력이 향상되면서 알아차림이 뒤따르지 못하면
혼몽한 상태에서 없는 형상을 상상력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실재를 보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거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갖습니다.
그런 현상 때문에 일생을 괴로움으로 보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 나중에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헛것을 본 것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바른 알아차림이 부족한 현상입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균형입니다.
균형을 바로 잡아, 균형을 이루게 하여 안정감을 줍니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알아차림은 치우침이 없게 하여 중도를 뒷받침 합니다.
알아차림은 겉으로는 공격적이지만 실제로는 공격적이지 못합니다.
다만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앞서서 끌고 나가지 않고,
그냥 일어난 대상을 있는 순간에 알아차립니다.
겉으로는 적극적이어 보이지만
속내로는 지극히 방관자 적이고 수동적으로,
단지 대상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보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에는 나름대로의 순도가 있습니다.
10%, 50% 90%... 여러 가지의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낮은 순도의 알아차림은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않아서 힘이 없는 알아차림입니다.
정확하게 밀착하고 알맞고 집중력이 있고 노력하는 마음이 포함될 때가
높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됩니다.
우리가 수행이 잘 안된다고 할 때는 낮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공손하게 모아서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알아차리면
높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되어서 순탄한 수행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상에 깊고 깊지 않고 하는 것은 집중이라는 사마디의 문제가 있습니다.
순도가 높은 알아차림은 대상이 확대되어서 크고 자세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 알아차림이 오래 지속되고 고요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혜가 납니다.
여러분! 수행을 하면서 너무 강하게 대상에 집중하면,
깊은 집중이 되어 오히려 고요함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는 머리가 아프다거나 다른 장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못 본척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못 본척한다는 것은 흥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리해서
지켜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볍게 알아차려서 생기는 찰나 삼매를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비로소 대상을 꿰뚫어 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에 머물러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것이고 ,
현재에 머물러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면
알아차림이 있는 바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할 때 알아차림에 집착하면 유연성이 없어서
오히려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할 일 없이 알아차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수행이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 되듯이, 알아차림도 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너무 힘들여서 하거나 꼭 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노동이 됩니다.
알아차림이 노동이 되면 마음이 힘들어서 싫어합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은 노동을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노동을 할 때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알아차리면서 하면
노동이 아니고 그 순간 수행으로 바뀝니다.
잘하려고 하는 것은 노력이 지나친 것인데, 노력이 지나치면 산란해지고 들뜨게 됩니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긴장되어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알아차릴 대상으로 생각하고
몸의 느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단단함 부드러움 가벼움 무거움 따뜻함 차가움 움직임 등등을 알아차리면
일도 재미있고 수행도 발전합니다.
힘들거나 싫어지거나 즐거울 때도 알아차리면
이내 일하고 있는 현재로 되돌아와 평형감각을 갖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 같은 일을 해도 피곤하지가 않아서 일석삼조의 이익이 있습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불을 피울 때 나무를 비벼서 피우는 것처럼
지속적이고 대상을 밀착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나무를 비비다 말다하면 불을 낼 수가 없습니다.
계속 비벼서 불을 내듯이, 알아차림에는 게으름이 없어야 합니다.
나태하면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태함을 무지라고 말합니다.
또한 망상도 깊은 무지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망상은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망상은 탐진치라는 악업의 세계입니다.
망상을 하고 사는 한 대상을 바로 알아차릴 수도 없으며,
어둠의 세계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어두워서 빛이 없으면 끝없는 윤회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언제나 모든 번뇌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물위에 뜬공처럼 물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 밖으로 튀어 오르지도 않고 항상 대상과 함께 있습니다.
수행자가 대상과 더불어 있을 때만이 대상에 함몰되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물위에 있으면서 물의 흐름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더불어 있으면서 현재 상황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알아차림의 임무입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는 출렁거리는 것을 알고,
고요히 머물 때는 고요히 머무는 것을 알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알고 말아야지,
알고 난 뒤에 무엇인가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단지 대상을 아는 것 외에 어떤 조건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림은 단지 알고 말아야합니다.
알고 난 뒤에 어떻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결과를 얻으려 하지만,
훌륭한 결과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게 살며시 옵니다.
