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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독립운동 기록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독립운동을 하신 외할아버지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순간 나는 좀 더 자세한 기록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착수했다.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투옥되어 옥살이 도중에 대구 교도소에서 순국하셨다. 그 때 연세는 불과 30세였다. 자녀는 딸 두 명을 두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를 가끔 들려 주셨는데 대구에서 하동 고전까지 행상을 만들어 독립군들이 운구를 해 왔는데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우천 시기여서 행상을 세 번이나 새로 만들었는데, 그 경비를 조달하기위해 논 7마지기를 매각했다고 하셨다. 독립군들이 만든 만장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걸 수가 없어서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 짊어 지고 장지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들이 모금을 하여 비석과 상석까지 만들었는데 대를 이을 양자가 정해지지 않아서 묘지 곁에다 임시로 묻어 두었다는 말씀도하셨다.
추가로 생각 나는 일이 있어서 덧붙이면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1968년에 하동 고전초등학교 발령을 받았다. 그해에 내가 담임한 학생중에 배오수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 이름이 배문석씨다. 그분이 고전초등학교 사친회장을 맡고 있었다. 사는 곳은 성천이었다. 가정방문을 가서 내가 배문석씨에게 이 동네에 저의 외조부님 묘소가 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을 하시더라 고 하면서 외조부님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외조부님의 함자를 물으셨다. 내가 李 璟자 鎬자라고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 어른께서 나를 보고 외할아버지 묘소를 자기가 관리하고 있다고 하면서 성묘나 하고 가라고 안내를 하시는 것이었다. 묘소에 갔더니 양지바른 언덕에 잔디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분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자기도 들은 이야기라 하면서 '양보면 장암에 사는 이씨들의 사자(죽은사람)가 다른 지역 산 사람 10명을 당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범호 외조부의 이름도 거명을 하시었던 생각이 떠 올라 추기를 한다.
곤명면지(1987년 12월 발행)에 수록된 외할아버지 행적
이경호(李璟鎬) 독립운동가
원적지(原籍地)가 곤양(昆陽) 솟골로서 부대(父代)에 곤명 신기(新基)에서 하동(河東) 고전(古田)으로 이거(移居) 하였다.
곤명(昆明)과 연고(緣故) 깊고 문중(門中)이 곤명임으로 3.1운동사(運動史)와의 3.1운동실록(運動實錄)에서 초기(抄記)한다.
이경호(李景鎬)는 1890년생으로 서숙(書塾)에서 충신열사(忠臣烈士) 애국정신(愛國精神)과 의열기록(義烈記錄)을 읽고 감명(感銘)을 받은 16세때 을사(乙巳) 5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되어 일제(日帝)에 대한 적개(敵慨)와 증오(憎惡)를 굳게 갖겠금 되었다.
1910년 일제(日帝)는 드디어 한일(韓日) 병합(倂合)의 강제조약(强制條約)으로 경술(庚戌) 국치(國恥)를 다함에 그들 일제(日帝)는 가혹(苛酷)한 무단통치(武斷統治)로서 강압수탈(强壓收奪)을 자행하니 민족 비애(悲哀)를 달랠 길이 없었다.
1919년 2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가 일본인에 의한 시해(弑害)라는 풍문(風聞)에 이경호(李景鎬) 등 유림지사(儒林志士)들은 비분망곡(悲憤望哭)으로 날을 보내는 중 3월1일 민족항쟁(民族抗爭)의 불길은 장안(長安)서부터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3월 23일 하동(河東) 장날을 기(期)하여 이경호(李景鎬)는 정성기(鄭成基) 정이백(鄭伊伯)등과 함께 태극기(太極旗)를 극비리(極秘裡)에 대량(大量) 만들어 경계망(警戒網)을 피하여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목이 터지라 외치니 삽시에 800여명의 군중(群中)이 합세(合勢)하여 시위(示威) 가담(加擔)하니 하동(河東)땅은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 소리 외침으로 일관(一貫)되었다.
이경호(李景鎬)를 비롯한 정성기(鄭成基) 정선기(鄭宣基)등은 현장(現場)에서 일경(日警)에게 난장(亂杖)을 맞고 끌려가 고문(拷問)과 심문(審問)으로 죽음보다 더한 형고(刑苦)을 받았다.
