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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金剛經)해설
초로인생(草露人生),그리고 꿈
김광한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더불어 가장 짧은 법문이 들어있으면서도 불교의 의미를 거의 담고 있는 경(經)가운데의 하나가 금강경(金剛經)이다.금강경은 약 6천 단어 정도의 길이로, 불교경전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짧은 축에 속한다. 직접 소리내어 끝까지 읽어 보면 30분 정도가 걸린다. 구마라집본에는 총 5149자의 한자가 쓰였다.
마지막 사구게(四句揭)는 비유적 표현을 써 이해하기가 쉽고, 노래처럼 외우기 편하다는 장점 때문에 진언처럼 외우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 등 대중매체에서도 간간이 인용되곤 하는데, 대표적으로 김만중이 쓴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중국 당나라 시절ㅇ에 심기제가 쓴 침중기, 그리고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조신대사의 꿈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원래 원문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는 것을 한문으로 옮겨짐에 따라 여기에 소리가 비슷하고 뜻이 같은 문자로 만들다보니
지금의 금강경 한문판이 된 것이다.
금강경에 스며있는 중요 내용은 일체는 무상(無常)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꿈이라는 것이다.살아있다는 것은 실체가 없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꿈속의 세상이란 것이다.사람이 잠을 자면 꾸게 되는 것이 꿈이다. 이 꿈은 사람에 따라서 흑백 빛깔이기도 하고 총천연색이기도 하다.그런데 꿈속에서는 삶과 똑같이 걱정도 하고 고생도 하면서 때로는 즐거운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는 것이다.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악몽을 꾸어서 살인범이 되어서 경찰에 쫓기다가 깨어보니 그것이 꿈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다.그러나 어디 이런 일만 있겠는가.예쁘게 생긴 미녀와 놀아나다가 그만 잠이 깨니 그 미녀가 온데간데 없이 없어져 차라리 꿈이나 깨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꿈속의 시간이란 것도 일정하지가 않아서 꿈에서는 평생을 살았는데 깨어보니 그 시간이 한시간도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 역시 큰 관점에서 보면 꿈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금강경에서는 이를 잘 설명해준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대궐같은 집에 초대를 받아서 여섯명의 귀족집 자제들과 그 집에서 차려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때 문득 물이 먹고 싶어서 물그릇을 찾자 어떤 중이 그 그릇을 뺏으면서 하는 말이 그건 개가 마시는 구정물이라고 햇다.그리고 잠을 깼다.그 사람은 꿈을 깨운 중이 꼴딱서니가 보기 싫어져 중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햇으나 꿈속의 일을 탓해서 뭣하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길거리를 가는데 꿈속에서 본것과 똑같이 생긴 대궐같은 집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거기 개(犬)가 다섯마리 구정물에 입을 담그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이때 그 사람이 생각이 난것은 바로 꿈속의 여섯명이 귀족자제가 바로 개가 되었고 개 한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서 깨달음을 달리하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해서 무엇이 있으므로 무엇이 생긴다는 인과(因果)를 이야기 한다.오늘의 내가 몸이 아프고 사업이 망하고 길거리에 노숙자로 나서게 되는 것도 일테면 전생의 내가 못된짓을 해서 이생에서 그 빚을 탕감하기 위한 부처님의 배려라는 것이다.꿈을 깨고 나면 다시 세상이 열리는데 그곳에서는 과거의 빚을 청산했기 때문에 좀더 낳은 환경과 직무가 주어지고 행복과 작은 불행이 이어진다는 것이다.꿈속의 이야기를 소설체로 꾸민 것들이 예로부터 많이있는데 남가일몽(南柯一夢),침중기(枕中記)같은 것이 그것이다.침중기(枕中記)》중국 당대의 풍자소설로 작자는 심기제 (沈旣濟)이다.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래와 같다.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는 가난한 서생이
한 도사(道士)가 준 베개로 인해
일생 동안의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보나,
깨고 보니 그것이 잠깐 동안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명리(名利)를 찾는 자신의 하찮은 모습을 깨닫는다.
