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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장]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比(견줄 비)하며 또 무슨 譬(비유할 비)喩(깨우칠 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後(뒤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空(빌 공)中(가운데 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태복음 13장]
31 또 譬(비유할 비)喩(깨우칠 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天(하늘 천)國(나라 국)은 마치 사람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後(뒤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空(빌 공)中(가운데 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누가복음 13장]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比(견줄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 菜(나물 채)田(밭 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空(빌 공)中(가운데 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 겨자씨
겨자씨란 ‘말씀’ 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씀이 마음에 심어져 말씀을 따라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 주변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스스로 된 어떤 ‘한 사람’ 을 뜻합니다. 이것을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말씀’ 으로 이야기하는 때도 있기도 한데 혹 내가 잘못 배웠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심긴 사람이 말씀을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는 길로 들어가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씨보다’ 라는 말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인데 ‘작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의 바탕 위에서 나올 수 있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모든 씨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사람, 즉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의 눈에 내가 가장 작게 비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높음’ 을 추구하며 삽니다. 태어나서 받는 교육이 그렇고, 교육을 마치고 하는 사회생활이 그렇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남보다 나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누가복음 16장]
15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者(사람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中(가운데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말씀이 마음에 심긴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이 작은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첫 과정이며,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첫발을 내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고난’ 의 길을 가게 하는 듯이 여겨지지만, 사실은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의 ‘쉼’ 이 그 첫 번째 목적이며, 그다음은 인간의 성정이 아닌 하나님의 성정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백지가 되어 있어야 그 위에 하나님의 성정을 써 넣을 수 있습니다. 내 종이 위에 잡다한 것이 적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쓰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경을 주고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 이 아니라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신’ 의 상태, 즉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한 ‘신의 자식’ 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흠이 없는 거룩함에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사람이 스스로 신의 위치에 다다를 수 없기에 그것을 돕기 위하여, 사람의 종이 위에 있는 낙서들을 지우게 하려고 성령의 법이라는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물론 낙서를 한 것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한 것이지 하나님이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쉼을 얻는 길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것은 앞뒤를 모두 잘라먹고 중간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왜 사랑하는지가 먼저 설명되어야 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맨 처음에 설명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헛됨을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전도서는 “헛되다” 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전도서로 전도를 받지도 않았고 전도서로 전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랑하신다는 말을 전하고, 그다음에는 “그러니 그 길로 가자” 가 아니라 “떨며 두려운 마음으로 가자” 가 전도의 결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은 자식을 낳아본 경험이 있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사람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신을 만들고 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흙이 신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흙으로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인형이 어느 날 귀도 팔도 떨어지면 당신은 그 인형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낳은 아이와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신의 속이 상할 뿐이며 곧 그 인형은 버려집니다. 그 차이를 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주신 것이고 사람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는 팔, 다리도 없고 귀도 잘려나갔지만 버려져 흙으로 돌아가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아버지” 라는 말을 함에 두려움과 떨림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과연 자신의 존재를 알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성경의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자신을 일컬어 “미물이다.”, “티끌 같은 존재다.”, “죄인 중의 괴수다.”, “벌레만도 못하다.” 라고 말을 한 것은 과장된 표현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씨는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무도 그를 자기보다 크다고 생각하지 않게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말씀’ 인 ‘물’ 혹은 앞의 비유에서 본 것과 같이 ‘습기’ 를 하나님께 받습니다.
