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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씨의 관산 定着史
1. 壯元峯에서 平化로 移徙
장흥 위씨는 원래의 보금자리는 장흥읍내 동동리 일대이다. 지금 장흥법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어떤 선조가 터를 잡았는지 모르나 1226년 원감국사(圓鑑國師) 3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로 말미암아 장원봉(壯元峯)의 전설(傳說)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시조와 중시조 그리고 5세조 충렬공(忠烈公) 등 선조들의 고장도 여기가 아닌가 보고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기에 단정할 수 없다.
장흥은 백제 때 오차현(烏次縣), 신라 때 오아현(烏兒縣), 고려 때 고마미지(古馬彌知縣)․마읍현(馬邑縣)․수령현(遂寧縣)․장흥부(長興府)․회주목(懷州牧)․장흥부와 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선조들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22년 후 살던 곳에서 나가야 했다. 중녕산(中寧山)에 있던 부(府)의 치소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옮길 자리가 선조들이 살던 수령현의 옛터로 지목됨에 따라 비워줘야 했다.
당시 주인공은 15세(悳龍)와 16세(溫良恭儉) 4형제로 보인다. 14세 판사공(判事公)은 친위음모가 적발돼 곤장을 맞았으며, 조선건국 후에도 왕의 지근에서 일했음이 왕조실록에서 확인됐다. 그런데 선조들은 판사공의 음모로 3대가 금고령으로 출사를 못했다고 알려졌다. 여기다 1414년에는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찌됐건 5부자는 예양강(汭陽江) 건너편 평화(平化)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았다.
장흥 위씨는 평화로 이전한 이후 분파(分派)가 시작된다. 16세 4형제 중 맏이인 자온(自溫)의 후손은 능주파(綾州派), 둘째, 자량(自良)의 후손은 관산파(冠山派), 셋째, 자공(自恭)의 후손은 사월파(沙月派)로 갈린다. 넷째, 자검(自儉)은 무후가 됐다. 이들 형제 가운데 셋째 자공은 사월방(沙月坊)으로 이사가 얼마간 살다가 둘째 손자(頓)를 데리고 함흥(咸興)으로 떠나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두 형은 평화에서 평생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관산파의 내력을 보자. 자량은 외아들 종복(宗復)을 두었다. 그를 가리켜 한성참군(漢城參軍)이라 한다. 그는 순천(順天) 박씨(朴氏)와 사이에 유형(由亨)과 유정(由貞) 두 아들을 낳았다. 유정은 다시 행원파(杏園派)로 갈려 나간다. 유형의 자는 자실(子實)이며 승문습독(承文習讀)을 추증(追贈)받아 습독공이라 한다. 그는 평산(平山) 신씨(申氏)와의 사이에 진손(晉遜)․진동(晉同)․진보(晉寶)․진수(晉秀)․진현(晉賢) 5형제를 두었다.
맏이인 진손(晉遜)과 둘째, 진동(晉同)은 무후(無後)다. 셋째, 진보(晉寶)는 인손(仁遜)과 대성(大成)으로 이어져 곡성(谷城)현감파를 이룬다. 넷째, 진수(晉秀)는 광산(光山) 김씨(金氏)와 사이에 경(鯨)․곤(鯤)․태(鮐)․전(鱣)․방(魴) 등 5형제를 낳았다. 맏이인 경(鯨)과 셋째인 태(鮐)는 무후다. 넷째인 전(鱣)은 덕원(德元)과 덕린파(德隣派)를, 넷째 방(魴)은 덕남(德男) 즉 훈도공파(訓導公派)가 된다. 막내 진현(晉賢)은 관산파를 잇는다.
다만 막내가 관산파를 이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관산파의 파조는 16세 자량(自良)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아들 17세 종복(宗復), 장손 18세 유형(由亨) 등은 관산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 관산과의 연고는 파조(派祖)의 증손인 19세 진현(晉賢)이 당동으로 입거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관산파라는 파명(派名)은 1759년 기묘초보를 제작하면서 붙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합리적인 분류는 아니다.