파란만장의 일생을 일순의 꿈에 응축시킨 소설수법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황량일취몽(黃梁一炊夢)'의 고사(故事)로서 후자에 전해지고 있다.
당대(唐代)의 실리적 풍조에 대한 작가의 풍자가 담겨져 있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은 당(唐)나라 심기제(沈旣濟)가 쓴 ≪침중기≫(枕中記)라는
전기소설(傳奇小說)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어휘로 덧없는 일생을 비유한 말이다.
읽는 재미를 위해서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개원(開元) 7년(917)에 도사 여옹(呂翁)이 있었는데 신선술(神仙術)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단(邯鄲)의 길을 가던 도중에 한 주막집에서 쉬게 되었는데, 두건을 벋고 띠를 풀고서 봇짐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길가던 소년을 보게 되었는데, 노생(盧生)이었다. (그는) 짧은 겉옷 차림에 망아지를 타고 장차 밭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여옹과 함께 한자리에 앉아서 신나게 담소를 나누었다. 이윽고 노생은 자신의 옷차림이 남루한 것을 돌아보면서 긴 탄식을 하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운이 없어 이처럼 고달프다니!”라고 했다. 여옹이 말하기를, “당신의 생김새를 보니 괴로움도 없고 병도 없는데, 신나게 담소를 나누다가 고달프다고 탄식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라고 했다. 노생이 말하기를, “저는 이처럼 구차하게 살뿐입니다. 어찌 ‘신나다(適)’고 이르겠습니까?”라고 했다. 여옹이 말하기를, “이게 신나지 않다면 무엇이 신나다고 이를 것이요?”라고 했다.
노생이 답하여 말하기를, “사나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마땅히 공명을 이룩해서 나아가선 장수가 되고 들어와선 재상이 되어 산해진미를 즐기며(列鼎而食), 절창의 노래를 듣고 문중을 더욱 번창하게 하고 집안이 부유해지고 한 후에야 가이 신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저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한 끝에 학식이 풍부해져 젊어서부터 공경(公卿)의 지위에 오르리라 했는데, 지금 장년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농사일이나 하고 있으니 고달픈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노생은 말을 마치나 눈이 감기고 잠잘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주막집 주인은 기장밥을 찌고 있었는데, 여옹은 배낭 속에서 베개를 꺼내 (노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나의 베개를 베고 자게나. (그러면) 마땅히 당신을 당신의 뜻과 같이 영화롭고 신나게 만들어 줄 것이요.” 그 베개는 청자였는데, 그 양 끝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노생은 고개를 숙이고 그 구멍으로 다가갔는데, 그 구멍이 점점 커지고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몸을 움직여 그곳으로 들어가서는 드디어 자기 집에까지 이르렀다.
몇 달 후 청하최씨(淸河崔氏) 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용모가 매우 아름바고 가지고 온 재산도 많았다. 노생은 대단히 기뻐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의복이나 수레 따위가 날이 갈수록 호사스러워졌다. 노생은 이듬해에 진사進士시험에 나가 급제하여 秘校(秘書省校書)로 첫 벼슬길에 올랐고, 응제應制하여 갑자기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벼슬길을 옮기고 마침내는기거사인지제호(起居舍人知制誥)로 옮겼다. 3년 후에 방백方伯으로 나가 陝西牧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생의 성품은 土功을 좋아하여 陝西에서부터 황하의 물길을 80리나 뚫고 어려움에서 구제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로움이 있어 덕을 기리는 비석을 새겼으며, 汴州(河南城)에 까지 미치어 하남성에서 訪使를 찾았는데 京兆尹으로 뽑혀 올라왔다. 그때 신무황제(神武皇帝)가 바야흐로 오랑캐(융적.戎狄)를 쳤는데 대단히 넓은 땅이었다. 마침 토번(吐蕃:티베트)이 모두 모여 공격하였는데, 촉룡분포지공(燭龍莽布支功) 호사(瓜沙)를 함락시켰으며 절도사 왕군을 착(𤟭)처럼 피살하여 민심이 흉흉해졌다(河湟震動). 황제는 장수 가운데 뛰어난 자를 생각했는데, 노생을 어사중승하서절도사(御使中丞河西節度使)로 기용하였다. (그는) 오랑캐(융로:戎虜)를 크게 무찌르고 7000級의 목을 베고 900리의 땅을 개척하였으며 큰 성을 쌓아 요해지(要害地)를 차단해 놓았다. 변방의 사람들은 거연산(居延山)에 송덕비를 세웠다.