그것은 바라지 않고 알아차렸을 때만이 오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언제나 대상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모양이라는 대상의 중앙에 고리를 단단히 걸어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다음에는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서 그 대상의 성품을 보아야합니다.
수행자가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먼저 모양이라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모양이라도 붙잡고 있을 때 차츰 그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이제는 성품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오직 욕망의 힘으로 앞으로 굴러갑니다.
이 욕망의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끝도 없는 무한궤도를 질주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이 전차의 브레이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끝없는 우주의 끝없는 삶을 떠돌아야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고통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났든지 그것은 반드시 고통과 죽음이 함께 수반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고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알아차림은 대상을 정확히 겨냥하는 과녁처럼
항상 분명한 표적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방황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대상을 주시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알아차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비상식적인 것은 거칠고 혼란스럽고 자연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비상식적이지 않고
상식이 통하는 매우 자연스런 것이므로 인위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알아차림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억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스스로 되어진다는 것으로
대상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좋은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8회 12연기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습관을 바꾸고 욕망의 거친 물결을 건너게 해줍니다.
알아차림은 불안 초조 공포로부터 자유를 줍니다.
알아차림은 들뜨지 않고, 고요함이 생기게 하여 그 순간 긴장으로부터 이완되게 합니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유연해집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내적 고요함의 상태를 말합니다.
알아차림은 작용하지 않고 비 작용적인데,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대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단지 대상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뿐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냉정해지거나 차가워진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냉정해진 모습에 대해서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주위로부터 변했다는 말을 듣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변화입니다.
누구나 수많은 날들 동안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참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할 일인지 할 말인지 알 것도 없고 그냥 분별도 없이 살다가
이제 대상을 알아차리면서부터 보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감정의 지배를 받고 살다가 이제는 이성적인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쳐 참된 자비가 넘쳐흐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의 여과를 거쳐야 비로소 바라는 것 없는,
온전한 자애가 생겨서 더 따뜻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냉정한 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과정을 거쳐서 따뜻한 자애가 생기는 시기가 반드시 옵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화해서 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의식이 진일보해 간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냉정해졌거나 이성적인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에 의해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수행을 해서 냉정해진 것이 아니라 전에 없던 새로운 의식의 개안(開眼)입니다.
새로운 의식이 계발 된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이때는 냉정해진 자신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 마지막 상황을 다시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래서 끝이 없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 다시 시작입니다.
그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의미가 없는 것인 줄 압니다.
이 진정한 뜻을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바른 지도를 받아야 단지 알아차리고 마는 수행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나 간에 모든 삶은 과정입니다.
과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냉정해졌다고 느끼게 된 것도 과정입니다.
마음이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순간이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정되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나 두려움을 가질 것이 없습니다.
두려운 상황도 그때 그 순간의 마음일 뿐입니다.
좋은 일에 있어서나 나쁜 일에 있어서나 과정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결론을 내리고 시시비비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상황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아야합니다.
그런 과정을 경험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지 않는 자신을 알고 스스로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당장에 어떤 변화나 결과를 기대하지 말아야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 수행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을 스스로 잘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온전하게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사실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알아야하는 대상이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남을 의식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내가 세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세상은 나의 인식의 범주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끌어들이지 않는 한 세상은 나와 무관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차림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면
자연히 밖으로 향해지는 마음이 생겨서 따뜻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도 자애로움을 갖습니다.
내 마음이 편해야 세상도 아름답게 보이고 남에게도 관용과 자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나 스스로의 문제가 우선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나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수행자가 의식이 고양되어서 수행이 발전된다는 것은 지혜가 성숙된 것인데
이 지혜는 알아차림의 결과로서만이 나타난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각기 다른 지혜가 있겠지만,
결국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하고 있지 않는가 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발전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스승님들은 항상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셔서
번뇌가 침입할 틈을 주지 않는 행동을 하시면서 사십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참으로 경건하고 소박하고 아름답습니다.