1) 堂洞은 冠山派의 요람
습독공 유형(由亨)의 막내아들 진현(晉賢․1483~1564)은 관산(冠山) 당동(堂洞)의 탐진(耽津) 최씨(崔氏)와 혼인을 함으로써 관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후손들은 그를 가리켜 강릉참봉공(康陵參奉公)이라 하나 추증(追贈)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평화에서 태어나 살다가 넷째, 형 진수(晉秀)와 용산(蓉山)의 어산(語山)과 인근에 있는 운주리(雲柱) 봉황동(鳳凰洞)에서 살았다. 이때 아버지 습독공도 평화를 떠나 아들들과 어산이나 봉황동에서 동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참봉공이 최씨 규수와 혼인을 한 시기는 1500년 정도로 보인다. 20세 전후가 당시의 혼인 적령기였기에 그렇다. 탐진 최씨 집안은 고을에서는 부자였다. 최씨 집은 사연을 간직한 집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은 중국 소흥부(紹興府)출신 임호(任灝)로 장흥 임씨(任氏)의 시조이다. 그는 1035년에서 1045년 사이에 중국에서 동래해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고 전한다. 임호는 중국내 국난을 피해 고려의 정안현(定安縣) 앞 돌의도(突衣島)로 동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호의 동래와 정착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우선 그가 동래한 시기라면 북송(北宋) 경우(慶祐)․보원(寶元)․경역(慶歷) 황제 연간에 해당된다. 960년에 건국해서 약 80년 전후라면 국란이 평정된 시기이다. 그런데 국란을 피해 안정된 고려로 귀화했다니 조금 이상하다. 여기다 고려로의 귀화를 계획했다면 왜 하필 국토의 극변인 정안으로 들어왔는가도 석연치 않다. 그리고 그는 당동에 온 직후 고려조정이 있는 개경(開京)으로 진출하나 이상하다.
즉 임씨들은 관산이란 변방에 정착하자 말자 벼락치기로 명문이 된다. 임호는 바로 개경(開京)으로 가서 출사(出仕)한다. 원외랑과 국사설이 있다. 임호의 아들 의(懿)는 곧 고려조정의 평장사(平章事), 손자 원후(元厚)는 중서령(中書令)에 올랐다. 증손녀는 왕비가 됐다. 공예태후(恭睿太后)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태후의 태생지는 당동이며 그래서 그 집터는 예사로운 집터가 아니다. 임씨 이후의 집주인은 탐진 최씨, 장흥 위씨, 수원 백씨, 장흥 위씨 등이다.
왕비에 간택된 배경을 놓고 설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당시 고려조정의 어의인 강진출신 최사전(崔思全․1067~1139)이 추천했다는 설이 있다. 주로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다른 설은 태조 왕건 이후 지방호족들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삼았기에 장흥의 호족 임씨에게도 적용했다고 고려대 박용운교수는 주장하다. 그러니 임씨들은 호족반열로 볼 수 있다. 시조 호의 아들 의는 문하시중 직무대행을 지냈고, 손자 원후 또한 대단한 벼슬아치기 때문이다.
임씨들이 이민 2세부터 고려의 수도 개경에 진출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박교수는 당시 보림사 승려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들고 있으나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어쨌건 왕비로 간택될 때 원후는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자신이 중서령이었다. 둘째, 장인 이위(李瑋․1049~1133)가 문하시중이었다. 셋째, 이자겸의 난으로 그의 딸들이 폐비가 됐다. 넷째, 기이하게도 정혼한 김인규(金仁揆)의 아들이 하필 혼인예정일에 급사한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위의 꿈 얘기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황색의 큰 깃발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펄럭이는 꿈을 꾼 후 외손녀가 1126년 인종(仁宗․4년)의 비로 간택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됐다. 연덕궁주는 이듬해(1127년) 의종(毅宗)을 낳고 2년 후인 1129년 왕비로 책봉된다. 언니(娥池)의 꿈을 샀다는 일화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후 경(暻)과 명종(明宗), 충희(沖曦), 신종(神宗) 등 5형제와 승경(承慶), 덕녕(德寧), 창락(昌樂), 영화(永和) 등 4공주를 낳는다.
왕후는 아들 의종이 즉위한 후 왕태후(王太后)에 오르고, 묘청(妙淸)의 난과 정중부(鄭仲夫)등 무인정권에서 왕통(王統)을 고수하려 애쓰다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공예태후 시호를 받았다. 공예태후는 당동이 낳은 인물이다. 장흥(長興)이라는 이름도 인종이 모후인 왕비의 출신고장이라 길이 흥할 길지를 상징해서 붙여준 지명(地名)이다. 그의 아버지 원후는 1142년 인종 20년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임씨들은 고려가 폐망하기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동 집터의 두 번째 주인은 탐진 최씨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가 망한 후 장흥 임씨의 집을 인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씨들이 약 3대쯤 살던 1490년대 말에서 1500년대 초의 주인은 최수동(崔壽東)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에 데릴사위를 삼아 집을 물러줬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동 집터의 세 번째 주인은 장흥 위씨일 것이다. 당시 탐진 최씨는 강능(江陵) 참봉(參奉) 진현(晉賢․1483~1564)을 외동딸의 배필로 삼았다.