조정으로 돌아와 공훈이 책록되어 대단한 영예를 누렸고 호부상서 겸 어사대부까지 올라 명망이 대단해졌다. 한때 중상모략으로 단주자사로 밀려나기도 하였으나, 3년 후 다시 조정에 불려들어가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어 소숭, 배광정과 함게 10여 년 동안 대권을 잡고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나라를 다스려 훌륭한 재상으로 존경을 받았다.
동열 재상의 모함으로 변경의 장수와 짜고 역적을 도모한다고 몰려 하옥되었고, 관원이 그를 잡으러 오자 그는 모면하기 어려움을 알고 처자에게 “고향에서 밭이나 일구고 편히 살지 못하고 뭣하러 벼슬길에 나서서 이 꼴을 당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거친 짧은 겉옷을 걸치고 망아지를 타고 한단 길에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라고 하며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했으나 아내의 만류로 미수에 그쳤는데 노생은 환관의 힘으로 사형은 면하고 환주로 쫓겨났다. 수년 후 황제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다시 그를 중서령으로 불러들여 연국공을 봉하고 은례가 자별하였다.
그 후 노생은 영화를 누릴대로 다 누리고 아들도 5형제나 두었는데 모두가 재주와 인품이 뛰어나 천하의 명문가와 혼인을 맺고 손자들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80세가 되어 그는 황제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해 주는 가운데서 노병으로 사망했다. 노생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는데 자기 몸은 주막집에 누워 있고 여옹은 자기 곁에 앉아 있고 주인의 수수밥은 아직 채 익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다.
노생이 벌떡 일어나 “그게 꿈이었단 말인가” 하고 말하자 여옹이 “인생의 신나는 일이라는 것도 그와 같은 게라오.” 하고 일러주었다. 노생은 한참 동안이나 실심해 있다가 여옹에게 욕심을 막아 준 데 감사하며 머리를 조아려 큰절을 하고 떠나가 버렸다.
김만중의 구운몽이나 역시 당나라 시절의 남가일몽이나 모두가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석(釋)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하는 조신대사의 꿈 이야기는 그후에 춘원 이광수에 의해 꿈이라는 소설로 다시 탄생이 되었다. 신흥사의 상좌중 조신이 불공을 들리러 오는 김진사의 딸을 사모했는데 대웅전에서 불공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속에서 그 처녀와 도망을 해 꿈같은 세월을 살다가 마침내 비참한 꼴이되어 가족과 이별하는데 깨어보니 꿈이고 꿈을 꾼 시간은 불과 몇시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내 조신은 깨달음을 갖고 공부를 해서 큰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베르네르 벨리베르의 개미와 작가 베르네르(1961년생)
불란서 작가 베르네르 벨리베르의 소설 <개미>는 추리소설 기법으로서 개미의 세계를 그렸다.사랑과 반역, 생존을 위한 투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기상천외한 개미의 세계를 개미의 시각으로 재미있게 그린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붙어있지 않고 숫자로 대신하는 개미 몇마리이다.에드몽 웰즈라는 천재적인 과학자가 세상에 발표한 논문<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의거해서 개미의 세계가 상세하게 표출이 된다.숫개미와 여왕개미, 그리고 병정개미 등이 살아가는 또다른 세상의 투쟁과 집단 학살, 그리고 생존에의 본능등이 인간세계와 다름없이 전개된다.그것은 인간의 세계는 목적하는 것들이 눈으로 보면 개미들과는 사뭇 다른 크기이지만 행동하는 것은 거의 흡사하다.우선 생존의 투쟁과 전쟁과 같은 것들이다.개미는 수억년동안 한번의 진화도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인간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보듯 많은 진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개미를 잡아다가 유리병 속에 흙을 낳고 집어넣으면 그들은 그것이 새로운 세상인줄 알고 거기서 집단 생활을 한다.궁전도 짓고 창고도 만든다. 다만 인간이 공급하는 먹이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 하나하나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작가 베르네르는 그 유리병을 던져 깨뜨리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이고 한 공화국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했다.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小人國)과 대인국(大人國)에서의 주인공의 대처방법과 삶의 방식은 사뭇 다르다. 한가지 사실을 놓고 대인국과 소인국에서의 인간을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이지만 행동하는데는 많은 규제와 방만이 포함이 된다.대인국에서 주인공 걸리버는 개미가 되지만 소인국에서는 신과같은 힘을 가진 거인이 된다.