수행자는 우선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 알아차림을 얼마나 지속시키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따르는 것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항상 분명한 앎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알아차림의 확실성, 정확성, 지속성은 분명한 앎이 수반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에 대한 이로움, 적절함, 분명한 대상,
무지가 없는 앎인가를 확인해야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겨냥하고, 대상이 겨냥이 되지 않을 때는
무엇이 이익인지, 무엇이 손실인지, 시기와 상황을 알아야 되고,
또 내가 불필요한 대상을 가지고 고뇌하는지,
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에서 바른 법을 보는지,
이렇게 아는 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여러분들!
알아차림이 안 될 때는 무엇이 이익인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때와 장소를 보십시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
그래서 알아차림이 부족할 때는 이러한 분명한 앎이 함께 할 때 알아차림이 발전합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상호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나르듯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상호 의존적이고,
알아차림의 기본적인 구성 요건입니다.
이것은 상승효과의 작용으로,
하나보다 둘일 때가 뛰어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수행이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위빠사나에서는 열반을 주장하므로 불사의 문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불사의 문이란 태어나지 않는, 윤회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지 않고 윤회가 끝나는 불사의 문은
8정도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알아차림은 영원히 사는 죽음이 없는 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표를 잃어버리면 계속 나고 죽는 공동묘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경전에 보면 죽기 전에 알아차림을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을 통해서 지혜가 성숙되고,
집착이 끊어진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여기서도 죽기 전의 상태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하는데,
평소에 알아차림이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고,
실제로 죽을 때도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죽을 때는 죽을 때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몰심이라고 합니다.
이 죽을 때의 마음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됩니다.
이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는 마음이 바로 사몰심입니다.
죽을 때의 그 순간의 마음은 이미 끝났지만,
그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 생에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져서 다음 생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죽을 때의 마음은 이미 끝났지만,
다음 생에 태어나는 과보를 남기고 끝나기 때문에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뒤에 끝난 마음이기 때문에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과보가 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하면
수행은 어떻게 죽느냐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했을 때
죽을 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의 마음이 전혀 먹어보지 않은 마음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상시의 마음이 죽을 때의 마음으로 그 과보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죽기 전의 마음의 상태가 고스란히 다음 생으로 가기 때문에
죽기 전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가 문제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알아차림만이 다음 생을 결정하고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혼미하게 죽지 않고 죽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알아차리며 죽으면
최고의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해보지 않던 알아차림을 죽기 전에 갑자기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의 필요성은 새삼 더 거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할 때도 정도가 있습니다.
무엇이나 능력만큼 해야 합니다.
없는 힘을 내서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이 부족하다고 한탄할 것 없습니다.
알아차림이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아무리 중요해도 알아차림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알아차림을 집착하는 것이 또 다른 욕망이므로
알아차림을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수행자에게 필요합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진행형이어야 됩니다.
언제나 알아차릴 대상은 계속됩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 순간 알아차림이 박제되어버립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 순간 알아차림이 없어지고 사유로 빠집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최종 상황을 또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괴로울 때 괴로움에 빠져서 괴롭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괴로워하고 있네!’ 라고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언제나 어떻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도 결론을 내린 그 사실을 다시 알아차려야합니다.
모든 대상은 정체하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흐름 안에서 알아차림을 통해서
나라는 유신견이 자리 잡을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알아차림으로 인해 지혜가 난 것을 기뻐하지 말고
다시 기뻐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의 갈 길은 멉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 합니다.
지혜가 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혜를 좋아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수행이 퇴보 합니다
제가 언젠가 미얀마에서 귀국을 할 때
저희 스승께 인사를 드리면서 몇 가지 질문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알아차림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스승에 눈빛은 잘하고 있다는 자애가 살며시 보였습니다.
저의 스승은 평소에 상대를 잘 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눈을 바닥에 깔고 늘 이야기를 들으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스승을 바라보면서 스승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그 이익이 크고 효과가 컸다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스승께서는 자애로운 미소를 띠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제 질문이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그 알아차림이 자꾸 끊어지는 것에 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또 제가 지금 귀국을 하는데
“한국에 가서 어떻게 이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질문 드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수행은 스승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특별한 묘수가 있어서 그 방법을 스승은 알고 있는 것처럼 다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저의 이러한 질문에 스승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알아차리는 것을 너무 집착 하고 있다.