이들은 진주(晋州) 감옥(監獄)으로 이감(移監)되어 일인판사(日人判事)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앞으로 충실한 일본국(日本國) 신민(臣民)이 되겠는가?” 하니 이때 이경호(李景鎬)는 고문(拷問)과 옥고(獄苦)에 지처 쓰러질 듯한 몸이면서도 대갈(大喝)하여 “나는 한국의 개가 될지라도 적국(敵國) 일본(日本)의 신민(臣民)이 되지 않겠다.”하고 대한남아(大韓男兒)의 의기(義氣)를 과시(誇示)하였다..
그는 징역(懲役) 8월을 선고(宣告)받고 다시 대구(大邱) 복심법원(覆審法院)으로 이송(移送)되어 복역중(服役中) 장독(杖毒) 과 겹친 옥고(獄苦)로 옥사(獄死)하였다.
해방후 계자(系子) 원구(源俅) 및 조카 원재(源宰) 원보(源寳) 등이 대구(大邱) 법원(法院)에서 판결문(判決文)을 찾으러 수차(數次) 노력(努力)하였으나 아직 기록문(記錄文)을 못 찾고 있다. 본촌(本村) 거주 김상무(金相武) 상룡(相龍) 상민(相珉)은 직계(直系) 외손(外孫)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기록
한자 : 李璟鎬
영어음역 : Yi Gyeongho
이칭/별칭 : 이경호(李景鎬),이경호(李敬鎬),기옥(基玉),농은(農隱),성재(城齋)
분야 : 역사/근현대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291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 조현덕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경호(李璟鎬)[혹은 李敬鎬로도 씀]는 1890년(고종 27) 6월 17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291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던 이경호는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리고 붉은 글씨로 ‘항일 투쟁’, ‘일본 타도’를 써서 벽에 붙여두고 항일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이후 성천서당(城川書堂) 제자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다 일제의 압제가 심해지자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6년간 살았다.
귀국 후 가사를 돌보던 이경호는 1919년 3월 하동군 양보면에 있는 일신학교 교원 정섬기(鄭暹基)와 정성기(鄭成基)·정세기(鄭世基)·정이백(鄭伊伯) 등과 하동읍 장날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경호는 정섬기의 자형이고, 정섬기와 정성기는 재종간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22일 태극기 수십 본을 제작하고 인근 동리에 연락을 취하여 의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3월 23일 하동읍 장날, 이경호와 애국 청년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 800여 명의 군중도 태극기를 흔들며 동참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하동경찰서에 연행된 이경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진주감옥으로 이송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판사가 “앞으로 충실한 일본국의 백성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에, 이경호는 “나는 대한의 개가 될지언정 오랑캐 일본의 신민은 되지 않겠다!”라고 외쳤다. 결국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간수를 구타하여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5월 14일 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 1994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거나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하동은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을 거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하동에는 독립운동의 사적지와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정부 차원의 서훈을 받은 애국지사가 5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의병 운동]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의병 운동은 하동에서도 활발했다. 의병 활동과 교전 회수의 80% 이상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했다는 점에서 하동이 경상남도 의병 투쟁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의병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수비대를 습격하고, 일진회원 등을 처단하였다. 주도적 인물로는 박매지(朴每之)[1878~1909], 임봉구(任鳳九)[1880~1908], 이성로(李成魯) [1878~?], 우수보(禹守甫)[1879~?], 김의홍(金義洪)[1886~1908], 조기섭(趙奇攝)[1881~1908 ]
손몽상(孫夢尙)[1878~1908], 박홍지(朴弘之)[1881~1908], 손기혁(孫琪赫)[1878~1946] 등이 있다.
박매지는 1908년 진주형무소 폭파 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진주 대평면 전투에서 다시 붙잡혀 총살되었다. 임봉구와 이성로, 김의홍은 일진회원을 처단하였으며, 조기섭은 청암면 안양리(安養里)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 순국하였다. 우수보는 일본 첩자 쓰다만끼지를 살해하였고, 그의 의병진은 하동군 악양면에서 일본군 수비병 18명을 사살하였다. 손몽상은 하동·구례 등에서 활약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박홍지는 하동군 적량면에 군수품을 구하려고 잠입하였다가 일본 수비대와 교전 끝에 전사하였다. 손기혁은 군자금 모금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
1. 3·1 운동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 등 구국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떨쳐 일어났다. 특히 1919년 3·1 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으며 하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鄭世基)[1897~1981]는 3월 13일 하동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박치화(朴致和)[1880~1945]는 3월 18일 적량면장을 사직하고 읍내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낭독하며 만세를 불렀다. 3월 23일 정세기, 정성기(鄭成基)[1886~1943], 이경호(李璟鎬)[1890~1920], 정이백(鄭移伯)[1919~?] 등도 하동시장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하였다.