진현은 어머니 신씨와 형과 어산(語山)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 습독공은 평화를 떠난 기록이 전혀 없다. 아들 진수와 진현은 어떤 연고로 지금은 용산면인 어산과 운주동(雲柱洞)에 살게 됐는지 자상하지 않다. 이들이 어산에서 살았던 시기는 15세기 후반이거나 16세기 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진수의 묘소가 그곳 봉황대(鳳凰臺)에 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또 1937년 운곡재(雲谷齋)를 건립한데서도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다 진현은 최씨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동에 입향한 것이다. 그가 1483년생이니 20세 전후에 결혼했다고 보면 16세기 초로 보인다. 결혼 이후 아버지께서 타계한 이후 어머니를 당동으로 모셔 함께 살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참봉공의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을 것이다. 처가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사위인 진현 또한 아들을 낳지 못했다. 하여 둘째 형 진수의 네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 곤(鯤․1515~1582)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는다.
호가 당곡(唐谷)인 곤(鯤)은 문중에서는 최초로 1549년(明宗 4년)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광주(廣州) 이씨(李氏)와 결혼해서 덕홍(德弘)․덕의(德毅)․덕관(德寬)․덕화(德和)․덕후(德厚) 등 5형제와 두 딸을 낳았다. 집엔 참봉공이 지은 강당인 수각(水閣)이 있었다. 여기서 5형제도 공부했다. 당시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1522~1556)과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은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은 수각을 제(題)로 한 형제의 시를 보자.
古城殘堞半藤蘿 : 고성의 무너진 담 반 틈은 등라가 얽혔는데
烏次餘民有幾家 : 오차의 남은 백성 몇 집이나 있을 런지
山岳不崩江海闊 : 산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강해는 광활하니
長生我欲問姮娥 : 오래 삶을 내가 항아에게 묻고자 하네
溪南一路入松蘿 : 계남의 한 길 소나무 겨우살이로 들어가니
趁召高軒似到家 : 부름 받고 옛집에 달려오니 벌써 이른 것 같네
盡醉不辭留夜宿 : 취하도록 사양치 않고 머물러 밤을 새우니
小梅香裏候姮娥 : 작은 매화 향기 속에 항아를 기다리 네
이 시는 기봉과 옥봉이 이성(異姓) 재종숙인 당곡(唐谷)을 위해 『당곡수각(唐谷水閣)』을 제영으로 시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봉은 당곡보다 7세 연하이다. 기봉의 집은 안양(安良)인데 왜 관산에 왔을까. 단순히 재종숙이라는 인척관계라서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설(異說)도 없지 않지만 1521년 귀양 온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에게 배우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
당동 집의 네 번째 주인은 인천(仁川) 이씨(李氏)가 살았다고 한이다. 한 동네 살던 차씨들의 경우 형제가 효자여서 후일 주민들에 의해 마을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넋을 기렸다고 한다. 높이 180㎝, 너비 45㎝, 비후 20㎝ 크기의 비는 관산읍사무소 뜰로 옮겼다. 1980년 관산 소도읍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차씨들은 1982년 문제의 비를 방촌리 626의 2번지로 옮겨 세웠다.
다섯 번째는 수원(水原) 백씨(白氏)다. 백씨들이 차씨들로부터 집을 사들였는지 아니면 다른 성씨로부터 사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장흥 위씨 가운데 당동의 집터에서 살았던 청계공(淸溪公) 후손들은 한 때 백씨들과 한 마을에 살다 성자동으로 옮겼다. 집터를 되찾은 주인공은 의재공(毅齋公)이다. 그는 평소의 소원이 오덕의 태생지를 환수하는 것이다. 노력을 경주한 끝에 마침내 탄생지를 되찾았다.
당동의 집터는 단순한 터가 아니다. 임씨 시조의 집터로 공예태후와 선조들의 태생지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서려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터를 다시 찾아 유장지로 가꾸고 싶어 매입을 타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해 마을 입구에 사당 정안사(定安祠)를 지어 선조들을 기리고 있다. 현재 의재공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으나 5덕(五德)의 탄생지라는 점에서 장흥 위씨 관산파의 성지(聖地)인 것이다.
