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公 전문경 묘비명(進士公 諱 文經 墓碑銘)
[중종29년 갑오년(1534년)- 선조18년 을유년(1585년)]
공(公)의 성(姓)은 전씨(全氏)요. 휘(諱)는 문경(文經)이요. 자(字)는 사윤(士允)이고 호(號)를 송촌(松村)이다. 태사(太師) 휘(諱) 이갑(以甲)의 후손(後孫)이라.
아버지는 휘(諱) 찬(瓚)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조(祖)의 휘(諱)는 공신(公信)이니 성균 생원(成均 生員)이시다. 증조(曾祖) 휘(諱)는 성명(性命)이니 조산대부 행 동몽교관(朝散大夫 行 童蒙敎官)이라.
어머니는 강릉최씨(江陵崔氏) 교수(敎授) 세환(世桓)의 따님이니 부인(夫人)은 천성(天性)과 지혜(知慧)가 통달(通達)하고 민첩(敏捷)하여 항상 법도(法道)에 맞았고 가르치는 일이 한결같으니 향리(鄕里)사람들이 다 그 뜻에 공감(共感)하고 존경(尊敬)을 표하였다.
중종 갑오(甲午)년 12월 3일에 공(公)을 낳으니 재예(才藝)가 출중(出衆)하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고 순박(淳朴)한 행실(行實)로 인(因)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특히 어버이를 섬기는데 정성(精誠)을 다하였고 제사(祭祀)에 임하여 털끝만한 불결(不潔)함이 없도록 공경(恭敬)을 다하였다.
일가제족(一家諸族)들에게도 돈독(敦篤)하게 대하여 우의(友誼)가 독실(篤實)하였으므로 지방 사람들과 나라에서도 칭송(稱頌)을 받았다.
명종 을묘(乙卯)에 진사(進士)를 하시니 조정(朝廷)에서 그 재행(才行)을 표(表)하여 갑자(甲子)년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제수(除授)하고 경오(庚午)년에 전직(轉職)되어 훈련원봉사(訓鍊院 奉事)를 역임(歷任)하였고 갑술년에 전직(轉職)되어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을 지냈다.
공(公)의 배(配)는 강릉박씨(江陵朴氏) 군수(郡守) 억추(億秋) 따님이라. 1남1녀두시니 장남(長男)은 경달(景達)은 생원진사(進士)요. 연일정씨(延日鄭氏) 첨정(僉正) 견룡(見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2녀를 두시니 장남(長男)은 각(珏)이니 진사(進士)를 지냈고 장녀(長女)는 사인(士人) 김이정(金履廷)에 출가시키고 차녀(次女)는 사인(士人) 이무적(李茂績)에 출가시켰다.
여(女)는 사인(士人) 김충간(金忠侃)에게 출가해서 2남2녀를 낳으니 장남(長男)은 지익(志益)이요. 차남(次男)은 지민(志閔)이요. 맏딸은 진사(進士) 최언침(崔彦琛)에게 출가하고 2녀는 진사(進士) 최덕일(崔德一)에 출가하였다.
공(公)이 선조 을유(乙酉)년 11월 20일에 졸(卒)하니 양양군(襄陽郡) 동면(東面) 선공(先公)의 묘 옆 경자(庚子)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公)의 장남(長男) 경달(景達)이 교(璬)에게 청(請)하여 가로대 우리 선군(先君)의 비문(碑文)을 자네가 지으라하니 교(璬)가 감히 글 못하다고 효자(孝子)의 정성스러움을 저버리지 못하고 삼가 비문(碑文)을 지어 가로대
하늘이 맑은 기운을 내심이여/天蒸淑氣
오직 공이 맑은 기운을 받아났도다./惟公禀生
조상의 인물들이여 /由來人物
크게 사람을 평정하는 일에 종사하였도다.(관직)/巨作權衡
싱그러운 수풀에서 연주되는 신령한 피리소리여/神林靈籟
공으로 더불어 시의 명성을 울렸도다./與公詩鳴
차가운 계곡에 푸른 물이여/寒溪碧水
그대와 같이 마음이 맑았도다./同君心淸
더벅머리 목동과 나무하는 아이들/牧竪樵童
서로 명성을 전하더라.相傳名聲
많은 공과 위엄 있는 덕이여/豊功威德
기록함이 이같이 크게 이루었도다./記此大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평창군수(平昌郡守) 이교(李璬) 찬(撰)
◎ 권형[ 權衡 ]
① 저울 추와 대. 사람이나 사물을 평정(評定)하는 일.
② 별 이름. 헌원성(軒轅星)과 태미성(太微星).
[네이버 지식백과] 권형 [權衡]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