문공학(文孔學)[1897~1946]은 3월 21일 횡천면에서 만세를 불렀고, 4월 3일 북천면에서 다시 만세 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하일로(河一魯)[1868~1938]는 옥종면 안계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최인우(崔寅愚), 정화영(鄭華永), 권대형(權大衡)[1898~1947], 권상숙(權尙淑), 권복대(權福大) 등도 이에 참가하였다.
정남시(鄭南時)[1885~1932]는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정재운(鄭在雲)[1895~1950]은 진교면 시위를 주동하였다. 이종인(李宗仁)[1869~1944], 박영묵(朴永默)[1881~1973], 정상정(鄭相正)[1878~1920] 등은 고전면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김기범(金淇範)[1885~1951]은 청암면에서 만세를 불렀다.
하동의 3·1 운동은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임시 정부(臨時政府)에서 활약하게 하는가 하면 하동청년동맹과 신간회 하동지회, 근우회 하동지회 등을 설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임시 정부와 중국에서의 활동
상해에 임시 정부가 서자 정재완(鄭在涴)과 문영빈(文永彬)은 이를 위해 활동하였다. 정재완은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의 만석 거부(萬石巨富)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를 통해 임시 정부에 자금 지원을 하였다. 문영빈은 1920년대 한용운 등과 함께 사천·곤명의 다솔사를 거점으로 구국 운동을 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다. 강우석(姜佑錫)[1901~1965]은 혈성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는데, 혈성단은 임시 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만든 단체로서 군자금 모집과 임시 정부의 선전 활동을 폈다. 김홍권(金弘權)도 상해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활약했다.
김재영(金縡濚)[1892~?]은 조선의열단 단원으로서 청년동맹회를 조직하여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하였으며, 백운룡(白雲龍)[1925~?]은 중국 산동성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광복군 활동을 하였다.
3. 학생 및 지식인 운동
이세기(李世基)[1923~1976]는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출신으로 부산제2상업학교 재학 중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慶南學徒戰力增强國防競技大會)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 심판의 부당한 처사로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자 이세기는 즉각 항의하고 한국인 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시가행진을 하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병도(李丙燾)[1923~1991] 역시 하동군 양보면 통정리 출신으로 같은 대회에 참가했다가 발발한 항일 투쟁으로 옥고를 치렀다. 신현중(愼弦重)[1910~1980]은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반제동맹의 한국지부격인 ‘반제부(反帝部)’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무준(趙武駿)[1918~1989]은 구주의학전문학교(九州醫學專門學校) 학생으로 유학생에게 일본의 멸망을 예언하는 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조학제(趙鶴濟)[1904~1945]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시 조선청년동맹 동경지부 조직책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잠시 귀국하여 국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임시 정부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잠입하였으나 체포되었다. 조정래(趙正來)[1914~1935]는 경상남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 휴교를 감행하여 경찰에 검거되었다. 같은 해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전기학교(東京電氣學校)에 입학하여 일본반제동맹 동경지방위원회 전기학교반(日本反帝同盟東京地方委員會電氣學校班)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반제동맹(朝鮮反帝同盟) 결성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 받고 병보석된지 3일만에 순국하였다.