알아차리다가 끊어졌으면 끊어진 것을 알아차리면 되지
너는 왜 알아차림을 지속 시키려고 하는 집착을 하고 있느냐?
알아차림은 끊어지는 것이다.
끊어졌을 때는 끊어진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리면 된다.
그런데 너는 지나친 집중을 얻으려고 지금 하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말이 너무 뜻밖이어서 저는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거나 또 한국에 와서 스승께 경건한 마음으로 항상 감사를 드렸습니다.
집중이 최고로 좋은 것이고 알아차림을 지속 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좋은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오히려
“지금 왜 알아차림이 끊어진 것을 문제로 삼느냐”라고
말씀 하신 것을 어디서 누구에게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 한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을 집착하지마란 말씀에 할 말을 제가 잃었던 것입니다.
스승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고 계실 것 같은 기대가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큰 스승이 알고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 하면 저는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묘안을 얻으려고 했는데,
스승은 알아차림을 지속 하려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단순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항상 자신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스승께서는 저를 한번 힐끗 보셨는데,
그 눈에는 지혜의 날카로움과 따뜻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스승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세삼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물러나와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내 스승의 말씀을 곱씹으면서 수행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스승의 한 마디가 제 수행에 매우 좋은 지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힘이 있는 만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인 것은 문제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 합니다.
무엇도 문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내가 지금 문제라고 하고 있네!”라고
알아차리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부처님께서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위빠사나의 사념처 수행이란 바로 알아차림으로 구슬을 꿰는 것이고
벽돌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이란 뗏목을 타고 피안으로 강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알아차림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함께 하는 모든 대상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현재 자기가 마주 하는 대상에 가볍게 떠나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공을 물에 놓으면 빠지지도 않고 물위로 솟지도 않는다.
알아차림은 이렇게 대상에 빠지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게 자기 대상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대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향하게 하고 보호함으로써 지혜가 드러난다.
알아차림은 튼튼한 기억인 상과 가깝다.
비유를 들면 튼튼한 기둥이 있는 성문처럼 육근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알아차림은 문지기와 같다고 한다.
이렇게 주석서에서는 알아차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일상의 알아차림이 강화되면 다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알아차림으로는 부족하여 분명한 앎이 함께 작용 되어야 하듯이 알아차리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뒤따를 때만이 온전한 알아차림이 유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사념처안에 심념처라는 마음은
마음을 사용해서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뜻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몸을 알아차리고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리고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단계가 와야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경우는 많지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하는 것이고, 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다시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완전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가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느낌 생각 행동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을 느낀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말 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감각적 쾌락을 일으킨 것은 마음이므로
그 느낌을 통해서 그것을 일으킨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반드시 그것을 일으킨 것이
탐심이 아니면 진심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런 원인을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차츰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또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각을 한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을 했을 때 망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다음에 다시 한번 망상 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면 좋건 싫건 간에 모두 집착으로 망상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도 좋아서 집착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스스로의 무지를 알게 됩니다.
다음으로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행위는 마음이 시켜서 합니다.
마음이 시키지 않고, 자신이 좋아서 하지 않으면, 절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눈꺼풀 하나도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으면 갑갑해서 마음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는 것이라서
이렇게 모든 것들을 시키는 것을 우리가 일일이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한순간 한 찰나 간에 커테떼떼인의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음은 매순간 무한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이 거듭되는 것을 말 합니다.
몸은 통나무와 같이 스스로 앉거나 일어나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행동을 보고 행동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때 행동을 보고 마음을 아는 방법이 바로 행동을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있는 마음을 알고, 일어난 마음을 알고,
하려는 마음을 알고,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면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 원인을 알게 되어 점진적으로 악습의 뿌리가 근절 됩니다.
악습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는 선업의 습관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악습은 알아차림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선업의 마음이 알아차림이 있을 때도 선업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선업이라고 알고 거기에 빠져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념처경에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알아차림은 많은 이익을 줍니다.
