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의「완화삼(玩花衫)」과 박목월의「나그네」
정석준(동리목월문학관 상주작가)
박목월과 조지훈의 첫 만남
동리목월문학관은 1955년에 출간된 박목월의 첫 개인 시집 『산도화』를 소장하고 있다. 『산도화』에는 조지훈이 써 준 발문이 있는데, 그 가운데 에도 둘의 첫 만남에 관한 얘기가 들어있다. 내가 목월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이른 봄이었다. 그 전해 가을에 나는 절간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었고 『문장』 폐간호를 받았다. 그해 겨울 과음한 탓으로 빈사의 몸이 되어 서울로 와서 소위 『국민문학(國民文學)』이 발간된 것을 보았고 몇 달을 누워 있다가 이듬해 봄에 조선어학회의 『큰 사전』 편찬을 돕고 있을 때였다. 일본서 돌아오는 초면의 시인이 하나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를 찾아와서 오는 길에 목월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전했었다. 그때까지 경주를 못 보았을 뿐 아니라 겸하여 목월도 만나고 싶기도 해서 나는 그 이튿날 목월에게 편지를 썼다. 무슨 말을 썼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매우 긴 편지였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얼마 뒤에 목월에게서 답장이 왔었다. 그 짧으면서도 면면한 정회가 서려 있는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늘한 옥적(玉笛)을 마음속에 그리던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 미리 전보 주시압."이 짧은 글을 받고 바로 진보를 쳤었다. 철에 이른 봄옷을 갈아입고 표연히 경주에 내린 것은 저녁 어스름 분분한 눈송이와 함께 봄비가 뿌릴 때였다.(산도화 발문)
1942년 이른 봄날 해질녘의 건천역. 하늘에서는 봄비가 분분히 흩어져 내렸다. 목월은 한지에 '박목월'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 들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역 구내로 들어와 멈추자, 큰 보퉁이를 머리고 이고 있는 시골 아낙네 서넛과 촌로 두엇이 플랫폼에 내렸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내려선 사내.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밤물결처럼 출렁거리던 신사. 조지훈이었다. 목월은 자기 이름을 적은 한지를 높게 흔들었다. 단박에 서로 알아본 두 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 안았다. 목월은 스물여섯, 지훈은 스물둘이었다. (권영민의 그때 그곳)
박목월의 수필집 「지훈과 나」라는 수필에서도 조지훈과과 박목월의 첫 만남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2차 대전도 무르익고, 또한 그 종말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일제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 『문장』은 폐간되고 우리에게는 글을 발표할 자리뿐만 아니라 우리글 그 자체도 빼앗기고 '세기의 심연'은 완전히 '밤'이 되었다.그러나 나는 꾸준히 작품을 썼다. 그것으로써 나를 달래고 위로하고, 또한 시를 쓰는 그 생활 안에서 삶의 등불을 밝혔던 것이다. 이 고독한 작업에서 빚어진 작품들을 몇몇 친구에게 돌려 보였을 뿐이다.그 시대의 절망적인 환경이 나를 향토적인 세계로 몰아넣고 그것에 깊은 애착을 갖게 하였으며 그 세계 안에서 나를 길러준 것이다. 그 무렵에 사귄 시우(詩友)로는 지훈 한 사람뿐이었다.지훈도 사귀었다기보다 만났다 함이 적합한 표현일지 모른다. 하루는 서울에 있는 지훈에게서 두툼한 봉서가 왔다. 지훈의 그 자획 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는 단정하면서도 멋있는 글씨로 엮은 긴 사연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문장』에 추천 받은 시우와 서신 왕래를 갖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본인이 그 당시 내가 살던 경주에 나타났다. 그의 밤물결 같은 장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산을 건너다보던 모습과 후리후리한 키에 희멀겋게 시원한 얼굴과 장자풍이 있는 너그러운 몸가짐. 우리는 어두운 여관방에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시를, 시대를 얘기하고 서울 시단 소식을 들었다.
경주에서 쌓은 깊은 우정
암흑의 시대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건천역에서 처음 만난 뒤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되었다. 둘은 폐허의 고도 경주의 여관에서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문학과 역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지훈은 시인이라는 자기 존재를 귀히 여기는 목월이 고마웠고, 무엇보다 그가 발표할 수도 없는 시를 써 두고 있는 점이 믿음직했다. 경주를 처음 찾은 지훈을 위해 목월은 안내자를 자처했다. 석굴암을 찾으니 대숲 사이로 복사꽃이 발갛게 고개를 드러낸다. 진눈깨비가 흩날려 제법 쌀쌀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찬술에 취하여 떨고 있는 지훈을 목월은 외투로 감싸 주었다. 둘은 경주의 왕릉 사이 오솔길을 걸으며 솔밭 아래 바람 소리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훈의 「완화삼」과 박목월의 「나그네」
조지훈은 열흘이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다. 지훈이 자기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목월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보내왔다. 거기에 목월을 위해 정성스레 쓴 시 한 편이 덧붙여져 있었다. '목월에게'란 부제가 붙은 시 「완화삼」이었다.
완화삼(玩花衫)/ 조지훈 (목월에게)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저리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지훈의 편지를 받아 들고 감격한 목월은 밤새 화답시를 준비한다. 그것이
바로 목월의 시 「나그네」다.
나그네/ 박목월
-술 익는 강마을의의 저녁노을이여-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조지훈의 「완화삼」은 시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문학사적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조지훈 시는 후기로 내려오면서 지사적(志士的) 기풍를 많이 띠게 되는데, 그러한 징조를 초기 시인 이 작품에서 예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는 암울한 시대에 처했던 시인의 탄식과 체념의 세계이다. 여기서 시제 ‘완화삼'은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를 의미한다.
목월의 「나그네」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달랠 길 없는 민족의 정한을 스스로 나그네화하여 아름다운 시어, 시각적 이미지, 고전적 가락을 통해 탄식과 체념이 담긴 낭만적 시정(詩情)으로 노래하고 있다.
지훈의 시 「완화삼」에서는 물길은 칠백리인데 반하여 목월은 남도 3백리로 화답한 것이다. 지훈의「완화삼」은 선비의 지도를 말하고 여유있는 낭만을 말하고 있지만 목월의 나그네는 유유자적하는 전근대적 이미지는 내포하고 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