금강경에서의 일체는 공(空)이고 실체가 없으며 모든 것은 꿈이란 것도 일맥상통한다.여기에서는 윤회(輪廻)가 있을뿐이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오래산 사람은 무드셀라라고 한다. 9백년을 넘게 살았으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그러나 그렇게 오래 산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 그 후손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라서 하느님이 특별히 인정해서 그 시대에 산 사람들과 선별해 세상의 씨를 전해주기 위해 살려둘 목적으로 방주(方舟)를 만들라고 하고 대신 악에 물든 인간들을 홍수로 모두 없애 버린다.
이때 등장하는 노아란 인물과 하느님의 관계, 그것을 크게 본다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개미와 같은 미물들이 매일 술이나 마시고 싸움이나하고 이성간에 적절하지 못한 관계나 하는 것을 보자 그만 노해서 마치 유리찻잔속에서 개미들처럼 유리 찻잔을 흔들어서 혼돈에 빠지게 한것이라면 어쩌면 이해가 가능할런지 모른다. 대저(大抵) 인간이나 개미나 미물이나 그 크기에 관계없는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는 누구에게나 꿈이 있을진데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꿈이 실체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 성경속의 많은 인물들이 1백년을 넘게 존재했다지만 신의 숫자개념으로 본다면 영원에 비해 몇백년이란 시간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그것을 늒지 못하는 인간의 착오가 있을뿐이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오늘의 삶이란 실체가 없고 풀잎에 떨어진 이슬이 햇볕이 비추면 사라지듯이 풀잎에 머문 이슬을 믿으면서 거기에 부귀영화, 출세 벼슬과같은 말들을 만들어서 한시적인 즐거움을 구사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잘 살고 부자가 되고 인물이 남들보다 뛰어났다고 하면 그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해서 다가올 업(業)을 훼손치 말아야한다. 인물이 잘났다고 함부로 그 인물을 갖고 여러 사람을 농락하거나 그것을 미끼로 금전적인 것들을 취득한다면 악업(惡業)을 부추기는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했는데도 괴로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전생의 악업을 씻기위한 빚을 갚는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삶은 실체가 없고 또 다른 삶, 그것은 오늘의 꿈에서 깰때만이 이루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에 영혼은 위대한 신비를 깨우친 사람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것을 느낀다.
맨먼저 힘겨운 에움길을 무작정 달린다.어둠속을 나아가는 불안하고 끝없는 행로이다.
그 다음에는 종말을 앞두고 공포가 절정에 달한다.전율, 부들거림,식은 땀, 격심한 공포가
지배한다.그 단계가 끝나고나면 바로 갑작스레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빛을 향해 올라간다.
눈에 경이로운 빛이 비치고 영혼은 노래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결의 땅과 풀밭은 지난다.
성스런 말들이 신심을 깨운다.깨달음을 얻은 완벽한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신비를 찬양한다.
<풀루타고스>
첫댓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일체는 無常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꿈이다. 연관 작품들을 통해 얕은 생각의 끝은
자유로와 지고 신비를 찬양하는 것. 금강경과 연관된 작품들을 통해 엉터리 생각인지 모르나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봅니다.
지적 산책이 즐겁습니다.
금강경에서 시작해서 구운몽, 고사에 이어 곁눈질 하고 덮었던 베르베르 작품 이야기,
마침내 짜안하고 영웅전!
그 흥미 진진하게 빠졌던 로마시대 영웅들 이야기.
우리나라와 차원이 다름에 좌절했던 그 기억들,,,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