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6시부터 전화가 왔다.
"저, oo인데요, 두 분 빨리 오셔야 돼요. 9시 반까지 시어머님이 나오시기로 했으니까 그때 맞춰 오셔야 돼요. 그리고요. 될수록 작은 애들보다 어른들이 많이 와줘야 돼요. 알았죠?"
예식장에 도착하니 신부는 걱정이 되어 드레스를 입은 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시댁 가족만 알아요. 친척들까지 알면 좋을 것 없어요"
드디어 예식 시작. 딴 따다 다안~ 고약하게 생긴 신부의 친정아버님께서는 자애로움과 근엄과 연민과 어색함 등의 복합성 얼굴로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신랑께 신부를 맡겼다.
일생일대의 가장 가슴 벅찰 이 기쁨의 날, 우리 신부 심정은 어떨까? 키 큰 신랑에 비해 너무 작은 신부는 키 외에도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슬프고 분하고 가리고 싶고 원망스러운 부분들을 어떻게 삭여낼까?
oo야~ 가서 잘 살아야 댄데이~~~
- 우리집 식구는 96명 중에서 -
처음으로 부모님을 빌려드린 퇴소생 언니의 결혼식 날 아빠가 쓰신 글이다.
부모님도 많이 어색해하셨고, 나도 기분이 참 묘한 날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 떠난 후 어느 날 남자(또는 여자)와 함께 인사하러 오면,
십중팔구 혼주석에 앉아주십사 부탁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 집엔 우리 삼 남매 것 외에도 결혼 기념 앨범이 많이 있다.
그렇게 50대 초반부터 이미 혼주 경험이 많은 두 분은
2007년 내 결혼식 때는 어느덧 베테랑(?)이 되어 있으셨다.
여기까지는 순전히 내 입장이다.
그때 그 들의 심정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도, 표현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부모님이 안 계셔서 보호시설에서 자랐다는 얘기를 터놓고 결혼하는 경우,
말할 때를 놓쳐 결혼식이 임박해서 혼주석이 빌 것 같아 그제야 고백하는 경우,
그냥 결혼식 하지 않고 살다가 나중에 결혼식을 하는 경우
다 달랐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혼주석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을 때
"저는 아동복지시설에서 부모 있는 설움을 겪으며 자랐다"라고 소개한 적이 몇 번 있다.
도대체 "부모 있는 설움"이라니!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나는 그제야 그 말이 얼마나 못된 말이었는지, 실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첫댓글 권총 님은 개의치 않으셨지 않을까요?
권총 이름도 털털하게 받아들이셨는데ㅎㅎ
네 좋아하셨어요~ 신부,신랑 만큼이나 설레어하기도 하시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