그러면 그때, 곧 나를 감싸고 있는 세상에서 가지게 된 껍질이 썩게 될 때, 내게서 씨인 그 마음이 습기인 말씀을 받아 싹이 트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싹이 마음에 트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자기의 껍질을 벗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싹이 트고 자란다는 것은 예언서에 표현된 것처럼 ‘새순’ 이 나는 것이며, 레위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듯이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순’ 이라고 이름 하는 자는 그리스도며, 나의 생활권에 대하여는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새순’ 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바탕으로 말씀을 따라가며 계속해서 지혜를 구하여 받아 깨닫게 되는 말씀이 곧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법’ 이며, 그 법을 깨달아 나를 ‘산제사’ 드리는 데까지 다다르면 그가 바로 ‘레위’ 즉, 그리스도께서 제사장 삼으신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싹이 나고 자라가면 새가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 공중의 새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뿌려진 씨를 먹어버리는 공중의 새는 말씀을 거짓으로 증거 하는 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영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을 합니다. 자기에게로 오면 세상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 복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세상에서도 잘 살고, 천국도 가자는 두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은 영이 죽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라고 하는 세상에서의 길은 이미 당신이 배우고 또 향하고 있는 대로 높음과 채움의 길이며, 하나님이 가라고 가르치시는 길은 비움과 낮아짐의 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당신의 마음이 높음과 채움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당신이 전해들은 말은 거짓 증인의 말입니다. 그들은 죽은 짐승의 시체나 작은 짐승을 사냥하여 먹고 사는 대머리 독수리 같은 새들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높아지게, 잘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 앞의 공표와 밤을 새우며, 새벽으로, 혼자서, 무리를 지어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잘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썩기를 거부하고 모든 씨 중에 가장 큰 씨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 비유에서 깃들이는 공중의 새는 자기를 썩게 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공중의 새를 하나님이 먹이시듯이 자기 또한 먹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목숨을 공중 나는 새처럼 하나님께 의뢰한 사람’ 을 말합니다.
성경의 메시지에 사용된 모든 용어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용어를 제외하고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은 모두 “상반된 두 가지 의미” 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중 나는 새’ 도 그렇고, 소금도 정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으면서 멸하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믿음’ 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것,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하여는 ‘믿는다.’ 라는 표현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 “나는 내가 밥을 먹고 있다고 믿어.” 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고,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이 말씀만을 보고 “그렇게 될 거야.” 라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사람이 인식 가능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적인 천국’ 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인 ‘천년왕국’ 이론과 육체가 아닌 영체의 부활을 이미 서신에서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인식 가능한 육적인 ‘육체의 부활’ 을 말하는 것과 역시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현실적인 하늘로부터의 그리스도의 재림’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단도 공중의 새이고 세상에 속한 자기를 부인한 자도 공중의 새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거짓 선지자도, 참 선지자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겉으로 표방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므로 그들을 따라간 것은 일차적으로 ‘모르고 따른 것’ 이기 때문에 “사냥꾼의 올무에서 나와라, 벗어나라” 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 (시편 36:5)는 말씀이 있습니다. 공중 나는 새가 된 자들을 성실히 먹이시고 보살피신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거룩한 땅에 들어갔을 때 모세는 그의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땅과는 분리가 안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는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신발을 신은 그 상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처음 보낼 때는 신발을 ‘신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신고’ 가라고 하시고, 또 신발을 더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신발 외에 다른 신발이란 인간의 사사로운 지혜나 지식의 신발을 말합니다. 말씀을 처음 받았을 때는 이전에 신고 있던 신발, 즉 이전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고, 신을 벗고 세상으로 가서 세상이 악하다고 증거 하는,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하여 비움을 행하라고 전도를 해야 합니다. 채움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비움을 전해야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과 부딪히지 않으면 핍박을 받을 수 없고, 핍박을 받지 못하면 지혜의 깨달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벗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전도는 사람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핍박을 받아 자기를 연단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믿음이란 혼잣말로만 중얼거린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전하는 행함으로 믿음의 증거를 보여야 하고, 전하려면 자신의 속에 있는 세상에 속한 것을 향한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그다음에 전할 수 있으므로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발을 벗고 다니며 지혜를 깨달아 새 공의, 새 신발이 마련되면 그때부터는 다시 언제나 신어야 합니다. 이렇게 같은 신발이라도 자라가야 하는 순서를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 깃들임
깃들이는 것은 전도자가 전도하여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공중 나는 새가 되어 나의 나무에 머무르며 나의 제자가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도구 삼아 말씀을 배우고 그 역시 나와 같이 나무가 되기 위해서 깃들이는 것입니다.
도를 가르치는 것은 육신의 눈을 기준으로 할 때는 다시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전도 명령입니다. 다 장성하기까지는 내 나무에 ‘깃들이다가’ 다 자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그 땅에 심어져, 또다시 그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무의 수가 늘어난 것을 ‘산’ 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래서 선민의 산은 나무 없는 대머리 산인 ‘자산’ 이 되었다고 예언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씀의 비교
설명의 형태만 보아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모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하여 설명할까?” 하시고, 마태복음은 천국의 복음을 마음으로 받는 사람들이므로 즉시 “천국은” 이라고 전제하고 설명하십니다. 또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서 알고는 있으나 실제로 가본 적은 없으므로 설명을 하기는 하되 무엇으로 비유할 필요는 없으므로 비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전제로 설명하십니다.