2) 文鄕전통과 水閣의 역할
수각과 관련, 관산의 문향적(文鄕的) 전통(傳統)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천관산과 방촌하면 위씨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씨하면 존재선생과 한학적(漢學的)지식인을 연상케 한다. 사실 관산 위씨가 향반의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글에 있다. 향촌사족으로 행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지식(知識)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향적(文鄕的) 전통은 여러 인물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관산은 벽촌이지만 예사로운 동네와 다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삼국시대와 고려 때 현의 치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당동에서 황실의 태후가 출생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호남 5대명산 중의 하나인 천관산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여타 지역에 비해 공부하는 선비들이 많다는 점이다. 네 가지 특징 가운데 세 번째까지는 이미 알려져 있으니 설명을 생략한다. 네 번째 이유인 선비가 많은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할까.
고려 때 장흥지방에서는 유난히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했다. 관산 당동에서 임호(任灝)의 아들 임의(任懿)의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시작으로 손자 임원후(任元厚)가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임원후의 장인은 이위(李瑋)이고 그의 딸은 공예태후(恭睿太后)이다. 장흥읍 출신 위계정(魏繼廷)도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강진(康津)출신 내의(內醫)로 이자겸(李資謙)의 역성혁명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최사전(崔思全)도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럼 이들 인물들은 우연히 배출됐는가. 물론 우연히 나올 수 도 있다. 그러나 인물은 선천성도 중요하나 후천적으로 가르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들을 가르쳤을 스승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고려 고종 때 장원급제한 위원개(魏元凱)․위문개(魏文凱)와 급제한 위신개(魏信凱)도 배우지 않고 급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가르친 스승을 알 수 없을 뿐이다. 아버지 등 가학이라도 배우지 않고 과거에 장원급제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한 이후 임씨와 위씨는 된서리를 맞는다. 고려를 떠받은 사족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위씨는 판사공(判事公) 충(种)이 시중 김종연(金宗衍)과 이성계세력을 뒤엎으려다 발각되어 3대에 걸쳐 출사를 금지하는 금고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장원봉 아래 집터로 부의 치소를 이전한다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위씨는 평화를 거쳐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살아야 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19세 진현은 당동에 입향해 정착한다. 어산(語山) 또는 봉황동에 살던 진수(晉秀)의 둘째 아들 곤(鯤)이 입양한 후 아버지는 수각(水閣)을 지어 공부하게 한다. 그가 7세 무렵인 1521년(辛巳)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장흥으로 귀양을 온다. 영천자는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으로 1519년(중종 8)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던 해에 진사에 장원과 현량과에 급제하고, 2년 후인 안처겸(安處謙)사건에 연루된 혐의이다.
영천자는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과 사제 간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장흥에 적거하면서 기봉을 가르쳤다. 기봉집(岐峯集)에「甲辰四月奉送靈川」(申潛字元亮, 時先生詩山守, 過冠山舊居) 즉갑진년 4월 신잠선생을 삼가 전송하며(신잠은 자가 원량이다. 이때 선생은 시산(泰仁)태수가 되어 관산의 옛 사시던 집에 들른 길이었다)등 시산잡영편(詩山雜詠篇)에 스승을 위해 쓴 30여수의 시에서 확인되고 있다(기봉집 189쪽).
시를 근거로 몇 가지 사실을 추적해 보자. 영천자는 1521년에 귀양와서 17년 간 지내다 1538년 해배됐다. 해배되면서 전북 시산(태인)군수에 제수됐다. 기봉은 영천자가 시산군수로 있다가 1544년(甲辰) 해남을 거쳐 관산의 예전 살던 집인 죽원(竹院)과 매창(梅牕)에 들른 후 전송한 시다. 기봉이 영천자에게 수학한 시기는 16세까지이다. 그러므로 7세 연상인 당곡공(堂谷公)과 동문수학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장소는 당동의 수각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있다. 이종출(李鍾出) 교수는「조선후기 향촌문화사와 존재 위백규」심포지움「존재 위백규의 가통과 향촌활동」이란 논문에서 위정훈(魏廷勳․1578~1652)이장흥에 유배 온적이 있는 신잠(申潛)을 배향하는 사우를 건립하는 일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이 또한 선대에서의 인연을 되새김으로서 위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 않았겠지만 명분을 세우고자 하는 중요한 향촌활동의 일환이었다고 했다.