4. 여성 운동
채소정(蔡小丁)은 1919년 4월 하동보통학교 학생으로서 하동읍내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근우회 하동지회를 주도하며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하동군지부와 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한순(金漢順)은 1928년 7월 근우회 하동지회가 설립되었을 때 초대 위원장으로서 채소정, 조필열(趙必烈), 강정회(姜貞會), 조복금, 박삼모, 조정희, 김귀례, 신수명, 제영순, 김보배, 김점균, 김은혜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홍순남(洪順南)은 하동읍 출신으로서 광주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 박영자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 만세를 주도하였다. 특히 제영순은 근우회 중앙 집행위원이 되고, 1932년 사회과학연구회에 동참하고 경남노조 활동에도 참여했다. 조복금은 교원노조에 관련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현황]
하동군에서는 2008년에 하동군 악양면 정동리 취간림에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을 세우고, 그 주변에 박매지 등 독립투사의 비석을 건립하여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1919년 3월 18일 하동읍내장터에서 낭독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원본이 1986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박치화 고가의 천정 속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하동 군민들의 독립 의지와 저항 의식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한자 : 三 一 運動
영어의미역 :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 역사/근현대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 김준형
[상세정보]
[정의]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국주의 열강들의 힘이 약화되는 한편 러시아에서는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하면서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민족 해방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의 수탈에 반발하여 민족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으로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
[경과]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국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국민들에게 배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국장일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전국에서 유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3·1 운동을 주도한 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만세 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 의지를 일제와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탑골공원에서의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이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하동에서도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동의 만세 운동의 효시는 3월 13일 하동시장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 운동이다. 양보면 출신으로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鄭世基) 등의 주도로 시작된 이날의 시위는 군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어 군내 각 지역에 자극을 주었다.
이후 3월 18일에도 적량면장을 사직한 박치화(朴致和)가 하동 읍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니 군중들이 곧바로 무리지어 가담하였다. 3월 23일에도 정윤기(鄭潤基)·정세기·정성기·이경호(李璟鎬)·정이백(鄭伊伯) 등이 주도하여 하동시장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21일에는 문공학(文孔學) 등이 횡천면 여의리에서 주민을 모아 독립 만세를 외쳤고, 다시 4월 3일 북천면 직전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옥종면에서는 3월 24일 하일로(河一魯)의 주도로 안계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최인우·정화영·권대형·권상숙·김중수·권복대·하계원 등도 인근 수곡면 일대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형 태극기를 경찰 주재소 정문에 세우고, 일본 경찰의 총을 빼앗아 던지는 등 거세게 저항하였다.
3월 29일에도 정남시(鄭南時) 등이 옥종면 월횡리에서 주민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진교면에서도 정재운(鄭在雲) 등의 주도로 1,000여 군중이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주동자를 비롯한 시위군중 다수가 체포 구금되었다. 시위는 이튿날에도 계속되었고, 700여 군중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4월 6일에도 진교면 주민 1,000여 명이 진교 시가를 돌며 구속자 석방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고전면에서는 4월 6일 이종인(李宗仁)·박영묵(朴永黙)·정상정(鄭相正) 등이 민족 대표 33인을 본떠 조직한 일신단(一身團)을 중심으로 고전면 배더리 시장[배다리 장터]에서 거군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배더리 시장[배다리 장터]에서는 인근 양보면·진교면·금남면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1,000여 명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청암면에서는 4월 7일 김기범(金琪範) 등이 대형 태극기를 마을 입구에 게양하고 다음 날 주민들을 선동하여 청암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화개면에서는 4월 11일 이정철(李正哲) 등이 새벽에 사방에 벽보를 붙이고 화개면사무소 담벼락에는 면 직원의 사직을 촉구하는 권고문을 붙이는 한편, 태극기를 배포하고 주민을 선동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청소년들도 만세 운동에 동참하여 4월 6일 화개장터에서 승려인 김주석(金周錫)의 주도로 학생들의 거사가 있었으며, 4월 7일 하동 읍내에서는 하동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시장통으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결과]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도 하였지만, 일제도 한국 국민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억지로 끌려가게 하는 무단 통치 정책을 문화 통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해외에는 지속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해 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동에서도 하동청년동맹과 신간회·근우회 지회 등이 설립되어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인해 3·1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은 좌절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치화(朴致和) 등 하동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작성해 사용한 대한독립선언서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고전면 성천리에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 운동 기념비가, 고전면 고하리에 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청암면 중이리에 청암면 독립 유공자 추모비가 있어 하동 지역 3·1운동의 모습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들 김희찬 군의관 임관식 날 국립묘지 기념방문 촬영
첫댓글 와 너무 좋은 자료네요. 전 국립묘지에서 이 분 묘를 뵈었을때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담에 또 한번 방문할 수 있었으면...