마가복음은 ‘땅에 심기는 것’ 으로, 마태복음은 말씀을 받은 자기의 ‘마음밭’ 으로, 누가복음은 그들이 이미 아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채소밭’ 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그들이 아는 채소밭의 의미는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 채소는 뒤의 ‘신명기 설명’ 을 참고하십시오.)
마가복음은 ‘심긴 후에’ 이며, 마태복음에는 ‘자란 후에’ 이고, 누가복음은 ‘자라’ 입니다. 마가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먼저 심겨야 하며, 이미 심긴 마태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자란 뒤라야 하며, 누가복음의 말씀을 듣는, 이미 율법의 지팡이를 잡고 있는 선민들은 선택 받아 심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
마가복음은 ‘큰 가지’ 를 냅니다. 마태복음은 ‘나무’ 가 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나무가 되지 않고 ‘큰 가지’ 가 됩니다. 나무란 전도자를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나무가 되는 것은 같으나 말미가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되느니라” 고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미 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채전에 심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이미 나무 된 선민 중에 제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깃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채소 >
[신명기 32장]
2 나의 敎(가르침 교)訓(가르칠 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軟(연할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菜(나물 채)蔬(나물 소) 위에 단 비로다
[시편 104장]
13 저가 그 樓(다락 루, 누)閣(문설주 각)에서 山(뫼 산)에 물을 주시니 主(주인 주)의 行(갈 행)事(일 사)의 結(맺을 결)果(실과 과)가 땅에 豊(풍성할 풍)足(발 족)하도다
14 저가 家(집 가)畜(짐승 축)을 爲(할 위)한 풀과 사람의 所(자리, 바 소)用(쓸 용)을 爲한 菜(나물 채)蔬(나물 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食(밥 식)物(만물 물)이 나게 하시고
하늘이란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펼치신 하나님의 뜻, 즉 공의를 말하며, 구름은 비를 내리는 것입니다. 구름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시는 뜻이며, 비란 은혜로 주어지는 인간 생존의 근원입니다. 물이 없으면 채소가 자라지 못하고, 채소가 자라지 못하면 인류는 멸망합니다.
복잡한 DNA 구조를 풀어내는 세상이 되어 있고, 컴퓨터가 등장하여 온 세상을 순간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놀랍게 문명이 발달하였지만 땅에서 자라는 채소가 없으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또 비나 구름의 근원은 역시 ‘해’ 에서 시작합니다. 해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에게 부여하신 ‘말씀’ 을 뜻합니다. 그것이 곧 ‘빛’ 입니다.
바울은 만물에 하나님의 뜻이 모두 나타나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바울의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8 하나님의 震(벼락 진)怒(성낼 노)가 不(아닐 부, 불)義(옳을 의)로 眞(참 진)理(다스릴 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敬(공경할 경)虔(삼갈 건)치 않음과 不義에 對(대할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創(만들 창)世(대 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永(길 영)遠(멀 원)하신 能(능할 능)力(힘 력)과 神(정신 신)性(성품 성)이 그 만드신 萬(일만 만)物(만물 물)에 分(나눌 분)明(밝을 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榮(꽃 영)華(꽃 화)롭게도 아니하며 感(느낄 감)謝(사례할 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虛(빌 허)妄(허망할 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있다 하나 愚(어리석을 우)蠢(꾸물거릴 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榮(꽃 영)光(빛 광)을 썩어질 사람과 禽(날 짐승 금)獸(짐승 수)와 버러지 形(형상 형)像(형상 상)의 偶(인형, 짝 우)像(형상 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情(뜻 정)慾(욕심 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辱(욕될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眞(참 진)理(다스릴 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被(입을 피)造(지을 조)物(만물 물)을 造(지을 조)物(만물 물)主(주인 주)보다 더 敬(공경할 경)拜(절 배)하고 섬김이라 主(주인 주)는 곧 永(길 영)遠(멀 원)히 讚(기릴 찬)頌(기릴 송)할 이시로다 아멘<진실로>
(※ 가능한 한글 개역 성경의 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풍년과 흉년, 건기와 우기, 기근과 이른 비와 늦은 비, 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성경의 동, 식물의 생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의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서신에서 만물에 대한 이치로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