영천자의 교학(敎學)은 관산의 위씨에게는 교훈으로 작용했다. 청계공(聽溪公)은 1573년 중사마시(中司馬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양춘재(陽春齋)에서 후학을 지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금(聽禽), 웅천(熊川), 만회재(晩悔齋), 반계(磻溪) 등 조카들이 그들이다. 이교수는 앞의 논문에서중부(仲父)에게 경학을 읽히기는 하였지만 거의 자득오해(自得悟解)하는 독학이었다.고 했으나 청계공의 학문적 수준을 과소평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마시에 합격한 수준이면 결코 만만찮은 실력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주의 행재소로 왕을 찾아 알현하고 운향관을 제수받고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鐘) 등과 수창(酬唱)한 사실에서도 그의 지식을 가름할 수 있다. 더구나 여응종은 청계공의 인물됨을 아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선생의 수준이 낮아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이해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가당찮은 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오덕의 스승은 알 수 없다. 5형제의 글이 진사와 무과에 급제할 정도였다면 상당한 수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둘째, 청계공(聽溪公)은 임진왜란 때 의주 행재소와 운향관으로 소임을 마치고 구향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에게 배운 제자에는 자신의 아들을 비롯해 모든 조카들이다. 이교수는 반계공(磻溪公)이 그에게 배웠지만 스스로 깨우친 부분이 많다고 풀이하나 옳지 않다. 적어도 진사시에 합격한 실력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
막내인 안항공(顔巷公)도 방촌으로 분가해서 후학을 지도했다. 22세들 사촌형제들은 청계공과 안항공에게서 배우고 그들은 다시 23세로 대를 이어 가르쳤다. 그리고 24세 수우옹(守愚翁) 형제는 장흥에 유배 온 노봉(老峯)에게 배웠다. 詩․書․畵 3절이란 삼족당(三足堂)과 아들 영이재(詠而齋)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른다. 간암공(艮庵公)은 서울에서 학문을 익히고 하향했다. 25세 잉여옹(剩餘翁)은 외가에서 배워 고흥에서 훈장을 했다.
존재공의 스승은 어릴 대는 종조부인 춘담공(春潭公)이다. 병계 선생 문하로 들기 전에는 주로 간암과 잉여옹에게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문중의 학풍은 계속 이어져 한말에는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기정진(奇正鎭)․정의림(鄭義林)․기우만(奇宇萬) 등에게 배운다. 춘헌(春軒)․죽암(竹庵)․오헌(梧軒) 등의 학덕은 일제도 함부로 하시하지 못할 정도로 문중의 힘으로 작용했다. 관산 위씨의 힘은 역시 글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급제하고, 정명(廷鳴․1589~1640)은 향시에 13번, 1611년 진사에 합격했다.
참봉공의 손자와 증손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칭을 없애고 서궁에 유폐한 사건이 발생했다. 종형제들은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보고 왕(광해군)마저 인륜도덕을 무시한 행위를 목격하고는 과거보기를 단념했다. 저마다 충분한 학문적 자질을 갖추었으나 왕의 패륜에 출사포기로 저항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판사공으로 인해 출사를 포기한데 이어 두 번째 출사포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 1624년 갑자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연거푸 일어났다. 5덕의 자손들 가운데 정열과 정철은 무관으로 출사했고, 임천에 있던 종형제들도 국가를 위해 앉아있지 않았다. 정묘호란에는 정망(덕홍)․정헌(덕의)․정훈․정명(덕후) 등 4명이 소모사(召募生)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격문에 따라 부진했다. 병자호란 때 정훈은 안방준의 창의에 참여하고 동생 정명은 옥과현감 이흥발에게 가담했다.
임진(壬辰)․병자(丙子) 양란에 5덕과 그 자손들의 활약은 곧 위씨를 관산의 사족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고려 때 임씨들이 황후와 시중을 배출했지만 이미 800년 저쪽의 일이다. 문과 등제자는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무과출신 현감이나 군수를 5명이나 배출된 것은 벽촌인 관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넷째 덕화의 집안은 3대가 현감과 군수를 했고, 다섯째 집안도 2명 역임했으니 그 권위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방촌은 유명세가 있는 동네이다. 우선 고려 때 현(縣)의 치소라는 점이 적지 않은 유명세를 지니고 있다. 거기다 넷째의 집은 바로 치소자리이자 현감과 군수가 3대에 걸쳐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안항공의 후손 가운데 둘째 아들 집안도 현조인 정열과 현손인 존재(存齋)가 현감을 지냈다. 한 동네에서 벼슬아치가 이 정도 나왔으면 관존민비(官尊民卑)에 젖어 있는 우리의 정서로 봐서 결코 흔치 않은 사례임이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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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7) 위정훈의 청금유고 및 제15회 향토문화연구 심포지움 관련논문,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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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죽음 준비
매일 죽음을 준비한다지만 별로 성과가 없다.
남의 죽음이 나와 관계없는 듯 살기 때문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면서 실제론 준비도 않고 있다.
다만 너와 나의 죽음이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태어나 숨 멎은 과정은 죽음의 직전일 뿐이다.
어떻게 준비해야 편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듯 죽을 수 있으면...
(2016. 7. 20)
원산 위정철(32세, 존재학연소)
원산 시(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