알아차림은 7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마음의 청정
둘째 슬픔의 극복
셋째 비탄의 극복
넷째 육체적인 고통의 소멸
다섯 번째 정신적인 고뇌의 소멸
여섯 번째 올바른 길 팔정도에 도달함
일곱 번째 열반을 성취함
이렇게 알아차림의 이익은 매우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알아차려야 되겠습니까?
알아차림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번뇌가 있지만 번뇌가 있는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저마다 축적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축적된 성향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축적된 성향을 바꿀 수가 없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축적된 성향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바뀔 수 없는 성향을 바꾸려고 해서 번뇌가 생깁니다.
바뀌지 않는 성향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의 축적된 성향을 바꾸려고 해도 과도하게 개입하면
오히려 성향을 더 강화 하는 결과만 맞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성인도 단 한사람의 성향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역시도 마찬가지 이십니다.
부처님도 단 한분의 성향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다만 길을 안내해서 스스로 바꾸도록 했을 뿐입니다.
상대의 축적된 성향을 존중해 줬을 때만이
자신의 축적된 성향도 용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축적된 성향은 바뀌지 않지만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원인과 결과가 사라지게 되어 언젠가 그 축적된 성향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이 순간에 우리가 알아차려야 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이 알아차림만이 우리가 피안으로 가는 뗏목을 타는 것이 됩니다.
이 알아차림만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우리가 아셔야 되겠습니다.
오늘도 알아차림과 함께 여러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30회 12연기
오늘은 알아차림에 대한 총 정리를 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려야할 기본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훈을 어기지 않고
알아차림의 수행법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활동하지 않을 때는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서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행동이 필요한 때는 즉각 움직이지 말고,
우선 움직이지 않은 채 고요하게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왜냐하면 동작을 하기 전에 보다 강한 알아차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움직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움직임에 전심전력으로 주의 깊게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잔치나 축제의 위험한 경계 등등에 처했을 때라도
몸을 제어하여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행주좌와에서 사념처인 신수심법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세에 빈틈없이 기민하게 알아차림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다음엔 대화를 할 때 지나친 즐거움, 오만, 흥분,
편견 등으로 지나친 몸짓이나 보기 흉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다음에는 알아차림을 하여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하며,
너무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무례한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만약 교양이 없는 사람을 만나는 역경계에 처할 때는
자신의 생각이 상대방의 마음에 잘 이해되고 수용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어 알아차리고 말을 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마음은 발정기에 있는 코끼리와 같이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날뛰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향해 항상 내적인 고요함의 말뚝에 꽉 매어 두어야 합니다.
떠다니는 마음을 내적 고요함의 말뚝에 꽉 매달아두는 것은
대상을 겨냥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에는 매순간 자신의 마음상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는 군중이 많이 운집한 가운데서도
다른 행동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집요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위의 설명을 기억하고 실천해야합니다.
이상이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지켜야할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다음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
바라지 말고, 얻으려고 하지 말고, 이루려고 하지 말고 알아차려야합니다.
없애려고 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화를 내지 말고 알아차려야합니다.
흐리멍텅하게 하지 말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졸릴 때는 졸음과 싸우지 말고,
몸과 마음이 졸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하는지 알아차려야합니다.
하기 싫을 때는 하기 싫은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좋아할 때도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따지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어떤 차별도 일으키지 말고, 그냥 알아차려야합니다.
복잡하게 알아차리지 않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없는 것을 알아차리지 말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즐겁고 편안하고 고요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되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차려야합니다.
지나치게 힘을 주거나 너무 집중을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부드럽고 가볍게 알아차려야합니다.
꼭 알아야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구속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려야합니다.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리되 확실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조급함이나 무거움이 있지 않게 하고, 예리하고 철저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너무 강하게도 너무 약하게도 하지 말고 강약의 조화를 이루어서 알아차려야합니다.
과거나 미래를 알아차리지 말고 언제나 현재를 알아차려야합니다.
주의력 있게 집중을 하되 깊게 하지 말고
순간순간의 찰나를 연속적으로 알아차려야합니다.
여러 가지로 옮겨 다니지 말고 하나의 대상으로 하되,
다른 것이 나타나면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언제나 자신의 몸과 마음임을 잊지 않고
항상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만약 마음이 밖으로 나갔을 때는 나간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언제나 결론을 내리지 말고 변화하는 대상을 알아차리십시오.
이미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면 결론을 내린 것을 다시 그대로 알아차리십시오.
처음에는 모양이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성품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다시 성품의 변화를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로 알아차려야합니다.
모든 대상은 무상과 고 무아임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지혜가 나면 지혜가 난 것을 알고,
지혜 때문에 좋아했으면 좋아한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모든 대상은 무엇이나 오직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려야합니다.
알아차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항상 새로 내야 됩니다.
이것을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려야 할 여러 가지 대상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대상을 알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대상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리고,
대상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화가 난 것을 아는 것을 알아차려야하고.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화가 난 것을 아는 것과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릅니다.
이때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심념처 수행입니다.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항상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되므로,
대상의 근본에 접근하는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화를 낼 때 화를 낸 마음을 알아차리면
화를 낸 마음의 성품인 빠라마타, 그 실재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화를 낸 마음의 성품이 탐심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그것을 일으킨 것은 마음이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원인을 아는 것이 됩니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면 성품을 아는 것이므로 대상을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대를 미워하거나 상대로 인해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상대를 보지 말고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와서 콩닥거리는 느낌을 지켜보아야합니다.
이때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더욱 격렬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슴에 있는 이 느낌을 없애려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러나 상대를 미워하는 힘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상대에게로 다시 갔다면
이때는 상대를 보지 말고 상대의 마음을 보아야합니다.
그런 뒤에 상대의 마음이 일으킨 축적된 성향을 보아야합니다.
상대의 행위는 그 사람이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축적된 성향이 일으킨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의 잠재적 성향을 지켜보아야 미워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로 인해 마음이 들떠있거나
아니면 멍청한 상태로 어리석음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합니다.
어리석음이란 좋아하는 것을 집착하고, 미워하는 것을 집착하고,
어리석은 것을 집착하여 번뇌를 키웁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워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리석은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잘못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단지 알아차리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 쉽게 싫어하기도 합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이 싫어합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같은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한쪽으로 치우치면 반드시 다른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마음이란 한쪽으로 더 깊게 치우치면 반드시 다른 한쪽으로 더 깊게 치우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느 쪽이냐에 상관없이 치우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균형이 깨지면 고통이 오고, 알아차려서 균형이 잡히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
우리가 안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관념을 아는 것보다 실재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양에 걸려서 시비를 하지만,
아는 사람은 대상의 성품을 보아 시비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능력을 갖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내가 아니라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지만, 내 마음이 아니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조건에 의한 마음이라고 알아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거나 극단적인 고행을 하지 않는
중도의 마음을 가질 때만이 일어납니다.
중도의 마음이 8정도며 8정도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느낌을 원인으로 지혜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서만이 번뇌가 소멸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이며 이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나
세상의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여러분!
법을 얻는 조건은 현재 선한 마음이 있어야하며,
선업의 과보가 충분해야합니다. 이것을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법이 있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직 선업의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행위로 이어지며, 그 행위로 인해 생긴 결과가 업의 결과물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몸도 업의 결과물입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원인과 결과물인 마음과 몸은 다시 새로운 원인이 되어 새로운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과거에 조건이 형성되어 현재의 마음과 몸이 되었는데,
다시 과거의 조건을 되풀이하면 또다시 현재와 같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은 항상 새로운 선한 원인을 만들며,
이로 인하여 나중에 원인과 결과에서 조차도 벗어날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수행의 체험은 높은 단계를 말하면서 하는 행동이 낮은 단계일 때는
실재가 아닌 생각으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실재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법을 얻는 조건은 현재의 선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있어 모든 행위를 합니다,
행위는 업이며 업은 과보를 낳습니다.
선업은 선한 과보를 낳으며 불선업은 불선의 과보를 낳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
안심하십시오. 수행을 하다가 죽지 않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두려울 때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알아차림이 선하고 행복한 것은
알아차리는 순간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불선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평하지 마십시오.
불평은 세치 혀를 도끼로 만드는 것인데
가장 먼저 도끼로 찍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알아차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귀한법문 명심하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